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jin Pak, [16/03/2022 4:48 PM]
I do not know whether you know 김재준 목사, a very well known Christian minister who lived in Toronto for a while. He father in law of 이상철 목사. Any way he continued writing diary and I checked my name and mother's name there. On mother,there is this entry.
Sejin Pak, [16/03/2022 4:48 PM]
1월 11일(일) - 이남순 여사가 전충림 사장을 통하여 나를 만찬에 초대한다. 나는 내키지 않는다.
이남순 여사로부터 다시 나에게 직접 전화해 왔다. 나는 몸이 고단해서 나갈 수 없으니 이번에는 용서하라고 대답했다.
이남순 여사는 일본 동경여자대학 출신으로 그 아버님은 일제 강점기에 “광산왕”의 칭호를 가진 부자엿다.
그 광산 구역은 주로 이북에 있었기에 김일성 정부에 의하여 알뜰하게 국유화됐다. 그러나 자기 주택에 거주하는 것만은 당분간 허락돼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남순 여사는 남북 통일의 열심당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랄 수는 없다. 연합교회에도 자주 나오고 “원불교”(圓佛敎) 신자라기도 한다. “친이북”의 “자유주의자”랄까. 어쨌든 아무데도 신념의 뿌리가 깊게 박힌 것 같지는 않다.
친좌익의 자유주의자라면 적중(適中)은 몰라도 근사(近似)는 한 것이 아닐까! 가산도 넉넉하고 자녀들도 수재 배출이다. 망평을 용서하기 바란다.
Sejin Pak, [16/03/2022 4:50 PM]
1월 5일(월) - 금호동 “정자”에게 편지 회답을 보냈다. “정자”는 늙은 부모에 대한 관심이 깊다.
2PM에 이남순 여사가 와서 통일방안을 얘기하고, 민간지도자의 왕래가 빈번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7PM에 NKT. 전충림 사장 주선으로 “토론토 민건” 간부 몇 사람과 함께 신필균 양을 주빈으로 중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나누며 간담했다. 나도 초정돼서 동석했다.
Sejin Pak, [16/03/2022 4:53 PM]
[범용기 제3권] (147) 野花園餘祿(其一) - 통일의 염원은
7월 18일 저녁에 김병욱 장로가 만찬에 초청한다.
“뉴저지”의 강일남ㆍ김은옥이 주빈이고 나와 이남순이 덩달아 불리었다. 그들은 “선통일 후민주”의 주장자들이랄까, 우선 이북과 친해놓고 보자는 분들이다.
10:30PM까지 시국얘기다.
나는 생각한다. “선민주 후통일”이고 “선통일 후민주”고 간에 그건 우리 자신들의 머리 속에서 맴도는 “환각”에 불과하다.
가령 “남한”은 “선민주”편이라 하자. 그러나 지금의 군사독재체제가 그 기득권을 자진 포기하고 민주인사들에게 고스란히 정권을 봉환(奉還)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총과 칼과 가스와 탱크와 데모진압 특수장비가 있다. 거기에 미국이 뒷받침한다. 그러나 일반국민에게는 “넘버”(數)와 돌멩이와 도피전술 밖에 없다. 전투에서는 상대가 안 된다. 그러므로 남한의 민주화는 전도요원하다. “후통일”은 더욱 요원하다.
“선통일 후민주”는 이북의 주장이라고 하자. 그건 가능한가? 휴전선을 넘으려면 당장에 60만 국군과 맞붙어야 한다. 6.25 때와 다르다는 것을 계산에 넣어야 할 것이다.
국군의 배후에는 미군이 있다. 장비와 무기는 미국이 제공한다. “이북군”은 “국군”만이 아니라 “미군”과도 싸워야 한다. 승산이 있을 것인가. 거기다가 “반공”이라는 “이념” 주입이 인간의 정상사고력을 마취시켰다.
미국의 지상군은 철수한다고 한다. 그러나 군함과 군용기는 건재하다. 자기 사람들이 나온 다음의 한반도에는 미련이 없다. 함포사격이다. 군용기의 폭격이다. 살인에 선택이 없다. 죽는 것은 한국사람, 조선사람이다. 그러나 소련과 중공이 한국사람 때문에 싸울 생각은 없다고 본다.
