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5, 2025

생명의 춤 박유진 full book

생명의 춤

초판 2쇄 인쇄 2020년

지은이 | 박유진 일러스트 | 민돈후 펴낸이 | 하영란 발행처 | 도서출판 빛의정원 등록일 | 2016년 7월 27일


Ⓒ 박유진

ISBN 979-11-958951-0-6 03120

이 도서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CIP)은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홈페이지(http://seoji.nl.go.kr)와 국가자료공동목록시스템 (http://www.nl.go.kr/kolisnet)에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CIP제어번호: CIP2016024485)

정가 12,000원 *표지 그림 설명

생명의 붉은 빛깔 춤사위가 펼쳐지자 진리의 원圓 만다라가 드러납니다. 치마폭 엔 이 책의 다섯 가지 큰 주제와 키워드들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담겨있습니다. 존재의 근원에서 비롯된 진리가 사랑의 원심력을 따라 방사되고 어느덧 생명의 춤은 시작됩니다.

생명의 춤 박유진 지음

빛의정원



차례
프롤로그 | 6

제1부 당신 안의 위대함 
당신은 빛입니다 | 11 
깨어나는 이들이 새로운 미래를 열리니 | 20 야생의 힘을 되찾는다면 | 31 선택하세요, 당신 안의 위대함을 | 38 위축되지 말고 거침없이 날아라 | 45 

제2부 경이로움 
  • 당신을 근원으로 데려가는 꽃 한 송이의 경이로움 | 53
  • 돌아서면 거기, 천국이 있네 | 63
  • Appreciation | 70
  • 결과와 상관없이 사랑하라 | 77 

제3부 회복 
당신의 서러움을 안아 줄게요 | 89 당신 마음 깊은 곳의 순수 | 94 칠흑 같은 밤하늘도 따뜻하게 | 100 좌절은 기회 | 106 마음을 다해 들으면 | 113 수신양호, 내가 듣고 있어요 | 120 

제4부 용서 
그러나 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 129
 용서 연습 | 134 상처가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 142 당신의 미래를 바꿀 용서 | 149 미안해, 더 사랑할 수 있었는데 | 152 가림막이 사라지면 | 159

제5부 리더쉽 세상이 우리를 통제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 167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드는 당신 | 174

JUST DO IT | 186

판단을 유보하고 바라보라 | 200 당신 가슴이 빛으로 가득 찬다면 | 206 성장을 위한 보물 |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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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사십여 년간의 긴 타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 와 정착한지 어느덧 십 수년이 되어갑니다. 그동안 삶의 예술학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아픔 에서의 회복, 존재로서의 깨어남, 그리고 리더십 개발에 힘써 오면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 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근본적 선함, 그것을 덮고 있는 너무나도 큰 아픔들, 그리고 강렬한 생명력. 한국 문화 전반에 깔려있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또한 한류가 세계 적인 호응을 받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아픔 을 아는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은 아픔을 선함과 생명 력으로 극복해가는 한국 드라마, 음악의 주인공들 안 에서 자신의 모습과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삶의예술학교에서는 이 아픔을 선함과 생명력으로

극복하고, 그 힘으로 자신과 세상을 비추어 가는 작업 을 깊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안에는 어떤 아픔도 훼손할 수 없는 근본적 생명력과 존재의 빛이 있습니 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안에는 이 힘과 빛이 너무 나도 큰 아픔들 아래 눌러져 있지요. 때로는 아픔이 너 무나 커서 빛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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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명의 불씨는 파괴할 수 없는 씨앗이지요. 이 씨앗 은 겨울의 차가운 눈 밑에서 따뜻함과 참 이해를 만나 서 다시 피어날 수 있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서 본래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춤을 출 수 있지 요. 삶의예술학교에서는 우리의 본성과 위대함, 제일 깊 은 생명의 힘을 회복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 일을 함께 할 선하고 용기 있는 주인공들을 초대합니다. 아픔에서의 회복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으며 용기와

끈질기고 꾸준한 빛을 향한 응답이 필요합니다. 아픔 을 딛고 일어나고자 하는 수많은 선한 사람들은 이 모 범을 보여주면서 이 길을 먼저 걸어가는, 드라마의 주 인공이 아니라 실제 삶의 주인공을 더 기다리고 있지 않 을까요? 세상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함과 끈 질긴 생명력으로 아픔을 딛고 생명의 춤을 추는 밝은 당신을. 그리고 그 모두를 위해 선함의 리더십을 제공 하는 당신을.

삶의예술학교에서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빛의 회복

의 모임은 치열하게 깨어나며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는 법을 배워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바로 이 곳에 당 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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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당신 안의 위대함


이 글들은 지난 몇 년간 삶의예술학교에서 했던 200

여 회 넘는 서비스service중 일부입니다. 서비스는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삶의예술학교 안팎 성원들의 모임 입니다. 이 시간마다 저와 삶의예술학교의 리더들은 생 명의 통로가 되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드러나야 할 빛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생명의 빛을 발산하면 모인 성 원들은 자신의 빛깔과 품성으로 그 생명의 빛에 응답해 주십니다. 커져가는 응답을 통한 빛이 가득한 모임입니 다. 여기서 다룬 주제들은 삶의예술학교에서 다루는 깊 은 존재와 생명에 대한 주제이면서 또한 실제 우리 사 회와 삶의 화두입니다.

