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5, 2022

1998 글 브라질 이민 카나다 재 이민

 

              4.19와 5,16 사건들이 터지기 전까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도 하고 친척들 간의 유대강화를 위해 식사대접도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살았다한번은 아이들과 외출했을 때 미도파백화점에 들른 적이 있다예쁜 인형을 보고 은명이가 몹시 가지고 싶어해 값을 물어보니 꽤나 비쌌다점원 말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수입해 가지고 온 것이라 값이 좀 비싸다고 하였다.  금액을 생각하면 어린 딸을 위해서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내가 보아도 너무 예쁜 인형이라 은명이에게 그것을 사주었다어린 시절에 선물 받았던 인형이라 그런지 은명이는 그 인형을 마치 동생같이 사랑했고 나이가 든 후에는 옷도 만들어 입히고 이불도 만들어 덮어주는 등 정말 애지중지하더니 결국 17살에 이민을 나오면서도 그 인형을 가지고 나왔다

              브라질에 가서는 공부하랴 일하랴 너무 바빠서 인형을 들여다 볼 사이가 없었다캐나다로의 이민수속을 끝냈을 때 나는 은명이가 그 인형을 캐나다까지는 가지고 가지 않겠지 하고 혼자 판단하여 브라질에서 가깝게 지내던 홍이네 엄마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그 인형을 주었다그 집에는 딸이 셋이나 있고 작은딸이 그 인형을 인계 받아 은명이처럼 그 인형을 잘 돌봐 줄 수 있는 적절한 아이라 생각되어 주었던 것이다나는 은명이 못지 않게 그 인형을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가는 그 인형이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훗날 이일을 안 은명이는 몹시 슬퍼하고 아쉬워했다말을 하면 가지고 가겠다고 할 것이 뻔해 인형에 대한 집착을 끊으라고 은명이에게 말을 하지 않고 인형을 다른 아이에게 준 것이었는데 은명이 마음을 너무나 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시련의 인생시작

 

              공장 문을 닫을 수는 없어 생산량을 줄이기는 했지만 돈암교 근처에 신축한 건물에서 타이어 재생공장을 계속 가동하면서 펌프공장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자금사정이 어려웠다그 때 우리는 은행 빚과 사채 쓴 것이 조금씩 있었는데 우리가 신축했던 건물을 팔면 이 빚들을 다 갚고도 이민 갈 여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하던 사업만 누군가에게 잘 물려주면 어느 정도의 돈은 마련할 수 있으리라 기대도 했었다그 당시 한국경제 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인지 남편이 하던 펌프공장인 대동공업주식회사(大同工業株式會社)를 인수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를 않았다이 일은 기술과 돈 모두가 있어야 했는데 그 때 당시 그런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해방 후 그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은 남북을 통 털어서 박성철 한 사람 밖에 없었다고 들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인재의 능력이 제대로 쓰여지지 못했었던 것이다그 당시 남편은 대동공업주식회사(大同工業株式會社)에서 한양공대를 졸업한 제자 두 사람을 그 분야의 기술자로 키우고 있었다남편은 그 사업을 맡아서 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두 제자들에게 맡기기로 결심을 하고 그 두 제자에게 가능한 한의 돈을 마련해 보도록 했다. 그래서 우리는 공장에서 손을 떼야 했는데 자기들이 일을 맡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이 공장을 계속 운영해야 하는 바람에 우리에게 줄려고 준비했던 돈을 회사 일이 급하게 되어 써버렸다고 하였다.

              남편은 하는 수 없이 자기가 마지막으로 자기 몫으로 펌프설치공사를 따내고 그 돈을 수금해서 우리 가족의 이민 여비를 마련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그런데 공사를 끝마친 뒤 돈을 수금해야 떠날 수가 있었는데 떠나는 날자는 점점 다가왔지만 수금은 되지 않았다사체 빚을 준 내 친구의 친구는 건물이 커서 잘 팔리지 않고 있자 자기가 직접 건물 살 사람을 구해서 데리고 왔다그 사람은 자기 빚을 청산한 다음 조금만 남을 정도의 금액으로 건물을 팔라고 졸랐다이민을 가기로 결정을 해 놓았으니 도리가 없었다집을 싼값에 팔아 사채와 은행 빚을 청산하고 조금 남은 돈으로 그때 마침 주인이 멕시코 대사로 나가 있어 비어 있던 집으로 알고 지내던 복덕방사람이 소개를 해 주어 그리로 이사를 했다남편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출발하는 날짜를 미루기로 하고 일부 돈이나마 받아 떠나는 가족에게 주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때 이민자들을 실어 나르던 배는 네덜란드 국적 화물선을 임시 개조하여 사람과 화물을 같이 실어 나르고 있었다.