미국도 소련이나 중공과 격돌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결국 우리만이 녹는다. 시들시들 마른다. 다시 말해서 “선통일”, “후통일”에서 “통일” 자체가 실현될 확률을 갖고 있지 않는 한, “先”이고 “後”고는 저절로 문제에서 탈락된다.
해외교포만이라도 통일을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자고 한다. “해외”라면 사실상 “자유진영”인데 개인자유가 강압되지 않는 한, 획일적인 공동선(線)은 算出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통일” 문제에서 전원 일치를 기대할 수는 없다. 결국 이북의 의식적인 교란 전술에 고용(雇用)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잃었던 내 나라는 도로 찾아야 하겠다.
Lost and not found여서는 안되겠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세계사의 태풍계절을 기다려야 할 것일까?
7월 21일(수) - 5PM에 이목사, 차상달, 신자, 나 강일남, 김은옥 등이 University Studiun에 가서 Canada 대 North Korea Team 축구(싸커) 경기를 봤다.
North Korea Team이 3:1로 이겼다. 교포들이 많이 모였다. 교포는 예외없이 North Korea Team을 응원한다. 열렬한 응원이었다. 영사관에서는 직원이 총 동원인 모양인데 이북 지원열이 너무 앙양된데 두려움을 느꼈는지 돌아다니면서 “좀 조용하게 관람할 수는 없을까요?”하며 은근한 제동(制動)을 건다.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다.
“같은 민족인데 그럼 캐나다를 응원하란 말이오?”하고 반발하는 교포도 있었다 한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민족의 피는 저절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은 존제 자체의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그리스도도 “우리 민족”의 피에 섞여 우리 혈관을 쉴새 없이 돌아야 한다.
7월 22일(목) - T.V.로 올림픽 경기 광경을 본다.
소련의 여자선수 김내리 양의 묘기(妙技)에 감탄했다. 금메달 둘이나 탔는데 그녀는 한국사람이었다.
우리 이민사회에서 민족의식이 “증발”한다고 걱정하는 이가 많다. 그러나 이런 국제경기 때를 보면 이론의 시비도 없다.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이다. 혹시 잊었다가도 타민족과의 대결이 생기면 “일촉즉발”(一觸卽發)이다.
이스라엘 노무자를 학대하는 애굽인 공사감독을 “모세”가 현장에서 죽여 버렸다는 사건은 앞 뒤를 맞춰보고 한 행동에서가 아니었다. 이성 중심의 전략 문제가 아니라, 같은 핏줄로서의 “촉발”이었고 그 자신의 “존재”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은 국제경기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Sejin Pak, [16/03/2022 4:58 PM]
7월 13일 – 김병숙 여사가 나와 이남순 여사와 김병욱ㆍ김인숙을 자기 Apt.에 초대했다.
점심인데 냉면, 지지미, 인절미 등 요리 솜씨가 비상했다. 약 3시간 시국담, 통일문제 등을 얘기했다.
저녁은 “신자”집에서 먹고 유숙했다.
Sejin Pak, [16/03/2022 4:59 PM]
9월 5일 – 하령이 오늘부터 학교에 간다. 삼학년이 된다.
이남순 여사가 일본인 “마쯔모도”(松本清張)가 펴낸 “기다노시진”(北의 詩人) 한권을 갖고 와서 읽기를 권한다.
