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브라질 이민,
밑바닥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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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엔 400달러, 네 아이 데리고 이민선 타다
1964년 드디어 우리 가족은 이민 길에 올랐다. 남편은 회사 일들을 마 무리해야 했기에 내가 아이 넷을 데리고 먼저 떠나고 남편은 뒤에 따로 오는 것으로 결정했다. 돈을 마련하는 것이 늦어지는 바람에 우리는 브 라질 이민 5차선을 타게 되었다. 1964년 9월 18일 금요일에 부산항에서 출항하는 이민선이었다.
다섯 사람 뱃삯을 지불하고 난 뒤 남은 돈을 달러로 바꾸니 400달러 였다. 수중에 있는 돈은 일단 그 돈이 다였다. 우리는 이민선을 타기 위 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남편의 제자 한 사람이 거래처에서 수금한 돈을 출항 전에 항구로 가지고 오기로 했다고 해서 우리는 부둣가 부근 다방 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떠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돈 가지고 온다는 사람은 영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때의 애타는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400달러만 달랑 손에 쥐고 서 두 달이 걸리는 먼 뱃길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남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싶다. 아내와 어린 네 남매를 머나먼 낯선 이국땅으로 먼저 떠나보내며 걱정이 안 될 리 없고 안타까운 마음이 안 들 리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돈 문제까 지 그렇게 되었으니 그미안한마음이 또 어떠했으랴. 우리를 떠나보내 고 서울로 혼자 돌아가는 길은 얼마나 착잡하고 쓸쓸했을 것인가.
남편의 그러한 심정을 헤아리고 내가 그때 좀 더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보이지 못한 것이 지금은 몹시 후회되는 일이지만, 그때는 내 마음의 경지와 의식수준이 그 정도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다만, 지금 이라도 그때의 남편의 심정을 깊이 이해하고 진실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내 스스로 위안을 찾을 뿐이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출항
이민선 보이스 베인Boisse Vain 호號는 네덜란드 국적 화물선을 개조한 것으로서 사람과 화물을 같이 실어 나르는 2만 5천 톤 급 큰 배였다. 아 침부터 잔뜩 구름 낀 날씨더니 오후 3시 출항할 때는 하늘에서 빗방울 이 떨어지고 있었다.
배가 부두를 서서히 떠나면서 손에 쥐고 있던 오색 테이프가 한 가 닥 한 가닥씩 끊어져 나갔다. 42년간의 조국에서의 삶을 뒤로 하고 행 복을 찾아 새로운 세계로 출항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 브라질은 우리 가족을 어떻게 맞이해 줄 것인가.
그러나 한편, 이제 과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에서의 모든 미 련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에의 도전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 음에 새로운 기운이 샘솟았다. “그렇다! 이것은 희망의 길이니 용기를 내자, 도전하자, 뜻을 이루자.” 당시 나는 마흔 셋의 나이였고, 옥경은 서강 학교 1학년, 은명은 이화여고 3학년, 세진은 보성고등학교 2학 년, 유진은 돈암초등학교 4학년 재학 중이었다.
부산항을 떠나 배가 처음 정박한 곳은 일본의 오끼나와 섬 앞바다였 다. 다음이 홍콩, 싱가폴, 말레이시아를 거치면서 각 항구에 배가 정박 하면서짐을 풀고 싣고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어떤 항구에서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육지에 상륙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나는 상륙해도 된다는 곳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 구경을 했다.
전 가족이 아주 값싸게 세계여행을 하는 셈이었다. 세진이만 배에서 절 내리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아마 두 달 동안 꼬박 배에서만 지내
지 않았나 생각된다.
두 달 걸리는 항해의 경유지는, 부산 – 오끼나와 – 홍콩 – 싱가폴 – 포트 수에스트남 – 페낭 – 모리샤스 – 로렌스 마루카스 – 다번 – 포트 에리자베스 – 케이프타운 – 리오데자네이로 – 산토스로 예정되어 있었
다.
