Saturday, June 21, 2025

태양의 품에 안기어 빛 내인 삶(이종만 편) 리형우(북한에 거주한 이종만 아들)

 


01. 태양의 품에 안기어 빛 내인 삶(이종만 편) 


리형우(북한에 거주한 이종만 아들)



차 례

머리말 

1. 고목에도 꽃을 피워 준 위대한 사랑

2. 영생하는 삶

맺는말



머리말


  자식으로서 자기 아버지에 대한 책자를 써 낸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게 차례지는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먼저 진심으로 애국, 애족하려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사랑과 믿음의 한품에 안아 주는 삶의 위대한 태양을 우러러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민족은 곡절 많은 운명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남에서 북으로, 자본가로부터 <조국통일상> 수상자로, 애국렬사로 인생의 말년을 값 있게 장식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남 다른 사람에 대하여 추억하노라면 저에게는 력사의 한 갈피 의 남기고 싶은 말, 온 세상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광복 전에 금광으로 거액의 돈을 벌어 민족산업과 후대 교육에 이바지 하려 고 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민족자본가였습니다. 그러나 광복 후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 마냥 환갑 나이에 걸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기였으며 그 이의 한량없는 사랑과 믿음 속에서 영생의 상상봉에 올라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버이수령님의 절대적인 믿음과 대해 같은 사랑속에서 저희 아버지는 애국, 애족의 길을 걸어 올수 있었으며 나라와 민족이 다 아는 영생하는 삶을 지는 사람으로 될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거룩하고도 한량 없는 믿음과 뜨거운 사랑의 이야기는 희세의 위인사랑의 이야기인 것으로 하여 세상에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뒤늦은 감은 있지만 문필가도 아닌, 칠순을 받아 보는 막냉이 아들이 아버지가 남긴 글과 해외와 남조선에 살고 있는 혈육들이 보내 온 자료들에 기초하여 있은 사실 그대로 전하고저 붓을 들었습니다

  미숙하고 여물지 못한 저의 이 글이 조국통일의 새 아침을 앞당겨 나아 가는 민족대단결의 성업에 다소라도 이바지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주체 90 (2001)년 6월 

리형우


1. 고목에도 꽃을 피워 준 위대한 사랑


  여름철에 들어선 모란봉은 봉우리마다 골짜기마다 녹음이 짙어 인생의 새봄을 활짝 꽃 피워 주는듯 하였습니다 풍치 수려한 모란봉 중턱에 자리 잡은 모란봉 극장에서는 주체 38(194 9)년 6월 25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모시고 력사적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가 열리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미제의 남조선단독 괴뢰<정부>조작과 그 이후 로골화되는 민족분렬책동에 대처하여 전 조선의 애국력량을 결속하기 위한 반미구국대책의 한 고리로서 소집하신 이 회의에는 남복 조선의 70여개 정당, 사회단체에서 선 된 대표 704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정각 오후 3시, 천지를 진동하는 듯 한 우렁찬 박수와 환호성속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석단에 나오시였습니다

  그 어디라 없이 젊음과 열정, 위풍이 느껴지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는 아버지와 회의참가자들은 조선의 밝은 앞날에 대한 부푸는 감격으로 가슴을 들먹이었습니다.

  이윽하여 좌석이 정돈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장을 쭉 둘러 보시며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시였습니다.

  “남조선에서 들어 온 대표들 가운데 리종만 선생이 왔으면 주석단으로 올라 오십시오.”


  회의장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해 졌습니다

  회의참가자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력사적인 이 회의 주석단으로 몸소 불러 주시는 리종만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 하고 의아해 하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놀라와 하였습니다

  잠시후 만장의 시선을 받으며 겉보기에도 세파를 겪어 보이는 늙은이가 앞쪽에서 엉거주춤 일어서 몸둘바를 몰라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저희 아버지 리종만이었습니다.

  남조선의 <조선산업건설협의회> 대표로 력사적인 회의에 참석한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신을 주석단으로 불러 주실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걸음을 옮기는지 조차 느끼지 못하고 황황히 주석단으로 올라 갔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 서시여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아버지의 손을 다정히 잡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습니다.

  “남조선 산업계에서 명망이 있는 이종만 선생을 오늘 이렇게 만나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선생이 년으로 한 몸으로 삼 팔 선을 넘어 먼 길을 오시느라고 수고 하셨습니다

  나는 선생이 남조선의 산업 건설 협의회의 대표로 평양에 와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결성 대회에 참가 한대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너무도 뜻밖이고 너무도 황송하여 감사의 말씀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 하시여 “선생이 이번에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의 온 갖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에 참가한것은 훌륭한 애국적거사입니다.” 라고 높이 평가 해 주시였습니다.

  그러시고는 회의 참가자들을 향하여 이 분이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조를 가지고 일제와 미국놈들과 잘 싸운 <조선산업건설협의회> 회장 리종만 선생이라고 소개하시였습니다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처음 만나는 자신을 믿어 주시고 한품에 안아 친절히 대해 주시며 높이 평가해 주시니 너무 송구스러워 몸둘바를 몰라 하였다고 합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 보려고 제 나름으로 무진 애를 써 왔으나 60평생을 값 없이 흘러 보냈습니다


  경상남도 이 한 빈농가에서 나서 자란 아버지는 3.1운동 때 독립만세도 불렀고 농민운동과 대중계몽운동에도 참가하였습니다

  그 과정에 광업계에 진출하여 일약 성공하여 갑부가 되었으나 반일애국의 초지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광복전에 아버지가 경영한 <대동광업주식회사>는 그 산하에 <대동광업사>의 간판을 단 수많은 광구들을 전국 각지에 두고 있었으며 <대동농촌사>에도 수백만평 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외에도 평양에 있던 <대동공업전문학교>, <대동출판사>를 비롯한 10개의 교육기관과 출판사도 경영 하였습니다.

  이렇듯 아버지는 민족산업을 일떠세워 보려고도 해보고 민족교육을 목적으로 하여 학교도 세우고 출판사도 경영하였지만 그 취지가 어떠하였던지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그것은 민족을 위한 참다운 행동으로는 될수 없었던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차례진것은 참기 어려운 감옥살이와 나라 없는 식민지백성의 민족적모멸감이었습니다.