Sejin Pak, [16/03/2022 5:01 PM]
[장공의 삶] 8장 : 세계로 끈을 잇다(1974-1982)
북미주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 의장을 맡다
역사와 함께 사는 김재준은 1975년 11월 3일 이상철과 함께 제네바로 향했다. 아프리카의 나이로비에서 모이는 WCC 세계 대회에 앞서 민주화 운동에 관심 있는 각국 대표들이 제네바에 회동하기로 한 것이다. 박상증이 주선했고, 미국 NCC 간부들이 주동 역할을 했다. 개회식에 기조연설을 맞게 된 김재준은 ‘크리스찬 선언-민주화운동과 그 역사적 의미’를 낭독하였다. 이 선언문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1973년 한국그리스도인 선언>을 작성한 것이다. 김재준이 하고 싶은 말이 이미 이 안에 모두 담겨 기조연설을 대신했다. 이 자리에 모인 각국 대표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할 구체안을 모색하려 했지만 아프리카, 필리핀, 중남미 등 한국과 같은 상황에 있는 나라들이 많아서 난관에 부딪혔다. 결국 한국인 민주단체로서 WCC에 직접적인 진술과 지원 호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인끼리 따로 지하실에 모여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세계협의회(World Council for Democracy in Korea)’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만들고 이상철 목사가 대표로 본회의에 보고했다. 제네바 회의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한국을 위한 북미 인권위’ 발족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민주화운동과 조국 통일을 펼치는 민주 인사들은 다양한 정치적 색깔을 지녔다. 좌파든 우파든 그들을 함께 묶어 이끌어갈 인물이 필요했다. 김재준에 대해서 알고 있던 민주 인사들은 넒은 포용력과 지도력, 그리고 인격을 갖춘 김재준을 명예회장으로 선출했다. 김재준은 민주화운동을 이끌어갈 당시 몇 가지 지도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민족 대단결의 원칙이다.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이 주변 강대국의 이해나 남북한 정권 당국자들의 ‘안보 논리’에 제약되고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리이다. 둘째, 인간 존엄성의 원리이다. 어떤 정치체제나 운동도 결국 인간의 존엄성과 침범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를 담보하고 고양하는 것이라야 한다. 셋째, 화해의 원리이다. 정치 현실에다가 숭고한 종교적 정신을 접맥시킨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서로 사랑하는 화해 정신으로서만 함께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넷째, 실존적 책임성의 결단의 원리이다. 사건과 상황은 항상 움직이고 변한다. 그 시점 그 상황에서 최선의 종합 판단을 한 후 결행하는 실천 행동이 그것이다.”277)
1976년 3월 1일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이 명동성당에서 발표됐다. 이우정이 구속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우정이 선언문을 낭독했기 때문이다.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등도 연행됐다고 보고가 왔다. 김재준은 이승만, 김상돈, 이상철과 전화 회담을 했다. 당장 해외민주단체로서 성명서를 내기로 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이 사건을 ‘정부전복죄’로 다룬다고 했다. 김재준은 이상철과 함께 급히 워싱턴으로 가서 프레이저 의원을 만났다. 이튿날 국회의사록에 프레이저 의원이 발제 연설이 붙은 영역 <3ㆍ1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됐다. 미국의 어느 일간지에서도 보도된 적이 없던 민주운동이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여 러 보도기관에서 이 일을 크게 다루었다.
김재준은 민주 인사들과 함께 각 방면으로 다양한 활동을 펴면서 워싱턴에 있는 교회들을 순방했다. 지금 한국 교회의 젊은 목사들이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고난 중에도 자유와 정의의 씨앗을 뿌리고 있으니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워싱턴 한인교회들이 적극 동참해 주기를 바랐 다. 그러나 그들은 보수적인 ‘부자’들이었고, 한국의 현실에 무관심했다.
“한마디로 개신교는 부르주아적 기독교다. 말하자면 자급자족하는 중산층 시민의 종교란 말이다. 그들은 이윤 동기에서 사업을 영위한다. 언제나 경쟁심리에서 부지런하다. 그들의 가치는 물량에 있다. 정신적인 ‘질 (質)’의 문제는 잘 먹혀들지 않는다. 그들의 사업욕은 세계적으로 팽창되어 간 데마다 자기 시장을 차리려 한다. 해외 선교도 그런 타입을 시사한다. 교파는 그들의 회사 간판일지 모른다. 개혁파 교회의 모습을 부르주아 생리와 대조해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278)
김재준은 그들의 냉담한 태도에 실망하고 뉴욕으로 돌아와서 4ㆍ19 기념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갔다. 김상돈의 사회로 진행된 강연회에서 4ㆍ19는 과거의 자랑이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어 미래의 소망이라고 밝혔다.