60일간의 항해는 인생의 축소판
고국을 떠나 지구 반 쪽 미지의 나라로 항해한 60일 간은 마치 짧은 일생을 산 것 같기도 했다. 인생 자체를 흔히 항해로도 비유하지 않는 가. 어디론가 나아간다는 것, 거친 풍랑을 헤치며 자신이 정한 목적지 로 향해 간다는 것, 그리고 목적지에 닿으면 또다시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서 떠난다는 것, 이것이 인생의 본질일는지도 모른다.
내가 6.25때 서울에서 피난길을 떠나 근 5개월 만에 고향 용잠에까 지 다다른 것이 확실한 목적지를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나의 첫 짧은 일생의 체험이었다면 이번이 그 두 번째가 되는 셈이었다. 다 른 것이 있다면 이번은 안전지 를 찾아간 피난길이 아니고 도전과 개 척의 길이라는 것이었다.
인도양과 서양을 건너며 망망한 양의 모습을 보았고, 파도소리 들으며 밤바다를 비추는 무수한 별빛을 보았고, 동남아와 아프리카 여 러 곳의 다양한 모습과 풍물과 사람들을 본 것은 우리에게 이렇듯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하늘의 축복이었다. 고국에서 얻지 못한 우리의희망찬미래와행복을새 땅에서, 그리고 넓은 세계 속에서 이 루어 나가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는 항해였다.
배가 정박하는 곳마다 육지에 내려 여러 나라의 각기 다른 풍물을 접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은 이렇게 다양한 것이었고 사람 사는 모습의 근본은 다 같은 것이었다. 잘 살고 못 살고의 차이 뿐 이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케이프타운 거리 를 구경할 때 목격한 인종차별이었다. 식당에는 물론 공원이나 공공장 소에 흑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는 곳이 많았고, 2층 버스 아래층에 는 백인만, 위층에는 흑인만 탑승할 수 있도록 구별되어 있었다. 심지 어는 ‘흑인과 개의 출입을 금함’이라고 모욕적으로 써진 경고문도 보 았다.
나는 최근에 ‘넬슨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인권투쟁을 하면서
27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마침내 흑인으로서 첫 남아프리카공화국 통령이 되고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한 그의 불타는 정의감과 투철한 신 념,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은 정말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의 이런 말이 특히 마음에 남아있다. “나는 자유를 향해 머나먼 길 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높은 언덕을 올라간 뒤에야 또 올라 가 야할 언덕이 그 뒤에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머나먼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꾸물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그가 수감된 후 세계의 여론 때문에 겨우 사형을 면하고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것이 1964년 6월 12일로 책에 적혀있는 것을 보고 나는 참 묘한 느낌을 받았다. 보이스 베인 호가 케이프타운에 정박한 것이 같은 해 11월 5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곳 거리에서 인종차별의 현장을 보고 마음이 착잡할 때 그 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불굴의 의지로 오직 인권, 자유, 평등, 정의, 평화를위하여처절한투쟁을 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파울로에 정착하다.
산토스 항에서 북서쪽으로 50km 떨어진 상파울로는 남아메리카 최 의 도시로 일컬어지고 있었고 해발 800m 고원지 에 자리 잡고 있었 다. 우리보다 조금 일찍 이민 와서 여기에 정착한 사촌 동서의 친정 조 카 둘이 내가 떠나기 전에 보낸 편지를 받고 산토스 항에 마중 나와 있 었다.
