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21, 2025

고영숙, “이종만,”『통일의 길에 이름을 남긴 애국인사들』 평양출판사, 2020), 60-90쪽.

 02. 리종만 

고영숙 



짓밟힌 꿈.............................................60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69

크나큰 포옹력에 감화되여.......................80

애국지사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사랑.........93


 

경력

. 1885년 1월 14일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룡잡리에서 출생

. 1912년 일제의 토지략탈에 맞서 농림주식회사 설립

. 1938년 대동광업주식회사 사장, 대동공업전문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 경영, 

         출판사 설립

. 1945년 남조선의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위원장, 기관지<독립신보>경영

.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에 참가

. 1954년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 고문

. 1955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1977년 1월 17일 사망

.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 수상


해방전 민족산업을 일떠(궈)세워볼 어벌찬 꿈을 품은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리종만. 꿈을 이루기 위해 안해본 일이 없었다. 농업이면 농업, 광업이면 광업, 어업이면 어업.....왜놈들이 판을 치는 험악한 세상에서 손을 대는 일마다 실패가 뒤따랐지만 결코 그의 도전의식을 꺾을 수는 없었다. 뻐를 깎는 아픔과 쓰디쓴 실패, 좌절의 수많은 언덕을 넘고 넘으며 방황하던 그는 약관의 나이로 세상을 떠돌아다닌지 30년 세월만에 일약 금광업에서 성공하여 당시로서는 누구나 놀랄만 한 부자로 되었다.

왜놈들도 부러워할만치 막대한 재산을 얻게 된 그에게는 또다시 남다른 꿈이 부풀었다. 고향사람들을 위해,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큰일을 하고 싶었던 그의 꿈은 나라없던 그 시절에는 펼칠수도, 지켜낼 수도 없었다. 오로지 저 하늘의 태양과도 같이 만사람을 한품에 안아 보살피고 이끌어주시는 절세위인의 품에 안기여서야 그의 애국의 꿈과 리상은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애국의 꿈과 리상을 안고 통일되고 부강한 조국건설을 위한 투쟁에 땀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은 리종만선생의 생활체험은 위대한 어버이의 품속에서만 통일애국에 바쳐진 삶이 빛날 수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짓밟힌 꿈


리종만 선생은 1885년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룡잡리에서 7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남쪽 끝 바다가에 있는 룡잡리는 마을 한가운데로 개울이 흐르고 뒤에는 높은 산을 배경으로 들판과 논밭이 길게 자락을 펼치고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농어촌이다. 이런 시골에서 뛰어 놀며 그는 어려서부터 한문을 공부했으나 16살에 병을 만나 3년을 병석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열아홉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얼마후 또다시 병이 도져 학업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20대에 접어든 때는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완전히 빼앗고 식민지정책을 더욱더 로골화하고 있던 시기였다. 문화, 산업 등 모든 것이 너무나 한심하게 뒤떨어진 말그대로 무지와 몽매의 시대였다. 더구나 고향마을은 조그마한 반농반어의 포구였으므로 마을사람들은 모두가 락후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저 밭이나 갈고 물고기를 잡아 먹으며 아무러한 희망도 없이 사는 마을사람들을 보며 리종만선생은 고향사람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없을까 하고 모대기였다(몸부림쳤다).

그는 나날이 령락되어가는 고향을 위해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어 1912년에 향리에 흩어져 있는 서당을 통합하여 대흥학교를 세웠다. 신식교육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하였지만 고향사람들을 위해 독학으로 신학문을 공부하고 교편을 잡은 그는 밤을 새워 공부해가며 신학문과 신문화를 학생들에게 배워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봉건적 인습에 빠져 있는 동네 노인들의 눈밖에 나 1년만에 학교문을 닫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사람들 모두가 높은 문명을 지닌 리상사회를 건설하자면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소박한 꿈을 안은 그는 마흔을 코앞에 두고는 가족을 이끌고 무작정 한성으로 올라와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고학당을 세우고 그것을 운영해 보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하였다.

고학당에서는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중학과정까지의 교육을 시켰는데 보통사람 같으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더라도 감당하지 못할 일을 리종만선생은 맨손으로 떠받쳐던 것이다. 얼마 안되는 재산마저 고학당에 쏟아붓고보니 가정살림살이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온 식구가 굶기를 밥먹듯 했으며 가장집물을 차압당하기도 하였다.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면서 방세를 내지 못해 열흘이 멀다하게 옮겨다녔다. 갈 곳이 없어 길거리를 헤매면서도 그는 고학당을 위해 고심했다. 

고학당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못해본 일이 없었다. 직접 만두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석탄손수레를 끌기도 하였으며 인력거를 끄는가 하면 청소부를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자기는 굶으면서도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고스란히 학교에 내놓았다.

가족과 함께 남의 집 곁방살이로 여기저기 다니다가 우연히 허헌변호사집 사랑채에 들어갔는데 당시 변호사겸 보성전문학교 교장이었던 허헌선생은 그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었다.

리종만 선생이 이렇게 별의별 고생을 다하며 애를 썼지만 고학당은 경영난으로 5년만에 문을 닫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대흥학교와 고학당의 실패를 통해 작은 학교를 하나 경영하려 해도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그는 뜻을 펼치자면 스스로 재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그후 기나긴 세월 이를 악물고 돈을 벌기 위해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만 했다. 논밭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부산에 나가 어물상을 차려놓기도 하였고 남의 배에서 품팔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목숨만 겨우 건지기도 하였으며 중석광산을 차려놓기도 하고 금강산의 깊은 산골짜기에 목재소를 차려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개천옆에 쌓아둔 목재가 심한 큰 물피해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나니 또 다시 빈털터리로 나앉게 되었다. 가슴에 품은 꿈을 이루기 위해 바다로, 산으로, 들로 떠돌아다닌 15년 세월이 그에게 남긴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빚과 이마에 깊게 팬 주름, 손바닥에 단단하게 박힌 굳은살이 전부였다. 그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운명을 저주하고 심지어 고단한 인생을 끝내버리력는 모진 마음도 먹어 보았다.

그러나 원망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리상사회에 대한 꿈을 펼쳐보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다시금 용기를 가다듬고 달라붙었지만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실패가 스무번을 넘기다보니 더는 슬프거나 괴롭지도 않았다.