“4ㆍ19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는 끝없는 혁명이다. 군사 독재, 공산독재, 독점 권력 아래서 독버섯같이 무성한 부패와 부정, 미국과 일본의 경제식민, 미국의 군사기지, 무엇보다도 38선의 동강난 요부(腰部), 이 모든 것과 싸우는 4ㆍ19 정신은 휴식 없는 전투태세로 미래를 향하여 전진한다. 4ㆍ19 기념은 과거의 자랑이 아니라 미래의 소망이다.”279)
강연이 끝난 후에 멀리서 김재준을 만나러 온 동문들, 동지들, 경동교회 교우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애기들까지 가족동반으로 온 제자들도 있었다. 삶에서 만난 인연들, 사제(師弟)로서 의리로 맺어진 관계, 사랑으로 맺어진 인간관계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김재준은 민주운동과 함께 타국에서 고난당하는 한인들이 있으면 빠짐없이 찾아가 그들을 격려해 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중에 산타 바바라라는 고장에서 교육위원 선거에 입후보한 김영민이라는 친구를 면회 간 일이다. 김영민은 경동교회 창설 장로인 김능근 교수의 맏아들로, 수재여서 일찍이 미국 유학을 갔고 결혼하여 산타바바라로 이주했다. 이 고장은 미국이 건국할 당시의 청교도들이 자리를 잡은 보수적인 마을에 동양인이 감히 교육위원 자리를 노리는 것이 괘씸하던 때, 경찰들이 거짓 조서를 꾸며서 김영민을 구속한 것이다. 알리바이가 확실한데도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종신징역을 선고했다. 이 일로 한인회는 대회를 열어 ‘인종 차별과 인권유린’을 성토하고 ‘영민 돕기’ 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정신감정을 위해 병감으로 옮겼다. 김재준은 한국의 상황과 경동교회 상황을 이야기해 주며 함께한 사람들도 격려하고 돌아왔다.
김재준은 캐나다의 윌리엄 스콧 선교사를 방문했다. 그는 지난날 조선 예수교장로회가 교권주의와 성서문자주의에 사로잡혀 김재준을 몰아낼 때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선교사들의 주입과 그들의 사관에 무조건적인 추종만 있었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한국적’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오랜 동지였다.
“한국 교회 50년이 물론 미국 기타 여러 신교국 교회들의 ‘선교사’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데는 아무 이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기독교사냐 하는 데는 너무 ‘얼’이 없다는 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사상’에 있어서 비판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주입’과 ‘추종’이 있었을 뿐이었다.”280)
스콧은 90의 나이였지만 언어나 행동이 젊은이 못지않았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서인지 홀로 ‘외톨이’ 살림을 하는 모습이 힘들어 보였다. 그는 ‘외로움’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면서 방 구석에 있는 어항의 금붕어를 가리키며 자신과 함께하는 유일한 ‘생명’이라고 말했다. 김재준은 스콧 선교사와 함께 그의 부인이 묻힌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추모의 기도를 드렸다. 김재준은 돌아오는 길에 그가 쓴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281)을 읽으면서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렸다.
동트는 아름다운 땅 한국
우리의 사랑스러운 조국 한국 만세!
멍에와 징벌에서 해방되었네.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께 겸손히 감사드립니다.
우리 민족을 영원히 수호하는 백두산
해변과 강과 계곡 그리고 인자한 어머니 땅을 에워싸고 도는 생명수
자랑스레 당신을 우리가 태어난 땅이라 부릅니다.
산과 바다의 땅
새로운 영광의 희망이 넘쳐나고,
우리 조상들의 땅, 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의 아름다운 정원 한국이여!282)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한, 진정 한국인으로 살았던 스콧 선교사는 1979년 7월 16일 향년 93세의 일기로 소천했다.
Sejin Pak, [16/03/2022 5:01 PM]
김재준은 5월 9일 캐나다 한인 연합교회에서 열리는 ‘노인잔치’에 참석 했다. 교회 청년들이 손수 준비하여 대접하는 ‘경로의 향연’이었다. 김재준은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인생철학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저녁에는 둘째딸 신자가 노인 60여 명을 목사관에 초청하여 저녁만찬을 열었다. 둘째 사위인 이상철 목사는 부모님이 모두 이북에 계셨다. 그래서 늘 부모님의 품안에서 지내는 둘째딸이 남편은 얼마나 외로울까 싶은 마음에 어머니 주일이 되면 그 외로움을 달래 주려고 연로하신 분들을 모셨다는 것이다. 김재준은 이런 딸 의 사려 깊은 마음가짐을 보고 마음속 깊이 칭찬해 주었다.