              돈을 마련하는 것이 늦어지는 바람에 결국 우리 가족은 5차선을 타게 되었는데 네 사람의 뱃삯까지 지불하고 난 뒤 남은 돈 미화 400$을 손에 쥐고 이민선을 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두 제자 중 한사람에게 남편이 자기 몫으로 받기로 했던 돈의 수금을 부탁한 뒤 우리 가족은 부두가 옆 이민선 보이스배인이 정박해 있던 근처 다방에서 그가 돈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떠날 시간이 점차 다가와 나머지 식구들은 선창가로 데려다 놓고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제자가 돈을 가지고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배가 떠날 시간은 다되어 가는데 돈 가지고 올 사람은 나타나지 않으니 그 때의 그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그 때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결국 돈을 가지고 오기로 했던 제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미화 400$만 달랑 손에 쥐고서 우리 다섯 식구는 배로 두 달이 걸리는 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 제자는 돈을 수금해서 잠적해버린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이 일을 다시 돌이켜 생각 해 보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하고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는 아마 우리 식구들이 그렇게 가진 돈이 없이 떠날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한다우리보다 먼저 치과집 이양숙동서의 친정조카 둘이 이민선을 타고 떠나 브라질 상파울로에 정착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떠나기 전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놓고 떠났다이양숙동서의 조카 둘은 상파울로에 도착 즉시 일본사람들이 운영하던 농업협동조합에 취직을 했다고 하였다우리 식구가 브라질에 도착하면 그 두 사람이 우리 식구를 맞이해 줄 것으로 기대 했었고 실지로 그들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부산항 부둣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친지나 친구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수중에 단 돈 미불 400불을 가지고 다섯 식구가 그 먼 미지의 세계로 떠나면서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없다고 체념을 해버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되겠지 하고 희망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참 묘한 점이 있다한국 속담에 '억울하게 죽으면 죽을 때 빽 하고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을 가끔 느끼곤 한다배가 부두를 서서히 떠나면서 손에 쥐고 있던 오색 테이프가 한 가닥 한 가닥씩 끊어져 갔다그 때 심정은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 보내는 사람이나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만 같이 느꼈을 것이다할 말을 잃은 체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민선

 

              일본사람들이 처음 하와이로 이민  때와 한국사람들이 브라질로 이민  때와는 시간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가는 사람들의 질에도 차이는 많았다우리가 탔던 배에서는 '파도라는 책에서 읽었던 비참한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브라질의 산토스 항구까지는 두 달이나 걸렸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적으로 참 사치스러운 항해였다고 본다부산항을 떠나 배가 처음 정박한 곳은 일본의 오기나와섬  앞바다였다다음이 홍콩싱가폴말레이시아를 거치면서 각 항구에 배를 정박시켜 놓고 짐을 풀고 싣고 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항구에서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상륙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배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흙을 밟아보기를 원했었다.

나도 항구에 배가 정박한 후 상륙해도 좋다는 곳마다 가족을 데리고 내려 구경을 했다전 가족이 비싸지 않은 세계 여행을 한 셈이었다세진이만 배에서 절대 내리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아마 두 달 동안 꼬박 배에서 지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남아프리카의 수도 케이프타운에서도 상륙했었는데 식당에는 물론 공원이나 2층 버스에도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에 들어 갈려고 했는데 흑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어 우리가 들어가도 되는지를 물었더니 들어가도 된다고 해서 들어 간 일이 있다. 2층 버스는 아래층에는 백인만 위층에는 흑인만 탑승할 수 있도록 구별되어 있었지만 타보지는 못했다.

              그 때 들은 이야기로 흑인들이 도시로 나와 일은 하지만 살수는 없었기에 도시주변에 흑인들만 밀집해 사는 지역이 있는데 그 실정은 정말 비참하다는 것이었다나는 보이스배인을 타고 가면서 그 배의 총지배인 노릇을 하고 있는 Law라는 중국사람을 만났다 케이프타운의 흑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 이  Law씨에게서 들은 것이다정말 마음씨 좋은 이 Law씨는 내가 우리 가족이 떠나올 때 제자직원이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300불을 주면서 어려운데 보태 쓰라고 했다그는 그 뒤에도 우리 식구들이 상파울로에서 정착해 사는 모습을 찾아와서 지켜보아 주었고 남편과 연락하면서 우리 가족을 위해 적극적인 협력을 해 주었다배가 브라질의 산토스항에 도착했을 때 치과집과 이양숙형님의 조카 두 사람이 마중을 나와 그들이 머물고 있던 곳으로 일단 우리가족을 안내했다그들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그 다음날부터 그 들 두 사람은 낮에는 직장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동서남북도 모르고 말도 전혀 할 수 없던 우리 가족들에게는 브라질에서의 대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V. 브라질 이민생활 4년간 (1964-1968)