1928년 그는 한 친구와 동업으로 또다시 금광개발에 나섰다. 자본은 친구가 대고 탐사와 채굴은 그가 맡아 리익을 절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3년만에 어느 한 금광에서 금맥이 터지자 그는 마침내 자기가 꿈꾸던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과 흥분에 휩싸이였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그는 자신이 피땀흘려 일군 그 금광에서 돈 한푼 받지 못한채 쫒겨났던 것이다. 나라고 성공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자금을 가지고 또 다시 이를 악물고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기린광산을 차렸다. 기린광산은 큰 수입을 안겨주지는 않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을 만큼의 소득은 안겨주었다. 기린광산을 발판삼아 좋은 바탕과 품질이 보장된 금광을 찾아다니던 그는 1932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영평금광을 사들이게 되었다. 그가 벌린 스물아홉번째 사업이었다.

영평금광은 옛날부터 잘 알려진 사금광산이었지만 한동안 폐광으로 방치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유명한 사금산지라면 부근에 틀림없이 석금(돌에 박혀있는 금)이 묻혀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이번에는 꼭 성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광산개발을 대대적으로 벌려 몇 년 후에는 국내에서 제일가는 <금광왕>이 되었다. 그야말로 부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를 베풀기 위해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의 처지가 일시에 역전되었다. 오랜 실패 끝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목돈이 생기자 리종만 선생은 그 돈을 나름대로 백성들을 위한 의로운 일에 아낌없이 바치었다.

1937년 5월 금광회사의 창립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기가 번 돈의 3분의 1을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소작농을 위해 내놓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였는데 소작료를 30%만 받겠으며 30년이 지나면 아예 한푼도 받지 않겠다는 그의 말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전조선 인구의 8할이 농사에 종사하는 것만큼 농촌의 생활수준은 곧 조선인의 생활수준을 의미합니다. 농민의 빈궁은 우리가 가장 력점을 두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20여년 동안 광업에 종사하다가 이제 어느 정도 금전을 만지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조선농촌을 다시 살리기 위해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자고 이런 계획을 한 것입니다. 처음 광산을 시작할 때도 돈을 잡으면 꼭 농촌사업을 해보겠다는 결심이 있었습니다.> 그때 리종만선생이 조선농촌을 살리는데 이바지할 명목으로 창설한 대동농촌사를 포함하여 사회에 기여한 돈은 수십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미력하게나마 전력을 다하여 사회를 위해 자신을 바치려는 마음을 지닌 그였기에 1937년 10월에는 왜놈들의 <산사참배> 강요문제로 폐교위기에 처한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하여 또 한번 세상을 감동시켰다. 평양에 하나밖에 없는 사립전문학교가 폐교를 결정하자 교원과 재학생, 동창회, 평양유지들은 40년 력사를 가진 학교의 간판을 내리게 할 수 없다며 숭실전문학교 존속운동을 벌렸다.

조선사람들 누구나가 어떻게든 학교의 간판을 내리는 것만은 막아보려고 했지만 막대한 액수의 인수자금과 조선총독부의 악랄한 방해로 숭실전문학교는 끝내 폐교되고 말았다. 이에 분격한 리종만 선생은 평양에 자연과학과 기술공학계통 전문가들을 집중적으로 키워내는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세웠다. 이 전문학교는 1938년 6월 숭실전문학교가 폐교된 직후 학생 80명을 둔 한 개의 학과(광산과)로 정식으로 개교했다. 전문학교는 1944년 폐교될 때까지 5회에 걸쳐 수백명의 조선인졸업생을 내놓았다. 그뿐아니라 그는 <일하는 사람은 다같이 잘살라!>는 경영철학을 내세우고 기업의 생산성을 높였고 추가 리윤을 로동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전국에 225만평의 농지를 소유한 4곳의 집단농장도 건설하였다.

한편, 출판사도 내오고 일군 재 부로 가슴속에 품었던 꿈을 실천에 옮기려던 그의 소망은 일제의 악독한 식민통치하에서는 결코 빛을 볼수가 없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의 금광강제정리사업과정에서 그의 광산기업은 해체되었고 자금난으로 리상농촌의 꿈도 접게 되었다. 같은 해에 출판사도 공업전문학교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팔아 넘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렇듯 리종만선생은 민족사업을 일떠(궈) 세워보려고도 해보고 민족교육을 목적으로 하여 학교도 세우고 출판사도 경영하였지만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민족을 위한 참다운 일을 전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일제는 그에게서 집도 재산도 다 빼앗고 강제로 경기도에 있는 사찰로 내쫒았다. 꿈이 무참히 짓밟힌 그에게 차려진 것은 나라없는 식민지 백성의 모멸감뿐이었다.

그 후 사찰에서 은거생활을 하던 리종만선생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손에 무장을 들고 싸우고 계시는 김일성 장군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었다. 그때마다 무릎을 치며 <이제 두고 봐라. 김일성장군님은 하늘이 낸 분이시니 머지 않아 이 나라는 해방되고 대통 운이 틀게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사찰에서 조국해방을 맞이한 리종만 선생은 커다란 감격과 기쁨을 안고 한달음에 서울로 달려 갔다.

당시 서울에서는 미국이 남조선에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미제의 군정통치라는 것도 사실상 일제의 총독통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해방 후 남조선의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성원으로 사업하면서 그는 우리도 공화국 북반부에서처럼 장차 일제와 지주의 토지를 무상몰수하여 무상분배하여야 하며 큰 기업소의 국영화와 중소기업의 협동화를 실현하고 계획경제를 해서 국가정책을 계획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국내산업건설을 발전시키고 외국자본의 침입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것이 미군정청의 마음에 들리 없었다.

미군정청은 저들의 군정통치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가 운영하던 삼척공업지구운영권까지 박탈하였다. 민족사업을 잘 얼떠(궈) 세워보려던 그의 커다란 포부는 이렇게 외세에 의하여 또다시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참다운 리상사회에 대한 애국의 꿈을 실현해 보려고 그리도 모지름을 써보았지만 외세가 있는 남조선땅에서 그것은 한갓 신기루에 불과하였다.

리종만 선생은 민족적 울분으로 가슴을 쳤고 도대체 어느 길로 나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모대기였다. 그러한 그에게 재생의 밝은 서광이 마침내 비치여 들었다. 그 빛과 더불어 참다운 애국의 인생이 바야흐로 시작되었다.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


남녘 땅에서 해방을 맞이한 리종만선생은 여러 기회에 북행 길에 올랐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뜻을 이룰수 없었다. 그가 위대한 태양의 품으로 찾아올 용단을 더욱 굳히게 된 것은 평양애 갔다 온 려운형과 우리 민족사에 특기할 거족적인 4월 남부련석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온 김구로부터 장군님을 직접 만나뵈온 이야기와 련석회의소식을 들은 후였다.