1976년 7월 18일 김재준은 김병욱 장로의 만찬에 초청되어 갔다. 그곳에서 강일남, 김은옥, 그리고 이남순을 만났다. 이들은 ‘선통일 후민주’ 주장자들이었다. 우선은 이북과 친해지자고 했다. 김재준은 ‘선민주 후통일’이든 ‘선통일 후민주’이든지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가령 남한이 선민주라 할 때 지금의 군사독재 체제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민주인사들에게 정권을 내놓을 리 만무할 것이고, 북한이 선통일이라 할 때 남한의 60만 국군과 맞붙어야 할 상황이니 이 또한 승산이 없는 싸움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해외교포만이라도 통일을 위한 공동전선을 형성하자고 했다.
며칠 뒤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북한과 캐나다가 축구 경기를 해서 북한이 3대 1로 이겼다. 교포들은 모두 북한을 응원했다. 영사관 직원들은 교포들의 북한 응원에 두려움을 느꼈는지 은근히 응원을 말렸다. 그래서 교포들은 누구 하나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귀에 거슬리는 이는 같은 민족인데 캐나다를 응원하라는 거냐며 반발하기도 했다.
“우리 이민사회에서 민족의식이 증발한다고 걱정하는 이가 많다. 그러나 이런 국제경기 때에 보면 이론도 시비도 없다.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이다. 혹시 잊었다가도 타 민족과의 대결이 생기면 일촉즉발(一觸卽發)이다. 이스라엘 노무자를 학대하는 애굽인 공사감독을 ‘모세’가 현장에서 죽여 버렸다는 사건은 앞뒤를 맞춰보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성 중심의 전략 문제가 아니라, 같은 핏줄로서의 ‘촉발’이었고, 그 자신의 ‘존재’ 문제였던 것이다.”283)
김재준은 이런 국제경기에서 민족애를 보면서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민족의 피는 저절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각주]
[277] “LA에 4ㆍ19 기념 강연회”, 『전집』 제14권, 253.
[278] 김재준, “대한기독교장로회의 역사적 의의”, 『장공김재준논문선집』, 99.
[279] 윌리엄 스콧, 연규홍 역,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한국기독교장로회, 2009.
[280] 위의 책, 306.
[281] “통일의 염원은”, 『전집』 제14권, 293.
[282] “UM창립총회를 열면서”, 『전집』 제16권, 210.
[283] “통일의 염원은”, 『전집』 제14권, 293.
Sejin Pak, [16/03/2022 5:02 PM]
[범용기 제3권] (218) 北美留記 第六年(1979) - 토론토에서
4월 3일(화) - 이질(姨侄) 석영 군이 찾아와 그 옛날 향동학교 시절, 동경 시절, 대구사범 시절 등등 – 그리고 그의 친형이자 내 “이질”이면서 향동학교 시절의 선생이던 “희영”에 대한 추억담 등등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 먹고 헤어졌다.
“굴”을 선물로 갖고 왔다.
1979. 4. 7.(토) - N.Y.의 해외한민보 주필인 서정균 씨와 Toronto의 장정문 신부가 내방했다.
상의할 것이 있어 일부러 왔다는 것이었다.
중국음식점에 가서 간단한 오찬을 나누며 얘기했다.
요지는 (1) 카아터 방한 직전에 전 북미주 민주단체들과 전세계(서독 등) 민주단체 연합으로 와싱톤에서 데모를 강행하자는 것.
(2) 이것을 계기로, 미국, 서독, 일본 등 각 민주단체 대표자 회의를 열고 한국민주 전세계 연맹을 발족시키자는 것이었다.
4월 9일(월) - 최홍희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12시에 Korea House에서 점심을 같이 하자는 것이다.