  일제 놈들은 아버지에게서 집도 재산도 다 빼앗고 강제로 경기도에 있는 <봉선사>라는 절간으로 내쫓았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절간에서 은신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나날 백두산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손에 무장을 잡고 싸우고 계시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무릎을 치며 “이제 두고 봐라. 김일성장군님은 하늘이 낸 분이시니 머지 않아 이 나라는 광복되고 대통운이 틀게다” 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절간에서 조국광복을 맞이한 아버지는 커다란 감격과 기쁨을 안고 한달음에 서울로 갔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해방자>의 탈을 쓴 미제가 남조선에 기여 들어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제의 <군정> 통치라는 것은 일종의 <총독> 통치와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광복후 남조선의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일원으로 사업하면서 아버지는 우리도 공화국북반구에서처럼 장차 일제와 지주의 토지를 무상몰수하여 무상분배하여야 하며 큰 기업소의 국영화와 중소기업의 협동화를 실현하며 계획경제를 해서 국가경제를 계획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국내산업건설을 발전시키고 외국자본의 침입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이 주장은 미<군정청>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미군은 삼척지구에 주요공장들이 있고 광산과 탄광, 발전소와 철도, 항만을 끼고 있어 경제 발전에 매우 유리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삼척 공업 지구를 종합적으로 개발하는데 관여했기에 그곳 정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군정>의 반인민적통치로 말미암아 삼척공업지구는 폭풍전야ㅇ[ 있었습니다. 이에 겁을 먹은 미<군정>과 리승만은 아버지에게 삼척공업지구 운영권을 위임하면서 사태를 수습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질서가 일정하게 잡히고 생산이 정상화 되자 미제침략자들은 간상모래배들과 결탁 하여 생산물들을 되는대로 략취하였습니다.

  삼척주둔 미군우두머리인 비치의 지휘하에 놈들은 온갖 만행을 서슴없이 감행하였습니다.

  미<군정청>은 아버지가 미군에게 뢰물을 바치지 않고 저들의 <군정>통치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삼척공업지구 운영권마저 박탈하였습니다.

  민족산업을 잘 일떠 세워 보려던 아버지의 커다란 포부는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에 의하여 또다시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민족적울분으로 가슴을 쳤고 한숨과 탄식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오래전부터 친교가 있던 허허선생으로부터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태양이 신 김일성장군님은 어떤분이시고 그이께서 베푸시는 정사는 어떤 정사인가 하는것을 자주 듣게 되면서 북으로 쏠리는 마음이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량심적인 민족자본가로서 반일애국의 뜻을 품고 일본놈들과 담을 쌓고 지냈지만 심중에서는 위대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고 대하시겠는가 하는 의구심과 초조감이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에게도 미제에게도 굴하지 않았다는 결백성만으로는 자신을 위로할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자본가로서 왜놈의 통치밑에서 큰 기업을 한 갑부가 아니었던가?

  그러던 아버지가 위대한 태양의 품으로 찾아 올 용단을 내리게 된것은 우리 민족사에 특기할 거족적인 4월남북연석회의에 대한 소식과 더우기 그 회의에 참가하고 돌아 온 김구선생을 만나 그의 이런 말을 들은 후였습니다

 “… 나라와 민족을 운명을 우려한다면 당파나 종교의 소속, 재산의 유무, 정치적견해 여하를 불문하고 반드시 김일성장군님의 두리에 단결해야 하오. 나는 이전에 공산주의자들이랑 협애한 사람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가보니 도량이 크고 관대하기 비길데 없다는 것을 알았소. 김 장군님과 같으신분이 진정한 공산주의자라는것을 나는 이번에 내 눈으로 실지 보고서야 진심으로 느꼈단 말이요. 그런 공산주의자라면 우리가 무엇때문에 공산주의를 나무라겠습니까. 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라 가겠고. 이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갈 길이요.” 아버지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야 할 곳은 바로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품이라는 것을 절감하였으며 많은 재산과 사회적지위, 안락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갑 나의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혈혈단신 공화국북반부로 넘어오는 대 용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한 아버지를 북남의 각계 애국인사들이 모인 자리에 불러 주신 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 휴식시간에도 쉬지 않으시고 아버지를 몸 가까이 불러 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시였습니다

  “나는 오늘 선생을 처음 만났지만 허헌선생을 통하여 이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당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었으며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였던 허한선생은 광복전에 저희 아버지가 경영하던 대동공업 주식회사에서 상무취체역을 하였으며 그거 일절을 반대하는 투쟁을 할 때는 정책자금을 뒷바침해 주었기에 아버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허헌선생이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 일하면서 그이께 저희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렸기에 수령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하여 그토록 상세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시여 이렇게 말씀하시였습니다

  “지난 날 선생은 많은 재산을 다진 기업가였지만 일제와 담을 쌓고 민족적 량심과 미국 애국적 지조를 지켜 왔습니다. 선생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의 지하자원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거액의 자금을 투자 하여 후대 교육사업과 계몽사업에 기여하여 왔습니다.

  선생은 해방 후에도 남조선에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리승만괴뢰도당의 매국배족행위를 반대하고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잘 싸웠습니다 우리는 선생의 애국적지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국토완종과 조국의 번영을 위한 투쟁의 한길에서 언제나 선생과 같은 애국자들과 손잡고 나갈 것 입니다.“

  정녕 분에 넘친 말씀이였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장장 20성상 항일혈전을 벌려 조국을 광복하신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황송스럽게도 불미한 아버지를 민족적량심과 애국적지조가 있는 애국자라고 높이 내세워 주시였습니다. 생각하면 애국이란 마음 먹었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나라를 위해 참답게 살려면 위대한 령도자를 모셔야 하며 애국을 하려고 해도 위인의 품에 안길 때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도 미제강점하의 남조선사회에서도 뼈저리게 체험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애국은 마음뿐이고 념원뿐이었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바지한것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지의 부끄러운 우국충정을 애국이란 고귀한 이름으로 값 높게 불러 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휴식도 잊으시고 아버지와 담화를 계속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적단합을 위한 통일전선로선에 대하여 알기 쉽게 해설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습니다.