<김일성 장군님이시야말로 우리 민족이 떠받들어야 할 유일한 령도자이시며 우리 민족은 오직 김일성장군님께서 가리키시는 길로 나가야 한다. 장군님께서는 남의 힘으로가 아니라 바로 조선민족의 힘을 한데 모아 통일독립을 하자는 립장이시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한다면 당파나 종교의 소속, 재산의 유무, 정치적 견해여하를 불문하고 반드시 김일성장군님의 두리에 단결해야 하오. 나는 이전에 공산주의자들이란 협애한 사람인줄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가보니 도량이 크고 관대하기 비길데 없다는 것을 알았소. 김장군님과 같으신 분이 진정한 공산주의자이라는 것을 나는 이번에 내 눈으로 실지 보고서야 진심으로 느꼈단 말이요. 그런 공산주의자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공산주의를 나무라겠습니까? 나는 김일성 장군님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 가겠소. 이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면서 김구는 자기의 완고하고 편협하던 정치적 견해를 고쳤던 것이다. 김장군님과 같으신 분이 진정한 공산주의자이시다! 이 말은 불세출의 영웅 김일성 장군님의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고매한 덕성에 대한 온 겨레의 걷잡을 수 없는 동경과 흠모의 분출이었다.

그 말에 큰 충격을 받고 리종만 선생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야 할 곳은 바로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국님의 품이라는 것을 절감하였다. 리승만 역도의 반민족적 행위를 직접 목격하고 당해보면서 그의 이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언제인가 리종만 선생이 리승만 역도한테 불리워간 일이 있었다. 리승만은 그에게 지하자원개발에 경험도 있고 수완도 있으니 남강원도 일대를 맡아 개척해 달라는 것이었고 또 그쪽의 민심이 소란하니 알아차리고 적절한 대책도 미리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리종만선생이 운영하던 <독립신보>가 자기들의 정치내막을 폭로하였다 하여 강제로 폐간시킨 리승만이 이번에는 광산개발을 미끼로 그를 인민들의 투쟁을 무마시키려는 저들의 음흉한 책동에 리용해 먹자는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분하였다. 

그 후 그가 자기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자 리승만 역도는 그에게서 산업운영권을 빼앗아 매판자본가들에게 넘겨주었다. 리종만선생의 경우 남족선의 썩은 사회에서 개가죽을 쓰고 굴욕을 참는다면 재산도, 사회적 지위도 다 보존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민족적 량심을 팔아 자기의 리익을 챙길수는 없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어버이 수령님께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그를 불러 주시었다. 그때 리종만 선생의 생각은 깊어졌다. 개가죽을 쓰고 굴욕을 참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루를 살아도 지조를 지키는 보람속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그는 환갑 나이에 많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 소중한 가정을 뒤에 두고 혈혈단신 평양으로, 어버이수령님의 품으로 갈 대용단을 내리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남조선의 조선산업건설협의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력사적인 대회장에 들어서게 되었다.

1949년 6월 25일. 바로 이날 그는 오매불망 뵙고 싶던 위대한 수령님을 직접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게 되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는 날로 심각해지는 미제의 분렬책동에 대처하여 평범한 애국력량을 결속하기 위하여 소집된 대회로서 남북조선과 해외의 70여 개의 정당, 사회단체들이 참가하였다.

그가 회의장인 모란봉극장에 이르니 북과 남에서 모여온 각계각층의 대표들로 장내가 꽉 차있었다. 리종만선생은 북과 남의 대표들이 모여 민족지상의 과업인 조국통일문제를 론의하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하여 마냥 가슴이 높뛰었다. 한편 민족자본가로서 반일애국의 뜻을 품고 일본놈들과 담을 쌓고 지냈다고는 하지만 그의 심중에서는 공화국에서 자기를 어떻게 보고 대해주겠는가 하는 의구심과 초조감이 좀처럼 가셔질 수 없었다.

어쨌든 자본가로서 왜놈의 통치밑에서 큰 기업을 한 부자가 아니였던가? 이윽고 주석단으로 키가 후리후리하고 위품이 당당한 젋으신 분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앞서 걸어나오시자 모두가 일제히 일어나 우렁찬 박수소리와 환호성을 터뜨렀다.

아! 김일성장군님이시다! 박수소리와 환호성은 더욱 세차게 울려퍼졌다. 환호하는 회의참가자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시며 회의장에 들어서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시며 옆에 있는 허헌선생을 비롯한 주석단 성원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시었다.

그러시고는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남조선에서 들어온 대표들 가운데 리종만선생이 왔으면 주석단으로 올라오십시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주석단으로 오른 리종만선생이 옷깃을 여미며 수령님께 인사를 드리려 하자 일어서시어 그의 손을 꼭 잡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렇게 교시하시었다. <남조선산업계에서 명망이 있는 리종만선생을 오늘 이렇게 만나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선생이 년로한 몸으로 38선을 넘어 먼길을 오시느라고 수고하였습니다. 나는 선생이 남조선의 산업건설협의회 대표로 평양에 와서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한데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시면서 그가 안팎의 분렬주의자들의 온갖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한데 대하여 훌륭한 애국적 거사로 높이 평가해 주시었다. 어버이수령님의 과분한 평가까지 받고 너무도 송구하여 그는 <장군님을 뵈올 체면이 못되는 줄 알면서도 제가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긴 세월에 나라를 찾아 주시느라고 얼마나...>라고 하며 감격에 목메어 인사의 말씀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였다. 몸소 자신의 곁에 앉혀주시며 자기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소탈한 풍모앞에서 그는 어느새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면서도 지워지지 않던 한 가지 생각, 북에서 나를 어떻게 대해줄 것인가 하던 걱정이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 휴식시간에도 쉬지 않으시고 그와 뜻깊은 담화를 하시었다.

<지난날 선생은 많은 재산을 가진 기업가였지만 일제와 담을 쌓고 민족적 량심과 애국적 지조를 지켜왔습니다. 선생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의 지하자원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거액의 자금을 투자하여 후대교육사업과 계몽사업에 기여하여 왔습니다. 선생은 해방 후에도 남조선에서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리승만괴뢰도당의 매국배족행위를 반대하고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잘 싸웠습니다. 우리는 선생의 애국적 지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국토완정과 조국의 번영을 위한 투쟁의 한길에서 언제나 선생과 같은 애국자들과 손잡고 나갈 것입니다.>

정녕 너무도 분에 넘치는 평가였으며 값높은 믿음이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장장 20성상 항일혈전을 벌려 조국을 해방하신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리종만 선생을 민족적 량심과 애국적 지조가 있는 애국자라고 높이 내세워주시었던 것이다.

