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일 박사(한반도중립화통일협의회)
I. 머리말
필자는 ‘한반도 평화가 없으면 동북아 평화도 없고, 동북아 평화가 없으면 세계평화는 더욱 없다.’는 명제와 인식을 가지고 출발한다. 이 말은 한반도의 평화는 세계평화에 직결될 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의 출발점이 된다는 의미이다.
남호(南湖) 이종만(李鍾萬) 선생은 1975년 9월 24일 평양을 방문한 그의 딸 이남순(캐나다 교포)과 대담 중 “남북은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달성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분단을 극복하고 대동단결하여 다시 하나 되어 세계의 평화를 선도하는 길은 남북이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이루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이남순, 2010: 100-103).
이 말은 이종만 선생이 1977년 1월 17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타계함으로써 결국 딸에게 주는 유언이 되었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1977년 1월 18일자 기사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명의로 “리종만 선생의 서거에 대한 부고” 기사를 게재했다.
필자는 한반도의 영구평화 달성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이종만 선생이 47년 전 ”영세중립 평화통일“이란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충격으로 느껴졌다. 당시 남북의 정치적 상황은 그러한 표현을 감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한의 박정희 정부는 1961년 5월 집권한 후 한국의 중립화 통일운동가를 사형시키거나 구속했다. 북조선(이하 북한)의 김일성도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남로당 출신 박헌영을 비롯해 월북한 인사들과 김무정을 비롯한 중국에서 귀국한 연안파를 숙청하는데 ”중립화“를 구실로 이용했다. 남북한 지도자도 1972년 7월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후 그들의 절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했다.
당시 남과 북의 국내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남호 선생이 1975년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요구한 것은 얼마나 선구자의 사상과 혜안을 가졌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한 말은 부녀간의 대화로 아버지가 딸에게 주는 유언적인 말로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남호 선생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의 사상을 이어받아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당면한 과제이며, 이종만 선생의 유지를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연구목적은 이종만 선생의 “영세중립 평화통일” 사상과 배경을 연구하고, 재구성함으로써 남호 선생의 유언인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데 초점을 둔다. 이를 위해 한반도중립화통일협의회가 2010년 10월 21일 선포한 한반도 영세중립 평화통일 실천 5단계를 분석의 틀로 하여 접근방법을 모색한다.
남호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영세중립 평화통일”의 관련용어에 대한 개념을 먼저 알아보자. 영세중립과 관련을 가지고 있는 용어들은 중립, 중립화, 비동맹 중립 등의 개념을 살펴본 후 평화통일에 관한 용어도 검토해 본다. 영세중립은 “중립”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중립의 전통적 의미는 A국가와 B국가가 전쟁을 할 경우 제3국은 전쟁 당사국의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무력을 지원하지도 않으며, 편의를 제공하지 않고 엄정한 중립을 유지하는 한 국가의 외교정책이다. 그 중립은 전쟁의 종료와 함께 효력이 상실되고, 중립의 국제적 지위도 종료된다.
중립은 통상중립(customary neutrality), 영세중립(permanent neutrality), 그리고 비동맹 중립(non-alignment neutrality)으로 구분된다. 통상중립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전쟁 당사국이 아닌 제3국의 외교정책이다. 영세중립은 중립의 국제적 지위가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영구적으로 유지하는 한 국가의 외교정책이다(Cyril Black et al, 1968: xi: 강종일, 2014: 20-21).
영세중립의 정의는 그 국가의 정치적 자주독립과 영토적 통합을 주변의 국가들과 협정을 통해 영구적으로 보장받는 제도적 장치이다. 영세중립국은 타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지 않을 권리를 갖지만, 타국을 침략할 수 없다는 국제적 의무도 지게 된다. 영세중립과 중립화는 일반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다만 영세중립은 국가에 한해 사용되지만 중립화는 국가를 포함해 국제수로, 국제하천, 국제분쟁 지역, 북극이나 남극과 같은 무주물에 사용된다(Cyril Black et al, 1968: xi).
비동맹 중립은 어느 특정한 국가와 동맹을 체결하지 않으면서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정책을 계속 유지하면서 국가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제3세계의 블록을 형성한 국가들의 외교정책이다. 제3세계는 1947년 8월 15일 독립한 인도의 네루 수상이 주장하는 비동맹 중립의 외교정책을 표방한 비동맹 중립 국가들의 평화원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제2장 참조).
다음은 “평화통일” 용어의 개념을 알아보자. 평화통일의 단어에는 2개 이상의 통일의 주체가 존재한다. 여기서 말한 평화통일의 대상은 분단된 남과 북이 평화통일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남과 북이 동일한 조건하에서 통일을 달성하는 것을 평화통일의 최고 가치로 한다. 그러므로 분단된 남북의 평화통일은 남북이 무력통일이나, 붕괴통일, 또는 강압통일을 배제하고, 같은 조건, 같은 국가이익, 같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두 주체가 평화적 방법으로 분단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것을 평화통일이라 정의할 수 있다.
