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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로동신문 1984년 12월 10일자에 실린 리종만(이종만) 선생의 일대기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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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동신문 1984.12.10 리종만 선생 일대기
2월 10일 (일요일)
민족 대단합의 길에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리종만선생을 한품에 안아주시고 베푸신 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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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인 1977년 1월 10일이었다. 이날 로동신문에는 조국인민주의전신 중앙위원회에서 발표한 하나의 부고가 보도되었다. 그것은 반선의 시기에 대한 것이었다. 경상남도 울산군이 고향인 리종만선생은 전에 서울에서 큰 기업활동을 벌였다. 그가 경험한 대동공업주식회사는 전국 각지에 10여 개의 정신과 수리개의 광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늘 주식회사에는 수백만 명의 토지가 있었다. 그는 이 외에도 예불광 전문학교를 비롯한 10여 개의 교육 기관과 관사도 경영하였다. 해방 후에도 허종한 선생은 남조선에서 여러 유산들과 농장들을 운명한 바 있었다.
이렇듯 리종만 선생은 수백만장자의 족자본가였다. 바로 이러한 남조선 출신의 민족 자본가였던 선생이 아무런 구속 없이 조국 품에 안겨 한 생을 보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신문에 부고도 크게 실리고 대국지사로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끌어주신 믿음과 사랑에 대한 참으로 가슴 뜨거운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
(1)
리종만 선생의 서거에 대한 부고가 보도되기 하루 전날인 1월 9일에 있은 일이었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리종만 선생이 서거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비통함을 금치 못해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보고를 가지고 온 일군에게 내가 리종만 선생을 잘 알고 있다고 하시면서 그의 상례를 잘해 주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었다. 이렇게 말씀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 서기국에서 사업하고 있는 한 일군을 부르셨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의 부친과 리종만 선생 사이에 오랜 깊은 친고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이미부터 잘 알고 계셨다. 그런 것만큼 그 일군을 장례식에 보낸다면 유가족들에게 더 위안이 될 것이라 생각하시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부르게 되셨던 것이다.
그 일군이 방에 들어서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금 기다리던 중이라고 하시면서 자리에 앉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리종만 선생이 어제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무를 오라고 하였습니다. 리종만 선생은 참 애국자이었습니다. 그는 민족적 지조가 매우 높았습니다. 해방 전에 리종만 선생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큰 기업가였으나 일본 놈과는 담을 쌓고 있었으며 민족적 양심과 지조를 지켜왔습니다. 해방 직후에도 리종만 선생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식민지화 책동과 민족 분열을 반대하는 애국 투쟁에 헌신하였습니다. 리종만 선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 일도 많습니다. 그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지하 자원 개발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옛 일을 미안해하며 리종만 선생을 추억하시는 듯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었다. 한 민족 자본가를 잊지 못하시며 그리도 높이 평가해 주시는 경애하는 수령님을 우러르는 일군의 가슴에는 세찬 감동의 파도가 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어서 다시 말씀을 이르시었다.
"<리종만 선생이 그렇게도 조국 통일의 그 날을 보지 못하고 간 것이 가슴 아픕니다. 리종만 선생의 장례를 잘 치러줍시다. 나는 가지 못하지만 나 대신 동무가 가서 유가족들에게 나의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하여 주시오. 그리고 나의 명의로 된 화환도 보내고 신문과 방송에 부고도 내도록 합시다. 리종만 선생의 장례는 정부 위원회에서 담당하도록 하고 모든 장례 비용은 국가 비용으로 합시다.>"
리종만 선생이 세상을 떠난 데 대하여 그토록 이서 하시고 그의 일생에 큰 관심과 자신의 명의로 화환도 보내 주시고 조국과 민족을 아는 애국지사로 그의 이름이 남도록 하여 주시는 위대한 수령님. 경애하는 수령님의 크나큰 은정이 담긴 말씀을 한자 한자 받아적어 가는 일군에게는 28년 전에 리종만 선생이 수령님을 처음 만나 뵙던 감격적인 장면이 눈앞에 뜨겁게 떠올랐다. 민족의 태양이시며 진실한 영웅이신 위대한 김일성 장군님에 대한 깊은 경모의 정을 품고 리종만 선생이 공화국 북반부로 들어온 것은 1949년 6월이었다.