 

상파울로 생활(1965)

 

  옥경이와 작은  은명이는 한국을 떠나기  서강대학에서 박신부의  인도 하에 영세를 받고 영세명을 클라라소휘야로 받았다그 당시 브라질에는 일본사람들이 20만 명 가량 살고 있다고 들었다브라질에 온 일본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외부와의 접촉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은 브라질 말을 하지 못한다고 들었다대부분의 남미 나라들이 스페인말을 하는데 반해 브라질에서는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있었다일본사람들이 많이 모여 장사하고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 보았다브라질 말은 몰랐어도 일본어는 한국어처럼 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브라질에 정착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어떤 일본사람이 일본 사람들이 많이 나가는 성당을 알려 주면서 그곳에는 요시오까 신부가 계시다고 했다성당을 찾아가 요시오까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고 요시오까 신부님은 우리 식구가 상파울로에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성당과 일본촌이 가까운 곳으로 우리가족은 아파트를 구해 이사를 했다. 당시 브라질은 군인출신 대통령이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국민들에게 그는 별로 인기가 없다고 들었다최저임금제도가 실시되고는 있었지만 임금은 얼마 되지 않았고 인플레이션은 심했다최저임금을 받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브라질 현 주민이었고 그들은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돈이 없으니 자식들을 교육시킬 수 없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살고 있었다그러나 브라질에는 기후가 따뜻해 아이를 낳고 바나나 나무 한 그루만 심으면 그 아이의 평생 먹을 것은 해결된다고 한다입을 것과 사는 집에 큰돈을 들일 필요가 없으니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처럼 돈 벌겠다고 악착같이 날뛰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말에 "아마냥아마냥"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일로내일로무엇이든지 내일로 미루자는 말이다오후 2시만 되면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2시간 내지 3시간 동안 낮잠을 잔다브라질 현 주민들은 마냥 사람 좋은 사람들이었다거기다 기후까지 더우니 자연히 게을렀다처음에는 이러한 모든 것이 놀랍기만 했으나 그런 생활모습을 보는 것에도 차차 익숙해져 갔다브라질은 한국과는 모든 것이 반대였다심지어 밤하늘의 달도 초생달과 그믐달의 모양이 한국과는 반대였다아파트로 이사를 해 놓고 아이들 학교부터 찾아 수속을 했다우리 가족들 중에 한국에서 포르투갈말을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동도 서도 모르고 말도 모르는 이국 땅에서의 생활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옥경이는 상파울로 대학 영문과에 청강생으로 등록을 했고 은명이는 상업고등학교와 미술학교에 등록을 마쳤다. 세진이는 보통고등학교에 그리고 유진이는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시켰다한국을 떠날 때 옥경이는 서강대학교에서 1년을 공부했고은명이는 고 3, 세진이는 고2, 유진이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유진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직장을 가졌다.

브라질에는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대규모 농업협동조합이 2개 있었고  이 두 조합이 소유하고 있던 땅은 어마어마한 규모라고 했다두 조합 중 "고찌아조합"이 훨씬 규모가 큰 것이었고 치과집 이양숙동서의 친정 조카 둘은 이 "고찌아"조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소개로 옥경이와 은명이는 그 조합사무실에서 일하게 됐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 걸어서 몇 분 걸리지 않는 곳에 일본신문사가 있어 세진이를 데리고 찾아갔다내가 일본말을 잘하고 나의 이력을 말하면서 세진이를 그곳에서 일을 시키고 싶다고 했더니 즉석에서 세진이를 채용해 주면서 내일부터 출근해 사진부에서 일도 돕고 일을 배우라고 했다사진에 소질이 있었던 세진이는 여기에서 일하면서 사진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고  캐나다에 와서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암실을 만들어 놓고 혼자 사진 인화작업을 하곤 했다세진이는 이민생활을 하면서 이유 없는 반항을 할 10대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겠지만 한편 많은 것을 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이들 문제가 일단 처리된 뒤 나는 요시오까 신부님 소개로 일본인 2세 디자이너를 소개받아 그가 일하고 있던 브라우스만 만드는 소규모 봉재 공장에 취직을 했다공장에 얼마동안 다니면서 공업용 재봉틀 사용법에서부터 바느질하는 것까지 모두 내 생전 처음으로 43세에 배우기 시작했다. 1개월 정도 공장에 다니면서 배웠더니 숙달이 되어 나도 틀질이나 바느질을 잘 할 수가 있었다처음에는 공장으로 출근하여 일을 했었다그 무렵 일본여대 선배 한 분이 우리보다 좀 늦게 딸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을 와 우리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그 선배가 하는 말이 하루는 유진이가 나를 찾아와 "아주머니 나하고 밖에 좀 나갑시다"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하고 따라 나갔더니 같은 동네에 사는 브라질 이이들이 자기를 놀려대니 야단을 쳐 달라고 부탁하더란 다그 선배 말이 "내가 브라질 말을 아나 한국말로 냅다 야단을 쳤더니 다 도망을 가더라"라며 웃었다.