이 책을 준비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신 춤추는태

양 님, 큰산 님, 함께 길을 걷는 삶의예술학교 스텝들과 후원자들과 참가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곳곳에서 이 일에 이미 기여하고 있는 수많은 빛의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위대한 생명의 춤을 함께 출 수 있기를.

세상의 모든 선한 사람들이 도전을 넘어서 빛나기를.

서울 삶의예술학교에서, 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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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빛입니다

· 깨어나는 이들이 새로운 미래를 열리니

· 야생의 힘을 되찾는다면

· 선택하세요, 당신 안의 위대함을

· 위축되지 말고 거침없이 날아라



당신은 빛입니다

당신의 초점을

결핍이 아닌, 이미 주어져 있는 것들로 완전히 돌려라. 놀라고 환희를 느껴라.

우리의 근본은 빛입니다. 그 각성이 참으로 창조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출발점이자 원리지요. 우리는 죄인도 아니고 어둠으로부터 오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각자 안 에는 신성한 태양이 있습니다. 이 선언이 머리가 아닌 온 존재로 받아들여지나요? 그저 낯설고 먼 선언인가 요? 하지만 우리 삶의 목적은 이 빛, 우리 안의 태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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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가고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며 본성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자신이 빛나는 태양임을 각성하지 못했습니다. 사회구조와 구성원들은 자신의 참 본성이 빛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요. 하지만 깨닫지 못한다 고 분명한 것이 모호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거 짓이 되지 않습니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구름 너머에는 태양이 존재하지요. 이것이 우리의 본성 에 대한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로 분리되어 있 다는 인식과 두려움, 즉 에고에 갇혀서 본인이 빛이라 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짙은 구름이 깔려 있더라도 구름 너머에 늘 태양이 있듯이, 빛은 우리 안 에 늘 있었습니다. 본성이 빛이기에, 우리는 피해자가 아닌 창조자로 세상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삶의예술학교는 세상 모든 사람이 피해자가 아니라

창조자임을 알고 그 정체성으로 삶을 살아가도록 돕습 니다. 지구상의 아주 많은 사람이 ‘피해자’입장에 서 있 습니다. 나는 피해자다. 내가 이렇게 된 건 저 사람 탓이다.

억울한 세상이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정체성 안에서 살아가면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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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의식수 준, 자기 정체성을 넘어서는 결과란 참으로 어렵기 때문 이지요. 그러니 참된 세상을 원한다면 피해자 정체성에 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창조자 정체성 안에서 시작 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개별화된 빛의 존재, 천사, 불성의 존재가 있습니다. 우리의 근원적인 정체성이죠. 어렸을 때는 부모님, 자라서는 주변 사람들이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니”라고 하고, 하물며 자신도 그런 질책을 하는 데, 어떻게 내가 빛의 존재란 말인가 생각할 수도 있습 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행동 하나하나와 무관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빛이며 불성이며 아트만이며 천사입니 다. 이것이 창조자로 서는 바탕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해서 제대로 타오르지 못 하는 태양이 빛을 발산하게 될 때, 그것이 삶의 예술입 니다. 자신이 빛이라는 근원적인 깨달음 아래에서 자기 안의 태양을 드러내는 것이 삶의 예술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자신의

빛, 내면의 태양을 긍정하는 용기지요. 누가 어떻게 말 하더라도 빛인 자신을 용감하게 드러내는 것이 필요합 니다. 우리가 실제로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인정하 는 데에는 분명 어떤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런 온전한 인정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

리 내면에서는 온전한 인정보다 “내 꼴을 봐. 부족하고 형편없어”라는 자기 평가가 먼저 올라옵니다. “네 꼴을 좀 봐”라는 부정적인 목소리가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지요. “빛의 존재 좋아하네. 네가 무슨 천사야? 태양? 뭐 잘못 먹었어?” 이런 말이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 깊은 곳에 박힙니다. 그 화살을 뽑아야 합니다. 다 거짓말입 니다. 그것은 우리의 진짜 꼴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 을 투사한 결과물입니다. 서로 ‘너의 못난 꼴을 보라’합 니다. 서로가 쏜 이 화살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

다.