애국자란 마음먹었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를 위해 참답게 살려면 위대한 령도자를 모셔야 하며 위인의 품에 안길 때라야 애국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도 외세가 살판치는 남조선 사회에서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뒤돌아볼수록 자신의 애국은 마음뿐이고 념원뿐이었음을 자책하던 그였다. 그런데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우국충정을 애국자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값높게 빛내주시는 것이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휴식도 잊으시고 그에게 민족적 단합을 위한 통일전선로선에 대하여 알기 쉽게 해설해 주시면서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서 모두가 새 민주조선건설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설데 대한 사상의 진수에 대해 뜻깊은 가르치심을 주시었다.

각계각층의 근로대중을 건국에로 힘있게 불러 일으키는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애국의 뜻을 접하는 그의 생각은 깊어졌다. 

공화국 북반부에서는 수많은 애국적 기업가들이 건국로선을 받들고 민족산업의 발전과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고 있다는 속이 확 트이는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새겨들으며 그는 절세위인의 높으신 덕망과 고매한 인품, 사리정연한 말씀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나라잃은 불우한 민족자본가로서 제딴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며 한 크지 않는 일도 애국적 지조라고 높이 치하해 주시는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누를 길 없어 리종만선생은 평양에 남아 인생말년이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힘껏 일하고 싶다는 외람된 청을 올리게 되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뜻을 긍정하시듯 환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선생이 이번에 평양에 남아서 사업할 의향을 표시하였는데 앞으로 조국의 통일과 부강발전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었다. 계속하시어 오늘 조선민족 앞에 나선 최대의 과업은 국토완정과 조국의 통일독립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 중대한 민족사적 과업은 조국을 사랑하고 나라의 통일을 념원하는 남북조선의 모든 애국적 민주력량을 총집결하여 단합된 힘으로 투쟁함으로써만 성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이번에 남북조선의 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전국적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를 가지고 거족적 구국대책을 강구하려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시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사업에 적극 참여하기 바라며 앞으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책임적인 임무를 맡아주었으면 한다는 크나큰 정치적 신임을 안겨주시었다.

정녕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품은 무한히 넓고 끝이 없다는 생각으로 그는 격정을 금할 수 없었다.

감격에 젖어 있는 리종만선생에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당시 외세에 의하여 식민지화된 남조선의 민족산업실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시면서 우리나라 경제건설의 기본 과업을 알려주시고 그가 민족경제를 부흥발전시키는 사업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나라에는 금, 은, 동, 철을 비롯하여 귀중한 유용광물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고, 참으로 우리나라는 자원이 가득찬 나라이라고, 선생은 새로운 광맥들을 찾아내고 광산들을 개발하는 사업에 힘써 주어야 하겠다고,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광물자원의 분포상태에 대하여 알려주고 광산운영기술과 경험도 가르쳐주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었다.

회의휴식시간도 퍼그나 흘렀으나 다정하신 눈길로 송구스레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시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는 선생이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훌륭한 일을 많이 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선생이 불편없이 사업할 수 있도록 내각에서 잘 돌봐주도록 하겠다고 하시면서 선생은 나이도 많은데 건강에 각별히 류의하셔야 하겠다고 다정히 이르시었다.

이윽고 회의장으로 향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륵는 그의 눈굽은 뜨거워 올랐다.

나이 60이 되도록 인생의 갖은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애국의 마음도 육체도 쇠진해 버렸던 황혼기가 언제였던가 싶게 참다운 애국애족의 길에서 재생한 기쁨으로 하여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것이 하염없이 흘러 내리었다.

어버이수령님이시야말로 열화같은 인간애와 하늘땅보다 넓은 도량, 한없이 소탈한 풍모, 이 세상 모든 것이 머리숙일 위대한 포용력과 고결한 덕망으로 민족을 안아 보살펴주시는 희세의 영웅이시구나 하는 생각에 감개무량하기 그지 없었다. 과연 조선의 위대한 령도자이시로구나!

심중에 맥박치는 이 한가지 생각으로 그날 저녁 잠자리에 누웠어도 리종만선생은 좀처럼 잘들 수가 없었다.

감격과 흥분은 계속 새로운 감회를 불러오기만 하였다. 비록 숱한 고생을 겪으며 더듬은 길이기는 하나 평양으로 온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 싶어 거듭 희열을 느끼었다. 하기에 훗날 그는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가숨속에 조선민족의 더운 피가 맥박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 장군님을 따라 나서야 한다. 나는 이 길이야 말로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한 길이고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이며 또 이 길에 개인의 행복도 영예도 있다는 가장 고귀한 진리를 깨달았다. 나의 어제와 오늘이 그것을 실증해 주고 있다.>


크나큰 포옹력에 감화되여


새로운 감회와 의욕속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 제2일 회의를 맞이한 회의참가자들은 뜻밖의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바로 간밤에 서울에서 김구선생이 피살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날 회의의장인 홍명희선생은 김구선생의 뜻하지 않은 재난과 관련하여 대회의 이름으로 조의를 표하였다. <....김구씨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노력분투한 분입니다. 비록 그가 민주주의적 자주독립방향에 대하여서는 모호하여 갈팡질팡 헤매는 반민주주의적, 철저치 못한 견해가 있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미군주둔을 반대하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인사였습니다.

이런 분이 리승만 괴뢰도당의 손에 의해 재난을 입은 것은 분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김구씨의 재난에 대하여 애도하며 동시에 그의 유가족들에게 조의를 표합시다.> 대회장은 자못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안타까운 분을 잃었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매우 애석해 하시면서 그를 살해한 놈들에 대한 격분을 금치 못해하시었다. 거의 한생을 반동적인 정상배들 속에 섞이여 사소한 정견의 차이나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덮어 놓고 따돌려 박해를 가하는 것만 보아오던 리종만선새에게 있어서 이것은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사상과 정견, 주의주장을 떠나 온겨레를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한 포옹력, 한없이 넓고 따사로운 그 품, 뜨거운 그 사랑에 대하여 그는 다시금 가슴 뜨겁게 절감하게 되었다. 김구선생이 당한 재난소식은 대회 참가자들을 더없이 격분에 사무치게 하였고 토론자들은 일치하게 하루빨리 자주적으로 조국을 통일 할 것을 열렬히 호소하였다.

그 이튼날에 계속된 대회에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으로 선거되었다. 이는 그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의 표시였다. 이 크나큰 믿음은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저버리는 일이 없이, 량심을 흐리는 일이 없이 살아온 민족자본가에 불과한 그를 애국의 대오에 떳떳하게 내세워 주는 태양의 따뜻한 손길이었다.

