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되다: 일선과 이종만의 삶과 유산 (한국어)
이 에세이는 일선 여사의 회고록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에 제시된 삶과 철학을 탐구하며, 그녀가 내면의 평화를 향한 여정과 한국 및 세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헌신에 초점을 맞춥니다. 또한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이종만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미친 지대한 영향, 그리고 그의 "대동(大同) 정신"이 어떻게 일선과 그녀의 가족에게 세대를 이어가는 지침이 되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일선 여사의 일기 선집에서 얻은 정보들을 활용하여 그녀의 내면세계와 직면했던 어려움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합니다.
유년 시절과 대동 정신의 씨앗: 식민지의 유산
일선 여사의 회고록은 일제 강점기인 1922년 울산 용잠리에서 보낸 평화로운 유년 시절로 시작됩니다. 자연과 깊이 교감하며 보낸 그녀의 어린 시절은 순수한 평화감과 "지구가 낙원이다"라는 평생의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잔잔한 해변을 탐험하고, 조수 웅덩이에서 보물을 모으고,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보낸 이 목가적인 양육 환경은 그녀의 의식에 청정한 바탕을 마련해주었으며, 이는 훗날 삶의 난관들을 헤쳐나가는 초석이 됩니다. 어릴 적부터 시작된 독서 습관, 특히 일본인 교장 사택에서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으며 형성된 지적인 갈증과 위대한 이상을 품은 인물들에 대한 동경은 그녀의 삶에 목적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신선"이라는 신비로운 개념과 용꿈을 꾼 경험은 그녀의 영적인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으며, 이는 훗날 "일선"이라는 필명과 그녀의 영적인 삶의 지향점으로 이어집니다.
13세에 서울로 올라온 것은 그녀의 삶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녀는 도시 생활의 복잡성과 역동성에 매료되었지만, 동시에 식민지배 하의 고난과 불평등을 목격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녀의 아버지인 저명한 사업가 이종만은 식사 시간마다 "대동 정신"을 강조하며 그녀의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옹호하는 이 철학은 일선 여사의 정의감과 깊이 공명했으며, 훗날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협력하는 "세계 정부"에 대한 그녀의 비전으로 발전했습니다. 세계적인 기아 문제 속에서 미국의 식량 잉여가 바다에 버려졌다는 신문 기사는 그녀의 이러한 이상에 대한 헌신을 더욱 굳건히 했습니다.
1939년부터 일본 여자대학교에 유학하며 보낸 일선 여사의 학창 시절은 당시 조선인 여성에게는 드문 기회였지만, 동시에 일련의 독특한 어려움들을 안겨주었습니다. 일본 문화와 학문의 엄격함 속에 몰입하면서도, 그녀는 식민 지배를 받는 민족의 일원으로서 겪는 도덕적 복잡성과 내면의 갈등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내면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개인의 성장과 배움에 집중하는 것을 선택했으며, 이것이 궁극적으로 민족의 미래에 기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타니구치 마사하루의 "생명의 실상"을 접하면서 영적인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고 마음의 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엄격한 기숙사 규칙을 준수하며 몸에 익힌 정리정돈과 절약 습관은 그녀의 평생을 관통하는 견실한 생활 태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일선 여사의 유년 시절은 7남매 중 막내딸로서 아버지 이종만이 부자가 된 후에 일본 유학을 한 유일한 형제였습니다. 이종만은 일선 여사보다 나이가 많은 자식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대학에 다닐 때에는 아직 부자가 아니었기에 일선 여사만이 일본 유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일본 유학이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필요로 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배경은 '강점기'라는 일반적인 식민지 시대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일선 여사의 회고록은 주로 개인의 성장, 지적 탐구, 그리고 가족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일제에 의한 직접적인 부정적인 경험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녀는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깊은 고뇌와 괴로움"을 겪었다고 언급하지만, 개인적인 차별 경험을 상세히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그녀가 외적인 어려움보다는 내면의 정신적인 성숙에 더 집중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그녀의 가족이 누린 사회경제적 지위가 당시 다른 조선인들이 겪었던 혹독한 차별과는 다른 경험을 가능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 한국 독자들에게는 일제 시대의 협력 여부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지점입니다.