내가 아름다운 존재임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네 꼴을 봐’라는 화살이 너무 많이 꽂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가슴에 꽂혀 있는 부정과 부인의 화살을 뽑아내세요. 사실 같겠지만, 실제가 아닙니다. 사실처 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겉 자아가 상처로 인한 많 은 왜곡과 미성숙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겉 자아 너머의 더 깊고 온전한 존재입니다. ‘나 는 나의 모든 상처 너머 근본적으로 훌륭한 존재야’라 고 긍정하는 배짱과 용기를 품으십시오. 비록 주변 사 람들이 화살을 멈추지 않을지라도, 남편이, 아내가, 엄 마가, 아이가, 친구가, 동료가 화살을 쏘더라도 근본적 으로 자신이 밝고 따스한 빛의 존재임을 알아차려 가십 시오. 세상이 주는, 또는 자신이 자신에게 던지는 수많 은 비하 때문에 이런 긍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 신의 온전함, 아름다움, 참됨을 긍정하려면 용기와 알 아차림, 그리고 실제 거울이 되어줄 수 있는 도반과 멘 토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부재한 것, 즉 결핍에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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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주목합니다. 물질은 더 그렇죠. 물질의 모든 성향 을 응축해 놓은 것이 돈이니 돈의 문제가 가장 심하겠 지요.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주목하고, ‘내게는 그것이 없다’는 인식 때문에 우울해 합니다. 갖 고 있지 않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자신에게 없는 것이 점점 더 눈에 보입니다. 에너지는 계속 ‘내게 없는 것’으 로 흐릅니다. 그러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 악순환을 끊 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주의와 초점을 완전히 바꿔서 당신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 놀라고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미 있는 것들에 놀 랄 줄 모릅니다. 그것이 있는 걸 발견하지도 못하고 그 냥 지나갑니다.

당신에게 이미 있는 것들에 놀라라!

이것이 실용적인 차원에서 삶의 예술의 핵심적 기술

하나입니다. 있는 것에 놀라기 시작하면 더 놀라게 됩니 다. 있는 것에 놀라는 사람이 되면 어떨 것 같나요? 밝 아집니다. 계속 행복하고 계속 밝아집니다. ‘와우! 와 우! 와우!’하면 없다고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있었다는 것을 볼 수도 있고, 내게서 저만치 멀리 달아났던 것들 이 저절로 오기도 합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발견해주고 거기에 놀라는 사람에게 오고 싶어 합니다. 사람도 “나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하며 우울해 하는 사람보다 경외감을 표 현하며 “진짜 좋다, 고마워”라고 하는 사람에게 가고 싶어 합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렇습니다. 삶의 중요한 비밀 하나가 이 것으로 해결됩니다. 주변의 작은 것들에 놀라고 고마워 하기 시작하십시오. 당신의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 들을 발견하고 조금씩 ‘반짝’해 보십시오. 옆에 있는 배 우자의 잠자는 모습을 보면서, ‘네가 있어서 참 좋다’는 친구의 문자 하나에서, 일상이라 부르는 사소한 것들 에서 일어나는 삶의 경이를 발견하고 놀라는 감수성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당신을 스쳐 지나가지 않고 당신에게 머뭅니다.

작은 것에 놀라는 것은 그것 뒤에 있는 빛을 느끼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얼굴, 함께 나누는 소박한 식탁, 작 은 꽃 한 송이의 내면에는 빛이 있습니다. 그 빛에 놀라 는 것이지요. 빛을 경험하면, 우리 안의 빛이 빛나기 시 작하고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처음에는 느끼지 못했 던-태양이 반짝 놀라면서 커지기 시작합니다. 이미 있는 것들에 놀라십시오. 매일 다가오는 주변의

작은 아름다움, 작은 선물, 고마움들에 놀라기 시작하 면 더 놀라게 됩니다. 나중에는 정말 사소한 것 가지고 도 놀라게 됩니다.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경이를 느끼는 사람이 이 세상에 빛나는 사람, 태양이 된 사람 입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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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

는 것들에 놀라는 사람들은 그 힘으로 자신에게 없는 것까지 창조해 갑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없는 것을 만 들어가는 가장 힘 있는 방법입니다. 없는 것을 가지고 우울해 하는 사람에겐 창조해 나갈 힘도 없습니다. 아 직 없다고 느껴지는 것을 만들어 가고 싶다면 당신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작은 것에 계속 놀라십시오. 그러면 그 힘으로 없는 것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에겐 없어! 없다고! 이걸 어떻게 바로

잡지?”하며 애를 씁니다. 이런 결핍의 에너지에는 분노 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곁에 있는 것, 이미 주어져 있 는 것에 놀라고 기뻐하며 고마워하는 사람들은 결핍마 저도 기쁨과 고마움으로 만들어 내고 그 결과는 끝내 좋습니다. 있는 것에 놀라고 고마워하고 좋아하는 사 람에게는 빛나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모든 에너지와 존재가 오고 싶어 하고 그와 함께 하려 합니다. 우리 안의 태양이 빛날 수 있도록, 있는 것에 경외감

을 드러내고 거기에 에너지를 집중하며 힘을 길러가는 사람이 바로 창조자입니다. 그 에너지는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분노의 에너지로 세상을 바로 잡으려 하면 궁극적으로는 바로 잡히지 않습니다. 분노는 궁극적으로 분노를 가져옵니다. 기쁨과 고마움 으로 창조하십시오. 주변의 작은 아름다움, 우리에게 다가오는 있는 것들에 우리 주의를 온전히 전환시키십 시오.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주 간단해요.