그의 8월 25일 평양에서는 전국적인 통일 전선 조직인 조국 통일 민주주의 전선 결성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날로 심각화되어 가는 미제의 식민지화 책동에 대항하여 애국 역량을 결속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의 한 고미로시 소집하신 대회는 북과 남의 70여 개의 정당, 사회 단체들을 망라한 역사적인 대회였다. 리종만 선생은 해방 후 남조선에 조직되어 있던 <남조선 민족 해방 동맹> 위원장의 자격으로 이 역사적인 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왔다. 그가 회의장인 모란봉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북과 남에서 모여온 70여 개의 대표들로 장내가 가득 차 있었다. 오후 3시가 되었을 때였다.
주석단으로 나오신 위대한 김일성 동지께서는 자리에 앉으신 다음 허헌신 선생을 비롯한 옆에 앉은 성원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시고 나서 밝으신 안색으로 참가자들을 살펴보시며 리종만 선생을 주석단으로 부르시었다. 누구도 움직이라는 사람이 없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시 웃으시며 유심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남조선에서 온 대표들 가운데 리종만 선생이 왔으면 주석단으로 올라오십시오.>"
순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리종만 선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여 엉거주춤이 서 있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재촉을 받고서야 그는 주석단으로 나오게 되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석단에 오른 리종만 선생이 옷깃을 여미며 인사를 드리려 하자 일어서시어 그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고령이신 분이 먼 길에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았겠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하고 먼저 위로해 주시는 것이었다.
리종만 선생은 참으로 면목이 없었다. 이런 과분한 인사까지 받고 보니 송구스러웠다. 그는 감격에 목이 메어 "<장군님! 장군님을 뵈올 자격도 못 되는 제가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긴 세월에 나라를 찾아주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하는 인사의 말씀도 올리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의 참가자들에게 리종만 선생을 소개하시고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 주시었다. 그러시고는 온화한 웃음을 지으시고 잘 왔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었다.
순간 리종만 선생은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출발하면서도 한가닥 지워지지 않던 생각, "공산주의자들이 나를 과연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던 걱정이 깨끗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었다. 사실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기 전까지만 하여도 민족 자본가로서의 남다른 과거를 가진 리종만 선생의 심중에는 위구심과 초조감이 없지 않았다. 일제 시기 큰 기업 활동을 하고 있던 그가 반일 감정을 품고 일제와는 담을 쌓고 있게 되자 일제는 그들의 손에 넣으려고 여러 번 위협하면서 구실을 만들어 강급하기도 하였고 또 그에게 중추원의 상의를 권고하기도 하였다. 리종만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선택만으로는 자신을 위로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자본가인데 왜놈의 밑에서 큰 기업을 운영하지 않았던가?..."
리종만 선생은 무시로 갈마드는 이 자책으로 하여 한 해 전인 1948년 4월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남북 조선 정당, 사회 단체 대표자들의 연석 회의에 참가하라고 보내 주신 초청장을 받고도 필경으로 길을 옮겨 놓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 선뜻 평양으로 걸음을 옮겨 놓을 용기를 내게 된 것은 해방 후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을 평양에서 직접 만나 뵌 김구 선생 같은 이들의 물려준 이야기에서 받은 충격이 컸다. 김구 선생이 어느 날 남북 연석 회의 이후 어지간히 접촉이 잦았던 리종만 선생을 만났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한다면 사상이나 종교의 소속, 재산의 유무, 직책 불문하고 반드시 김일성 장군님의 두리에 단결해야 하오. 나는 이전에 공산주의자들이란 무정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번에 가보니 도량이 크고 담대하기 비할 데 없다는 것을 알았고, 김 장군님과 같으신 분이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것을 나는 이번에 내 눈으로 실지 보고서야 진심으로 느꼈단 말이오. 그런 공산주의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공산주의를 반대하겠습니까? 나는 김일성 장군님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가겠소. 이 길만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요."