              이런 사건이 있은 뒤 나는 집에서 일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래서 낡은 재봉틀 한 대를 샀고 집에서 브라우스를 만들기로 공장 쪽과 합의했다얼마간은 브라우스만 만들다가 공장 쪽에서 브라우스 감 앞쪽에 주름 잡는 일을 해 보겠느냐고 했다큰 공장에서는 그 일을 기계로 하지만 규모가 작은 곳이라 삼이 재봉틀로 한 감 한 감을 박아서 그 일을 해야 했는데 그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주름 잡는 일을 시작한 뒤 처음에야 서툴렀지만 곧 숙달이 되어 여러 가지 종류의 주름잡는 일을 예쁘게 하면서도 빠르게 해냈더니 공장에서 무척 좋아라했다주름잡는 일은 브라우스만 만드는 것보다 수입이 훨씬 많았다그 공장에서 필요로 하는 양을 나 혼자서 다 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내 의견을 공장 측에 전달했더니 자기들이 일감을 배달해 주고 일을 마치면 자기들이 공장으로 가지고 가기로 하는 것에 합의를 보았다나는 집에다 주름잡는 공업용 기계를 샀고 그 결과 일의 능률이 많이 올랐다그 일을 해 보면서 나는 바느질에도 소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라질에서 우리가 살던 아파트 건너 편 건물 1층에는 빵 만드는 가게가 있었다그 집에 밀가루 빵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죠까라는 이름을 가진 칡뿌리 비슷한 식물 가루로 금새 구운 그 빵 맛은 어찌나 맛이 있든지 영원히 잊어버릴 수가 없다

              유진이가 우리 식구 중에서 제일 먼저 브라질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1년이 지난 뒤 학교에서 1등을 하기 시작 해 브라질에 있던 4년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아 상도 많이 받고 칭찬도 많이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브라질 사람들이 받는 최저 임금은 어찌나 적었든지 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브라질 사람을 고용해 청소와 빨래하는 것을 시켰다. 브라질 사람들은 더운 곳에서 태어나 자라서 그런지 동작이 대체로 느리다그들의 그런 태도는 우리 한국 사람들 눈에는 무척 게으르게 보였다브라질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아마냥"이란 말은 "내일로미루자는 뜻도 있지만 서둘지 말라는 뉘앙스도 담고 있다한국사람들이 잘 쓰는 "빨리 빨리"와 꼭 반대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브라질에 있는 쥐와 달팽이는 어찌나 크던지 달팽이를 대야에 담아 놓고  찍은 사진이 있다일본어에  "んて もだい "라는 말이 있는데 "だい "는 대미라는 생선을 일컫는 말이고 "んて "는 죽어도 라는 뜻으로 일본에서는 대미가 생선 중에서 제일 맛있는 것으로 간주된다그러나 브라질에서 먹어 본 대미는 그게 아니었다너무 맛이 없었다. 하지만 정어리는 한국에서 먹던 것과 같은 맛이 났던 걸로 기억한다왜 일까대체로 물이 다르면 맛도 달라지게 되어있다옛날에 아버지께서 우리 나라는 기후와 땅이 좋아 우리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다 맛이 있다고 하시던 말씀이 맞는 것 같았다나는 브라질 말로 아침점심저녁 인사말과 고맙다는 말 그리고 숫자를 먼저 익혔다남편 없이 아이 넷을 데리고 처음에는 상파울로에 정착을 했지만 브라질에 오래 살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래서 캐나다로 다시 이민 갈 것을 계획하고 남편과 연락을 취해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가족들 뒤를 따라 곧 온다고 하던 남편은 몇 개월이 지나도록 브라질로 오지 않았다가족을 먼저 떠나 보낸 후 뒷정리를 하여 몫 돈을 손에 쥐고  우리에게 오기로 했었다.