  “우리는 해방후 건국사업에 착수하면서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여 모두가 새 민주조선건설에 한사람같이 떨쳐 나설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힘 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여 모두가 새 민주조선건설에 한사람같이 떨쳐 나서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1930 년대 말 자신이 많은 돈과 화약을 가지고 있으면서 항일유격대의 무장투쟁을 적극 돕지 못한 죄책감으로 하여 온몸이 확확 달아 오르는것을 참을수 없어 마음속으로 머리 숙여 빌고 또 빌었으며 뒤늦게야 태양의 품에 안기게 된것을 두고두고 후회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늘 공화국북반부에서는 수많은 애국적기업가들이 우리의 건국로선을 적극 받들고 민족산업의 발전과 나라의 완전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라고 속이 확 트이는 말씀을 해 주시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덕망, 고결한 인품과 사리정연한 말씀에 매혹되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라 잃은 불우한 민족자본가로서 아버지의 변변치 않은 수행을 두고 애국적 행동이라고 높이 치하해 주시니 그 은혜에 보답하고저 아버지는 평양에 남아 인생 말년이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힘껏 일하겠다고 외람된 말씀을 올리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긍정하시듯 환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 앞으로 조국의 통일과 부강발전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조선민족 앞에 나선 최대의 과업은 국토 완정과 조국의 통일독립을 실현하는것입니다 이 중대한 민족사적과업은 조국을 사랑하고 나라의 통일을 념원하는 남북조선의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을 총 집결 하여 단합된 힘으로 투쟁함으로써만 성과적으로 수행할수 있습니다. 이번에 남북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사회 단체대표들이 전국적인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를 가지고 거족적구국대책을 강구하려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우리는 선생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사업에 적극 참가하기 바라며 앞으로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에서 책임적인 임무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크나큰 정치적 신임을 안겨 주셨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광복후 미제에 의하여 식민지화된 남조선의 민족산업실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시면서 우리나라 경제건설의 기본과업을 알려 주시고 “선생은 민족경제를 부흥 발전 시키는 사업에도 기여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산업실태까지도 깊이 헤아리고 계시는데 대하여 크게 탄복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나라의 광업실태를 손금 보듯 알려 주시면서 참으로 우리 나라는 자원이 가득 찬 나라이니 선생은 새로운 광맥을 찾아 내고 광산을 개발하는 사업에 힘 써 주어야 하겠다고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광물자원의 분포 상태를 알려 주고 광산운영기술과 경험도 가르쳐 줘야 한다고 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휴식시간도 퍼그나 흘렀으나 다정하신 눈길로 송구스레 앉아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는 선생이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훌륭한 일을 많이 해줄것을 기대합니다. 선생이 불편없이 사업할수 있도록 내각에서 잘 돌봐 주도록 하겠습니다.

선생은 나이도 많은데 건강에 각별히 유의 하셔요 하겠습니다.“ 라고 다정하게 말씀 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지와 담화를 마치시고서야 회장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아버지 와 하신 담화는 <리종만과 한 담화> 라는 제목으로 김일성 전집 제 9권에 수록되여 있습니다.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 곁에 앉아 장군님만 우러러 보았습니다.

  나이 60이 넘도록 인생의 갖은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애국의 마음도 육체도 쇠진해 버렸던 황혼기가 언제인가 쉽게 참다운 애국애족의 한 이래서 재생한 기쁨으로 하여 아버지의 두눈에서는 뜨거운것이 하염없이 흘러내리였습니다.

  아버지는 위대하신 수령님이시야말로 열화와 같은 인간애와 하늘땅보다 넓은 도량, 한없이소탈한 풍모, 이 세상 모든것이 머리 숙일 위대한 포용력과 고결한 덕망으로 민족을 안아 보살피시는 희생의 영웅이시구나 하는 생각에 감개무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에 참가했던 아버지를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내세워 주시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힘껏 일해 보려는 소원을 성취하도록 해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희 아버지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헤아리시고 내각간부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 주시였습니다.

  진정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의 아버지의 삶을 참된 애국의 한길에서 빛내일수 있게 하여 주신 어버이이시며 새삶의 은인 이셨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저의 아버지에게 돌려 주신 사랑과 믿음은 끝이 없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신임에 의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사업하기 시작한 그때 저의 아버지의 나이는 예순세살이였습니다. 인생을 다시 살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으나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에 충성으로 보답하기 위해 애써 일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과 조국통일위업에 적은 힘이나마 바치려는 아버지의 애국충정을 귀중히 여기시여 커다란 믿음을 안겨 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우산장휴양소에서 휴식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외국에 가서 안전하게 생활 할수 있도록 은정 깊은 조치를 취 해 주시였으며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곧 귀국 하시도록 해 주시였습니다. 주체 43(1954)년 2월 중순 어느 날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화의 나날 위대한 수령님 못내 그리워하던 아버지는 설레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그이 께서 보내주신 승용차를 타고 한달음으로 달려 갔습니다.

  몇 몇 일군들과 함께 지도를 펼치시고 무엇인가 의논하고 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안으실듯 아버지를 반가이 맞아 주시였습니다. “선생이 몸 성히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래도 외국땅이 자기 집만 하겠습니까. 앉으십시오.” 

  아버지는 다정한 그이의 말씀에 뭐라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피어린 싸움을 치르시였고 재더미로 된 페허우에 부강한 조국을 일떠세우시느라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일하고 계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멀리 떠나 있는 한 늙은이의 안부까지 념려해 주시는 것이였습니다. 아버지의 안색을 주의깊이 살피시며 건강과 생활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습니다.

  “선생님을 급하게 만나자고 한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복구건설과 관련하여 의논할것이 있어서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전후복구건설을 하자니 동이 많이 요구 됩니다… 일본놈들이 도망 가면서 좀 있던 공장과 광산을 다 마사버렸습니다. 해방후 우리 로동계급이 건설해 놓은것도 이번 전쟁에서 미국놈들이 또 마사버렸습니다. 이것을 복구하자니 많은 자재와 완료가 필요합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동이 필요합니다. 동을 한톤도 좋고 두톤도 좋으니 있는것을 다 파내자는 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 아버지는 부쩍 힘이 솟구쳤습니다. “장군님, 문제 없습니다. 동도 많고 금도 많습니다.”