리종만 선생의 머리 속에는 날이 갈수록 38도선을 넘고 평양을 다녀온 벗들이 두고두고 되뇌이던 말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살아올랐다.
바로 이러한 시기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 통일 민주주의 전선 결성 대회에 그를 불러주시었던 것이다.
초청장을 받아 든 리종만 선생은 생각이 복잡하였다. 그는 민족 자본가로서 일제를 대신한 미제의 남조선 강점과 식민지 예속화 정책에 심히 불만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리종만 선생에게 있어서 평양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한 생애의 미련으로 간직해온 민족적 양심과 지조를 지키는가 저버리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8.15 해방을 서울에서 맞이하였던 리종만 선생은 어느 날 이승만 역도가 불러간 일이 있었다. 이승만은 그에게 지하 자원 개발에 경험도 있고 수완도 있으니 남강원도 일대를 맡아 개발해 달라고도 하였고 그 후의 민심이 흉흉하니 알아차리고 적절한 대책도 미리 세워 달라는 청도 하였다. 그 무렵에 남조선 곳곳에서는 미제 침략자들과 괴뢰 도배들을 반대하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남강원도 일대의 광산,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이 특히 심하였다. 바로 이승만 역도는 지하 자원 개발을 미끼로 리종만 선생을 인민들의 투쟁을 무마시키는 데 이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 후 리종만 선생이 자기 민족적 양심을 팔지 않고 진보적으로 나오자 미제 이승만 괴뢰는 그에게서 산업 운영권을 빼앗아 친미 매국노에게 넘겨주었다. 선생의 경우 남조선의 썩은 사회에서 개가죽을 쓰고 굴종을 한다면 재산도, 사회적 지위도 다 보존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리 많은 재산도, 높은 사회적 지위도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한 몸에 지니시고 구국 전선의 진두에 나서신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높은 뜻을 받아 안는 그 기쁨에는 비길 수 없었다. 이렇게 그는 평양으로 향하였던 것이다.
리종만 선생은 역사적인 대회에서 조국 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회 위원과 상무 위원으로 선거 받았다. 이것은 그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의 표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 자본가인 리종만 선생의 지난날을 묻지 않으시고 오히려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저버리는 일이 없이,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없이 살아온 그의 생애를 애국지사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하시고 그를 한 품에 안아주시었던 것이다.
1957년 8월 27일에 우리 나라에서는 최고 인민 회의 제2기 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이 역사적인 선거에서 리종만 선생은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으로 선거 받았다. 그리 그는 73살이었다.
새로 선거된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들의 명단이 신문 지상에 보도되었을 때였다. 국내에서는 물론 리종만 선생의 과거에 대하여 다소라도 알고 있는 해외에 있는 동포들 속에서까지도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 명단을 공개한 신문에서 그의 이름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진갑이 넘은 그가 말년에 나라의 집사로 취급하는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으로 나서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지난날 수백만 장자이던 남조선 출신의 민족 자본가 리종만 선생이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된 사실에서 사람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이 넓고 따뜻한 사랑에 대하여 다시금 가슴 뜨거워하였다.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이 된 리종만 선생은 그저 감격하기만 하였다. 그는 자기를 찾아와 축하를 해주는 사람들에게 희색이 가득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나는 김일성 장군님의 특별 대우를 받고 있소. 해방 전에는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시는 김 장군님께 의연금 한 푼 내놓지 못한 기업가였던 내가 오늘 장군님으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고 살자니 그저 황송하기만 하구려. 남조선에 그냥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은 미국 놈들의 식민지 예속 속의 경제 파탄에 걸려 기업은 망산달하고 나라는 존재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스러지고 말았을 게요. 그러했을 내가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으로까지 불리게 되었으니 갈 바를 알 수 없소.>"
경애하는 수령님께서 리종만 선생에게 돌려주신 깊은 신임과 배려, 그것은 한 민족 자본가였던 그를 조국과 민족을 아는 애국지사로 손잡아 이끌어 주신 위대한 사랑이었다.