미국은 일본 분할 대신 한반도를 분할했다.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은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선언 제7항에서 일본 본토를 네 지역으로 분할통치하기로 합의했으나 처칠 수상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련이 극동지역에서 교두보를 설치하려고 한다.”는 통보에 따라, 미국은 일본의 분할통치를 취소하고, 1945년 8월 13일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했다.
이 글의 구성은 제1장에서 연구목적, 연구방법, 영세중립 관련 용어와 평화통일 개념을 해석하며, 제2장에서는 북한의 중립정책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검토하고 설명하며, 제3장에서는 이종만 선생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의 사상적 동기와 배경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재구성하며, 제4장은 우리가 남호 선생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의 유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대안을 모색하며, 제5장은 결론으로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 달성을 위해 남북정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제언한다.
II. 북한 중립정책의 역사적 배경과 발전
이 장은 북한 중립정책의 역사적 배경과 발전과정을 연구함으로써 북한의 국내 정치적 상황에서 왜 중립화가 대두 되었는가를 개관하고 분석하며, 북한의 중립정책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본다. 북한에서 중립화 용어가 최초로 거론된 시기는 남한에서 납북된 인사들과 월북한 인사들, 그리고 북한의 사회단체 인원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이하 평화통일촉진회)가 최초로 ‘중립화’ 용어를 사용했다.
북한에서 중립화 용어가 최초로 대두된 시기는 1956년 7월 2일 모란봉 극장에서 개최된 재북평화통일촉진회(대표: 조소앙)가 채택한 7개항의 결의문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김일성은 1957년부터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 출신을 숙청하는데 중립화 구실을 악용했으며, 김무정과 김두봉, 최창익 등 연안파를 숙청하는 데 종파분자를 구실로 했다. 중립화에 대한 북한의 이러한 숙청사건으로 이종만 선생은 “중립화”나 “영세중립”의 용어를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오로지 마음속으로 가질 수는 있었겠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 장에서는 김일성이 그의 정적을 숙청하는 데 어떠한 구실을 주었는지를 살펴본 후, 북한의 중립정책이 어떻게 발전하였는가를 살펴본다.
1. 북한 중립정책의 역사적 배경
북한의 중립정책은 반둥회의가 채택한 “비동맹 중립” 정책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전술한 바와 같이 북한에서 최초로 제기된 ‘중립화’ 용어는 재북평화통일촉진회가 1956년 7월 2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개최한 시국선언에서 7개 행동강령 중⑤항과 ➆항에서 중립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⑤항은 “남북협상에서 통일헌법의 초안을 토의·합의하고 전 조선적 직접, 비밀, 평등에 입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입법기관을 설치하고, 통일헌법을 채택하며, 합법적 통일정부를 구성하여 국제적 ‘중립화’를 선언하도록 할 것"이며, ⑦항은 “남북이 통일된 후, 중립국으로서 국제적 자유를 확보하고,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도 아닌 모든 인민의 균등에 기초한 진보적 민주주의와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정강을 발표 했다(이태호 1991: 374-376).
김일성은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반둥회의 1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조선에서의 사회주의 건설과 남조선 혁명에 대하여”를 주제로 연설을 했다. 이때 김정일도 길일성을 수행해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중앙일보, 1972. 08. 25.).
2. 김일성의 비동맹 중립 연방제론
김일성은 1960년 8월 14일 ‘과도적 조치로서의 남북연방제’ 통일방안을 발표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 실시, 남북의 현 정치제도 유지, 남북대표로 구성된 민족최고위원회 구성, 주한미군철수와 남북군대의 10만 명 감축 등을 제안했다(노중선 1996: 75). 그는 또한 1966년 11월과 1967년 1월 2회에 걸쳐 재미 중립화 통일운동가 김용중에게 보낸 답신 편지에서 “남북통일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북한은 서울에 대표를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용중은 1968년 12월 18일부터 수차에 걸쳐 김일성 주석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남북정상들이 만나서 통일문제를 협의하고, 주한미군철수 문제와 베트남파병을 철회할 것 등을 요구했다(정병준 2004: 51). 박정희 정부는 김용중을 친북 공산주의자로 단정하고, 김용중의 어떠한 제안에도 공식대응을 자제했다(정병준 2004: 49).
김일성은 1967년 미국에서 조선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한호석 소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조선에서 자주적인 정권이 서거나 혹은 남조선이 중립화라도 된다면 우리인민의 손으로 나라의 통일을 이룩하는데 사실상 큰 난관은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조선로동당출판사 1983: 김일성 전집 제21권),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연방제 통일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했다. 그의 제1차 연방제 제안은 높은 단계의 연방제로 한국에 제안했으며, 제2차 제안은 1987년 12월 9일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통해 미국에 제안했으며, 제3차 제안은 1991년 1월 1일 낮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을 한국에 제안했다.