리종만선생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모든 애국적 민주력량을 튼튼히 결속할데 대한 방침이 얼마나 위대한 생활력을 가지고 천만사람의 가슴을 들끓게 하였는가를 대회가 끝난 직후인 6월 29일에 열린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경축 평양시민대회에서 더욱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구름처럼 모여든 수십만 그 모든 사람들의 얼굴마다에는 새조국건설의 당당한 주인으로서의 긍지와 열정이 한껏 어려 있었다. 이 도도한 흐름에 남조선에서 온 인사들도 합류되어 실로 민족대단합의 거창한 흐름이 거리에 차고 넘쳤던 것이다. 얼마나 미더운 힘의 과시였던가!

이 날도 리종만선생은 어버이수령님을 따라 주석단으로 올랐다. 각계각층 대표들이 연단으로 달려나와 조국전선선언서를 지지하여 열화같은 결의들을 토로하였다. 그들은 일치하게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두리에 하나로 굳게 뭉쳐 조국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하여 끝까지 싸울 철석같은 결의들을 다지었다. 어버이수령님을 따르는 이 길에서만이 민족의 무궁한 번영이 담보되며 민족대단결을 실현하여 겨레의 숙망인 조국통일 위업도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외세의존과 사대망국 풍조가 차고 넘치는 남조선땅에서 비분과 좌절로 밤을 지새우며 한탄하던 그는 너무나 대조적인 현실 앞에서 격정을 금할 수 없었다.

이 거창한 흐름속에 합류되고 하나의 의지로 용해된 자신을 찾게 된 것이다. 리종만선생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으로 내세워 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내각 간부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하는 은정어린 조치도 취해 주시었다.

당시의 그의 나이가 예순 세 살이었다. 인생을 새롭게 살기에는 너무도 늦은 감이 드는 나이었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의 두터운 신임과 배려속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힘껏 일해볼 열망으로 가슴 불태우며 그는 공부를 시작하였다.

비록 늙기는 하였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는 진리 앞에서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늙음을 한탄할 것이 아니라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은덕에 만분의 하나라도 보답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자신을 채찍질 해가며 리종만선생은 백배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학교과정을 마치고 신심에 넘쳐 일을 시작한 때 침략자들은 끝내 범죄적인 침략전쟁을 도발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나라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리종만선생이 외국에 가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또다시 취해 주시었다. 어버이수령님의 극진한 보살피심에 의하여 조국해방전쟁시기 외국에 가 있었던 선생은 1954년 정초에야 귀국하게 되었다. 압록강을 건너서며 그는 상처입은 조국강산의 참혹한 모습에 가슴이 미여져오고 너무도 격분하여 그 아픈 심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가 조국에 도착한지 며칠 지나서였다. 그 날도 조국전선중앙위원회 사무실에 나가 일하다가 방금 점심을 하고 난 참인데 어버이수령님께서 그를 부르신다는 련락이 왔다. 서둘러 차에 올라 그이께서 계시는 방으로 들어서니 몇몇 간부들이 수령님의 두리에 서 있었다. 어버이수령님을 다시 뵈옵게 되는 순간 리종만선생은 그 기쁨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었다. <수령님, 그간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뜨거워 오르는 격정에 그는 문안인사조차 변변히 올리지 못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손에 드셨던 연필을 놓고 마주 나오시어 그의 손을 잡아주시며 매우 반가와 하시었다. <선생이 몸성히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래도 외국땅이 자기 집만 하겠습니까. 앉으십시오.> 가렬한 전쟁의 중하를 겪으셨지만 여전히 건강하신 어버이수령님을 뵈온데다가 그이의 따뜻한 손길에 접한 리종만선쟁은 흥분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마주하신 책상우에는 큰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가렬한 전화의 나날 매일 매시각 작전지도를 보시며 침략자들과의 싸움을 승리에로 이끌어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오늘은 지도를 펼치시고 전후복구건설을 령도하시느라 침식을 잊고 사업하신다고 생각하니 그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이께서는 그의 건강과 생활에 대하여 세세히 물으시고 나서 선생을 급하게 만나자고 한 것은 복구건설과 관련하여 의론할 것이 있어서 오라고 하였다고, 전후복구건설을 하자니 동이 많이 요구된다고, 동을 한t도 좋고 두t도 좋으니 있은 것을 다 파내자고 말씀하시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지능과 수완도 딸리고 광업계에서 오래 동안 일해왔다는 이름뿐인 자기를 여전히 믿어주시고 나라의 중요한 사업을 토론해 주시는데 힘을 얻은 그는 신이나서 이렇게 말씀드리었다. <장군님! 문제없습니다. ....동도 많고 금도 많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올린 그는 해방전 대동광업주식회사를 경영할 때 북부 일대의 여러 지대를 돌아다니며 탐사한 내용과 어느 한 산에 20만t의 동광석이 매장되어 있다는데 대하여 말씀 드리었다. 어벙수령님께서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대단히 좋은 자료를 선생이 알려 주었다고 하시면서 그럼 해당 부문의 일꾼들과 좀더 구체적으로 협의해 보자고 하시며 중공업성 지질탐사관리국의 한 일꾼을 부르시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 일꾼을 기다리시는 동안 선생에게 동광석을 어떻게 캐내면 좋겠는가에 대하여 물으시었다. 채광은 어떻게 하며 그 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도 못하였던 그는 아무런 대답도 드릴 수 없었다. 잠시 후 그 일꾼이 방에 들어서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리종만선생을 가리키시며 그를 아는가고 물으시었다. 그 일꾼이 처음 본다고 대답을 올리자 어버이숭령님께서는 <인사를 하오. 리종만선생이요. 앞으로 국장동무는 리종만선생을 모시고 사업을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로 부르시고 동광석을 캐내기 위한 탐사조직과 수송, 고압선 인입과 기본건설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따져 보시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다시금 전후복구건설에 동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를 강조하시면서 송전선을 복구하는데도 그렇고 앞으로 철도의 전기화를 실현하는데도 동이 많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순간 리종만선생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었다.

흘러간 오랜 세월 속절없이 묻혀있던 은금보화가 바야흐로 해빛을 받아 인민의 행복에 이바지 하게 되었다는 희망과 기쁨과 함께 그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울려준 것은 복구건설의 첫 단계에서 벌써 철도전기화를 실현할 전망을 펼치시는 그이의 가르치심이었다.