둘 다 일본인 농업협동조합에 일자리를 얻었다고 하며 상파울로에 있는 그들의 숙소로 우리를 안내했다. 어디가 동서남북인지도 모르고 언어도 전혀 통하지 않으니, 우리 다섯 가족이 몸담을 집을 구하고 살 아갈 방도를 찾기까지 당분간 그들의 집에 신세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 게 브라질에서의 첫 출발이 이루어졌다. 곧이어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은 일본인 집단촌 부근의 아파트였다. 인근에 일본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의 요시 오까 신부님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옥경이와 은명이가 한국에서 캐톨 릭 세례를 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브라질은 군인 출신 통령이 통치를 하고 있었고 국민들의 지 지를 별로 받지 못한다고 들었다. 최저 임금제도가 실시되고는 있었지 만 너무 저임금이었고 인플레이션은 심했다. 최저 임금을 받고 있던 사 람들 부분은 브라질 원주민이었다. 그들은 자식들을 교육시킬 돈이 없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없는 악순환 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에는 기후가 따뜻해 아이를 낳고 바나나 나무 한 그루 만 심으면 그 아이의 평생 먹을 것은 해결된다고 했다. 입을 것과 사는 집만 있으면 이민 온 사람들처럼 악착같이 돈 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하는말에 ‘아마냥, 아마냥’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일로, 내 일로’라는 뜻이고 서둘 것 없이 내일로 미루자는 말이다. 오후 2시만 되면 가게 문을 닫고 낮잠을 자는 게 그들의 일과였다. 처음에는 이러 한 모든 것이 놀랍기만 했으나 차차 그들의 생활상에 익숙해져 갔다. 브라질은 한국과는 모든 것이 반 였다. 심지어 밤하늘의 달도 초승달 과 그믐달의 모양이 한국과는 반 였다.
이렇듯 자연환경이 다르고 풍습과 문화가 생판 다른 브라질에서의 긴장감 넘치는 새 생활은 어려움이 많은 가운데에서도 활력을 샘솟게 했다. 장장 6,300km의 아마존 강이 흐르는 남미의 제일 넓은 나라 브라 질의 이색적인 자연, 풍토, 생활문화, 사회관습 속에서 우리는 이제 어 떤 삶을 창조해 나갈 것인가. 모든 가족이 생활전선에 나서다
아파트로 이사를 해 놓고 당장 눈앞에 닥친 의식주 해결을 위하여 유진 이를 뺀 나머지 식구가 모두 직장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옥경이와 은명이는 일본 사람들이 경영하는 ‘고찌아 농업협동조합’에 사무원으 로 취직했다.
처음에 우리에게 숙소를 제공했던 사촌 동서 친정 조카들이 마침 여 기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알선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브 라질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규모의 일본인 농 업협동조합이 두 개 있는데, 여기가 그 중 규모가 더 큰 조합이었다.
세진이는 우리 아파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일본인 신문사에 취직 을 시켰다. 내가 세진이를 데리고 가서 우리 사정을 이야기 하고 부탁 을 하니 마침 그런 사람이 필요했던 참인지 바로 채용이 결정되었고, 그 다음날부터 출근해서 사진부에서 배워가면서 일을 하게 되었다.
사진에 취미가 있고 소질이 있었던 세진에게는 참 좋은 일자리였다. 여기에서의 경험이 이후 세진이가 사진에 해 깊은 조예를 가지게 된 게기가 되었을 것이다.
다음 할 일은 아이들을 야간 학교를 찾아 입학시키는일이었다. 그 러기 위해서 우선 무엇보다 새로운 언어 포르투갈어를 습득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급선무였다. 유진이를 먼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시켰다. 너무도 고맙게도 요시오카 신부님이 관할하시는 천주교 사립학교에 돈을 안내고 다닐 수 있게 주선을 해주셨다.