“참 좋다.”

이 단순한 말 한 마디지요. 처음엔 이에 관한 경외감 이 느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 로 표현하면 우리의 에너지와 의식은 점점 있는 것들로 집중됩니다. 우리는 언어를 바꿀 필요가 있어요. 없다고 느껴지는 데도 억지로 좋다고 말하란 것이 아닙니다. 우선 느껴지는 작은 것부터 ‘참 좋구나. 아름답구나’라 고 감탄하면 감수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이 있 으면 속으로만 ‘좋네’하고 지나가지 말고, 잠시 멈춰서 “참 좋구나”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가십시오. 그렇 게 하는 순간 “참 좋구나”는 더 깊어지고 우리 내면으 로 들어갑니다. 그 능력을 키워가세요. 그러면 우리 안 의 태양이 점점 더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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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는 이들이
새로운 미래를 열리니

깨어서 바라보라. 당신과 세상의 에고와 본성을

이 세계의 미래를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지난 30여

년의 역사를 돌아봅시다. 세계는 경제적으로나 기술적 으로 굉장한 발전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그 발전의 밑 바탕에는 자연의 심각한 파괴가 있습니다. 파괴는 점 차 심해지고 인간 세상에는 어두움의 세력, 탐욕의 세력 의 힘이 더 커지는 듯합니다. 만약 세계가 지금처럼 계 속 간다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요? 익숙한 지금의 자신 과 결별하지 않는다면, 익숙한 자기를 떠나 더 큰 자신 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면 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셨습니까? 이 영화를 한마디 로 요약하면, “미래의 인류가 현재 인류의 구원을 돕는 다”지요. 극한 상황에 직면한 현재 인류가 내민 도움의 손을 미래의 인류가 잡아준다는 내용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미래 인류가 현재 인류인 우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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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할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파괴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현재의 우리가 그릴 수 있 는 가장 희망적인 미래 그림은 이런 것이겠지요. 자연 은 인류가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악의 세력 은 점점 더 강해져서 세상을 뒤덮습니다. 더는 삶을 살 아갈 수도, 회복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진 세상, 더는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내려간 바닥에서 깨어나는 존재 들이 조금씩 등장합니다. 그 깨어나는 존재들은 서로 만나고 연대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의 힘이 조금씩 커집니다. 그 연대의 힘이 솟아오르며 점차 희망 의 빛이 되고, 더 큰 흐름, 즉 우주적 힘과 만나 변화해 나가는 그림이지요. 오염되고 파괴되는 자연환경, 암울 해지는 정치, 경제적 구조로 절망 가운데 고통받는 인 류 가운데에서 깨어나는 존재들과 그들의 연대, 그들이 만들어 내는 문화. 이것이 희망적이고도 어쩌면 현실적 인 미래의 그림이지 않을까요.

『미래에서 온 멘토』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화 <인터 스텔라>에서 미래 인류가 현대 인류에게 손을 내민 것 처럼 미래에서 멘토가 온다면, 과연 우리에게 무슨 도 움을 주는 말을 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들은 아마 이 렇게 조언해 줄 듯합니다. “인류의 미래와 희망은 오직 ‘깨어난 이들의 연대’ 에 있습니다. 깨어난 사람들이 드러나고, 몸체, 문 화를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깊은 암흑의 세상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 십시오. 어둠 속에서 빛이 드러날 것입니다. 암흑 속에서 깨어나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드러날 것입니 다. 어둠을 거쳐, 깨어난 문명으로 거듭날 것입니

다. 그 새로운 문명에서 온 우리가 깨어날 당신들 에게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세상은 어둠을 거쳐, 깨 어난 존재들의 씨앗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지금, 낡은 틀을 버리고 그 깨어남의 길에 동참하세요.” 얼마 전, 삶의예술학교에서 주최한 인생 설계 학교

프로그램에 참가한 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했습니다. 주 제는 ‘영웅의 여정, 성장의 여행’이었는데요, 익숙한 자 신에게서 떠나 성장하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날 저는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의 ‘영웅 의 여정’이라는 도표를 함께 봤습니다. 조지프 캠벨은 다양한 문명의 신화에 이 ‘영웅의 여정’이 담겨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는 이 여정을 열두 단계, 혹은 열일곱 단 계로 나누어 분석했는데, 이것이 인간의 성장 과정에 관 한 은유라고 설명하지요. 조지프 캠벨이 말한 열두 단 계를 간략하게 ‘떠남-도전-극복-통합과 귀환’의 네 단계 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영웅은 익숙했던 세상을 떠 나고 떠난 후 도전을 받습니다. 그 도전을 극복하며 자 기 정화와 성장을 한 뒤 세상을 이롭게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지요.