일찍이 일제 시기 공산주의에 대하여 무작정 그릇된 생각을 품고 있던 완고한 민족주의자들, 회식에 사로잡힌 계층까지도 너그럽게 품어 안으셨고 지어 고집불통의 독립군 우두머리들까지도 창조력 있는 실천으로 공동의 친분과 치르는 싸움의 길로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님. 식민지 나라 민족 자본가들의 의지와 동향에 대하여 깊이 통찰하고 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제와 미국의 강점 하에서 리종만 선생이 겪은 풍파와 고충을 헤아리시고 뒤늦게나마 조국 전선과 조국 통일 위업에 작은 힘일지 바쳐 나가려는 그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시어 그토록 두터운 신임을 안겨주시었던 것이다.
리종만 선생이 최고 인민 회의 대의원으로 선거 받기 3년 전인 1954년 2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경애하는 수령님의 극진한 보살핌에 의하여 조국 해방 전쟁 시기 외국에 가 있었던 리종만 선생은 이때에야 귀국하게 되었다. 그가 귀국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승용차를 보내시며 그를 가까이 불러주시었다. 몇몇 간부들과 무엇인가를 의논하고 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종만 선생이 발걸음을 들어서자 하시던 일을 멈추시고 일어나오시며 "선생이 몰성히 있다는 소식은 있었지만 그래도 외국 땅이 자기 집만 하겠습니까? 앉으십시오." 하고 말씀하시면서 부축하시며 반가이 맞아주시었다.
각별한 전후 시기 승차를 도맡아 치르시고도 여전히 건강하신 경애하는 수령님을 뵌 데다가 그이의 따뜻한 손길에 접한 리종만 선생은 감사의 말씀도 번번히 올리지 못한 채 감격에 잠겼다.
"<선생을 급하게 만나자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복구 건설과 관련하여 의논할 일이 있어서 오시라고 하였습니다. 전후 복구 건설을 하자니 돈이 많이 요구됩니다. 일본 놈이 도망가면서 좀 있던 광산과 금산을 다 망쳐 놓았습니다. 해방 후 우리 인민 계급이 건설해 놓은 것도 이번 전쟁에서 미국 놈이 다 망쳐 놓았습니다. 이것을 복구하자니 자재와 돈이 필요합니다. 그중에서도 금이 필요합니다. 금을 한반도 전체에서 다 파내자는 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능과 수완도 뛰어나시고 광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해왔다는 이 고령인 자기를 여전히 믿어주시고 나라의 중요한 사업을 맡아 달라고 하시는데 힘을 얻은 리종만 선생은 신이 나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장군님! 문제 없습니다. 돌도 많고 금도 많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올린 그는 대동광업주식회사 운영할 때 북부 일대의 여러 지대를 돌아다니며 탐사한 내용과 학성산에 20만 톤의 동광이 매장되어 있다는 데 대하여 말씀드리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나 매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대단히 좋은 자료를 선생이 알려 주었다고 하시면서 그럼 광업 부문의 일군들과 좀 더 구체적으로 협의해보자고 하시어 중공업성 지질 탐사 관리국의 한 일군을 부르시었다.
잠시 후 그 일군이 방에 들어서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종만 선생을 가리키시며 그를 아는가고 물으시었다. 그 일군이 처음 보게 된다고 대답을 올리자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인사 하오. 리종만 선생이요. 앞으로 지질 탐사 관리국 동무는 리종만 선생을 모시고 사업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었다.
그러신 다음 그 일군에게 리종만 선생과 함께 기술자들을 데리고 학성산에 나가 조사해 오라는 과업을 주시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었다.