포르투갈어를 하나도 모르고 시작한 유진이는 일 년이 지나자 일등 을 하기 시작했고 3년 후에 졸업할 때는 최우등생 상을 받는 영광이 있 었다. 얼마 후에 옥경이는 상파울로 학 영문과 야간반에 청강생으로 등록을 했고, 은명이는 상업고등학교 야간반에 들어갔다가 나중에는 미술학교에 등록을 했다. 세진이는 보통고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모두 다 최선을 다하였다. 아직 너무 어린 유진이만 빼고 위 세 아이 는 학교에 다니면서 돈벌이를 함께 했다.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 속에 서 학업과 일을 병행해야 했던 삼 남매는 혼신의 힘을 다해 거기에 적 응해야만 했기에 달리 고민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서로 화할 여유가 없었다. 특히 이유 없는 반항의 시기인 사춘기에 있었던 세진이의 그때의 내면세계는 어떠했을는지…….

모처럼의 가족 나들이, 브라질에서
재봉사가 되어 노동의 진미를 체험하다
아이들 문제가 일단 해결되자 나는 요시오까 신부님 소개로 일본인 2 세 디자이너를 소개받아 그가 일하고 있던 소규모 블라우스 봉재 공장 에 취직을 했다. 거기서 공업용 재봉틀 사용법과 바느질하는 것을 배우 기 시작했다. 1개월 정도 하니 숙달되기 시작했다. 여자로서 바느질을 해본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공장으로 출근하여 일을 했었으나 어린 유진이를 혼자 집 에 두는 것이 염려가 되어 집에서 일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공장 측과 합의를 보았다. 낡은 재봉틀 한 를 사다 놓고 집에서 작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얼마간은 블라우스만 만들다가 공장 쪽 요청에 의해 블라우스 감 앞 쪽에 주름 잡는 일까지 맡게 되었다. 내가 기일을 어기지 않고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일해 주는 것이 그들의 신뢰를 얻은 것이었다.
이 일도 곧 숙달이 되어 여러 가지 종류의 주름잡는 일을 예쁘게 하 면서도 빠르게 해냈더니 공장에서 무척 좋아했다. 주름잡는 일은 블라 우스만 만드는 것보다 수입이 훨씬 많았다. 일의 양이 많아지니 내가 일감을 가져오고 가져가고 할 시간이 없어서 물건 오가는 것은 공장 쪽 에서 해주게 되었다. 나중에는 주름잡는 공업용 기계까지 집에 들여다 놓게 되어 하루 작업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바빠서 힘은 많이 들었지만 수입이 많아지는 것이 큰 보람이고 즐거움이었다. 아마 이때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내가 바느질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평생 몰랐을 것이다. 나는 직접 몸을 움 직여서 일하는 이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았고 이것은 돈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무엇이든지 붙잡고 집중해서 열심히 하면 자연히 더 숙달된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만큼 스스로의 보람과 기쁨이 따르게 되고 또한 그로 인 해 삶 전체가 점점 더 향상되는 것은 당연한 세상의 이치였다.
노동의 진미를 맛보면서 아버지의 말씀에 비로소 깊이공감할 수있 었다. 그것은 ‘사람과 사물에 한 공경심과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일에 임할 때에 그것은 신성한 노동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수행과 보은의 길이며 동 평화세계에로의 길이다’는 말씀이었다.
브라질에서 얻은 것
좁은 아파트 공간에서 다 같이 정말 열심히 살았던 그 기간은 가족이 일치단결해서 가정을 튼튼하게 만든 뜻 깊은 시기였다. 누구나 생활이 풍족하고 안락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꼭 좋은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거기에 도전이 있고 열정이 있고 화합이 있는 가정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답고 힘찬 것인가.
남편이 상파울로에 온 것은 우리가 부산항에서 헤어진 지 1년 8개월 만이었다. 남편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브라질에 와서 더 실력 발휘를 하고 전문가 접을 받았다. 고찌야 농업협동조합 기술 고문직을 맡았 고 조합 책임자보다 월급을 더 받았다.