한 인간이 참으로 깨어나기 위해 익숙했던 자신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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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떠나 도전을 극복하고 통합하며 돌아와야 하듯, 인류도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한 인간이 제 대로 성장하기 위해 영웅의 여정을 거쳐서 새로운 자신 을 발견하는 것처럼, 인류도 이런 여정을 거쳐서 새로운 집단적 자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영웅에게 닥친 도 전은 곧 큰 시련입니다. 영웅은 다양한 시련을 거쳐서 귀환합니다. 그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영웅은 생명 의 힘, 지혜의 힘, 사랑의 힘을 갖습니다.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줄 영험한 힘, 즉 ‘영약靈藥’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지요.



[그림 1 영웅의 여정 ]

영웅의 여정 도표에서 제일 아랫부분, 즉 ‘바닥’ 부분 은 ‘죽음의 관문’ 같은 통과 의례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 의 관문은 도전의 끝이 아닙니다. 그다음에 시련의 과 정이 또다시 등장하지요. 실제 인생에서 도전을 뚫고 영 웅의 여정을 이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 분 이런 시련의 과정을 거칩니다. 제 지인은 그런 시련 의 여정을 거치는 동안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살을 시도 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죽음의 관문을 지나신 거죠. 이 분은 죽음을 생각한 그 바닥에서 외부로부터 오는 도움과 삶의 다른 요소들을 만납니다. ‘이게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고 방향을 바꾸면서 시련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회와 인류에 기여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이런

과정을 겪는다면, 인류라는 공동체는 집단적으로 이 영 웅의 과정을 밟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시련을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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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할 것입니다. 어쩌면 시련은 점점 커져서 우리를 점점 더 큰 절망과 고통으로 밀어 넣을지도 모릅니다. 그러 나 잊지 마십시오. 시련은 시련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 리는 그것을 통과할 것이고 성장할 것입니다. 인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의 여정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죽음과 같은 최악의 시련을 거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를 뚫고 간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 또한 이 바닥을 뚫 고 인류 공동체에 생명의 힘을 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를 예상하고, 깊은 영혼과 넓은 눈으로 시련 너머를 응시하십시오. 안타깝게도 이 죽음의 관문은 시련의 끝이 아닙니다. 영웅이 죽음의 관문을 통과했을 때, 그는 “아, 이제 끝 났구나. 이제 통과했어”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귀환 합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시련을 만나지요. 어째서일까요. 시련은 왜 끝나지 않는 걸까요. 무엇이 더 필요해서일까요. 캠벨은 또 하나의 시련이 오는 이유 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웅은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힘을 얻었으나, 아직 그 힘과 완전히 하나 되지 않았다. 영웅은 그 힘으로만 온전히 무장되지 않았다. 그에 게는 버려야 할 요소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영웅이 이 관문을 통과하는 핵심 프로세스는

이전 시련에서 얻은 작은 힘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는 것 을 깨닫고 그것에 자신을 온전히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작은 힘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는 과정을 통해 영 웅은 비로소 귀환합니다. 죽음의 관문을 통과한 것만 으로는 완전한 확신이 생긴 게 아니라는 뜻이지요. 완 전한 확신이 아니므로 또 다른 도전을 만나 자신 안의 힘을 다시 보고 찾고 느끼면서 ‘아, 오직 이것뿐 이구 나!’ 확인하면서 완전히 그 힘과 하나 될 때 비로소 이 여정을 마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깨달 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온전히 자신의 것 이 되기까지는 반복되는 시련, 혹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시련이 왔을 때, ‘이게 뭐지?’하면서 반만 깨달았던 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고 체화體化됩니다. 앞서 인류의 미래와 희망은 오직 깨어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들이 연대하며 문화를 형성해 나가는 것뿐 이라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음’이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일까요. 크게 네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 다. 첫째는 하늘을 향해 깨어 있음, 둘째는 본성에 깨어 있음, 셋째는 에고에 깨어 있음, 그리고 마지막은 세상 에 깨어 있음입니다. 첫째, 하늘을 향해 깨어 있다는 것은 하늘의 뜻,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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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지혜, 하늘의 사랑에 대해서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응답과 극성極性이 더 큰 지혜와 사랑과 뜻을 향 해 설정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자신의 제일 깊 은 자리에서 기도하며 하늘의 뜻, 하늘의 시각이 무엇 일까 질문한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나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늘의 뜻과 하늘의 시각을 묻는 기도입니다. 이 마음 안에서 진리를 공부 하고 하늘을 대변해 온 스승들을 공경합니다. 이 모두 가 하늘에 대해 깨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 깨어 있다 함은 올바름,

사랑, 진리, 생명, 온전함 등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의 힘 에, 그 생명의 힘에서 나오는 기쁨에 깨어 있음을 말합 니다. 자신의 본성 즉, 올바름, 온전함, 생명의 힘에 깨 어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분리된 에고의 속삭임 에 속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본성에 깨어 있기 때문에 에고의 속삭임에 속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분리된 에고 의 두려움, 불안, 피해의식, 패배의식 등이 ‘너는 안 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세상도 너를 거부해. 모든 것이 안 돼’라고 할 때, 이것이 에고의 목소리임을 깨닫고 그 속삭임에 속지 않습니다.