"<오늘부터 리종만 선생을 동무들의 고문으로 임명합니다. 앞으로 동무들은 리종만 선생을 도와서 일을 잘하여야 하겠습니다. 리종만 선생은 해방 전 일제의 박해 속에서도 민족적 지조 굽히지 않고 살아온 분입니다. 이제는 연세가 많으신데 동무들이 저 선생을 잘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이 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리종만 선생에게 베푸신 보살핌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그를 먼저 올려보내신 지질 탐사 관리국의 일군에게 리종만 선생이 아직 외국에서 입고 온 옷을 벗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이달 말까지 그 나이에 맞는 좋은 양복과 외투를 해드리라고 하시었다. 그리고 그가 생활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식모도 붙여주고 거처도 조용한 곳에 잡아주고 의료도 잘 보장해주어 편안한 환경에서 사업하는 데 여로가 없도록 하라고 온정 깊은 말씀을 하시었다.
이 자애에 넘치는 사랑과 배려에 대한 이야기를 리종만 선생이 전달받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는 보살핌과 넘치는 은정에 너무도 감격에 겨워 눈물을 뜨거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리종만 선생에게 베푸신 신임과 사랑은 날과 더불어 더욱 깊어갔다. 한번 손잡으시면 어떠한 환경에서나 끝까지 믿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종만 선생이 걸어온 과거보다도 그의 윤리의 위도를 더 높이 평가하시면서 그를 조국과 민족을 아는 애국지사가 되도록 보살펴주시고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었다.
그로부터 4일이 있는 일이었다. 리종만 선생은 이 무렵 뜻밖의 일로 하여 번민 속에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것은 학성산 조사 사업 때문이었다. 그가 학성산에 20만 톤의 동광석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해방 전에 자기의 회사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의 조사 자료에 의지해서였다. 그런데 이번에 현지에 나가 본 결과는 사실이 달랐다. 새로 탐사를 더 하면 몰라도 당장은 거의 가망이 없었다.
이것으로 하여 리종만 선생의 생각은 복잡하였다. "함께 갔던 기술자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정부에서는 나를 과연 어떻게 보겠는지?"
바로 이러하던 4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종만 선생과 같이 학성산에 갔다 온 지질 탐사 관리국의 책임 일군으로부터 학성산 조사 결과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용히 방안을 거니시며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없다. 없단 말이지." 하고 되뇌이시었다. 그러시고는 다시 이렇도록 걸음을 옮기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문득 걸음을 멈추시고 그 일군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었다.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없다고 해도 동무들이 리종만 선생에 대하여 절대로 다르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리종만 선생은 학성산의 동광석 20만 톤을 위해서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리종만 선생을 믿을 것은 학성산의 동 때문이 아니라 그 선생의 애국적인 지조와 민족적인 양심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없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아니라 1만 톤이 있어도 그것이 리종만 선생이 탐사한 나라의 지하 자원이라고 생각할 때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그리고 지금은 나라에 한 푼의 돈이라도 한 덩이의 돌이라도 더 많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학성산에서 한 푼의 돈이라도 캐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리종만 선생은 나라에 큰 공헌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무들은 학성산에 동광석이 20만 톤이 없다고 하여 그 선생을 의심하거나 박대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재삼 말하지만 내가 본 것은 리종만 선생의 애국심이었고 민족적 양심이었습니다. 동무들은 앞으로도 리종만 선생을 계속 잘 모시고 그 선생을 적극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리종만 선생이 자기가 알고 있는 우리 나라의 광산과 유용 광물의 분포 상태를 다 찾아내겠다고 하는데 유능한 기술자를 붙여서 그 사업을 추진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지질 탐사 사업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깊은 신뢰와 뜨거운 사랑, 위대한 포용력에 넘치는 말씀이었다. 경애하는 수령님의 말씀에 감격하게 된 일군은 우리 수령님의 도량이야말로 하늘에 닿는 높이이고 그 뜻의 깊이와 넓이는 바다와 같은 것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지나온 역사는 출중한 위인들과 명장들이 지니었던 도량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기었다. 리종만 선생도 역사가 전하는 영웅호걸로 명성이 높았던 사람들의 도량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지 않게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건대 그 도량은 많은 경우에 자신의 이름을 내거나 그 어떤 이해 관계로부터 사람들을 써먹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리종만 선생이 체험하게 되는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도량은 결코 이득이 있으면 사람을 써먹고 이득이 없으면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경애하는 수령님의 위대한 도량은 인간과 민족에 대한 유일무이한 사랑에서 생겨난 믿음과 신념의 발현으로서 거기에는 사심이 없었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적 양심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손잡고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신념, 바로 이런 국세족의 터널에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위대한 수령님의 도량은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으며 세월의 흐름과 만물의 변천에도 퇴색과 변함을 모르는 영원한 것이었다.
