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versation with Gem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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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다녀와서
이남순 (1)

우리 조국이 양단 우리 자신들은 알 바 없었고 그 후 30년 타의에 의해 양단된 국도와 민족은 또다시 파력을 빌려야만 통일이 될 것인가? 이남순 여사는 토론토에 사시는 캐나다 한국계 캐나디안이며 가정주부이다.  여사는 지난 여름에 북조선에 계시는 90고령의 아버지를 찾아서 동경, 북경을 거쳐 평양을 방문 아버지와 동생을 30년 만에 만나고 돌아왔다. 이하 여사의 평양방문 수기이다. 본지는 변천하는 국제정세 하에 이북의 생생한 농도들의 소식을 소개하고 동포애로써 상호이해를 돕고자 여사에게 청탁하여 이 수기를 게재한다는 것이다.


수기를 쓰는 목적

평양을 다녀온 후 많은 분들이 다녀온 얘기를 듣고 싶어 하나 이러한 것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전체적인 것을 다 얘기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이 날에 사는 우리 동포들에게는 이북 얘기는 "타부"가 되어 왔기에 이 문제를 취급하는 데 적이나 신경을 쓰고 심사숙고했다. 이것을 현재의 실정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해버리면 고만 이것만 앞으로는 그렇게 나갈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 "노기대장과 스디엣세투"에 대한 노래를 배웠는데 젊은 분들은 이 노래의 내용을 모를 것이지만 40이 넘은 분들은 아실 것이다.

일오전쟁 후 여순방에서 두 적의 대장이 화해의 악수를 하는 장면을 노래 부른 것인데 "어제의 적은 오늘의 우인"이란 뜻의 노래다. 이차대전 때 일본은 "귀축미영(鬼蓄 米英)"을 부르짖었으나 패전 후 적국이든 미국은 일본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두 나라의 유대는 매우 강하다.

유엔에서의 한국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론은 우리 자신들이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해관계를 달리하고 피가 다른 남의 나라끼리도 싸울 때는 싸워도 타협할 때는 타협할 줄 아는데 이 매기를 같이 하고 한 핏줄기인 우리 동포가 언제까지나 갈라져 싸워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문제 해결의 중점을 민족 제일주의, 민족 우선주의로 한다면 동족 간에 있어서의 피상적이고 부분적인 이해관계는 초월할 수 있다고 보고 서로가 미워하고 불신하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 민족의 자손만대를 위해 서로를 이해하고 손잡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기원하면서 이 수기를 쓰는 것이다.

내가 평양에 가게 된 동기

작년 (1974년) 말에 우연히 들여다본 북에서 보내온 통일신보는 그 후의 나의 생활에 큰 변동을 가져왔다.

이 날에 사는 나의 친가에서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을 계기로 북으로 가신 아버지의 생사는 알 바 없지만 하도 오랜 세월이 지났고 해서 생일을 기일로 정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하셨는데 그 아버지께서는 90고령의 지금까지 건강하게 생존하고 계시다는 아버지 자신의 수기였다. 1974년 11월 15일 자의 통일신보를 들여다보는 나는 이종만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어 무심코 지나려다 동지에 게재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 날부터 여러 식구가 있으니 얼핏 알아볼 수도 없었으나 어쩐지 가슴은 설레고 읽기 시작한 수기는 한 줄을 읽는 것이 어찌도 그리 더디든지 읽어 내려가면서 대동광업에 대한 말이 나오고 내가 알던 사연들을 읽었을 때 내 심장은 뛰기 시작했으며 긴 숨을 내쉬고 나니 하염

북경 호텔에서 3박 4일을 머무는 동안 붉은 광장, 고궁, 만리장성, 지하능, 백화점 거리 등을 구경했다. 고궁과 지하능 등을 구경한 뒤 나는 중국에서의 혁명의 필연성을 깨달았다. 중국 칠억 인구가 완전히 식생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느꼈다. 나는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 과거의 이 땅의 사정과 비교해 볼 수는 없으나 책에서 파리가 없다는 것을 굉장히 신기하게 쓴 것을 읽었기에 참말로 파리가 없나 하고 호텔 넓은 식당을 두루 살펴보니 한두 마리는 보인다.