              그러는 동안 브라질 입국비자 기한이 끝난 것도 모르고 있다가 재 입국 수속과정에서 남편의 신원 조회를 했더니 서울대학병원 산부인과 과장을 지내다 6.25때 행방불명이 된 사촌형이 있었는데 신원조회 과정에서 그 문제로 물고 늘어져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몇 개월만에 풀려났었다고 한다. 브라질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걱정할까봐 말을 하지 않아 나는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남편이 빨리 오지 않아 애타게 기다렸었다. 이민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신원조회는 이민 수속을 밟으면서 이미 상세히 다 했던 일이고 비자가 기한이 지났으면 브라질 쪽에서 재심사를 해야 할 일이지 한국정부 쪽에서 그것을 문제삼아 자국민을 괴롭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우여곡절 끝에 우리가 브라질에 온 뒤 1년 8개월이 지난 후에야 남편은 상파울로에서 가족과 상봉하게 되었다그 때 캐나다로의 이민수속은 계속되고 있었고 캐나다 측에서 동경제국대학 시절 남편의 성적표를 보내라는 연락이 와 일본으로 연락을 취해 그것을 부쳐오는데 또 몇 개월이 지나갔다.

              성적표를 보내라고 한 이유는 캐나다 정부가 남편의 이민자격을 기술자로 규정하고 그 이민조건에 맞추기 위해서였다결과는 '엔지니어'로서의 자격을 받기 위해 일단 캐나다에 입국해 면접에 합격해야 한다고 했다다시 말하면 입국하기 전 캐나다의 기술자 자격을 먼저 받고 캐나다 엔지니어 자격자로서 다시 이민 수속을 하라는 것이었다어쨌든 이 과정을 거쳐 우리 가족은 브라질 체류 4년만에 캐나다로 재이민을 했다캐나다에 도착한 후 우리는 즉시 미국으로의 이민 수속을 했더니 이민 허가가 수개월만에 너무나 빨리 나왔다. 그런데 남편과 나는 신중하게 생각을 한 뒤 미국보다는 캐나다를 우리 인생에 있어 제 2의 고국으로 결정 내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그때 내린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국내에 있을 때는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외국에서는 그의 능력에 대해 인정을 받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브라질에서 고찌야 조합 기술고문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고찌야 조합 책임자보다 월급이 많았다. 일본사람들은 천황과 동경제대라면 조건 없이 고개를 숙이니 남편에 대한 대접은 각별했고 또 남편이 브라질에서 자기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고국 땅을 떠날 때에는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 더 넓고 열린 곳으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그러나 브라질은 우리가 살 곳은 아니었다당시 브라질에는 그 나라 원주민들은 무척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외국에서 이민간 사람들만 잘 사고 있었다우리가 브라질로 이민 수속을 할 때는 땅을 사서 이민자격을 얻는 지주이민으로 브라질에 들어갔었지만 그 땅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가 보지도 않고 브라질을 떠나왔다샀던 땅값은 사실 이민을 하기 위한 수수료로 지불되었던 것이지 처음부터 우리가족은 농사이민이 아니었다브라질 사람들은 순박해서 좋긴 하지만 누가 질문을 하면  언제나 긍정적인 대답만 하는 특색이 있었다예를 들면 길을 물었을 때 어디어디로 가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긴 하지만 그 방향이 틀린 경우가 많다.  그 사람들은 몰라도 절대로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이런 경우가 작은 일일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큰일인 경우 아주 황당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당시 브라질로 이민간 한국사람들은 바느질하는 일을 많이 했다. 그 중 특이하게 대구에서 직물공장을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하던 가족으로 훈이네가 있었는데 구슬가방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구슬을 끼워 핸드백을 만드는 일이었다훈이 어머니는 도량이 넓고 사람이 진실했다그 때 만난 이 후 그 사람과는 지금까지도 1년에 한번씩 꼭 서로 카드를 주고받고  있다브라질에 다시 한번 가 볼 기회가 있을지그 사람은 브라질에서의 소중한 추억 속의 한 사람이다.

 


VI. 카나다 이민생활 정착과정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캐나다로 재이민(1968 10. 12)

 

1968년 10월 12일에 토론토 공항에 도착했다그 때 우리가 처음 만났던 이민관은 너무나 친절하여 캐나다에 대한 첫 인상은 정말 좋았다당장 어디로 가야할 지 참 막막했던 우리 가족을 위해 그 이민관은 어떤 호텔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서 일단 그곳으로 가라고 하였다우리 가족은 공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이민관이 말해 준 호텔의 이름과 주소를 말해 주었더니 택시 운전수는 우리를 시내 다운타운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호텔로 데려다 주었다일단 그 호텔 방에 짐을 놓고 나오는데 "박선생님이시죠"하며 어떤 젊은이가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기대치도 않았던 한국말로 누군가 말을 걸어오니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 소개를 하였다시아버지와 같은 하자 돌림인 분이 자유당 때 총무를 지내신 분이 있는데 자신은 그 분의 사위라고 했다.