  아버지는 광복전 <대동광업주식회사>를 경영할 때 북부일대의 여러 지대를 돌아다니며 감사한 경험과 자료에 근거하여 학성산일대에 적어도 20만톤의 동광석이 매장 되어 있다는것을 확신성 있게 말씀 올렸습니다.

  지도에서 동매장지의 위치까지 짚어 가시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넌 대단히 좋은 자료를 알려 주었다고 무척 만족해 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의 한 일군을 부르시어 아버지를 소개하시면서 기술자들을 데리고 학성산에 나가 조사해 볼떼 대한 과업을 주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시였습니다.

  “오늘부터 이종만 선생을 동무의 고문으로 임명합니다. 앞으로 동무들은 이종만 선생을 도와서 일을 잘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종만 선생은 해방전에 일제의 박해속에서도 민족적지조를 굽히지 않고 살아 온분입니다. 이제는 년세가 많으신데 동무들이 저 선생을 잘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가슴이 터질듯한 기쁨과 환희를 느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원대한 구상을 실현하는데 적은 힘이나마 보탤수 있게 된 감격과 흥분을 금할수 없었던 아버지는 곧 기술자들과 함께 학성산 동광탐사의 길에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학성산의 험산준령을 밤낮으로 톺으며 밤낮으로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시원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부 사람 속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구구한 말들이 돌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번민속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학성산에 동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리도 기뻐하시던 위대한 장군님을 무슨 낯으로 뵈온단 말인가.)

  그러던 4월 중순 어느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질탐사관리국의 한 일군으로부터 학성산 동광탐사정형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였습니다.

  집무실을 거니시며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셨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습니다.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톤이 없다고 해도 동무들이 리종만선생에 대하여 절대로 다르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리종만선생을 믿은것은 학성산의 동광석때문이 아니라 그 선생의 애국적인 지조와 민족적인 량심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톤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없을수도 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학성산에 동광석 20만톤이 아니라 단 한 톤이 있어도 그것이 리종만선생이 탐사한 나라의 지하자원이라고 생각할 때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그러니 동무들은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톤이 없다고 하여 그 선생을 의심하거나 박대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재삼 말하지만 내가 믿은 것은 리종만 선생의 애국심이었고 민족적 량심이었습니다. 동무들은 앞으로 리종만 선생을 계속 잘 모시고 그 선생을 적극 도와 주어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전달 받은 아버지는 터져 오르는 오열을 막을길 없었습니다.

동광석 20만톤을 찾지 못한것보다 그 일로 해서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저의 아버지를 더 생각하시는 그 믿음과 은정, 그 일로 해서 누가 시비라도 할세라 따뜻이 념려해 주시는 햇빛 같은 그 사랑, 이 세상 천하에 어버이수령님처럼 사려 깊고 인자하시며 있어서는 안될 잘못도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는 은정 깊은 위인이 또 어데 있으랴 싶었습니다.

  인간은 강하나 자기에 대한 불신 임앞에서는 언제나 약하며 자기에 대한 믿음앞에서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지만 불신 임앞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그토록 괴로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 생활에서는 믿는다는 말 한마디가 가지는 중량은 이처럼 무겁고도 심각한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정치만을 늘 받아 온 로동당 시대의 새 세대들은 아마 믿는다는 그 말의 무게를 잘 모르고 살것입니다. 행복속에서 복을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믿을데가 없고 믿어 주는 사람이 없는 사회에서 살아 본 사람들에게는 믿음이란 그 말이 그처럼 심장을 울리고 눈물겹게 고마운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느 한 일군으로부터 전해 들은 정전직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후 절실히 필요한 동광석을 찾으려고 어느 한 지점에 대한 탐사에 실로 막대한 자금을 돌려 주시였습니다. 푼전이 귀하였던 때라 일군들은 그 엄청난 액수의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만일 동광이 없다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한 일군들에게 그 돈을 다 쓰고도 동광석이 없으면 산꼭대기에 후대들이여, 여기에는 동이 없으니 다시는 손을 대지 말라는 비석을 세워 놓자고 하시면서 그러면 우리 시대에는 손해를 보더라도 후대들은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아버지는 가슴 뜨거운 그 사연을 전해 듣고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나라와 민족의 만년 대계를 위하시는 숭고한 그 뜻과 한없이 넓은 품이 지금 자신을 지켜 주고 뜨겁게 안아 주고 있는 것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숭고한 뜻을 받들어 적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척 한스럽기만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지질 탐사 관리국의 한 일군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광복전에 왜 동광을 안하고 금만 따라 다녔는지 한스럽소. 내 할수 있는 일이란 이것 뿐인데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동광을 꼭 찾아 내고야 말겠소.”

  아버지는 새로운 열심을 품고 다시 북방 의 산간오지로 떠났습니다.

학성산과 삼포, 석막동, 소동을 비롯한 그 전날에 광산자리 와 산골짜기, 진펄, 벼랑길을 가리지 않고 샅샅이 탐사하였습니다.

  70고령이었지만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선 길이여서 삶의 희열을 한껏 느끼였습니다.

  몇달간의 고심어린 탐사끝에 아버지는 마침내 학성산주변의 여러 곳에서 전망성이 좋은 유용광물매장지를 찾아 냈을뿐만아니라 앞으로 광산을 개발하는 경우 투자의 효과성을 높일수 있는 조사자료까지 만들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사실을 보고 받으시고 매우 기뻐하시면서 리종만선생의 노력이 정말 크다고, 리종만선생은 애국심이 높은 분이라고 또다시 높이 치하해 주시였습니다.

  끝 없는 믿음과 사랑을 받게 되는 아버지는 자기가 이 세상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어 위대한 수령님께 다소라도 기쁨을 드릴수 있게 되었구나 생각하니 행복하기 끝이 없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자주 이 일을 회상 하시면서 리 종만 선생이 좋은 사람이었다고 감회깊이 추억하군 하시였습니다.