가족이 다 같이 한 집에 살면서 모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니 늘 바 쁜 가운데에서도 우리 모두에게 보람과 희망이 넘치던 때였다. 인간의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왕성한 생명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 때 어려 운 가운데 단련된 마음과 정신이 우리 가족 모두 자신을 충실히 꽃피워 나가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믿는다. 브라질에서의 4년간은 나에게 정말 완전히 새로운 인생경험이었다. 이민선을 탈 때 각오하고 결심한 것처럼 나는 제일 밑바닥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차근차근 나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자 했고, 어느 정도 그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도 보다 넓은 안목을 가지게 되고 세상에 도전하고 적응하는 능력을 기르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제일 중요한 것을 얻은 셈이었다.
09
캐나다에서 다시 새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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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에 정착하다
우리가 브라질로 이민 간 것은 그 당시 제일 빨리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길이 그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들 장래를 위해서도 보다 배 울 것이 많고 기회의 폭이 넓은 선진국으로 다시 이민 가는 것이 우리 가 고국을 떠난 목적에 맞는 일이었다.
이제는 또 다른 세상 캐나다에서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다음 여 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던 학교를 마저 더 다녀야 하는 세진이만 상파울로에 남겨두고 우리 가족은 캐나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68년 10월 12일에 토론토 공항에 도착했다. 캐나다의 첫 인상은 산뜻했다. 공항에서 우리를 맞이한 이민 담당관의 미소와 친절함 속에 서 캐나다인의 의식 수준을 읽을 수 있었다. 세인트제임스 타운에 신축 한 아파트를 빌려서 캐나다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옥경이는 토론토대학에 가기를 원했지만 입학 허용 연령 제한선이 넘어버려서 어쩔 수 없어 대신 요크대 수학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중간 에 생물과로 전공을 바꾸더니 동물 해부하는 것이 징그럽다고 그만두 고 결국은 토론토 대학에서 인류사회학을 다시 시작했고 박사학위는 퀘백시에 있는 나발대학에서 받았다.
은명이는 라이어슨 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다. 학교를다니면서옷 만드는 회사에 취직을 했고 옥경이도 아르바이트로 같은 회사에서 사 무직 일을 했다. 세진이도 상파울로에서 12학년을 마치고 가족과 합류 했다. 세진이와 유진이는 쟈비스 고등학교가 집에서 가장 가까워 그 학 교로 전학했다.
3년간의 육체노동
나는 이민자들에게 무상으로 실시하는 영어공부를 2년 동안 하고 나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우선 브라질에서 익힌 재봉 일부터 시작해 보기 로 했다. 브라질에서 공업용 기계를 사용해서 간단한 것을 해 본 경험 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기왕이면 고급 옷 만드는 것을 해보겠다고 나섰 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의류 공장에 나가서 며칠을 시도해보았는데 실력을 인정받지 못해 서 단순한 일만 주어졌다. 단순 작업은 작업한 수량에 따라 임금을 주 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붙잡고 할 일은 아니었다. 좀 더 발전성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다음에는 일본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플라스틱을 녹여 선물용 물건 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을 했다. 이 또한 단순노동이었고 실적급이었다. 나는 남다른 집중력과 효율적인 동작관리로써 다른 사람이 하루 종일 할 일을 몇 시간 만에 해치우는 능력을 발휘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동작관리 요령은 내가 한국생산성 본부의 ‘경영자 훈련과정’에서 습득 한 것이었다.
이 공장 일도 오래 할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다음으로 우리 아파트 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병원 식당에 일자리를 얻었다. 여 기에 취직을 한 이유는 영어를 더 배우고 경험을 얻어 영양사자격을 얻 어 볼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해서 보니 그것은 가 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이렇게 육체노동을 계속하는 것으로는 체력의한계를느꼈고 그이 상 발전해 나갈 수 없는 것이었기에 나는 모두 합해 3년 정도의 육체노 동 생활을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파트 임대료도 아낄 겸 그동안 저축해 놓은 돈과 은행 장기 융자금으로 집을 구입기로 결정하고 아이들이 토론토 대학으로 갈 것 을 예상해서 그 주변의 집을 보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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