              남편이 한국에서 이 아저씨의 딸이 캐나다에 산다는 말을 듣고 전화번호를 알아내 가지고 있다가 캐나다에 도착한 즉시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낯선 이국 땅에서 친척 조카사위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 반가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그렇게 우연히 만난 이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나는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호텔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어 우선 우리 식구가 지낼 수 있는 방을 구하기로 했다우리와 같이 브라질에 이민 와 있던 박선생이란 분의 아들이 캐나다 토론토에 우리보다 먼저 와 있었다그 사람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어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집에 있었다우리가 있었던 위치를 말해 주었더니 자기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 곳으로 오라고 하였다그곳에 도착해 보니 그가 있던 집 근처 2층에 가구가 갖추어진 방이 있어 우리가족은 잠시 그곳에 머물기로 하였다.

              호텔비를 지불하는데 100$짜리 미화를 주었더니 호텔 종업원이 깜짝 놀라면서 자기는 100$짜리 미화는 처음 본다고 하였다그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100$짜리 돈 좀 구경하자면서 모여드는 것을 보고 우리가 오히려 그 사람들을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서양사람이면 다 돈이 많은 걸로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캐나다에서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임시 숙소에 짐을 옮겨 놓고 우리가 살집을 찾아 나섰다시조카 뻘되는 김씨는 우리보다 먼저 와 정착을 한 사람이라 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유진이를 데리고 김씨의 안내를 받으면서 아파트를 구하러 나섰다남편은 직장을 알아보느라 바빴고 딸 둘은 학교에 관해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우리가 캐나다로 올 때 세진이는 학교 문제가 어중간해서 나중에 불러 오기로 하고 혼자 브라질에다 남겨 두고 왔었다아파트를 구하러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다 거절당해 버렸다이유는 12살 된 유진이 때문이었다시조카 김서방이 나에게 제안을 하였다아이가 있다고 집을 빌려주지 않으니 좀 비싸더라도 새로 짓고 있는 아파트에 한번 가 보자고 했다그곳은 세인트 제임스 타운이라는 곳이었다.

              우리가 처음 갔던 그 때는 건물이 몇 채 밖에 지어지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큰 블록 전체가 고층건물들로 꽉 들어차 수만의 사람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아파트촌이다값이 좀 비싼 것이 흠이긴 했지만 새로 지은 아파트라 깨끗해서 좋았다. 32층 건물의 29층에 침실 3개 짜리 집을 빌려 그 때 돈으로 한 달에 250$씩 지불한 걸로 기억된다이 금액은 그 때로서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그래도 그 곳에 살기로 결정을 했다가구를 사기 위해서 신문 광고를 훑어보았다그 일은 남편 몫이었다누가 이사를 가면서 가구를 판다고 하는 광고를 보고 그 집으로 가보기로 했다쓰던 물건이었지만 가구들은 너무나 깨끗했다응접실과 방 셋을 채우는데 4,000$ 정도의 거액이 들었다새 아파트에 쓰던 가구를 둔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중고 가구들을 사서 배달을 시켰다한꺼번에 여러 가지 물건을 샀기 때문에 혼동이 되기는 했었지만 배달된 가구와 처음 본 것과는 분명히 차이점이 있어 시비가 벌어졌다나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다한번 가 본 길한번 만난 사람의 얼굴심지어는 한번 본 물건도 정확하게 기억한다는 점이다소위 말하는 눈썰미가 있다는 것이다이것과는 반대로 노래가사나 사람이름 그리고 영어단어를 잘 외우지는 못한다한 번 본 물건을 틀림없이 기억하는 내가 차이점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며 추궁을 하니 결국 가구를 팔았던 사람들이 사실을 말하고 말았다자기들이 보여 주었던 물건들은 쓰던 것들이 아니라 새것이었고 자기들은 가구를 파는 장사꾼이며 TV같은 것만 자기들이 쓰던 물건이라는 것이었다이런 경험을 통해 캐나다 사람과 우리 나라 사람들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신문에다 이사를 가기 때문에 쓰던 가구를 싸게 판다는 광고를 낸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백화점이나 가구를 파는 가게보다는 질이 좋은 물건을 비교적 싸게 팔고 있었기에 그 때 산 가구들은 오래오래 잘 사용했고 농과 그릇장은 지금도 쓰고 있다