본성에 깨어 있으려면 생명의 힘을 키워가는 활동과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본성의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지요. 이 힘은 일상의 작은 선물들을 인식하고 느 끼고 감탄하고 고마워하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싹을 틔 웁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서의 구절은 우리 귀에 아주 익숙하지만, 이 정언正言이 적용된 삶은 흔치 않습 니다. 이 말의 위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삶의 작디작은 선물들, 즉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들을 의도적으 로 인식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까이 있는 이의 작 은 미소, 예상치 못한 작은 도움, 작은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지요. 이런 것들은 작고 섬세한 것들이어서 하나 하나 인식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 안에서 우 리의 본성도 점점 싹을 틔우지요.

셋째, 자신의 에고에 대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 늘을 향해, 그리고 자신의 본성에 깨어 있다 해도 에고 를 깨닫지 못한다면 사실 하늘에도 본성에도 깨어 있는 게 아닙니다. 에고는 근원적인 두려움, 분리되어 있다 는 인식, 판단하는 목소리, 피해자 대 가해자의 정체성 등으로 자신을 강화합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이것이 우리의 본성에서 온 목소리가 아님을 정직하게 바라보 고 그 에고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본성 에 깨어 있기 때문에, 에고가 아닌 우리의 본성과 동일 시합니다. 넷째, 세상의 참 본성과 그 안의 에고에 대해 깨어있 어야 합니다. 당신 안의 에고와 본성의 작동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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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에고와 본성의 작동을 알아채야 해요. 사람, 사회, 나아가 세상의 참 본성과 분리된 에 고를 명확하게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척’ 가 장해서 결국은 자기 욕심을 차리는 수많은 에고의 교묘 한 작동에 속지 않습니다. 그 눈으로 세상의 참 본성이 꿈틀거리면서 일어나고 있음을 바라보고 그것에 힘을 주고 축복해 줍니다.

이 네 가지가 깨어 있음의 핵심입니다. 깨어 있는 사

람들은 하늘에 대해서,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 자신의 에고에 대해서, 세상 안에서의 에고의 움직임, 참 본성 의 움직임에 대해서 깨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 서 그 참 본성의 꿈틀거림, 드러남을 인식하면서 이것을 보호하고 격려해 주고 키워 주는 역할을 함께 합니다. 그 문화를 키워 갑니다. 이런 깨어 있는 사람들의 몸체, 문화를 만들어 가는 존재들이 이미 곳곳에 있습니다. 이것이 미래로 건너가는 다리이며 인류의 희망이 아닐 까요? 이러한 깨어 있는 존재들의 몸체, 문화를 계속 적 극적으로 키워갑시다. 그리고 이 확장에 기여합시다. 깨 어난 미래 문명에 닿는 다리를 만듭시다. 시련을 건너서 생명의 힘, 인류에 희망을 가져오는 영웅의 여정을 하는 깨어있는 존재들이 됩시다.


야생의 힘을 되찾는다면

당신의 뿌리, 근원의 힘을 되찾으세요. 거침없는 자연의 생명력이 당신 안에 흐르도록.

삶의예술학교 프로그램 참가자 중 춤 쎄라피 전문가

가 계십니다. 얼마 전에 이 분이 춤 쎄라피에 관심 있는 분들께 초대장을 보내셨는데요, 초대장은 이렇게 시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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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순수한 가슴에 묻습니다.”

꽤 강렬한 초대였지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는

마음의 결심이 담긴, 치열하게 전념하지 않는다면 초대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다가왔습니다. 초대의 말을 소 개할게요.

요즘 아이들이, 학교가, 선생님이, 사회가 문제라 고 얘기하면서 나는 얼마나 나의 세상에 참된 리더 십을 발휘하고 일상에 구현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참되게 일어서야 합 니다. 우리가 참되게 사랑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렇게 머뭇거릴 수가 없다는 생각 이 듭니다. 참된 영적 리더들을 세우고 키우는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치열하게 전념하며 자신이 참 된 존재로서, 참된 리더로서 성장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분들을 초대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떨치고, 순수한 나의 가슴을 회복하는 깊은 치유 와 정화의 작업을 계속해 나가려고 합니다. 가슴의 순수함을 회복하여 더 높은 진리의 의식으로 나아 가고자 하는 분들을 초대합니다. 존재의 깨달음을 통하여 그 빛을 나의 가족, 학생, 동료들에게 비추 어 함께 깨워가고 싶은 분, 또 자신이 하늘로부터 받은 참된 사명이 무엇인지 찾아 그것을 펼치고 싶 은 분, 그리고 저의 이 초대에 가슴이 설레며 진동 하는 것을 느끼시는 그 모든 분들의 응답과 반응 을 기다립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함께 모이고 동참할 때 만이 가능합니다. 환영합니다.