그때 그가 어버이수령님께서 이미 가렬 처절한 전화속에서 지질학자와 자리를 같이 하시고 서해안간석지개간문제를 두고 의논하셨고 건축가를 부르시고서는 평양의 복구건설에 관한 구체적인 안을 주시고 설계를 작성하게 하시었으며 전선길에 잠시 들리신 파괴된 농촌마을에서는 여기에 앞으로 대규모적인 과수원을 조성하자고 하시며 인민들을 고무해 주신 사실을 알았더라면 더욱 놀랄을 것이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 일꾼에게 기술자들을 데리고 어느 한 산에 나가 조사해볼데 대한 과업을 주시면서 오늘부터 리종만선생을 동무네 고문으로 임명한다고, 앞으로 동무들은 리종만선생을 도와서 일을 잘 하여야 하겠다고 당부하시었다. 숭엄한 감정으로 그이를 우러르는 리종만선생의 뇌리에는 어느 한 일꾼으로부터 전해들은 정전 직후에 있었던 일이 되새겨졌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전후 절실히 필요한 동광석을 찾으시려고 어느 한 지점에 대한 탐사에 실로 막대한 자금을 돌려 주시었다. 푼전이 귀하였던 때라 일꾼들은 그 엄청난 액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동광이 없다면?!....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러한 일꾼들에게 그 돈을 다 쓰고도 동광석이 없으면 산꼭대기에 후대들이여, 여기에는 동이 없으니 다시는 손을 대지 말라는 비석을 세워놓자고 하시면서 그러면 우리 시대에는 손해를 보더라도 후대들은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교시하시었다는 것이다.

가슴뜨거운 그 사연을 전해듣고 그때 얼마나 감동했던가. 나라와 민족의 만년대계를 위하시는 숭고한 그 뜻과 한없이 넓은 품이 지금 자기를 지켜주고 뜨겁게 안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신임과 사랑은 이에만 그치지 않고 날과 더불어 더더욱 뜨거원만졌다. 한번 손잡으시면 어떠한 환경에서나 끝까지 민어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걸어온 과거보다도 그의 운명의 전도를 더 걱정하시면서 그를 조국과 민족이 아는 애국지사가 되도록 보살펴주시고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었다.

그 사랑, 그 믿음을 안고 그는 험산준령을 밤낮으로 톺으며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공광석을 찾고 찾았다. 그러나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새로 탐사를 더하면 물라도 당장은 거의 가망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부 사람들속에서는 그에 대한 구구한 말들이 돌았다. 그는 번민속에 잠기게 되었다. 동이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리도 기뻐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을 무슨 낯으로 뵈온단 말인가? 함께 갔던 기술자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정부에서는 나를 과연 어떻게 보겠는지?.... 그가 심각한 고민속에 빠져있던 그해 4월 중순 어느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와 같이 어느 한 산에 갔다온 지질탐사관리국의 책임일꾼으로부터 조사결과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었다. 조용히 방안을 거니시며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시었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 산에 동광석이 20만t이 없다고 해도 동무들이 리종만선생에 대하여 절대로 다르게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우리가 리종만선생을 믿는 것은 동광석 때문이 아니라 그 선생의 애국적인 지조와 민족적인 량심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그 산에 동광석이 20만t이 아니라 단 1t이 있어도 그것이 리종만선생이 탐사한 나라의 지하자원이라고 생각할 때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지금은 나라에 한g의 동이라도 더 많이 요구되는 때라고, 이러한 때에 한g의 동이라도 캐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리종만선생은 나라에 큰 일을 한 셈이라고, 그러니 동무들은 거기에 동광석 20만t이 없다고 하여 그 선생을 의심하거나 박대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강조하시는 것이었다. <재삼 말하지만 내가 믿은 것은 리종만선생의 애국심이었고 민족적 량심이었습니다. 동무들은 앞으로도 리종만선생을 계속 잘 모시고 그 선생을 적극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깊은 신뢰와 뜨거운 사랑, 위대한 포옹력이 넘치는 말씀이었다. 그이의 말씀을 전달받은 리종만 선생은 터져오르는 오열을 막을길 없었다. 동광석 20만t을 찾지 못한 것보다 그 일로 해서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자기를 더 생각하시는 그 믿음과 은정, 그 일로 해서 누가 시비라도 할세라 세심히 보살펴주시는 해빛같은 그 사랑, 이 세상 천하에 어버이수령님처럼 사려깊고 인자하신 인품을 지니신 위인이 또 어데 있으랴 싶었다. 

그렇수록 그이의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도량과 인정미를 다시 한번 뜨겁게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베풀어주신 높은 신임을 거듭 받아 안게된 그는 값없이 살아온 지난날들이 더없이 한스러웠다. 좀더 일찍이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곁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어느새 인생말년에 이른 아쉬움이 컸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마침내 결심을 품고 내각청사를 찾아 갔다. 한 책임일꾼을 만나자 품속에 깊이 간수했던 한 장의 문서를 내놓았다. 그것은 그가 지난 날에 경영하던 대동광업주식회사청사를 공화국정부에 넘겨준다는 <양도문서>였다. 그 문서를 내놓으며 리종만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에게는 김장군님의 신임이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가장 귀중한 장군님의 신임을 받아안은 지금에 와서 나에게는 재산도 귀하지 않고 명예도 귀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장군님을 받들어 여생을 바쳐 일할 결심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그는 몸과 마음이 한결 젊어진 듯 열정에 넘쳐 사업에 더욱 힘썼다. 지질탐사관리국의 한 일꾼에게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내가 해방전에 왜 동광을 안하고 금만 따라다녔는지 한 스럽소. 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것뿐인데 장군님께서 바라시는 동광을 꼭 찾아내고야 말겠소> 그는 새로운 결심을 품고 다시 탐사의 길에 나섰다.

그는 해방전에 표본을 뜯어 탐사 흔적을 남겨놓군 했던 자리를 두루 찾아 여러 곳의 전망성 있는 유용광물매장지들을 찾아 냈을 뿐아니라 앞으로 채굴이 되는 경우에 대비하여야 할 수송, 기타 문제들에서 투자를 적게 하면서도 수송을 헐하게 할 수 있는 조사자료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면서 리종만선생의 노력이 정말 크다고, 리종만선생은 애국심이 높은 분이라고 높이 치하해 주시었다. 끝없는 믿음과 사랑을 받아안은 리종만선생은 어버이수령님께 다소나마 기쁨을 드렸다는 행복감에 가슴이 설레였다.

그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계기로 된 이 이야기는 애국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려깊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오늘도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리종만선생은 그후에도 젊은 기술자들과 함께 북방의 추위와 눈길도 헤치고 비바람과 무더위도 이겨가며 탐사의 길을 이어갔다.

