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0, 2022

5] 신수식 주제: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에 대한 토론문

주제: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에 대한 토론문

신수식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



안녕하십니까?

남호 이종만 선생 기념사업회 추모포럼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드리며 포럼 토론자로 초청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남호(南湖) 이종만(李鍾萬,1885.1.14.­1977.1.17., 월성))선생은 발제문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엄혹한 일제 강점기에 광산왕, 기부왕, 자선사업가, 사회활동가,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민족자본가, 친일파 등 보는 관점에 따라 실로 다양하게 평가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물론 어떤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의 생애 전부를 대상으로 해야하며 어느 특정한 일부분만을 떼어내 그 부분만 초점을 맞춰 강조하거나 미화해서는 매우 일면적이고 편파적인 평가에 빠져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본 발제문은 대동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한 농촌이상향 건설, 민족교육운동, 그리고 민족자본가로서 이종만 선생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점은 이종만 선생이 말년에 선택한 월북행위와 이와 관련하여 이 행위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교유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종만 선생의 인생을 크게 세시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 첫째, 태어나 1932年 이전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시기, 즉 28전 29기의 시기, 
  • 둘째, 영평광산을 매각하면서 1937년 새롭게 대동광업(주)을 설립하고 그가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 대동사회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시기, 
  • 셋째, 1945년 이후 활동과 북으로 올라가 새로운 사회 건설과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시기 등입니다.

본문에서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에 기반한 자주적 실천 활동에 대한 조명은 연세대학교 방기중 교수의 연구, 즉 1937년 6월 창립되어 1943년경까지 합법적 공간에서 전개된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사상을 검토하면서 이 운동이 1920, 30년대 비타협적 민중적 성향의 사회교육운동이나 농민적 입장의 경제자립운동을 주도한 경험이 있는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일부 사회주의자가 결집하여 전개한 목적의식적 실천 활동이며 또한 해방 후 좌우합작과 통일 민주국가 건설을 지향한 사회민주주의 내지 수정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지향한 중간파 경제사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종만 선생의 일제강점기 여러 사업체인 대동광업(주), 대동광산중앙조합, 주식회사대동출판사, 대동농촌사, 대동공전 등은 ‘대동공동체’이며 그 이유는 이 사업체와 기관 가운데 이익을 창출하는 곳은 오직 대동광업(주)뿐이었고 이종만 선생이 언급한대로 돈을 벌기위해 대동광업(주)을 창설한 것이 아니라 광업에서의 공동체 건설과 자영광의 창설, 농촌에서의 자작농 실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학교 건립과 출판활동 등이 최종 목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발제자[1?]가 강조하고 있는 이종만 선생의 민족자본가로서 가졌던 대동사상과 그 실천을 위한 대동공동체 실현에 대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본 토론자는 역사적 사실을 통한 이종만 선생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대해 일부 동의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자본가 남호 이종만 선생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일생을 통한 평가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에 대해 보다 분명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첫째, 본 발제문에서 주요 자료 언급하고 있는 것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 친일잡지 삼천리,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 토론자는 이러한 자료들이 과연 객관적인 관점에서 민족자본가로서 이종만 선생에 대한 평가로 강조한다고 해서 의혹과 비판적인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2]

둘째, 민족자본가로서 평가하는 부분입니다.

민족자본은 민족경제, 즉 민족주의의 기초이자 민족적 생활을 위한 경제적 기초에 자신의 기반을 갖는 자본이다. 따라서 민족경제를 파괴하려는 제국주의 자본이나 그 대행자인 매판자본과 이해가 대립되는 자본으로 규정되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자본의 정치적 자세에 따라 민족자본, 예속자본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는 당시 일제 강점기에 강력하게 조선의 민족자본 생성, 성장을 방해하고 저지했습니다. 조선에 민족자본이 진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독자적인 경제영역(원료조달, 제품판매, 금융 등)을 확보하고 경제적 자유를 지향하는 경쟁적 산업자본이어야 하며 소규모 이하의 자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당시 큰 규모의 대동광업(주)가 과연 일제의 비호 없이 성장할 수 있었으며 민족자본으로서의 이러한 조건에 부합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셋째, 대동공동체와 내선일체

이종만 선생에 대한 평가는 크게 민족자본가의 긍정적인 측면과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측면으로 나뉩니다. 물론 인간의 세상사에서는 악과 선의 양분으로 분리해서 전적으로 어느 한쪽 편의 평가를 하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위해 내놓은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이자 일제 강점기의 표어인 내선일체와 연관성입니다. 즉, 이종만 선생이 일제 강점기 때에 친일행위를 여러 영역에서 했다는 사실에서 그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다. 다음은 이종만 선생의 친일행위 관련 주요 내용입니다.