  저희 아버지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곳이었다고 할수 있는 학성산은 애국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려 깊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도 사람들에게 많은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체 40(1955)년 10월 어느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한 일군을 찾으시여 조국전선중앙위원회의장단성원들을 이름 있는 인사들로 꾸리고 그들의 책임성과 역할을 높일데 대하여 가르쳐 주시면서 친히 저의 아버지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 위원회 의장으로 내세워 주시는 크나큰 정치적신임과 배려를 돌려 주시였습니다. 계속하여 조국전선중앙위원회 의장단회의에 제기 할 때 그에 대한 소개를 잘 하라고 하시면서 우리는 그가 년로하고 건강이 좋지 못하므로 오래동안 휴식도 시켰다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의 의도를 알고 그와의 사업을 잘 하며 제기되는 문제들을 제때에 풀어 주어 그가 맡겨 진 일을 잘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히 가르쳐 주시였습니다.

  아버지가 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으로 중공업성 고문으로 인생말년을 보람 있게 보낼수 있은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 깊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였습니다.

  경애하는 수령님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그것은 저희 아버지에 애국심에 대한 가장 값 높은 표창으로 됩니다.

  하기에 아버지는 자기가 지난 날에 경영하던 <대동광업주식회사> 청사를 공화국정부에 희사한다는 <양도증서>를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에게는 김일성장군님의 신임이면 그밖에 더 바랄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가장 귀중한 장군님의 신임을 받아 안은 나에게는 재산도 귀하지 않으며 명에도 귀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장군님을 받들어 여생을 바쳐 일할 결심입니다.” 라고 하면서 흥분에 넘쳐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과 은정 넘치는 사랑은 생활의 구석구석에도 따사롭고 미치였습니다.

  주체 43(1954)년 초봄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일군이 아버지를 해방산기슭의 경치 좋은 곳에 건설된 아담한 살림집으로 안내하였습니다.

  널찍한 방이 여러칸이고 시원한 마루방, 창고, 목욕탕, 자그마한 청원까지 달린 훌륭한 집이었습니다. 영문을 몰라하는 아버지에게 그 일군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말씀이 계시여 선생이 이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끗이 포장한 함에서 나이에 어울리는 고급양복과 외투 그리고 은수저를 비롯한 여러가지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내놓았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아버지에게 몸소 보내주신 선물이였습니다. 뜻밖에 과분한 배려를 받아 안게 된 아버지는 끓어 오르는 감사의 정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얼마전 위대한 수령님께서 외국에 가서 갓 돌아온 아버지를 만나주시였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행색에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을 부르시어 선생이 아직 외국에서 입고 온 옷을 받지 못했다고 념려하시면서 며칠안으로 아버지의 나이에 맞는 좋은 양복과 외투를 해드리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는지 무슨 생각에 잠기셨다가 선생이 혼자서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식모도 보내주고 집도 조용한데 잡아 주고 승용차도 해결해 주어 년로한분이 사업을 하는데 애로가 없도록 해주라고 당부하시는것이였습니다. 그때로 말하면 전쟁이 갓 끝날 때라 누구나 단벌옷에 집타발할 형편이 못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토굴집에서 나오지 못했고 당과 국가의 일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나이 많은 아버지가 가족도 없이 홀로 합숙생활을 하고 있는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리시여 잊지 못하고 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떻게 하나 아버지에게 가능한 껏 편의를 보장해 주려고 하시는것이였습니다.

  그날 저녁 집안팍을 말없이 몇번이고 돌아 본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극진한 사랑이 생각할수록 가슴 뜨겁게 사무쳐와 감사의 정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물론 광복전이나 남조선에 있을 때 아버지는 좋은 집에서 값진 가구들을 차려 놓고 부러운 것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번쩍거리는 집에는 밝은 빛이 없었고 따스한 인간의 정이 없었던입니다. 그렇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련해 주신 이 아담한 집은 따사로운 해빛이 함뿍 차고 넘치는 사랑의 요람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사랑의 요람에서 그저 잠들수 없었습니다.

  남조선에 두고 온 자식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 아버지에게 돌려 주신 믿음과 사랑의 이야기, 대를 두고 전할 은정 깊은 이야기를 자식들과 같이 기쁨으로 나눌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에 깊이 잠겨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뒤척이었습니다.

  그 무렵 집안의 막냉이었던 저는 인민군대에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대에 의해 서울이 해방되자 한주일만에 입대한 저는 미제침략자들을 격멸소탕하는 전투들에 참가하여 대구계선까지 남진하였다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보장하고 강원도 금강군계선에서 방어전투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주체 40(1955)년 여름 어느 날 저는 조선인민군 신문을 보고 아버지가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성원으로 사업하고 있다는 뜻밖의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아버지에게 여러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해 가을에 갑자기 집에 갔다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전후들의 전송을 받으며 부대를 떠나 혁명의 수도 평양,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받아 안은 하늘같은 은덕과 사랑에 대하여 모르고 있던 저에게는 모든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지난 날 자본가이던 아버지가 평양에 와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성원이 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왔고 이제는 일흔나이에도 사회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왔습니다.

  년로한 아버지가 어떻게 사시는지, 왜 갑자기 나에게 집에 갔다 오라는 명령이 떨어 졌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집을 찾아 마당에 들어 서기 바쁘게 “아버지!” 하고 목 메여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도수 높은 안경너머로 이윽토록 나를 보면서도 인차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내가 여전히 고이 자란 연약한 막내아들의 표상으로만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포연속에서 억세여 진 나를 넋을 잃은 듯 한동안 바라보다가 와락 껴안아 주었습니다.

  그날 밤은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눈꿉을 씻으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돌려 주신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 밤이 새도록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는 나에게 인 군대 입대하기를 참 잘하였다고 말하면서 무척 대견해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하여 군사복무를 더 잘할 맹세를 다지였습니다.

  그러던 주체 45(1956)년 5월 어느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란봉극장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성원들을 비롯한 중앙위원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휴식시간에 아버지를 만나 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환한 미소를 주시며 아버지에게 “년세도 많으신데 건강이 어떻습니까?” 라고 다정히 안부를 물으시였습니다.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께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막내아들을 찾은 사연을 말씀 올리었습니다.