4월 10일(화) - “코리아 하우스”에서 12시 최홍희 장군을 만났다. 최덕신 장군도 자리를 같이했다. 9월쯤에 해외민주단체 총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4월 11일(수) - 오후 1시에 이남순, 김인숙, 김병숙 세 분이 한국관에 모였다.
내 서독갔던 얘기를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곰탕을 먹으면서 대략 얘기했다.
나는 다만 사실을 얘기한 것 뿐이오. 나 자신으로서의 “콤멘트”나 태도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左右合作의 포석인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민통과(배동호 등) 자매관계를 맺고 행동을 같이 하게 하려는 저의에서인 것 같기도 했다.
Sejin Pak, [16/03/2022 5:04 PM]
5월 2일 – 김정근, 김영호, 박세진 세 젊은 박사후보생 그룹이 떤다스에 있는 “上海”란 중국반점에서 나를 위로해줬다.
밤 10시까지 얘기하다가 경용집에 갔다.
Sejin Pak, [16/03/2022 5:05 PM]
[범용기 제3권] (193) 北美留記 第五年(1978) – “제3일” – Second Class Mail로 5월 31일 – 김정근과 박세진 두 젊은 동지가 “제3일” 2종우편 면허를 얻어다 줬다.
Sejin Pak, [16/03/2022 5:07 PM]
[범용기 제3권] (187) 北美留記 第五年(1978) - Washington에
3월 16일 – N.Y.에서 Washington에로.
9PM에 “Shuttle”로 한 시간만에 Washington에 도착했다.
Taxi로 국무성에 직행해서 프레이저 의원의 “한국 내의 한국 CIA 암약상”을 파헤친다는 청문회 방청석에 앉았다.
“레나드”(Korea desk 책임자)가 증언했다. 그의 종결 연설은 명 스피치였다.
나와서 이스탐불 영사관 관계로 일하다가 망명해온 “윤창오” 씨를 만났다.
오랫동안 그의 경위와 경험담을 들었다. 그는 한식당에서 생선찌개, 전복탕, 맥주 등으로 우리에게 점심을 제공했다.
청문회 후에 인권위 담당 차관보인 맑슈나이더와 International Affairs의 Laurent Morin을 그들 사무실에 방문하여 장시간 얘기했다.
모두 열성적인 협조를 약속했고 지금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Ambassador Hotel 1218호실에 투숙했다.
3월 17일 – 박한진 목사가 여관에 찾아왔다. 나이 먹었어도 여전한 익살꾸러기다.
정용철 목사도 왔다. 언제나 정중하고 착실하다.
나와 셋이서 와싱톤 병원에 갔다. 거기서 뇌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역시 우리 졸업생인 김순회 전도사를 문병했다. 어려운 수술인데도 경과는 좋다고 했다. “어머니”가 간호하고 있었다.
나는 기도하고 격려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일렀다.
“믿음”이란 것은 내 모든 사정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스스로 걱정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손잡고 안수했다.
“어머니”는 즐거웠다.
나는 그길로 Catholic Center에 갔다.
지학순 주교가 “로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몰래 여기 와 있다는 것이었다.
이층 치벽한 구석에 와 있다. 반가웠다. 전에와 꼭같다.
소식을 교환했다.
거기서 나와 국무성에 들러, 하원 윤리위 자워스키, 프레이저의 수석 보좌관 John Sarzburg 등을 만나 인사와 소식교환을 했다. 인품좋은 인간들이었다.
밤에는 China Inn에서 “민통”이 주최한 만찬간담회에 참석했다. 한인회 간부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공통의식이 조성되는 것으로 보였다.
3월 18일 – 한민신보 정기영의 초대로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민통 관계 간부들과 간담했다.
재미교포들이 낸 3.1 선언문에 “민통” 인사들 명단이 모두 탈락된 데 대한 불만이 있었다.
N.Y.측 얘기는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김상호가 일부러 와서 동참을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민통”의 Prestige를 존중해서라도 사전에 충분히 상의하고, Demo 행진에 대해서도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상의했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와싱톤에서는 “민통”이 “터줏대감”이고 내력으로 보더라도 UM보다 훨씬 “선배”라는 것을 인정하고 매사에 신중을 기했어야 할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됐다.