이 초대에 스무 명 정도의 사람이 응답했고 한 달에

한 번, 일 년 동안 모이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야성野性으로부터 점점 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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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집니다.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더 그렇지요. 미국의 초월주의 사상가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랄프 왈도 에머 슨Ralph Waldo Emerson은 “좋은 신사는 먼저 좋은 짐승이 어야 한다In a good gentleman there must first be a good animal” 고 말했습니다. 위대함greatness의 뿌리에는 순수한 자연 스러움, 즉 자연의 힘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얼마 전에 지리산 생태영성학교 원장이자 전국 귀농 운동 본부장이신 이병철 님이 보내주신 글이 참 인상적 이었습니다. 글의 제목은 ‘신령한 짐승으로 거듭남을 위 하여’였는데요. 보통 영적인 것들을 말할 때 짐승을 분 리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늘과 땅은 한자리에 있어야 하며 영적인 것은 ‘짐승됨’과 다른 세계가 아니라는 내 용이었지요. 본문의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는 본래 땅의 생명이었고, 그 생명 속에 하늘 을 모신 존재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 신이 땅의 자식임을 잊어버리고, 어머니 땅을 배신 하여 스스로 생명의 뿌리를 차단하였다. 그리하여 솟구치는 대지의 기운을 받아 사지에 넘쳐흘렀던 활력은 사라지고, 빛나던 눈빛은 생기를 잃었다. 그 거침없고 걸림 없던 그 자유로움과 당당함 대 신, 두려움에 떨며 눈치 보는 초라하고 비루한 짐 승으로 전락하였다. 땅에서 솟구치던 그 야성이 사 라진 자리에서 눈부시던 하늘의 신성도 또한 사라 졌다. 그리하여 땅의 부르짖음은 하늘에 닿지 못하 고, 하늘의 간곡한 당부를 또한 듣지 못하였다. 땅 에 살고 있지만 생명의 뿌리가 뽑혔고, 하늘을 바 라보았지만 가슴 속 하늘을 알지 못하였다. 땅의 생기와 하늘의 신명으로 충만하던 삶의 기쁨은 사 라지고, 우리는 땅에도 하늘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도는 고단한 존재가 되었다.(‥‥‥) 다시 기쁨 에 떨며 온몸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법을, 온 삶으 로 사랑하는 법을, 감사하고 축복하는 법을 배워 야 한다. 땅을 움켜쥔 질경이의 끈질긴 그 생명력 을, 대지를 질주하며 포효하는 사자의 거침없는 그 당당함을, 바람을 솟구쳐 나는 매의 가둘 수 없는 그 자유를 다시 살려야 한다.(……) 우리 안에서 꺾 어진 생명의 기운을, 접혀진 생명의 나래를 다시 활 짝 펼쳐야 한다. 다시 우리 존재의 본 모습으로, 생 명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삶의 자연성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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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길을 걷다 멈춰서 느껴 봅시다. 대지의 기운 을 느낄 수 있나요? 도시의 빌딩과 자동차, 번쩍이는 불 빛 속에서 대지의 솟구치는 기운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넘쳐흐르던 활력과 빛나던 눈빛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요? 대지를 질주하며 포 효하는 사자의 거침없는 당당함, 바람을 솟구쳐 올라 하늘을 가르는 매의 가둘 수 없는 자유를 되찾아야 합 니다. 그 야성은 우리의 본성이며 원초적 에너지이기 때 문이지요. 우리 안에 있는 야성, 그 생명력이 살아나야 이를 바탕으로 사랑의 위대함, 진리의 위대함이 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눈치 볼 필요 없습니다. 지나치게 점 잖을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오랜 문화를 깨뜨릴 필요가 있 습니다. 거침없는 자연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 넘쳐흐르 도록 해야 해요. 언제 다함께 바다에 갑시다. 해변에서 뜨거운 모닥불

을 피우고, 차가운 바닷물에 풍덩하면서 바다의 자연 에너지를 느껴보는 건 어떻습니까. 늦은 겨울이던지 봄 이라도 좋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점잖은 신사처럼 틀 안에서 살아오지 않았나요? 우리 안의 오랜 습성을 깨 고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세요. 이를 통해 근원의 힘이 깨어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사랑의 위대함도 깨어날 테 니까요.