또 다시 위대한 수령님께서 베풀어주신 높은 신임을 받아 안게 된 리종만 선생은 지난날 헛되이 살아온 일들이 더없이 한스러웠다.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을 일찍이 따르지 못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어느새 인생 황혼에 이른 아쉬움이 컸다. 이러한 그는 어느 날 내각 청사에 찾아가 한 일군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품 속에 깊이 간수했던 한 장의 문서를 내놓았다. 그것은 그가 지난날에 운영하던 대동 공업 주식회사 청사를 공화국 정부에 넘겨준다는 양도 증서였다. 내각의 일군에게 리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는 김 장군님의 신임이면 그밖에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가장 귀중한 장군님의 신임을 받아 안은 나에게는 재산도 귀하지 않고 명예도 귀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직 장군님을 받들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합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리종만 선생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광물 탐사 사업에 더욱 힘냈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대로 우리 젊은 기술자들을 이끌고 북방의 추위와 눈길도 헤치고 비바람과 무더위도 이겨가며 탐사의 길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리종만 선생은 해방 전에 표본을 들어 탐사한 흔적을 남기고 기술했던 곳들을 죄다 답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그는 여러 곳의 가치 있는 유용 광물 장지들을 찾아냈을 뿐 아니라 앞으로 개발이 되고 경제성이 있는 광물들을 투자를 적게 하고 수송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조사 자료까지 만들어냈다.
어느 해 봄에 이 사실을 보고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종만 선생의 노력이 정말 큽니다.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못내 만족해하시었다. 그러시고는 간부 부문의 일군에게 리종만 선생은 애국심이 높은 분이라고, 우리는 이런 분들을 존경하고 내세워주어야 한다고 또다시 그에 대하여 높은 평가의 말씀을 하여 주시었다.
리종만 선생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보살핌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극진하였다.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한족두리 그의 나이가 많아지자 그의 건강에 대하여 깊이 관심하시며 어느 해 8월에는 보건 부문의 일군을 찾으시어 리종만 선생이 절대로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도록 그들이 그의 건강을 잘 돌봐주라고 신신당부하시었고 또 어느 해 봄에는 일군들로부터 그의 건강 상태를 알아보시고 리종만 선생이 잘 지내고 있다니 마음이 놓인다고 하시며 기뻐하시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처럼 극진한 보살핌과 사랑 속에 리종만 선생은 서울에 두고 떠났던 아들과도, 잃어버린 것으로 치부하던 딸과도 상봉하게 되었으며 귀여운 손자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93살이 되도록 복 속에 한 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리종만 선생이 조국의 길에서 참다운 삶을 찾게 된 것은 오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1974년 여름에 리종만 선생은 어느 한 출판사에 내 자기 수기록에서 이렇게 썼다.
"<가슴 속에 조선 민족의 더운 피가 백박 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김일성 장군님을 따라 나서야 한다. 나는 이 길이 바로 나라의 통일 독립을 위한 길이고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이며 또 이 길에 개인의 생과 영예도 있다는 가장 고귀한 진리를 깨달았다. 이것은 나의 어제와 오늘이 그것을 실증해주고 있다.>"
그가 깨달은 이 고귀한 진리, 그것은 그만이 느끼고 체험한 것이 아니다.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그이의 현명한 영도를 따르는 이 길에서만이 조국의 무궁한 번영이 이룩되고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이 고수되며 우리 인민의 영원한 행복이 담보된다. 그리고 이 길에서만이 민족적 통일도 실현되고 전체 조선 인민의 최대의 숙망인 조국 통일 위업도 실현되고야 할 것이다.
본사 기자 최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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