나는, “지금 우리는 다 같이 박독재정권과 싸운다는 것이 제일의 사명이니만큼 우리끼리 서로 본의 아닌 ‘시행착오’ 같은 것은 서로 용납하고 총 결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통 자체 안에도 사상적인 “분립”의 기맥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충분한 양해로 행동을 같이 할 수 있게끔 성의를 다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유감이라고 말했다.
금후에는 그런 “소홀”이 없을 것이라고 무마하여 피차 양해한 것으로 알고 김상돈의 기도로 작별했다.
강영채 박사도 같이 있은 것으로 기억된다.
강영채 박사는 “불순분자”의 침투를 경계자하고 했다.
같은 날 나는 기차로 필라델피아에 갔다. 김순경 박사 주선으로 그의 집에서 유지인사들이 모여 간담했다.
다양한 “성분”의 인사들인 것 같았다. 밤 11시에 “강근” 씨가 자기 차로 “트렌톤”까지 “에스콧”해 줘서 고마웠다.
새로 한시쯤에 New Work에 내려 Taxi로 김상호 박사 집에 갔다. 중참먹고 거기서 유숙했다.
3월 19일 – 8AM에 손명걸 박사가 김상호 집에 들러 나를 Pick-up해 Inter-Church Center에 나왔다.
10시에 Assembly Hall에서 한인동지 그룹이 예배했다. 내가 설화(說話)했다.
준비한 애찬을 나누고, 헤어져서 손명걸 박사 차로 김상호 집에 가서 한 시간 쉬었다.
오후 4시에 임순만 박사의 Pick-up으로 Bronx의 안중식 목사 교회 7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하여 설교했다.
안중식 목사 사택에서 밤 한시까지 UM의 과거를 검토하고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만은 산만하여 효능적이 아니므로 역시 “단체”로서의 “조직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데 합의되었다.
거기서 UM 헌장 개정초안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Chair man은 한승인으로 했다.
안 목사 댁에서 냉면이 중참으로 준비되 나왔다.
박신화 양을 반갑게 만났다.
3월 20일 – 안중식 목사 댁에 목사들이 많이 들렀다. 12시 반에 안 목사 집을 떠나 안 목사 Drive로 라과디아 공항에 급행했다.
박창해, 임순만이 공항까지 나와 전송해줬다.
1:10PM에 출발하여 2:25PM에 Toronto 공항에 내렸다. Islington까지 Bus로 가서 Subway로 Spadina 사무실에 들렀다.
편지가 쌓여 있었다. 이 목사와 소식을 교환하고 이 목사 차로 경용 집에 갔다.
3월 22일 – 김정근, 김영호, 박세진, 세 청년이 “제3일” 발송작업을 도왔다.
Sejin Pak, [16/03/2022 5:09 PM]
[범용기 제3권] (231) 北美留記 第六年(1979) - 사마리아인회 원유모임
7월 14일(토) - 오늘은 호수 위 하루다.
연합교회 사마리아인회(노인회)에서 온타리오 호수를 배로 건너 나이아가라 반도에 내려서 폭포를 구경하고 폭포 상류의 공원에서 야외예배겸 점심을 즐기는 “소풍의 날”이다.
나도 참가했다. 회비 12불. 각자 부담이다.
내가 잠깐 설교라고 했다.
호수와 하늘과 구름이 층층으로 이어서 “묘망운수”(渺茫雲水) 그대로다.
오후 네시 반에 관광뻐스로 토론토를 향해 달렸다.
오후 7시 반에 토론토에 내리자 그 길로 나는 토론토 대학 Married Students Apt에 들러 요새 신혼한 박세진 김정숙의 Open House에 참석했다.
김정근 부부와 정근 처남 부부가 와 있었다. 새로 두 시에 정근의 차로 집에 왔다.
Sejin Pak, [16/03/2022 5:13 PM]
9월 27일(화) - 오늘이 추석이란다.
토론토 대학에서 PH.D. Work중인 김정근, 김영호, 박세진 등이 경화루라는 중국집에서 푸짐한 추석연을 베풀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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