호텔 종업원들은 거이가 20대 청년 남녀고 간혹 나이 든 사람도 보인다. 이 호텔에서는 전혀 외국 상품은 팔지 않았다. 세계 각국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옷차림은 한결같이 검소하다. 중국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는 주 전연 색깔을 볼 수 없고 별로 미소를 짓지 않으나 서두르지 않는 것이 특색이었다.

시민들의 교통수단은 버스와 자전거, 지하철은 지금 건설 도중에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같이 소비 제품을 많이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백화점에도 물건이 많지 않았다. 출퇴근 시의 자전거 대열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드디어 평양에 도착하다 

북경과 평양 사이에는 1주 2회 비행기 왕래가 있으며 갈 때나 올 때나 구름이 끼어 국경인 압록강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유감이었다.

평양의 인구는 85만 명 변두리까지 넣으면 약 150만이라고 한다. 일본말은 내가 알아들으니 귀에 먼저 들어와서 그런지 이 호텔에는 적으나 일본 사람 수가 많은 것 같았다. 계획해서 만든 근대 도시라 도로도 넓고 깨끗하고 가로수로 심어진 수양버들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보통강가에 자리 잡은 안산 호텔에는 외국 사람들을 위한 외국제 술, 담배를 팔고 있었다. 호텔 음식은 양식, 한식. 이 지대는 일제 시에는 사람이 살 수 없었던 곳이라 해서 이름이 "안산 여관"이라 붙였다. 옛날의 화신 백화점이 평양시가지에서 남은 유일한 건물이어서 기념물로 수리해서 남겨놓았다고 한다. 모란봉 산기술에 여든 건물들이 더러 있는데 그것도 전쟁 전의 건물이라고 하며 그 외에는 전부 다시 지었다고 한다. 평양에서 큰 건물은 어린이궁전, 혁명박물관, 평양체육관, 평양대극장, 인민문화궁전, 방송탑 등 규모도 크고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다. 시 중심가의 건물들은 대개 5, 6층이나 나의 아버지가 살고 계신 집은 일제 시대의 일본 사람들이 살던 관사와 같은 집으로 단층이었다. 1954년에는 이 집이 굉장히 좋은 집이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었고 난방은 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더운물을 이용해서 하고 있었다. 교통기관은 버스와 전차, 지하철, 낮에는 거리가 아주 조용해서 사람이 많이 안 사는 것 같으나 출퇴근 시간에는 거리가 복잡하고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짓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 어떤 분이 평양시의 지도를 사겠다고 했으나 평양시에는 파는 지도가 없어서 놀랐다.

(원산 남쪽 동해안 하이웨이 해안의 철조망이 눈에 띈다)

(다음 호에 계속)

평양에 다녀와서 이남순 (3)

(4페이지에서 계속) 

방송국에 관한 내용 

 평양에는 평양방송국과 낭송국이 있고 신문은 중앙노동신문과 평양신문을 보았는데 그 외에는 없는지는 모르겠다. 각군에는 중국, 모에는 도 방송국, 큰 도시 그 도시의 방송국이 따로 있다.

소나고 부드는 별장들이 대동강변만 해도 적 많고, 노템(이것도 휴양소 나간다)들도 많이 보였다. 금강산 백두산에도 이와 같은 휴양소가 많아 근로자들은 1년에 한 번씩은 유급휴가를 받아 휴식을 하러 간다고 한다.