일선 여사의 남편인 박성철도 일본 도쿄 제국대학에 유학했습니다. 박성철은 부유한 집안 출신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에 진학했으며, 이는 그의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여줍니다. 박성철은 일본에 대한 일선 여사보다 더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자식들에게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캐나다 생활에서 일선 여사가 일본 식당에 가자고 할 때 박성철은 "왜 일본 식당에 가야 하는가"라고 따지곤 했다는 가족의 기억은 그의 내면적인 반감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일선 여사의 유년 시절과 일본에서의 경험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반면, 박성철의 경우는 일본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더 명확히 나타납니다. 이러한 차이는 두 사람이 겪었던 식민지 시대의 경험과 그들의 내면화 방식이 달랐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이종만: "아름다운 부자"이자 대동 사상가
이종만은 일제 강점기 한국 재벌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인물입니다. 1885년 울산 용잠리에서 태어나 1977년 9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부를 축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의 복지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아름다운 부자"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의 사업 활동, 특히 대동광업주식회사(大同鑛業株式會社)는 단순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조화롭고 풍요롭게 사는 대동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그의 삶은 "27전 28기"의 역경을 이겨낸 불굴의 투지이자, 더 높은 목적을 향한 헌신의 증거였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 중 하나는 금광 매각 대금 155만원 중 50만원(오늘날 약 3천억 원에 해당)을 "재단법인 대동농촌사"(大同農村社)에 출연한 것입니다. 이 재단은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30%의 소작료를 제한하며, 30년 후에는 소유권을 이전하여 그들의 장기적인 안정과 자립을 보장하는 파격적인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소작료가 50%를 넘는 경우가 허다했던 상황에서 그의 이러한 행보는 동아일보 같은 언론으로부터 "이처럼 갸륵한 독지가의 토지가 불행히도 157만 평에 불과하여 그 수혜 소작인이 겨우 연천, 평강, 영흥 3군의 153호에 그치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라는 극찬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그는 평양에 대동공업전문학교(大同工業専門學校)를 설립하여 산업 인력 양성에 기여했으며, 이 학교는 훗날 북한의 김책공업종합대학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대동광산조합 등의 사업체들은 하나의 통합된 "대동 콘체른"을 형성하여 이윤보다 사회적 복지를 우선하는 경영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이종만의 "대동 정신"은 전통 한국 사상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조화, 평등, 상생을 강조했습니다. 그가 남긴 "대동일람 서문"(大同日覽 序文)과 "대동교학회 취지서"(大同敎學會 趣旨書)에는 사심을 버리고 대자아(大自我)의 활연한 심경에 이르러 만물이 크게 하나 되는 이상 사회를 실현하려는 그의 철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물질과 정신의 조화로운 통합, 종교와 과학의 융합을 통해 인류의 행복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힘이 의(義)라"(군국주의)는 생각과 "부가 의(義)라"(착취적 상업주의)는 생각이 미래에는 하늘과 인류의 양심에 의해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며, 단순한 힘이나 부가 아닌 겸손과 봉사를 기반으로 한 "도덕 국가" 건설을 역설했습니다.
1949년 김일성 주석이 평양에서 소집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참석한 후, 이종만은 남한에 가족을 남겨둔 채 북한에 정착했습니다. 이는 민족의 통일에 대한 그의 변치 않는 헌신과,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가 그의 대동 이념을 실현하는 데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그는 북한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과 광업부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유일한 자본가 출신 인물입니다. 남한에서는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그의 이러한 행보는, 일선 여사의 회고록에서는 이념을 초월하여 대동의 이상을 일관되게 추구한 증거로 제시됩니다. 일선 여사는 학자들이 그의 행동이 비록 식민지배 하에서 이루어졌지만, 조선인의 진정한 경제적 자립과 삶의 개선을 위한 것이었지 일본과의 협력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을 인용하며 그의 친일 논란에 반박합니다.