  그러자 그이께서는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아들을 찾아 매우 기쁘겠습니다.…” 라고 하시면서 기쁨을 금치 못해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커다란 시름이 풀리신 듯 환하게 웃으시며 아들을 제대시켜 공부시키자고, 그렇게 되면 선생은 아이들과 함께 살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고맙다고, 위대한 수령님 의 은덕을 눈에 흙이 들어 가도 잊지 못하겠다고 감격에 넘쳐 말씀 드리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보위상을 돌아 보시며 “리종만 선생의 아들을 곧 제대시켜 공부시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라고 교시를 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은정 깊은 조치에 따라 나는 주체 45(1956)년 늦가을에 제대되여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다심한 어버이정에 아버지는 목이 꽉 메였습니다.

  늘 혼자 있는 몸을 측은히 여기시며 내각에서 각별히 생활을 돌봐 주도록 조치를 취해 주시고 좋은 계절이면 때를 맞춰 경치 좋은 곳에 휴양도 보내여 즐거운 생활을 하도록 관심해 주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제는 또 아들을 찾아 같이 살도록 해주기 위하여 마음을 쓰시였을것을 생각하니 아버지는 그 은혜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몰라 하였습니다

  따사로운 해빛이 비쳐드는 아담한 집에서 아버지는 며느리도 맞아 손자, 손녀들을 거느리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였습니다.

  나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취해 주신 조치로 제대되여 대학의 예과 과정을 공부하는로 로동학원을 거쳐 건설 대학(당시)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어엿한 민족간부로 자라난 나는 평양시를 훌륭하게 꾸리시려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수도건설구상을 꽃 피워 나가는 영예롭고 긍지 높은 도시건설기사로 일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 의 크나큰 정치적신림임으로 10여년간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성원으로 활동하다 로한으로 건강이 허락치 않아 80대 이르러서는 공로보장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시고 아버지에게 부상대우를 계속 받도록 해주시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하도록 은정 깊은 배려를 돌려 주시였습니다.

  그후 아버지는 백내장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실명되여 7년간이나 앞을 보지 못하였지만 태양을 바라다 보면 둥근 형태가 보인다, 이것은 시력이 잘못된 것이 아니니 수술만 하면 다시 광명을 찾고 어버이수령님을 다시 뵙게 될 것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고령이 나이인 88세 때 기적적으로 눈수술을 하고 앞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과 믿음에 충성으로 보답하려는 신념화된 의리심이 저희 아버지에 가슴속에 맥박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저희 아버지는 지나온 인생행로를 더듬어가며 민족의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긴것은 행운중의 행운이라는 것, 하기에 조선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어디에서 살 건 우리 수령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 믿음과 사랑에는 충성으로, 실질적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것,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보답하는것이 다름 아닌 인간의 도리라는것을 생활의 진리로 찾게 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방송으로 항일혁명투사들의 회상기를 들을 때마다 량강도와 자강도에 있던 <대동> 신히 광산들을 통하여 항일유격대를 물심량면으로 돕지 못한것을 매우 한스럽게 생각한다고 여러번 말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아버지를 태양의 품에 안아 주시고 믿음과 은정 깊은 사랑을 주시여 애국애족의 한 길로 손 잡아 이끌어 주시였기에 고목에도 충성의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하기에 아버지는 60청춘, 90환갑을 노래하며 위대한 수령님의 극진한 보살핌속에서 만복을 누릴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황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였습니다.

  아버지는 위대한 수령님을 받들어 애국충정을 다하는 그것이 가장 고귀한 인생이라는 진리를 절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자기가 남반구에 있었다면 상상도 할수 없었고 그 어떤 재부나 명예와도 대비할 수 없는 인생의 빛나는 가치가 자기에게 안겨져 있음을 생활 속에서 확신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지의 나이가 한해 두해 지나면서 많아 지자 일군들에게 리종만 선생이 절대로 무리하게 일하지 않도록 잘 돌봐 주라고 신신당부 하셨고 아버지가 잘 지내고 있다는것을 아시고는 마음이 놓인다고 못내 기뻐하시였습니다.


2. 영생하는 삶


  태양이 영원하듯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어린 사랑은 끝이 없기에 아버지의 삶도 영생하는 것입니다

  주체 60(1977)년 1월 17일 인생 말년을 행복하게 지내던 아버지는 로환으로 92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보고를 받으시고 애석함을 금치 못해 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보고를 가지고 온 일군에게 내가 리종만선생을 잘 알고 있다고 하시면서 그의 장례를 잘 해줘야 하겠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에서 사업하고 있는 책임일군을 부르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의 부친(허한선생)과 우리 아버지 사이에 오랜 세월 깊은 친교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이미 전부터 잘 알고 계시였습니다. 그런것만큼 그 일군을 장례식에 보낸다면 유가족들에게 더 위안이 될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을 부르게 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을 자리에 앉히시고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습니다.

  “리종만선생이 어제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무를 오라고 하였습니다. 리종만 선생은 참 좋은분이었습니다. 그는 애국적지조가 매우 높았습니다. 해방전에 리종만 선생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은 큰 기업가였으나 일본놈들과는 담을 쌓고 있었으며 민족적 량심과 지조를 지켜 왔습니다. 해방직후에도 리종만선생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 정책과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 헌신하였습니다. 리종만선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일도 많습니다.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지하자원개발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아버지를 추억하시는 듯 한동안 말씀이 없ㅇ시였ㅅㅂ니다.

  민족 자본가 출신인 저의 아버지를 잊지 못하시며 높이 평가 해 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는 일군의 가슴에는 세찬 감동의 파도가 일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윽하여 다시 말씀을 이으시였습니다. 

 “리종만 선생이 그렇게도 념원하던 조국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간것이 가슴 아픕니다.

 리종만 선생의 장례를 잘해 줍시다. 나는 가지 못 하지만 내 대신 동무가 가서 유가족들에게 나의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하여 주시오. 그리고 나의 명의로 된 화환도 보내고 신문과 방송 의 부고도 내도록 합시다. 리종만선생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정무원에서 맡아 하도록 하고 모든 장례비용은 국가비용으로 합시다.“

  그 일군은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아버지의 령구앞에서 우리 유가족들에게 전달하여 주었습니다.