김일성이 제안한 높은 단계의 연방제 방안은 남과 북이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위에서 남과 북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내오고, 그 밑에 남과 북이 같은 권한과 의무를 지니고 각각 지역자치를 실시하는 연방공화국 창립방안으로 외교권과 국방권이 민족통일정부에 있게 되는 것이다. 김일성은 또한 그의 전집에서 중립통일을 하자고 27회 주장했으며, 중립화 통일에 대해서는 3회 언급했다(조선로동당출판사 1983: 김일성 전집 21권).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발표했는데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의 외교정책은 비동맹중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북한의 연방제 중립방안을 정식으로 제안하고, 전제조건으로 남북이 어떠한 정치와 군사적 동맹이나 블록에도 가담하지 말고, 중립 국가를 지향해야 하며,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지고 있는 북과 남은 두 지역을 통할하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창설하되 중립국이 되는 것은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으로 남한의 군사통치 청산, 주한미군철수,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 전환 등을 요구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안’은 1민족 1국가 2지방자치제로 외교권과 군사권을 중앙정부가 갖는 제도이다(노중선 1996: 216-218). 김일성은 1987년 12월 9일 소련 공산당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통해 미국 레이건 대통령에게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정식 제안했다.
김일성은 1990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강영훈 총리와의 대담에서 “남북은 중립화 통일을 해야 합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가 설득할 터이니 남조선은 미국과 일본을 설득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당시 통역으로 동행한 김동현이 2016년 5월 13일 필자에게 증언). 김일성은 1991년 1월 1일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한국에 제안했다. 김일성은 또한 1993년 4월 7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 연설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전 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발표하면서 “전 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중립적인 통일국가를 창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노중선 1996: 518).
김일성은 1994년 조국통일의 방법을 위한 “조국통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애국이다” 주제의 발표문에서 “우리는 이렇게 북과 남에 있는 서로 다른 제도를 다치지 말고 하나의 련방국가를 창설 하자는 것입니다. 련방국가는 물론 자주적인 중립국으로 되여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조선로동당 1996: 김일성전집 제44권 401쪽).
3. 김정일의 스위스식 무장중립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에서 높은 단계의 연방제를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으로 변경했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군사권과 외교권이 민족중앙정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의 정부에 있는 연방제로 국가연합 단계로 EU국가들의 국가연합과 같은 제도이다. 김대중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15공동선언 제2항에서 “남쪽의 연합제와 북쪽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다.”고 확인했다. 따라서 남과 북은 향후 통일문제를 접근함에 있어 6·15공동선언을 참고로 할 것으로 전망된다(강종일, 2017: 125).
김정일은 통일된 코리아가 스위스와 같은 무장중립 외교정책의 필요성에 대해, 첫째, 한반도에서 냉전체제를 종식하고, 둘째, 한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전통을 가진 국민들이며, 셋째, 한민족은 19세기 말부터 100년 이상 계속된 일본과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전쟁의 공포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이며, 넷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립외교를 필요로 하고 있으며, 끝으로, 남북은 충분한 국방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한반도의 스위스 식 무장중립론을 주장했다(Myong Chol Kim,` 2001: 103-113).
북한은 연방제 통일방안을 발표할 때마다 연방제의 외교정책은 “비동맹 중립”을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비동맹 중립을 주장하고 있다.
III. 이종만 선생의 영세중립 평화통일 사상과 배경
일제 식민시대 일본의 농촌수탈 정책에 맞서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하고, 농촌재건과 농민계몽을 위해 다양한 구제사업에 최선을 다 해온 이종만 선생은 광복과 함께 한반도가 분단됨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한반도가 분단됨에 따라 그가 소유한 광산, 농지, 학교, 사업의 근거지가 북조선에 있었고, 한국에는 미군이 진주해 군정을 실시함으로써 이종만 선생이 지금까지 구상해온 농촌의 구제 사업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남호 선생은 할 수 없이 북한으로 월북을 택하게 된 동기가 된 것 같다. 이 장은 이종만 선생이 왜 월북을 하게 되었으며, 그의 막내 딸 이남순에게 유언이 된 “영세중립 평화통일” 사상은 누구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어떠한 배경과 경로를 통해 남호 선생에게 주입되었는가를 규명해 보는데 초점을 둔다.
1. 이종만 선생의 월북한 동기와 이유
이종만 선생이 언제, 어떻게, 왜 월북을 하게 되었는지 정확한 동기와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당시 남북한의 국내 정치적 상황과 남호 선생의 개인적 사정 등을 참작해 추론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며, 가능한 범위에서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남호 선생이 월북한 동기와 이유는 남한에서의 이유와 북한에서의 이유를 구분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남한에서 찾을 수 있는 국내사정과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이종만 선생은 1946년 5월 일제 적산이었던 삼척탄광을 불하받아 자율운영을 하고 있었으나 존 리드 하지(John Reeds Hodge) 군정장관이 이종만 선생의 삼척탄광 사장직을 박탈하고, 하경용 사장을 임명했다. 그 결과 삼척탄광 노조원들은 자율운영과 이종만 선생의 사장직 유임, 새로운 사장 임명을 반대하는 파업을 하게 되었다.