 

              옥경이는 토론토대학에 가기를 원했지만 입학허용 연령 제한선이 넘어버려서 입학 허용이 안 된다고 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구대 수학과에 들어갔다수학과를 공부하다가 생물과로 전공을 바꾸더니 동물 해부하는 것이 징그럽다고 그만두고 결국은 토론토대학에서 인류사회학을 다시 시작해 퀘백시에 있는 나발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은명이는 라이어슨 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다학교를 다니면서 옷 만드는 회사에 취직을 했고 옥경이도 은명이와 같은 회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세진이도 쌍파울로에서 데리고 왔다세진이와 유진이는 쟈비스 고등학교가 집에서 가장 가까워 그 학교로 전학했는데 이 학교가 이름 있는 명문 학교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세진이는 브라질에 있을 때 배운 사진기술을 토론토에 와서 즐겼다.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어 현상과 인화도 본인이 직접 다했다그 때 찍은 사진들이 지금 보아도 아주 훌륭한 것들이 더러 있다유진이도 저도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하더니 우리가 살던 아파트 내에서 신문배달을 시작했다세대수가 꽤 많았기 때문에 자기가 쓰는 용돈을 벌어서 썼다.

              외국으로 이민을 나온 사람들은 개척자라고 나는 생각한다미국사람들이 영국에서 유럽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와 인디언들과 싸워가면서 광활한 땅을 개척했던 것만이 개척은 아니다새로운 땅에 발을 붙이고 언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낯선데서 하나하나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는 생활도 또한 개척이라 할 수 있겠다부모와 자식들이 모두 일치 단결하니 그리 어려운 줄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갔다나는 영어학교에 등록을 했다.  1주일에 5일 나가 영어를 배우고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42불씩 받아 가면서 공부를 하니 캐나다의 복지제도의 고마움을 절감했다.  대학까지 나왔어도 영어실력은 형편없어 ABC부터 시작했다.  내가 나가는 반에는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고 퀘벡주에서 온 불란서계 젊은 처녀도 둘이 있어 같이 공부를 했는데 내가 어찌나 열심히 했든지 그 아가씨들도 나에게 질세라 열심히 했다.

              1년을 이 학교에서 공부한 뒤 이 학교에서는 더 다닐 수 없어 돈은 받지 않으나 영어는 공짜로 배울 수 있는 다른 학교로 옮겨 1년을 더 영어공부를 했다공짜로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학교가 토론토 시내에 여러 곳 있었다.  토론토에 와서 꼭 영어공부를 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되는 이유가 있었다.  브라질에서 4년 살면서는 포르투갈 말은 일상용어 몇 마디 정도와 숫자만 배워 돈 쓰는데 지장 없을 정도였으나 브라질에 사는 일본사람들의 1세 대부분은 말을 배우지 않고도 일본말만 쓰면서 살 수 있었기에 브라질말을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남의 나라에 가서 그곳 말을 공부하지 않으면 수십년을 살아도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기에 나는 열심히 영어공부를 한 것이다.  그러나 어학공부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2년 동안을 영어공부를 하고 직장을 찾아 나셨다우선 브라질에서 배운 바느질하는 일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브라질에서 공업용기계를 사용해서 간단한 것을 해 보았지만 고급이상은 해 본 경험이 없는데 기왕 할려면 고급 옷하는 것을 배우겠다고 나선 것이 잘못이었다며칠을 시켜 보더니 안되겠다고 그만 두라고 하였다간단한 것들은 만드는 수에 따라 임금을 주기 때문에 시간당이 아니라 수량으로 임금이 지불되었다.  좀 해보니 여기서 배우는 것이 장래성이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일본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플라스틱을 녹여 선물용 물건을 만드는 공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가 있기에 가 보았더니 채용이 되었다단순노동이지만 양을 내야하는 일이기에 머리를 좀 써야 했다동작관리를 해야만 양을 많이 낼 수 있는 일이었다다른 사람이 하루해야 할 일을 몇 시간만에 해치우니 주인이 놀랐다나는 한국에서 한국 생산성본부가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기업경영학코스 6개월 과정 1회 졸업생이었다.  사업을 하면서 아무 경험도 없이 무작정 해 나오다 생산성본부에서 '기업경영학코스를 시작한다해서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즉시로 등록을 했다.