1) 친일단체활동에 대한 기록들로 [4]
①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 위원이 된다. 조선총독부가 전시 총동원 체제를 위해 만든 단체다. 
②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임명됐다. 총독부가 친일(유림) 인사들을 동원해 만든 단체다. 
③1940년에는 '대화숙'(야마토주쿠)이라는 친일교화책에 가입했다. 대화숙은 내선일체를 강화하고, 사상 사건 관계자를 선도한다는 취지로 운영됐다. 
④1941년 9월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10월에는 이 단체의 이사가 됐다. 조선인을 수탈해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보탰다.

2) 친일언론활동에 대한 기록들로 [4]
①1939년 1월 1일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축전첩신년, 기무운장구' 시국 광고에 참여했다. '기무운장구'는 "무운이 오래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다. 일제의 승전을 축원하는 것이다. 
②1940년 7월에는 잡지 <삼천리>에 지원병 격려글-지원병과 혈한애의 인-을 기고했다. 조선인들에게 '천황을 위해 전장으로 나가 싸울 것'을 독려했다. "지금 대아시아의 신질서건설의 성업에 조선 청소년이 참가하는 것을 참으로 높게 평가한다. 이 거룩한 사업에 우리 조선 청소년이 진심으로 지원병을 희망하여 몸을 위에 바치는 모양에 감사를 금할 길이 없다. 조선 청소년 제군은 혈과 한과 애의 인이 되라."

3)창시개명, 月城鍾萬(츠키시로 쇼마)  [4]

4)일본군의 전쟁을 위해 헌금지원 [4]

①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군에 위문품 등을 보냈다. 
②1937년 7월 북지(황군) 위문품대로 1,000원을 기탁했다. 
③1938년 10월 정주경찰서에 황군위문금 1,000원 기부했다. 
④1939년 7월 위문대에 1,000원을 기부했다.

이에 대해 선생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담보적 개념이며 농업발전을 위한 출판운동, 청년교육운동 등에 훨씬 더 많은 돈을 지출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본 토론자는 자료를 분석하면서 이종만 선생께서 진정으로 대동사상의 대동공동체를 실천해 보겠다는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은 것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4]

넷째, 북한에서의 활동에 대한 평가의 문제입니다.

북한에서 이종만 선생의 활동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선생의 주요활동을 조국통일운동, 지하자원개발의 선구적 역할에서 대동사상과 그의 실천운동에 대한 온전한 연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북한 정권은 항일영웅, 광산기술자 필요성이 있었고 또 해방 이후 북한의 주요 인물들과 과거 교유관계가 강했다는 사실에서 북한에서의 입지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발제자의 보는 시각이 북한에서 인정받았기에 우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5a]
모든 것이 차별하에 있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과 새로운 침략, 전쟁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일제의 이상적 기업과 농촌이상향 건설을 방해하고 저지하는 상황에서 대동사람들과 함께 이종만 선생의 애국적이고 민족적 사고에 기인한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종만 사상을 유교, 기독교, 불교를 아우르는 이타적 삶에서 찾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주의자로서 북한 사회주의사회 건설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특히 이종만 선생은 1974년 수기에서 북한의 독재자며 신적 존재인 영도자 김일성을 극찬했다는 사실에서 민족주의자, 대동사상, 대동공동체 구성, 그 실천자로서 진정한 의미를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5b]

이러한 관점에서 본 토론자는 이종만 선생에 대한 연구는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정의될 수 있도록 보다 더 많은 시간과 자료를 바탕으로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6]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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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s comments:

[1] 어떤 논문?이달호

[2] 자료가 친일언론자료이다. - 당시에 "친일" 아닌 언론이 있을 수 있는가?

[3] 대기업은 민족자본이 아니다. - 그런 판단은 한 종류의 역사관이다. 

[4] 친일단체, 친일언론활동 - 상황이 대기업이 되면 그렇게 해야된다.

[5a] 북한의 이종만 평가 - 북한에서는 "친일"의 인식과 평가가 다른 것이 보인다. 소위 "반민족"이라고는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이다. 남에서도 충분히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다.

[5b] 김일성 찬양 - 그러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종합 커멘트:

- 한국 사회에서는 있을 수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시각을 대변하는 비판으로 볼 수 있다.
- [2][3][4]일제시대의 조선통치의 성격, 조선의 사회경제의 성격 문제, 그러니 역사관의 문제,로 가게된다. 
- [5a] 북한의 이종만 평가라는 것은 이종만이 월북하기 전에 이종만을 평가한 사람들의 평가와 다르지 않다. 특히 이종만을 북으로 부른 허헌은 민족문제연구소보다 이종만을 더 잘알고, 민족문제연구소의 평가보다 더 민족적으로 공정하다고 할 수 있다.  
- [5b] 본인이 이렇게 쓴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모든 것이 그렇게 (고처) 쓰여진다. 일제 시대에는 조선에서 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대기업이나, 사회의 중요인물은 정부의 통제에 따라야 된다. 한국의 독제 시대에서도 비슷하나, 일제 시댜나 북한에서 보다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을 자유가 더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의 부정적인 평가를 따른다면 이종만에 대한 이런 포럼이 있을 수도 없다.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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