둘째, 이종만 선생은 당시 그의 이름으로 서울에 집 두 채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 채는 작은 부인이 살고 있었고 나머지 한 채는 남호 선생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원들은 한 사람이 집 두 채를 가지고 있으면 몰수 대상이므로 집 한 채를 내 놓으라고 강요했다. 할 수 없이 이종만 선생은 살고 있는 집을 내 놓게 되었다. 그 결과 이종만 선생은 사실상 서울에서 거처할 집이 없어지게 되었다.
셋째,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남한은 한국정부가 자치적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였고, 과거 일본정부에 협력한 중간 간부들이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 결과 한국인들이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운영하지 못하고, 일본에 부역한 한국인들이 중간 간부로 재 등용됨에 따라 사업가로서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하였고, 전망도 없어 보였기 때문에 북한행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예가 삼척 탄광의 노동자들의 파업이유가 그러한 종류의 사건이었다.
끝으로, 남호 선생은 여운형 선생의 암살 사건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이종만 선생은 평소 몽양 선생이 조선 중앙일보 사장으로 재직할 때인 1933년대부터 일본 아다미 온천으로 함께 여행을 할 정도로 친했다. 그런데 몽양 선생이 1947년 7월 19일 성북동에 머물고 있는 귀암 김용중 선생을 마나고 귀가 하던 중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된 사건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다음은 남호 선생이 월북하게 된 동기로 북한의 사정을 알아보자. 첫째, 이종만 선생이 해방 전까지 소유했던 대부분의 재산이 북한에 산재해 있었다. 예를 들면, 일제 식민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 위기에 처해 있던 평양 숭실학교를 1937년 ·10월 120만원에 매입했으며, 한해 140만원 상당의 채금을 할 수 있는 장진금광이 함경남도에 있었고, 함경북도에는 그에게 노다지를 선사해 준 영평금광이 있었으며, 1944년 재인수한 평양대동공업전문학교 등이 북한에 있었다.
둘째, 그는 일제 식민 시절부터 광산 업무에 종사했기 때문에 그가 소유한 광산들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사가 발동한 것이다. 즉, 북한에 산재한 그의 부동산들의 관리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 이종만 선생의 또 다른 월북 이유는 1948년 4월 22일 김구 일행과 함께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함께 참석했던 전 대동광업주식회사 상임 감사로 활동한 허헌에게 재 월북을 약속한 가능성인 것이다.
그러면 이종만 선생은 북한에 어떻게 재 월북을 했을까? 이종만 선생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한으로 갔으며, 그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종만 선생은 1948년 가을 다시 북으로 때는 도보로 간 것 같다. 1949년 6월 25일 오후 3시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개최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서 김일성 주석은 “남조선에서 들어온 대표들 가운데 리종만 선생이 있으면 주석단으로 올라오십시오. 남조선 산업계에서 명망이 있는 이종만 선생을 오늘 이렇게 만나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선생이 연로한 몸으로 38선을 넘어 먼 길을 오시느라고 수고 하였습니다. 나는 선생이 남조선의 산업건설협의회의 대표로 평양에 와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한데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선생이 이번에 미제와 리승만 괴뢰도당의 온갖 방해 책동을 물리치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은 훌륭한 애국적 거사입니다”라고 북한은 말하고 있다(리형우, 2001: 9-10쪽). 김일성이 이종만 선생을 이렇게 소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남호 선생이 1948년 가을 북으로 갈 때는 38선을 넘어 도보로 간 것으로 추론된다.
이종만 선생이 북한으로 다시 가기 직전인 1948년 가을 북아현동에 거주한 막내 딸 이남순 여사의 집에 들려, “들어오시라”고 해도 들어오지 않고, 말하기를 “이제 나는 먼 길을 떠난다.”고 말을 했다(박종인, 『조선일보』 2021. 11. 03). 이종만 선생은 1975년 9월 24일 평양에서 27년 만에 부녀상봉을 했다.
2. 이종만 선생의 영세중립 평화통일 사상과 배경
이종만 선생의 영세중립 평화통일 사상이 언제부터 어떻게 그에게 전파되었고, 주입되었는지 알아보자.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종만 선생 주위의 인물 중 누가 영세중립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전제를 했을 때 이종만 선생의 주위 인물 중 영세중립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추론 할 수 있는 사람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나 또는 조소앙 선생을 생각할 수 있다.
이종만 선생이 1936년 영평광산에서 노다지 금맥을 발견하고 거부가 되었을 때 여운형 선생은 1933년 3월 7일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했다. 여운형 사장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 일장기 말살사건을 보도함으로써 조선중앙일보는 1937년 11월 5일 폐간 되었다. 이종만 선생은 조선 중앙일보가 소유하고 있던 서울 종로구 견지동 111번지에 신축한 2층 벽돌집 건물을 대동광업주식회사 사옥으로 매입했으며, 여운형과 함께 일본 아다미 온천에 여행도 했다.