  우리 유가족들은 끝 없는 믿음과 영생하는 삶을 안겨 주시는 그 고마움에 오열을 터뜨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대 대하여 그토록 애석해 하시며 몸소 자신의 명의로 된 환도 보내 주시고 조국과 민족의 아는 애국자로 이름이 남도록 해주시는 크나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아버지의 령전에 보내주신 화환에 <김일성 고 리종만 동지를 추모하여> 라는 글발이 있었습니다

  그 글발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그렇게도 념원하던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결의를 굳게 다지군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저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끝 없는 믿음과 사랑을 거듭거듭 베풀어 주시였습니다.

  주체 66(1977)년 3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외에서 살고 있는 저희 누님이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보도록 조치를 취해 주셨습니다 대양과 대륙을 넘어 수천수만리 길을 편히 왔다 가도록 비행기표도 마련하여 주시고 조국을 방문하는 기간 아버지의 묘소도 동생과 함께 찾아 보도록 해주시었으며 조국의 현실을 더 잘 알도록 공화국의 여러 곳에 대한 견학도 하도록 크나큰 은정과 배려를 돌려 주시였습니다.

  하기에 누님은 사랑과 믿음은 천하를 얻는다고 했는데 천하를 품어주시는 위대한 김일성 장군님이시야 말로 태양이시라고 높이 칭송하였습니다.

  주체 75(1986)년 9월 어느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력사연구소 책임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여 가르치심을 주실 때에도 “리종만은 애국적인 기업가입니다.” 라고 크나큰 정치적 신임을 안겨 주셨습니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번 믿음을 주시고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이 세상 끝까지 믿어 주시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보살펴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민족애와 인간의리의 최고화신이십니다.

  우리 집에서 주체 75(1986)년 9월 민속명절인 추석날을 앞두고 아버지의 묘소를 찾으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한 일군이 우리 집에 찾아 와 추석날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애국 렬사릉 준공식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알려주는것이였습니다.

  저는 위대한 수령님 과 경희 하는 장군님께서 아버지를 애국렬사들의 대렬에 나란히 세워주시는 그 정치적신임과 믿음에 목이 꽉 메여 눈굽이 뜨거워 졌습니다

 <애국 열사릉>!

이것은 정녕 희생된 렬사들에 대한 혁명적 의리를 가장 숭고한 높이에서 체현하고 계시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고결한 동지애와 변함 없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평양의 교외 신미리의 청청한 로송들로 둘러 싸인 아담한 곳에 애국렬사들의 묘비가 천만 년 변치 않을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어 사람들에게 숭엄한 감을 주고 있습니다.

  명예위병대가 정렬한 가운데 장중한 애국가의 주악으로 준공식이 시작되자 애국렬사릉 종합 비문앞에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당시)의 명의로 된 화환들이 진정 되었습니다.

  종합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발이 새겨져 있습니다.


<조국의 번영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 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86년 9월 17일>


  비문 앞에서 유가족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렬사들에게 베푸시는 어버이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의리 깊은 사랑과 믿음은 변함이 없으며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더더욱 뜨거워만 진다는 것을 심장으로 절감하면서 격정을 터뜨리였습니다.

  유가족 단위로 자기 부모들의 묘비를 찾았습니다.

  아버지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리종만선생

조국전선 의장

1985년 1월 14일 생

1977년 1월 17일 서거>


  우리 유가족들은 아버지의 묘비앞에서 피가 식고 심장이 멎어도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추억속에 남고 인민의 존경속에 사는 삶만이 영생하는 삶으로 된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끼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국애족의 길에서 수령의 추억 속에 남고 력사의 기억 속에 남는 삶, 정치적 생명을 안고 인간으로서 존재가치를 빛 내이는 삶을 영생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기에 우리 유가족들은 아버지가 보지 못하고 간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사업에 모든 것을 다하리라 굳게 맹세를 다 지였습니다.

  이날 저녁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유가족들을 위하여 옥류관에서 위로연을 마련해 주시였습니다.

  정녕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야말로 고결한 동지애를 지니시고 변함 없는 믿음을 주시는 인간 사랑의 최고화신이십니다.

  주체 73(1984)년 9월 어느 날 로동신문사 기자가 나를 찾아와 경애하는 장군님이 말씀에 따라 아버지와 관련된 덕성 기사를 쓰게 되었다고 하면서 취재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서 그 기자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기사 원고를 친히 보아 주시고 제목은 <민족대단합의 길에서>로 하며 위대한 수령님께서 리종만선생을 한품에 안아 주시고 베푸신 은정으로 글을 잘 쓰도록 하자고, 그리고 주체 73(1984)년 12월 10일 <로동신문>의 실리도록 하여 주시였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정부 기관지 <민주조선>에 기사 <광명을 안겨 준 은혜로운 품>, <평양 신문>에 기사 <애국과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저의 아버지에게 베푸신 숭고한 은정에 대한 덕성기사들이 실리였습니다. 그리고 조선로동당창건 30돐 기념도서가 5개 나라어로 번역 출판되었는데 그 책에도 <신임>이란 제목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저의 아버지에게 베푸신 믿음과 은정 깊은 사랑에 대한 기사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 영생하는 삶은 그 무엇을 주고도 살수 없으며 그 어느 행성의 무게에도 대비 할수 없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은 누구든 한번 믿으시면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영원하며 그 믿음과 사랑은 경애하는 장군님에 의해 더욱 뜨거워 져 영생하는 삶으로 빛나는 것입니다.

  주체 84(1995)년 8월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로 카나다에서  살고있는 팔순을 바라다 보는 백발의 늙은이인 누님이 조국광복 50 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조국을 방문하였습니다.

  누님은 행사를 성과적으로 마치고 나와 함께 애국렬사릉을 찾아가 아버지의 묘비에 꽃다발을 놓고 술을 부으면서 오열을 터뜨렸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딸이 왔습니다. 잠시라도 잠에서 깨여 나시여 이 딸을 맞아 주십시오. 어버이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계시어 영생하는 아버지를 뵙고 싶었습니다.”

  저의 누님은 아버지는 시대의 걸출한 위인들을 모시여 복 많이 받고 영생한다고 하면서 희생된 렬사들을 한 품에 안아 영생의 삶을 누리게 해 주시는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김일성 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의 숭고한 동지적 사랑과 의리 앞에 눈굽을 뜨겁게 적시였습니다.