지금에 갔다가 부인들이 과수원에 서 생산 안한 것의 잉여 자유란 살 수 있게 되어있다 어떤 것을 완전히 금하면 암거 생겨서 이를 자유 판매케 했다. 월급은 최저가 70원 내지 80원이고 높은 사람은 300원 이상 받는 이가 있는데 고유직종을 닫는 직종은 기술사, 예술인, 작가들이 수입이 많고 중앙의원(국회의원)이 300원 이상, 대학 나온 강사급이 100원 정도 병원 간호부장급이 100원 정도, 동사 간장들도 많지는 않고 30원 보수가 있다고 한다. 행용은 과거의 충농정도의 생산이었고 아직까지는 기업에서 돌리는 농도 배당받은 농도는 재산을 인식 안 하고 이 끼띠며 상업적인 것을 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수백만 원의 은행 저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별로 쓸 곳은 없는 것 같았다. 5명 가족에 월 100원 정도면 최저 생활이 된다고 하였다. 기타 의복, 오락비, 아이들 용돈 등이 드나 부부 두 사람이 일하면 반 정도는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여기서 사는 사람으로서의 사고방식이고 교육, 의료가 모두 무료니, 무슨 필요 있어 저축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제도는 철저한 대가족 제도이고 복장은 간소하게 하나 의외로 세련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 것을 반대해서 화장터를 만들어 놓았으나 문을 닫고 쓰지 않는다고 한다. 전부 매장을 한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이 직장 가고 나면 노인들이 집을 지키는 것은 여기와 마찬가지이나 아이 보는 것은 탁아소, 보육원이 잘 되어 있어 여기서와 같은 노인들의 고원은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오락은 영화관, 극장, 오페라, 음악 그 외 구역마다 써클들이 있어 낯선 곳에서도 오케스트라 댄스도 즐긴다 하나 워낙 일손이 모자라는 곳이라 높고 지낼 시간의 여유는 많지 않은 것 같았다. 9월 9일 TV에서 9.9절 (건국기념일) 행사도 인민 광장에서의 경축과 피로연에서 만여 명의 남녀 군무(오케스트라 댄스)는 장관이었다. 음악은 도라지타령, 아리랑과 같은 민요곡도 하고 속도가 빠른 행진곡도 반주되었다. 이날 밤을 새우며 놀기 때문에 다음 날은 다들 일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땅에서는 우리 민족이 고래로부터 지켜오던 설, 추석, 단오 명절이 9.9절 (건국기념일), 10월 1일 당 창설 기념일이 명절이라고 한다. 노인들을 극진히 위하는 대가족 제도를 비롯해서 그간 이곳 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더듬어 볼 때 이곳에는 유교식 공산주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동무, 엄마 동무 한다고 하는데 웃으면서 설명이 부부간에 동지적 결합을 한다는 말을 해도 아버지 동무, 엄마 동무 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여기는 너무 자유가 없는 것 같다고 한다. 남북이 갈라져 있으니 부득한 사정도 있거니와 자본주의 사회와 근본적으로 자유에 대한 개념이 다르며 사회가 발전해 갈수록 더 제일 것이다. 내 생각에는 자유가 없는 대신 나쁜 짓 할 자유도 없기 때문에 범법자는 적을 것 같았다. 11년제 의무 교육, 무료 의료 시설, 무 세금 하면 백성들의 기본적인 부담은 다 해결된 셈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 여사는 의용군에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된 동생과 그의 부인, 북의 조카와 새 동생 그리고 조카들을 만났다.)

(전호에서 계속) 교육에 관하여

평양에 다녀와서 이남순 (4)

가야금 상고, 아토떠온 기타, 수예, 자수, 기제수, 재봉실, 남자아이들을 위한 운전 연습, 선반기 사용법, 라디오, TV 실제 다루는 일 기타, 지육(탁구, 복싱, 기계체조) 등 어린이들이 가진 재능을 살리기 위해 가르치고 있었다. 이 땅에는 왕이 없으니 어린이들이 용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년 궁전, 어린이 궁전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김대에는 시설이 아직 넉넉지 않은 것 같으나 그들의 탐구하자는 임성은 그 부족을 커버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cite: 8https://www.google.com/search?q=2] 탁아소, 보육원, 나생소년궁전, 김일성대학을 구경했는데 내가 본 탁아소는 000명을 수용한다고 하며 연령은 각승 이 탁아소는 집을 떠나 오랜만에 있는 어머니들, 지방 공연을 나가는 연예인 또는 지방 출장이 잦은 직업을 가진 어머니들을 위해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밤낮 맡아 준다고 하며 각 아이들은 그들의 카드가 있어 상세히 기록되고 이 기록은 돌아온 어머니가 그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서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각 아이들의 신체와 심리 상태, 적성, 특성, 소질 등을 알아내는 데 도움이 되며 대학 진학 시 전공 선택도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많이 살피라고 권고한다고 한다.