다만 여운형 선생은 1945년 8월 이후 한국의 해방 공간에서 건국준비위원장으로서 좌우합작을 위한 중도주의 정책을 추진하던 중 1947년 7월 19일 암살되었다. 이종만 선생은 1948년 가을 북한으로 월북을 함으로써 두 사람이 영세중립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이종만선생의 영세중립 사상은 조소앙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운형 선생은 한국의 해방정국에서 영세중립 보다는 중도주의를 주장하면서 좌우합작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 이종만 선생과 조소앙 선생의 관계를 알아보자. 북한은 1949년 4월 19-24일간 평양 대동강 쑥섬에서 남북사회단체연석회의를 개최했다. 북한이 남북사회단체연석회의를 개최한 목적은 한국이 1948년 5월 10일 실시 예정인 국회의원 선거를 중지시키거나 연기를 위해 김구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북한을 방문한 것이다(박한식, 2021: 56). 이종만 선생은 김구 일행과 같이 방북했으며, 4월 30일 남북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한 후 김구 일행과 함께 서울로 돌아 왔다.
한편 조소앙 선생은 6·25 한국전쟁 중 북으로 납북되었다. 남호 선생과 조소앙 선생은 1951년부터 북한에서 통일문제를 협의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셈이다. 두 사람이 영세중립에 관해 협의할 수 있는 기간은 7년 정도였다. 이 기간 중 조소앙 선생은 북한에서 중립화 통일방안을 연구하였고, 북한당국과 자주 협의했으나 중립화 안이 수용되지 않았다. 조소앙 선생은 기회만 있으면 평양에서 중립화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조소앙 선생은 1958년 북한이 엄항섭 선생을 체포하자 이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하던 중 질병을 얻어 9월 10일 사망했다. 조소앙은 유언에서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쳤다고 후세에 전해다오. 삼균주의 계승자도 보지 못하고 갈 것 같아 못내 아쉽구나. 삼균주의 이념과 사상을 후세에 전해 줄 것을 바라오”라고 유언했다(김삼웅, 『조소앙 평전』 2014).
그 무렵 이종만 선생은 1951년 1월 20일 북한의 파괴된 공장들을 복구하기 위해 지배인이 되었으며(『로동신문』, 1951. 01. 21.), 1954년에는 북한의 자원개발을 지원하는 광업부 고문으로 활동했다. 남호 선생은 1955년 10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에 취임함으로써 두 사람은 영세중립 평화통일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사항은 이종만 선생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으로 재직한 기간 중 납북된 인사들과 북한사회단체 활동가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회(대표: 조소앙)’가 1956년 7월 2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개최된 시국선언 대회에서 채택된 선언문의 행동강령 7개항 중 ⑤항과 ➆항에서 중립화의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
‘재북평화통일촉진회’가 결의한 내용은 ⑤항에서 “남북협상에서 통일헌법의 초안을 토의·합의하고 전 조선적 직접, 비밀, 평등에 입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입법기관을 설치하며, 통일헌법을 채택하고, 합법적 통일정부를 구성하여 국제적 중립화를 선언하도록 할 것"이며, ⑦항에서 “남북이 통일된 후, 중립국으로서 국제적 자유를 확보하고,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도 아닌 모든 인민의 균등에 기초한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정강을 발표 했다(이태호 1991: 374-376).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갖게 한 것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도 아닌 모든 인민의 균등”을 강조한 것으로 조소앙 선생의 주장인 삼균주의에서 강조하고 있는 “인민의 균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재북평화통일촉진회의 결의문에 포함된 단어인 “국제적 중립화” 용어는 김일성이 1956년 말경부터 1959년까지 박헌영을 비롯한 월북한 남조선 공산당 출신 30여명을 숙청하는 구실이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종만 선생이 민주주의통일전선의 의장으로 재직한 시기에 모란봉 극장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종만 선생은 “중립화”의 단어를 쓰지 않고, ‘영세중립’의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 후북한은 “영세중립” 단어가 아니라 언제나 “중립” 또는 “중립화”를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면 김일성이 중립화를 구실로 남한 인사들을 숙청한 내용을 살펴보자. 김일성은 195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30여명의 남한출신 조선남로당 인사들을 숙청하는데 “중립화” 단어를 구실로 삼았다. 김일성은 “이들이 적들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하면서 제국주의나 수정주의자들과 손잡고 통일에 대한 대가로 한국의 중립화를 받아드리려 계획한 다수의 반혁명 종파분자들”이라고 숙청 이유를 발표했다(김삼웅, 2019: 32쪽).