70고령이었지만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선 길이여서 삶의 희열을 한껏 느낀 그였다.


애국지사로 내세워 주신 위대한 사랑


리종만선생이 통일애국의 참된 삶을 빛내일수 있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신 어버이수령님의 각별한 사랑은 갈수록 뜨거워만 졌다. 

1955년 10월 어느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내세워 주시는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를 돌려주시었다. 그리고 그가 년로하고 건강이 좋지 못하므로 오래동안 휴식도 시켰다고 하시면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제때에 풀어주어 그가 맡겨진 일을 잘 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히 가르쳐 주시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1957년 8월 27일에 진행된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선거에서 리종만선생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72살이었다. 새로 선거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의 명단이 신문에 발표되었을 때였다.

국내에서는 물론 그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해외동포들까지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을 공개한 신문에서 리종만이라는 이름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가 인생말년에 나라의 정사를 토의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나서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였지만 지난날 수 백만장자였던 남조선출신의 민족자본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된 사실에서 사람들은 어버이수령님의 한없이 넓고 따뜻한 품과 사랑에 대하여 다시금 가슴뜨겁게 느꼈던 것이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 리종만선생은 그저 감격하기만 하였다. 그는 자기를 찾아와 축하해 주는 동료들에게 희색이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특별대우를 받고 있소. 해방전에는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시는 김장군님께 의연금 한잎 내놓지 못한 기업가였던 내가 오늘 장군님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고 살자니 그저 황송하기만 하구려. 남조선에 그냥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은 식민지예속의 올가미에 걸려 기업은 파산당하고 나라는 존재는 바람받이의 등불처럼 스러지고 말았을 거요. 그러했을 내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었으니 참말 꿈만 같소.....>

어버이수령님께서 리종만선생에게 돌려주신 신임과 배려, 그것은 민족자본가였던 그를 조국과 민족이 아는 애국지사로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사랑이었다. 그가 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으로, 중공업성 고문으로 인생말년을 보람있게 보낼 수 있는 것은 이렇듯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 깊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종만선생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은정넘치는 사랑은 생활의 구석구석에도따사롭게 미치었다.

1954년 초봄 어느 날이었다. 한 일꾼이 그를 해방산기슭의 경치좋은 곳에 건설된 아담한 살림집으로 안내하였다. 널직한 방이 여러 칸이고 시원한 마루방, 창고, 목욕탕, 자그마한 정원까지 달린 훌륭한 집이었다. 영문을 몰라하는 그에게 그 일꾼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친히 교시가 계시여 선생이 이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시는 생활필수품이 들어 있는 깨끗이 포장한 함을 리종만선생에게 안겨주었다. 뜻밖에 과분한 배려를 받아안게 된 그는 흥분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얼마전에 어버이수령님께서 외국에서 갓 돌아온 그를 만나 주신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행색에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한 일꾼을 부르시어 선생이 아직 외국에서 입고 온 옷을 벗지 못했다고 념려하시면서 며칠 안으로 그의 나이에 맞는 좋은 양복과 외투를 해드리라고 교시하시었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는지 무슨 생각에 잠기셨다가 선생이 혼자서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식모도 보내주고 집도 조용한데 잡아주고 승용차도 해결해 주어 년로한 분이 사업을 하는데 애로가 없도록 해주라고 당부하신 것이었다. 그때로 말하면 전쟁이 갓 끝난 때라 누구나 단벌 옷을 입고 다녔고 집 타발할 형편도 못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토굴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 많은 그가 가족도 없이 홀로 합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리시어 잊지 못하고 계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어떻게 하나 그에게 가능한 껏 편의를 보장해 주려고 하시는 것이었다. 새 집에 들어선 그날 저녁 집안팎을 말없이 몇 번이고 돌아본 리종만선생은 어버이수령님의 극진한 사랑이 생각할수록 가슴뜨겁게 사무쳐와 감사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해방전이나 남조선에 있을 때 그는 좋은 집에서 값진 가구들을 차려놓고 부러운 것 없이 살았다. 그렇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 마련해 주신 이 아담한 집은 그에 대비할바 없이 따사로운 해빛이 함뿍 차고 넘치는 사랑의 요람이었다. 그는 사랑의 요람에서 그저 잠들 수 없었다.

남조선에 두고 온 자식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어버이수렁님께서 자기에게 돌려주신 믿음과 사랑의 이야기,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온정 깊은 이야기를 자식들과 같이 기쁨 속에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에 밤새도록 뒤척거리며 잠 못 이루었다. 그러는 그에게 뜻밖의 기쁜 일이 생기었다. 그의 막내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왔던 것이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대에 의해 서울이 해방되지 한 주일만에 입대한 막내아들이 1955년 여름 어느날 자기 아버지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성원으로 사업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들을 만난 리종만 선생은 어버이수령님께서 돌려주신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 밤이 새도록 이야기해 주었다. 1956년 5월 그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성원들을 비롯한 중앙위원들과 함께 모란봉극장에서 진행되는 회의에 참가한 어느 날이었다. 이날 회의를 지도하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회의 휴식시간에 중앙위원들과 함께 리종만선생을 몸소 만나 주시었다. 그이께서는 환하신 미소를 지으시며그에게 년세도 많으신데 건강이 어떠한가고 다정히 안부도 물어 주시었다. 어버이수령님을 또다시 만나뵙게 된 기쁨에 가슴설레이며 리종만선생은 그이께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막내아들을 찾은 사연을 스스럼 없이 말씀올리었다. 그러자 그이께서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라고, 아들을 찾아 매우 기쁘겠다고 하시면서 커다란 시름이 풀리신 듯 환하게 웃으시었다. 그러시고는 아들을 제대시켜 공부시키자고, 그렇게 되면 선생은 아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리종만선생은 정말 고맙다고, 어버이수령님의 은덕을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지 못하겠다고 감격에 넘쳐 말씀 올리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즉석에서 해당 일꾼에게 리종만선생의 아들을 곧 제대시켜 공부시키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교시하시었다.