일선 여사의 평화를 향한 여정과 대동 정신의 계승
해방 이후 일선 여사의 삶은 한국 전쟁과 민족 분단이라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펼쳐졌습니다. 그녀는 전쟁 중 투옥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비극을 직접 겪으며, 이념 갈등이 초래하는 비참한 결과를 목격했습니다. 어린 자녀들과 노부모를 이끌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가는 피난길에서 그녀가 보여준 회복력과 기지는 전쟁이 요구하는 인간의 강인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낯선 이들의 친절함, 예를 들어 군용 열차에 몰래 태워준 군인과 두부를 나눠준 사람은 그녀에게 인간 본연의 선함에 대한 깊은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전쟁의 깊은 상처는 그녀로 하여금 그러한 고통의 의미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들었고, 이는 갈등에 대한 해답을 찾는 평생의 탐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선 여사의 삶에서 가장 중대한 전환점은 1975년, 아버지가 북으로 떠난 지 27년 만에 평양에서 극적인 재회를 이룬 것입니다. 이 감격적인 만남에서 그들은 단순히 가족사를 넘어 통일된 조국의 미래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버지가 염원했던 민족 통일의 소명은 그녀 자신의 "천명(天命)"이 되었고, 이는 그녀의 남은 삶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평양에서 돌아온 후, 일선 여사는 캐나다 교포 사회에서 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초기에는 공산주의 이념이 아버지의 대동 정신인 평등주의와 더 부합한다고 보아 어느 정도 공산주의에 대한 동정적인 시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통일 운동 내부의 파벌주의와 그로 인해 가족(특히 아들 세진의 항의 편지와 사위의 강력한 반대)이 겪는 어려움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녀는 진정한 평화는 정치적인 수단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일기에 따르면, 이 시기는 정치 단체 내의 갈등과 "영광과 치욕, 시기와 질투"에 대한 환멸로 점철되어 있었고, 이는 그녀로 하여금 더 깊은 영적인 길을 모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일선 여사의 개인적인 여정은 외부 정치 활동에서 내면 영적 발전으로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기 수련과 명상 등 다양한 영적 수련을 통해 깊은 치유를 경험하고 보편적인 에너지와의 연결감을 높였습니다. "100% 긍정적 사고"는 현실을 창조하는 의지의 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확고히 하는 핵심 원리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자녀들과의 상호작용, 특히 딸 반아의 "감성적 독립 선언"과 그에 따른 감성 치유 과정은 진정한 관계와 사랑에 대한 그녀의 이해를 더욱 깊게 했으며, 단순한 가족 관계를 넘어 "도반(道伴)"으로서의 영적인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경험들은 삶의 덧없음과 내면의 평화가 지닌 중요성을 끊임없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1964년, 재정 사기로 인해 수중에 400달러(또는 그녀의 일기에는 200달러로 기록되어 있음)만을 가지고 네 자녀를 데리고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 것은 한국에서 누리던 중산층의 삶에서 노동 계급으로의 극적인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한국에서 공장 관리자를 지냈던 '신여성'이었던 일선 여사는 브라질에서 집에서 재봉일을 하는 '내직 노동자'로 3년간 일하게 됩니다. 이 육체노동은 그녀에게 평생 어깨 통증을 남겼지만, 동시에 "노동의 진미"를 깨닫게 하고 진정한 일의 의미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힘든 이민 생활 속에서도 그녀는 일본의 평론지 세카이를 읽으며 지적 호기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캐나다로 재이민 후에도 병원에서 청소 일을 하는 등 육체노동을 계속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일선 여사에게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그녀는 이를 영적인 성장과 진정한 인간 경험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64년 브라질로의 갑작스러운 이민 결정은 가족 내에서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었습니다. 일선 여사의 회고록에는 "자녀들의 장래를 위한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자녀들은 이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강화된 반공 체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선 여사의 아버지 이종만이 북한으로 월북한 사실은 남한 사회에서 가족에게 상당한 정치적 불이익과 미래의 제약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선 여사의 남편은 일선 여사와 자녀들이 먼저 이민을 간 지 1년 반이 지난 후에도 출국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이종만의 월북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이민은 잠재적인 정치적 위험을 회피하고 자녀들이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략적인 결정이었을 수 있습니다. 일선 여사는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 재정적 사기를 당해 거의 무일푼이었지만, 그녀는 이민선에서나 브라질 정착 초기에 자녀들에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각오와 자세"로 이민 생활에 임했으며, 이는 그녀의 강한 의지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2006년, 84세의 나이에 그녀는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제주도에 정착했습니다. 이 결정은 그녀의 운명이자 평화를 위한 평생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라고 믿었습니다.
미래를 향한 비전: 힐링 가든과 홍익 리더십
일선 여사의 회고록은 개인과 인류의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그녀의 비전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녀는 진정한 평화가 내면의 변화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하며, "자신과 타인을 알고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그녀의 철학은 한국의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대동(大同) 정신"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원칙들을 체현함으로써 개인이 인류 의식에 기여하고, 전 세계적으로 평화의 물결을 확산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주도에서의 그녀의 개인적인 사명은 자연과 연결되고 내면의 평화를 찾으며 총체적인 치유를 경험할 수 있는 안식처인 "힐링 가든"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이 계획은 그녀가 토론토의 정원에서 평화로운 환경이 지닌 변화의 힘을 목격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더불어, 그녀는 대동 정신을 체현하고 세계 평화에 기여할 미래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국제 홍익 리더십 학교"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그녀의 아버지인 이종만의 "대동교학회"의 현대적 발현이며, 그의 비전이 시대를 넘어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일선 여사의 회고록은 한국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한 간절한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그녀는 북한의 행복이 남한의 행복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진정한 통일은 정치적 이념과 차이를 초월한 한민족의 "마음의 통합"에서 비롯될 것이며, 이것이 곧 더 평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녀의 삶은 회복력, 영적 성장, 그리고 이상에 대한 변치 않는 헌신으로 특징지어지며, 평화의 변혁적인 힘과 대동 정신의 영원한 유산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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