이종만 선생이 주장한 “영세중립”의 단어는 여운형 선생이나 또는 조소앙 선생 중 누구와도 논의한 증거는 없다. 이종만 선생은 북한에서 많이 쓴 “중립화” 단어를 쓰지 않고, 북한에서 사용되지 않은 “영세중립”이란 단어를 쓴 것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영세중립의 용어는 이종만 선생이 독자적으로 터득한 단어인 것으로 분석된다. 또 하나의 가정은 이종만 선생이 고향에서 19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는 광정에서 근세조선 시대 고종황제가 1891년부터 6월부터 1904년까지 주장한 “조선의 영세중립 정책”을 알게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고종황제는 조선의 영세중립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미국의 26대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협조와 일본의 방해로 인해 실현하지 못하고, 1904년 1월 20일 “조선은 영세중립국이다”라고 발표했다(강종일, 2017: 14쪽). 그러므로 이종만 선생의 영세중립에 대한 인식의 배경은 더 연구돼야 할 과제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과거 고종황제 시대에는 ‘중립화’ 용어는 전연 사용되지 않았고, ‘영세중립’의 용어만이 사용되었으며, 북한에서는 영세중립 단어는 전연 사용하지 않고, 중립이나 또는 중립화의 용어만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종만 선생의 ‘영세중립’에 대한 사상이나 지식은 과거 고종의 영세중립 정책에서 인지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하다. 남호 선생은 또한 북한에서 조소앙과 한반도의 ‘중립’이나 또는 ‘중립화’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하거나 토론을 할 수는 있었으나 딸에게는 의식적으로 스위스의 “영세중립”의 용어를 상용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김일성이 월북한 남로당원을 숙청할 때 “중립화”를 구실로 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영세중립”의 단어를 사용했다고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은 이종만 선생이 강조한 “평화통일” 사상에 대해 알아보자. 이종만 선생의 평화통일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그가 경험한 전쟁의 참상과 6·25 전쟁으로 인한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평양을 보았으며, 국제전쟁과 남북전쟁의 참화는 그로 하여금 분단된 남북이 평화통일을 반듯이 해야 한다는 평화사상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종만 선생이 월북하기 전 경험한 이승만의 북진통일 정책이나 한국 보수층의 북한 붕괴통일이나 또는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 정책 등을 경험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나 무력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주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당시 남북한의 그러한 국내 정치적 상황으로 남호 선생은 1975년 9월 해어 진지 27년 만에 상봉한 딸 이남순에게 비밀리에 남북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유언의 형식으로 전함으로써 영세중립 평화통일에 대한 사상적 선구자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남호 선생의 평화통일 사상은 그가 한학을 많이 공부했기 때문에 알 수 있게 된 ‘대동사상’에서 유래된 공정한 사회의 신념을 넘어서 노동과 자본의 조화로운 협조 속에서 공존공영의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대동사상의 핵심에서 평화통일의 사상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종만 선생은 대동교학회 취지문에서 남북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에 대해 “조선의 동포여, 세계의 동포여, 자손만대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하여, 인류의 명예를 위해 크게 새로워지는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위해 떨치고 일어나지 아니하려는가. 생존경쟁의 국제생활의 옛 습관을 깨뜨리고 서로 사랑하고 돕는 신세계 질서를 건설하지 아니하려는가. 이기적이고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 남을 사랑하고 도덕이 빛나는 천국을 건설하지 아니하려는가. 하늘이 진실로 바라는 바가 바로 영세중립 평화통일의 사상이고 배경임”을 우리는 추정해야 할 것이다(이남순, 2010: 404).
IV.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 접근방안 모색
이종만 선생이 우리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한반도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 것인가? 이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접근하고 실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은 분단 된지 76년이 경과 했으나 아직도 분단은 계속되고 있다. 남북은 대립과 갈등을 더 깊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위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남북이 직면하고 있는 갈등과 대립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한다.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그들의 국가이익을 위해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방해할지라도 우리는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할 운명이다. 남북이 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남북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도 시인해야 한다. 이제 남북이 ‘남북문제는 남북이 해결한다.’는 대 원칙을 가지고 주변의 국가들의 방해를 극복하면서 남북의 경제협력을 더 강화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신뢰프로세스를 바탕으로 한 보통국가의 관계를 먼저 구축돼야 할 것이다. 남북 간의 신뢰가 회복되지 않으면 평화통일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남북은 통일의 대상이자 주체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 들이 무엇인가를 먼저 정확하게 진단한 후,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현재 남북의 평화통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남북한 통일정책의 대립, 북한의 핵문제, 북한과 미국의 대립, 매년 실시되고 있는 한·미연합훈련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저해하고 있는 요인들
(1)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문제점
한반도가 평화통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이다. 미국은 국가이익을 위해 북한이 핵을 보유하기를 원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다(박한식 명예교수). 박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은 북한이 핵을 보유함으로써 3가지 국가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북한이 핵을 보유함으로써,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통제하기가 용이하며, 둘째, 미국이 주한 미군을 주둔 시킬 수 있는 확고한 명분을 가질 수 있으며, 셋째 한국과 일본에 많은 무기를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또한 남북관계가 평화적 관계로 발전하려고 하면 이를 방해 한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는 1992년 남북관계가 최고조로 발전하였고, 한반도의 분단역사 중 최고의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딕 체니 당시 국방장관은 1992년 11월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연례안보회의(SCM)에서 “1993년부터 한미연합훈련을 재개하자”고 제안했고, 한국이 이를 수용했다. 1993년부터 한미연합훈련이 재개되자 북한은 반발로 핵개발을 선언했고,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탈퇴했다고 그레그는 주장한다(도널드 그레그, 2015: 357-358).