어버이수령님의 은정깊은 조치에 따라 막내 아들은 1956년 늦가을에 제대되어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리종만선생은 어버이수령님의 다심한 사랑에 목이 꽉 메여 올랐다. 늘 혼자 있는 그를 걱정하시며 내각에서각별히 생활을 돌봐주도록 조치를 취해주시고 좋은 계절이면 때를 맞춰 경치좋은 곳에 휴양도 보내주시어 즐거운 생활을 하도록 관심해 주시더니 아들을 찾아 같이 살도록 해주기 위하여 얼마나 마음을 쓰시였을까 하고 생각하니 어버이수령님의 깊고깊은 은혜에 어떻게 감사를 드렸으며 좋을지 몰랐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취해주신 조치로 군대에서 제대되어 건설대학(당시)을 졸업한 막내아들은 평양시를 훌륭하게 꽃피워 나가는 도시건설기사가 되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974년 11월 15일부 <통일신보>2면에 실렸던 <수령님의 품에서 새 생활의 길로>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아버지가 평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리종만선생의 딸이 해외에서 수십여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가 조국을 방문하여 아버지를 만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는 은정깊은 배려도 돌려주시었다.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 신임에 의하여 10여 년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단 성원으로 활동하던 리종만선생은 로환으로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80대에 이르러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리종만선생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보살피심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극진하기만 하였다. 어버이 그 사랑속에 고령의 나이인 88살에 그는 기적적으로 눈수술을 받고 앞을 다시 보게 되었으며영화도 감상하면서 말년을 행복하게 보내게 되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나이가 한해두해 지나면서 많아지자 일꾼들에게 리종만선생이 절대로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도록 동무들이 그 선생을 잘 돌봐주라고 신신당부하시었고 또 어느 해 봄에는 일꾼들로부터 그의 건강상태를 알아보시고 리종만선생이 잘 지내고 있다니 마음이 놓인다고 하시며 못내 기뻐하시도 하시었다.

어버이수령님의 이처럼 극진한 보살피심과 사랑속에 그는 잃어버린 것으로 치부하던 딸과도 상봉하게 되었으며 귀여운 손자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90살이 넘도록 행복속에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1977년 1월 인생말년을 행복하게 지내던 리종만선생이 92살에 로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보고를 받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못내 애석해 하시며 그의 장례를 잘해 주어야 하겠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에서 사업하고 있는 책임일꾼을 부르시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 일꾼을 자리에 앉히시고 리종만선생이 어제 사망하였다고, 그래서 동무를 오라고 하였다고 하시며 리종만선생은 참 좋은 분이었다고 교시하시었다. 그러시면서 그는 애국적 지조가 매우 높았다고, 해방전에 리종만선생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큰 기업가였으나 일본놈들과는 담을 쌓고 있었으며 민족적 량심과 지조를 지켜왔다고, 해방 직후에도 남조선에서 외세의 식민지예속화 정책과 민족분렬책동을 반대하는 투쟁에 헌신하겠다고 하시면서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지하자원개발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고 교시하시었다.

민족자본가였던 리종만선생을 잊지 못하시며 높이 평가해 주시는 그이를 우러르는 일꾼의 가슴에는 세찬 감동의 파도가 일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계속하여 이렇게 교시하시었다.

<리종만선생이 그렇게도 념원하던 조국통일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간 것이 가슴아픕니다. 리종만선생의 장례를 잘 해줍시다. 나는 가지 못하지만 내대신 동무가 가서 유가족들에게 나의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하여 주시오. 그리고 나의 명의로 된 화환도 보내고 신문과 방송에 부고도 내도록 합시다. 리종만선생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정무원에서 맡아 하도록 하고 모든 장례비용은 국가비용으로 합시다.> 그 일꾼으로부터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전달받은 유가족들은 끝없는 믿음과 영생하는 삶을 안겨주시는 그 고마움에 오열을 터뜨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었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은 한번 믿음을 주시고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이 세상 끝까지 믿어주시고 보살펴주시는 민족애와 인간의리의 최고 화신이시었다. 애국렬사들을 번영하는 민족자주의 락원우에 영생의 이름과 함께 높이 세워 주시려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대해같은 포옹력과 열화의 사랑, 그것이 그대로 드놀지 않는 고임돌이 되고 어떤 비바람에도 씻기지 않는 불변의 비석이 되고 비문이 되어 세워진 신미리의 애국렬사릉만 보아도 그것을 잘 알수 있다.

일찍이 망국의 그 세월 수난의 풍운속에 휘말려 곡절많은 생의 길을 걸어오면서도 애국적 량심을 저버리지 않았던 민족자본가 리종만선생도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속에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되어 있다. 1990년 8월 만수대의사당에서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높은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의하여 조국통일상을 제정하여 통일애국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리종만선생의 민족적 량심과 애국적 지조를 귀중히 여기시어 그를 한품에 안아 따뜻이 보살펴 주시고 조국통일의 한길에 값높이 내세워 주시었으며 그에게도 조국통일상을 수여하도록 해주시었다.

조국통일상에는 통일애국인사들을 잊지 않으시고 그들의 공로를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이 높이 평가해 주시며 그들의 위훈과 삶을 영원히 빛내어 주시려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 다심한 사랑이 깃들어 있다.

리종만선생이 세상을 떠난지도 어언 수십년 세월이 흘렀다.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가족들에게 끝없는 믿음과 사랑을 거듭거듭 베풀어 주시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977년 3월 해외에서 살고 있는 리종만선생의 딸이 조국을 방문하여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보도록 조치를 취해주시고 비행기표도 마련해 주도록 하시었을 뿐만아니라 이 기간에 공화국의 여러 곳에 대한 견학도 할 수 있도록 크나큰 은정과 배려를 돌려 주시었다. 그 은정에 보답하기 위해 카나다에서 살고 있던 리종만선생의 딸은 해외에서 통일애국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러다가 1995년 8월 팔순을 바라다보는 백발의 나이에 조국해방 50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또다시 조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행사를 성과적으로 마치고 동생과 함께 애국렬사릉에 있는 아버지묘소를 찾았다. 애국애족의 걸출한 위인들의 품에 안겨 만사람이 부럽도록 값높은 영생의 삶을 누리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의 자식들은 솟구치는 뜨거움으로 눈굽을 적시었다. 리종만선생의 딸은 조국방문을 끝내고 돌아가 애국렬사릉에서 동생과 함께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민족통일대축전 참가소식을 남조선에 살고 있는 오빠에게 편지로 전달하였다. 이 뜻깊은 소식을 받은 오빠는 너무 감개무량하여 북녘 가까이에 있는 곳까지 수백여리나 되는 길을 단숨에 달려와 평양하늘을 우러러 허리굽혀 인사를 드리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은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귀중히 여기며 통일성업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한 사람이라면 출신도 경력도 불문에 붙이시고 영생의 언덕우에 높이 세워 주시며 자녀들의 운명도 미래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 주시는 가장 넓으신 도량과 위대한 포옹력을 지니신 민족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다. (고영숙, “이종만,” 평양: 평양출판사, 『통일의 길에 이름을 남긴 애국인사들』 2020), 60-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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