              그 때의 우리나라 사정은 참으로 어려운 형편 속에 있었다해방은 되었으나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 사람들이 손을 떼고 떠나고 나니 그 실정은 너무나 한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그야말로 국내에서 개척기가 시작되었던 때였다나는 이 때 6개월간에 결쳐 연수한 "기업경영학"를 평생동안 유용하게 잘 활용해 오고 있다이 때 내가 플라스틱을 녹여 선물을 만드는 공장에서 내가 한 방법은 동작관리를 해서 최대의 효과를 내게한 것이었다집에서 살림을 할 때도 물건관리를 철저히 했다그래서 우리 집은 항상 깨끗하다물건은 처음에 그 물건이 놓여져야 할 적절한 자리를 찾아 놓여지면 사용한 후에는 반드시 같은 자리에 놓도록 하였기에 항상 주위가 정돈이 되어 있는 것이다밤낮 치우고만 있지 않아도 항상 깨끗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나의 이런 습관의 결과이다.  그 공장에서의 일도 나에게는 장래성이 없을 것 같아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우리 아파트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병원 다이애트리 디파트먼트에 취직을 했다여기에 취직을 한 이유는 영어를 더 배우고 경험을 얻어 영양사자격을 얻어 볼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해서 보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한국에서의 생활은 육체 노동이 아닌 정신노동이었기에 몸이 육체적인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 견디기 힘이 들었다모두 합해 3년 정도 일을 해 보고는 일하는 것을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아파트 빌리는데 지불하는 돈으로 집을 사도 모기지를 물어 나갈 수가 있기에 그동안 저축해 놓은 돈으로 다운패이를 하고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이 토론토대학으로 갈 것을 생각하고 대학 가까운 곳으로 집을 찾아 다녔다.  집이나 사람이나 인연이 있는 법이라 지금까지 내가 살고 있는 알버니 이 집을 1970년 8월 달에 사서 이사를 했다지금까지 이 집에서 살던 사람은 유럽에서 이민 온 지 오래 된 사람들인데 하나 있는 딸은 결혼해서 따로 살고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2층 3층을 세 놓고 있었는데 세 준 사람들을 그대로 있게 하고 지하실을 개조하여 방을 만들고 그곳에서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젊은 사람들은 이민 오면 집은 안 사더라도 자동차를 먼저 사는데 우리 식구들은 차가 필요할 때는 택시를 이용하기로 하고 5년 동안 차를 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돈이 모이면 다운패이를 하고 집을 한 채 두 채 사 나갔다

              한 채를 더 사면 두 채 사는 것은 수월했고 세 채도 샀다.  남편은 직장에서 받는 돈은 따로 챙겼다.  나에게 알버니 집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을 하라고 하고 다른 집에서 나오는 돈은 저축을 해 나갔다.  집이 채가 되자 청소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는 집 청소를 사람을 사서 하자고하고 남편은 반대하니 의견이 상충되었다내 생각은 세 놓는 집들도 항상 깨끗하게 수입되는 것 중에서 지출을 하면 집을 더 사 나갈 수 있지만 자기 몸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는 없다고 했다내가 몸이 견디지 못하게 되니 남편도 어쩔 수 없던지 그 중 한 채를 팔아 뉴욕으로 갔다뉴욕에 건물들이 싸다고 한국사람 둘과 합자해서 큰 아파트 건물을 사더니 얼마 가지 못해 집 한 채 판 돈을 날리고 돌아 왔다우리 둘이는 다시 의논을 했다집을 사서 세 놓는 일이 힘이 드니 모기지 사는 일을 해 보기로 하고 찾아 나섰다.

              우리가 집을 사서 이사한 다음 해(1971년 3월 4시어머님이 돌아 가셨다는 급보를 받았다캐나다 이민수속을 다 해 놓고 누가 캐나다로 오는 편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시부모님은 큰 집 큰동서와의 인연으로 원불교에 나가신 지 오래 되셨는데 돌아가실 때는 천주교 영세를 받으셨단다우리 가족이 서울을 떠나기 전에 서강대학에서 옥경이와 은명이가 영세를 받았고 이 신부님이 집에까지 오셔서 가족을 위해 교리강의도 하셨기에 시모님 생각에는 가족들과 같은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큰시누와 사촌동서 한 사람이 천주교 신자였고 그들의 권유가 종교를 바꾸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유진이는 천주교가 브라질의 국교와 같이 보편화 되 있었기에 학교에서 영세를 받았지만 세진이는 지금까지도 아무 종교와도 인연을 맺은 일이 없다.  시모님은 천주교 공동묘지에 모셔졌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Eric Schwimmer - a biographic article

Google Gemini === You said Enquiery on Eric Schwimmer - My anthrologist brother in law. a secular Jew, originally from Holland before the 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