미국의 이러한 한반도 정책으로 한반도의 분단이 76년이 경과되었으나 남북의 평화적 관계는 진전되지 않고, 대립과 갈등을 계속하고 있다. 남과 북은 이제부터 한반도 문제를 미국이나 중국에 의지하지 말고, ‘한반도 문제는 남북이 해결한다.’는 대 원칙과 각오를 가지고 남북관계의 평화적 발전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첫째 조건은 남북관계가 평화적 호혜관계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은 제일 중요한 조건이고, 필수적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남북은 하루 속히 남북기본합의서 제14조에 근거해서 남북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평양과 서울에 대표부를 개설하고, 경제협력도 강화해야 할 것이다.
(2) 남북통일정책의 공통점과 문제점
남북의 통일정책은 1991년부터 공통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이 이를 외면하고 있다. 남북정상은 2000년 6월 15일 “남북의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다”고 확인했으나 남북통일문제는 아직도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통일정책은 1989년 9월 11일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남북이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에 따라 3단계 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주장하는 통일의 제1단계는 화해협력단계, 제2단계는 남북연합단계, 제3단계는 통일국가를 완성하는 3단계 통일방안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제6차 당 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발표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중앙정부가 국방과 외교권을 가진다. 그러나 김일성은 1991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의 수정안은 지방정부가 외교권과 국방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남북의 통일 방안은 사실상 EU와 같은 국가연합체가 된 것이다(노중선, 1996, 452). 그 결과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발표한 ‘6·15남북공동선언’ 제2항에서 “남한의 연합제 통일방안과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에 공통점이 있다”고 확인했다.
(3) 한·미연합훈련의 문제점
한·미연합훈련이 최초로 실시된 것은 1954년부터 유엔사 주관으로 실시된 "포커스렌즈" 군사연습과 정부차원의 "을지연습"이었다. 그것이 정부와 군사 분야의 종합지휘소 연습으로 발전되었으며, 1994년 이후부터 매년 8월말에서 9월초 연례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최근에는 후방지역경계 및 안정화작전, 연합전시증원(RSO), 특수작전, 지상기동, 상륙기동작전, 전투항공작전 등 연합사 임무의 모든 국면을 포함한 야외기동훈련을 확대해서 실시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에 한미군사훈련 중지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으나 미국은 응하지 않고 있다. 키리졸브연습(KR)과 독수리훈련(FE)은 훈련의 질적 성과를 제고하기 위해 2002년부터 상호 통합하여 실시하고 있다. 지휘소연습(CPX)과 야외기동훈련(FTX)은 병행해 한·미연합전구급 연습으로 발전시켰다. 한미연합훈련 후에는 미국의 항공모함 등이 서해로 진입함으로써 북한과 중국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에 북한의 체제를 보장하고, 한미연합훈련의 중단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오로지 CVID에 입각한 비핵화를 요구하면서 북한이 사실상 이행할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 북한이 모든 핵 시설의 가동을 중지하고, 핵 생산 시설을 완전하게 파기하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당장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것은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만들 수 있는 구실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4) 북한의 핵개발 배경과 미국의 요구사항
김일성은 일본이 핵폭탄 2개로 항복하는 것을 보고 핵의 위력에 놀라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전부터 핵개발을 구상했다. 김일성은 1946년 5월 서울대학교 이공학부 이승기 학부장과 연세대학교 한인석 교수에게 김일성의 친필초청장을 보냄으로써 그들이 월북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1946년 10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을 설립하고 도상록 교수를 물리수학부 초대 학부장으로 임명했다. 특히 도상록은 1952년부터 1990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 과학원 원사로 북한 원자력의 아버지로 인식되고 있다(박종수, 2011, p. 242).
그 후 북한은 국내 핵 과학자를 소련 등지에 유학시켰다. 대표적 유학파는 정근, 최학근, 서상국 등이다. 정근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 2회 졸업생으로 소련에서 원자물리학을 연구했다. 최학근은 김일성대학 재직 중 1949년 모스크바대학과 두브나 핵연구소에서 연구했다. 그는 원자력연구소 제2대 소장과 원자력 공업상을 역임했다. 서상국은 1966년 소련에서 28세로 핵관련 박사학위를 받은 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과장을 역임했다. 그는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을 주도한 인물이다. 북한은 1953년 6·25전쟁 휴전 직후, 핵무기 방위부대를 신설하였고, 1955년 핵물리연구소도 창설했다(박종수, 1996, p. 243).
김정은 총비서는 2022년 1월 19일 제8기 제6차 정치국 회의에서 “선결적으로, 주동적으로 취하였든 신뢰구축 조치들을 전면 재고하고, 잠정 중지했던 모든 활동들을 재가동하는 문제를 신속히 검토해 볼 데 대한 지시를 해당 부서에 포치(하달) 하였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월 20일 보도했다. 이는 북한이 2018년 4월 21일부터 중단했던 핵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모라토리엄(유예) 선언을 3년 9개월여 만에 철회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북한은 특별한 조치가 없으면 2017년 11월 상태로 회귀할 것으로 보여 한반도가 또다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되고 우려된다.