이북 사람들은 국민 학습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각 가정에서는 한 단위로 직장에서는 식당 단위로 일요일, 토요일 반나절을 학습 노트를 간다고 하며, 공원 나무 밑에서 젊은 남녀들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어디 가나 볼 수 있었다. 공장에서는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할 수 있게 공상대학이 있어 그들의 전문 지식과 교양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학생 궁전에서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과외 공부하는 곳인데 여자아이들을 위한 무용부 (고전 무용, 발레), 기악(바이올린, 피아노, 가야금, 서양 기타), 수예, 자수, 기계 수, 재봉실, 남자아이들을 위한 운전 연습, 선반기 사용법, 라디오, TV 실제 다루는 일 기타와 체육 (탁구, 복싱, 기계 체조) 등 어린이들이 가진 재능을 살리기 위해 가르치고 있었다.

(사진: 다시 만난 형제, 그러나 그들은 또 헤어져야 했다. 아버지, 동생 그리고 이북에서 출생한 동생과 나란히 서서) (사진: 평양을 방문한 캐나다 경제 시찰단과 같이)

예술

나는 오페라 극장에서 몇 편의 가극을 보았다. 모든 그녀의 작품은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테마로 한 것이었다. 건설적이고 진지하며 너무나 강력한 충격을 받았다.

무대 장치의 아름다움과 연기의 높은 숙련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일제적 낭만적인 무대 장치는 모든 외국 사람들의 경탄을 받을 만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장지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또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30내지 40이상으로 보이는 높았다.

TV에서 남성 이중창, 4중창, 여성들의 4중창, 합창을 보았는데 미카 린다, 눈이 온다, 바닷물이 출렁인다, 인파, 개울물이 흐른다, 녹고수가 떨어진다 하는 것이 꼭 실제와 같이 보였으며 구름도 자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장치되어 있었다. 어린이들의 기악 연주 솜씨에도 놀랐다. 우리 백성들은 이렇게 재능이 많은데 과거에는 이런 재능을 펼칠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공업

이북은 지하 자원이 풍부하니 중공업 발전에 지장이 없다. 모든 공장에서는 공작기계부터 다 자기 손으로 만들어 쓴다고 하며 섬유 공업도 발달해 의복의 자급자족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만 색감이 너무나 유치했다.

민족의 앞날

내가 이북을 다녀오면서 생각한 것은 매일매일이 건설하는 것으로 새 삶을 보내는 이 사람들이 자기들 쪽에서 이루어진 것을 자국을 더럽히는 결과가 오는 전쟁은 안 날 것이라는 점이다. 또 내 생각으로는 이남의 농도들도 이 짓는 전쟁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난다.

내 조국이 남쪽의 넓은 농토와 발달된 경공업, 북쪽의 중공업이 하나로 뭉쳐 우리 민족에 이바지한다면 세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마치 부잣집 자식들이 무능 부자 되듯이 무능력한 사람들을 만들어 내기 쉽다. 계획 사회 제도는 국가를 공업화하는 가장 빠른 길이고 공산주의는 이 길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자유 경쟁에서는 이윤을 따지기 때문에 공해 문제 해결은 도저히 불가능하나 모든 국가들이 노력해야 한다면 이 공해는 인간의 건강을 파괴하고 인간성 상실은 인간의 정신을 파괴할 것이니 우리 국가는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의회 민주주의 사회의 발전, 물심 양면의 발전, 자연 과학과 심령 과학의 통일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영 원한 발전에의 길이고 인류의 이상의 길이 아니겠는가. 같은 형제 싸우는 것을 그만하고 화해를 해야 할 시기는 왔다. 서로 욕하는 것을 그만하고 손을 잡고 나가자. 남들도 주저하지만 민족인 우리는 어려운 점이 많더라도 극복해 나가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