  조국광복 50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했던 누님은 조국방문을 끝내고 돌아가 애국렬사릉에서 나와 함께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민족통일대축전 참가소식을 남조선에 살고 있는 형님에게 편지로 전달하였습니다.

  이 뜻 깊은 소식을 받은 형님은 너무 감개무량하여 북녘에 가까이 있는 남조선의 동해안 최북단에 있는 대진 해수욕장까지 단숨에 500여리를 달려 와 북녘의 평양하늘을 바라다 보며 불세출의 영웅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 장로님을 우러러 허리 굽혀 인사 드리며 감사의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주체 79(1990)년 8월 어느 날 한 일군이 나를 찾아ㅇ와 만수대 의사당으로 오라는것이였습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여 만수대 의사당으로 가니 한 일군이 나에게 자리표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국사를 토론 하는 만수대 의사당회의실이었습니다.

  안내원이 머뭇거리는 나를 앞자리로 안내 해주었습니다

  뒤좌석을 돌아다 보니 제1차 조국통일범민족대회참가자들과 평양시안의 정당 사회단체, 교육, 문화부문 일군들, 출판보도부문 일군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회의가 시작되자 보고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높은 정치적 신임과 배려로 <조국통일상>을 제정하여 통일애국인사들에게 수여하게 된다면서 한사람한사람 이름을 부르기 시작 하였습니다.

  그런데 절반쯤 지나서 <리종만선생>이라고 아버지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얼결에 대답은 하였으나 자기의 귀를 의심하면서 두리번거리다가 옆사람의 독촉을 받고서야 엉거주춤 일어나 주석단으로 올라 가 아버지에게 수여되는 <조국통일상>을 받아 안게 되었습니다.

  <조국통일상>에는 통일애국인사들을 잊지 않으시고 그들의 공로를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이 높이 평가해 주시며 그들의 위훈과 삶을 영원히 빛내여 주시려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 큰 믿음과 은정, 다심한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도 어언 20여년이 흘렀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강산도 변하고 세대도 바뀌여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경에 하는 장군님께서 베푸시는 의리 깊은 사랑은 변함이 없으며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더더욱 뜨거워만 집니다.

  주체 87(1998)년 5월 어느 날 한 일군이 급히 나를 찾아 와 당중앙위원회에서 아버지의 사진을 가져 오라고 한다는것이었습니다.

  나는 의아해 하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찍은 사진 한장을 그 일군에게 주었습니다. 후에 그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새로운 기술에 기초하여 만들어 진 훌륭한 돌사진을 보시고 애국렬사릉 묘비에 렬사들이 돌사진을 잘 새겨 넣으면 렬사들의 정치적생명을 빛내여 주는 데도 의의가 있고 유가족들도 좋아 할것이라고 말씀 하시였다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애국렬사들의 돌사진을 빨리 만들어 붙이도록 세심한 지도와 가르침을 주시였다고 합니다.

  주체 87(1998)년 9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멀고 험한 수천리 전선시찰을 마치시고 돌아 오시는 그 길로 개건확장된 애국렬사릉을 찾으시였습니다 그이께서는 렬사의 모습이 셍동하게 안겨 오는 돌사진을 정겨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애국렬사들 한사람한사람을 회고하시였습니다.

  정녕 경애하는 장군님은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귀중히 여기며 통일성업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한 사람이라면 그의 출신도 경력도 불문에 붙이시고 영생의 언덕 우에 높이 세워 주시며 그의 자녀들의 운명도 미래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 주시는 가장 넓으신 도량과 위대한 포용력을 지니신 민족의 위대한 령도자이시며 자애로운 어버이이십니다.

  참으로 사상도 령도도 덕망도 민족의 영원한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과 꼭 같으신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이 계시여 저의 아버지와 우리 자녀들의 찬란한 삶의 어제와 오늘이 있고 래일이 학고히 담보되는것처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귀중히 여기는 모든 동포들이 경애하는 경에 하는 장군님의 따사로운 품에 안길 때에야 참된 애국의 길에서 영생하는 삶을 지니고 빛내여 나갈수 있을것입니다.


맺 는 말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누님과 형님과 한자리에 모여 이 책자를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 눈시울이 젖어 들군 합니다 지금 80고령의 누님은 저 멀리 해외에, 보고 싶은 형님은 남녘땅에, 그리고 나는 평양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이하여 한피줄을 이은 한 형제, 한일가가 21 세기에도 산 넘어 대양 건너 뿔뿔이 헤어 져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어찌 우리 가정에만 한한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조국통일유휸교시와 경애하는 장군님의 말씀을 높이 받들고 장군님을 따라 나아가며 7천만 겨레의 민족대단결로 조국통일의 그날을 하루 빨리 앞당겨야합니다.

  이러한 투쟁결의가 굳세여 질수록 나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글의 한구절이 가슴 깊이 되새겨 집니다. 

  “가슴속에 조선민족의 더운 피가 맥박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따라야 한다. 나는 이 길이야말로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한 길이고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이며 또 이 길에 개인의 행복도 영예도 있다는 가장 고귀한 진리를 깨달았다.

  나의 어제와 오늘이 그것을 실증 해 주고 있다.“


저의 아버지가 깨달은 이 고귀한 진리, 그것은 아버지만이 느끼고 체험한것이 아닙니다.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를 일심으로 믿고 따르는 이 길에서만이 조국의 무궁한 번영이 이룩되고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이 고수되며 우리 인민의 영원한 행복이 담보되는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에서만이 민족적대단결도 실현되고 전체 조선 인민의 최대의 숙망인 조국통일위업도 반드시 성취되고야 말것입니다.



태양의 품에 안기어 빛내인 삶 

-------------------------------

저 자 : 리형우

발행인: 강석호

낸 곳 : 평양출판사

인쇄소: 평양인쇄공장

인 쇄 : 주체 90(2001)년 7월 20일

발 행 : 주체 90(2001)년 7월 30일


No comments:

Post a Comment

Eric Schwimmer - a biographic article

Google Gemini === You said Enquiery on Eric Schwimmer - My anthrologist brother in law. a secular Jew, originally from Holland before the 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