미국은 유엔과 함께 북한에 강력한 경제제재를 하면서 북한의 당장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경제적 제재와 관련하여 아무런 해제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북한에 단계별 제재를 해제하는 데 아무런 조치도 제시하지 않고 북한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만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은 비핵화 의지를 가지고 있으나 북한에 대한 미국의 경제제재를 일부라도 해제하지 않고 있다. 만약 미국이 한미군사훈련을 중지하면 북한도 점진적 비핵화를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즉 북한이 미국과 북한 간에 단계별 비핵화를 하자고 하는데 미국은 반응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를 한 후, 북한이 요구하는 경제제재를 완화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북미핵협상은 진척되지 않고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실험을 계속하게 만들고 있다.
2. 남북의 평화통일 접근방안
한반도중립화통일협의회는 한국과 미국에 있는 중립화 통일 단체들과 협의를 한 후, 한반도 중립화통일 5단계 방안에 대한 헌장을 2010년 10월 21일 서울과 미국에서 선포했다. 이는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통일을 위한 헌장인 것이다. 첫 단계는 남북이 경제적 협력을 통해 남북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며, 남북관계가 정상적인 국가관계로 발전한다. 둘째 단계는 남과 북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남북의 중립화를 위해 공동합의문을 채택한다. 셋째 단계는 남과 북, 그리고 4강간 남북의 중립화를 위한 국제조약을 체결한다. 이를 위해 북한은 사전에 미국·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넷째 단계는 남과 북이 각기 100명씩 대표를 차출해 민족통일최고회의를 구성하고, 통일헌법과 통일선거법을 제정하여 남북정부의 비준을 받은 후 남북이 총선거를 실시한다. 다섯째 단계는 중립화된 남북은 하나의 중립화 통일국가를 창립한다. 본 헌장은 한반도 중립화 체제구축을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절차와 과정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대우주는 지구에 평온과 평화를 주었다. 그러나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지구의 평화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욕심과 그들의 국가이익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대우주의 선물인 지구의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은 먼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영세중립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반도의 영세중립은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는 물론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이며, 지구의 평화와 평온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를 위해 인류는 지구를 지배하려는 욕심과 모든 살상무기를 다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즉, 인간들이 지구에 서식하는 동물로 돌아가는 지구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V. 맺음말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남북의 평화적 관계가 먼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남북관계가 좋아지려면 이를 방해한다(도널드 그레그 전 대사). 한반도가 영세중립 평화통일로 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남북의 평화적 관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사실상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은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을 분할하려다가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한반도를 분할 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결자해지 차원에서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협력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미국은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하되 단계별 비핵화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처음부터 북한에 CVID를 요구하지 말고,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1단계 조치를 취하면 미국도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북한에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국제적 외교는 언제나 주고받는 것(give and take)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비핵확“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 제조장치와 시설을 파괴하는데 최소 수년의 세월이 소요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북한에 당장 비핵화를 하라고 요구하지 말고 단계별 비핵화를 요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북한이 단계별 비핵화를 하는 동안 미국도 북한에 상응하는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소위 단계별 비핵화를 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이를 무시하고 당장 비핵화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북미 핵협상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비핵화 요구를 거꾸로 생각하면 미국이 ‘북한에 핵무기를 가져라’ 하는 말과 같은 의미가 성립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은 한반도에서 주한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받아드릴 수 없는 비핵화를 요구함으로서 주한미군이 주둔할 수 있는 구실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주한 미군이 주둔하는 한 남북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은 실현이 불가능 하다는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이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북은 특단의 조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남북정부는 주한미군이 철수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도 남북기본합의서 제14조에 명시되어 있는 ‘남북 간의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서울과 평양에 대표부를 설치해야 할 것이다. 남북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상호 침략의 의사가 없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기 때문에 주한 미군이 주둔할 수 있는 구실이 약화되거나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남북이 미국의 의사에 반하는 남북의 평화적 관계를 어떻게 수립하느냐에 따라 한반도 영세중립 평화통일의 가능성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다음 단계는 남북이 외교적 합의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남북의 지도자들이 외교의 3원칙으로 ‘자주외교, 균형외교, 중립외교’를 동시에 발표한 후에 남북 간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면서 북한의 비핵화도 연계하여 해결하는 방안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남북정부는 이제는 한반도 문제는 남북이 처리하고, 외국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차원에서 독자적으로 남북의 경제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국은 북한에 개성공단 같은 규모의 공단을 20여개 정도 조성함으로써 한국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의 지하자원과 노동력을 융합하는 남북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게 되면 경제적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 되어 국제적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참고문헌>
강종일, 『한반도 생존전략: 중립화』 서울: 해맞이미디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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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일 프로필>
필자는 경희대학교 정치외교 학사와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외고안보 석사를 마친 후,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박사는 (전)대한일보 편집국 기자로 근무한 후, 남베트남
미국대사관에서 행정관과 주미얀마 대한민국대사관 1등
서기관을 역임했다.
그는 (전)주대우 이사로 리비아와 인도네시아에서 근무
했으며, 현재는 한반도중립화통일협의회 회장과 한반도
중립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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