진정한 힘은 뿌리로부터 옵니다. 우리의 위대함은 생 명의 뿌리에 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 는, 대지와 생명의 힘을 그대로 담고 있는 당당한 존재 로, 사랑과 지혜로 차있는 빛나는 존재로 이 세상을 걸 어 보지 않겠습니까? 이 길은 선택받은 극소수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하늘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유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진 인 간입니다. 끝도 경계도 없는 하늘이 이 세상에 초라하 고 비루한 짐승을 만들었을까요? 그런 하늘은 눈치를 보는 초라한 인간이 만든 하늘이고 하나님입니다. 참 하늘과 참 하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참 하늘과 참 하나님은 생명의 힘으로 가득 찬 위대한 인간을 만 들었습니다. 하늘의 힘과 자연의 힘으로 가득 찬 존재 로, 신령한 짐승, 신령한 영혼으로 거듭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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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세요,

당신 안의 위대함을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낄 때, 나약함에 무릎 꿇지 말고

당신의 근원으로 돌아서십시오. 거기서 진짜 당신을 만나십시오.

2주 전 열린 삶의예술학교 세미나에서 우리는 존재 의 일치에 의한 작은 빛의 폭발을 경험했습니다. 이 경 험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지난 금요 일에는 세미나에 참가했던 분들 중 여섯 분이 다시 만 나 더욱 깊은 일치를 나눴습니다. 참 존재의 일치는 에 고에 갇힌 ‘나’를 넘어서는 경험입니다. ‘나’라는 분리된 개인의 사사로움을 넘어서는 일치를 통해 이 세상에 하 나의 존재로 함께 서 있을 때 세상은 더 평화롭고 안전 한 곳이 됩니다. 이를 ‘성통공완性通功完’이라 말할 수 있 겠는데요, ‘성품을 통달하고 일을 완수한다’라는 뜻입 니다. 우리는 ‘함께 세상을 품고 책임진다’는 일치의 경 험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며 도달한 이 마음 자리는 비단 여섯 명뿐만이 아니라 자기를 넘어 세상을 함께 책임지고자 하는 모든 이를 대신하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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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는다’는 것은 자기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선 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자신의 작음을 넘 어설 수 있을까요? 넘어서려면 먼저 이것이 어디에서 오 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사로움은 자신에 대한 불신과 의심에서 옵니다. 믿지 못하면 점점 위축됩니다. 더 작아지지요. 자신에 대한 믿음 없음, 의심, 불신은 끝 내는 생명 자체에 대한, 삶에 대한, 우주에 대한, 신에 대한, 근원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믿음 없음입니다. 이 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의심, 믿음 없 음, 불신의 이면에서 우리는 나약함을 느낍니다. 우리에 게 친근한 느낌이죠. 그런 사람들은 자신만만해도 안으 로는 어떤 나약함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모 두가 경험한 이 나약함이 우리 자신인가요? 이 나약함, 포기, 패배감이 정말 우리입니까? 우리의 삶은 크고 작 은 선택으로 이어집니다. ‘왼쪽 길로 갈까? 오른쪽 길로 갈까?’, ‘점심으로 뭘 먹을까?’, ‘가족 여행으로 어디를 갈까?’같은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부터 ‘어떤 직업을 선 택할까?’, ‘누구와 결혼할까?’같이 큰 방향을 결정짓는 것까지 우리 삶은 매 순간이 선택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은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 안에서부 터 올라오는 나약함, 패배감, 사사로움, ‘나는 이것밖에 안 돼’라는 목소리에 엎드릴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에 있는 생명의 힘, 근원의 위대함에 엎드릴 것인가? 우리 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 본래 모습인 생명의 힘, 근 원의 위대함을 말이지요. 이 선택은 간단하지만, 우리에 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나약함의 느낌, 생각, 남아 있는 어떤 패배감에 엎드려 절하면 그 상태로 삶을 살 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저 일상을 간신히 살아가는,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쪼잔하고 작은 존재라고요? 그렇다면 우리는 거짓말쟁 입니다. 우리 안의 나약한 느낌에 절하는 습관이 너무 오래, 너무 깊이 박혀 자신을 작은 존재라 믿고 만 거지 요. 다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거짓말 앞에 절 을 해 온 것입니다.

우리, 그거 그만합시다!

나약함을 모셨던 그 자리가 명당인 줄 알고 투자를 많이 해서 버리기 아깝겠지만, 생명의 힘, 위대한 근원 앞에 있는 빛나는 제단에 비하면 콩알만도 못한 자리입 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거짓말 안에 둘러 쌓여있던 빛 나는 신의 딸, 신의 아들입니다. 자신에게 절하십시오. 그 ‘자신’은 작은 자기가 아니라 우리의 근원, 생명 자체 를 말합니다. 주변에 온통 우리에 반대하고 우리를 거 부하며 부인하는 말과 행동이 있을지라도, 모든 조건 이 최악이라 여겨지는 순간일지라도 자신의 중심 근원, 생명의 중심을 향해서 온몸을 숙여 절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뚝 서십시오. 그런 순간에 우리의 내면에서 ‘너는 못해! 네까짓 게 뭐라고! 이 세상이 만만치 않아!’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목소리가 점점 커져서 천 둥처럼 당신을 쓰러트릴 듯 쿵쾅거릴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우리의 근원이자 중심, 생명의 힘을 향해서 거침없 이 절하고 그 자리에 서십시오. 그러면 모든 부정적인 소리는 작은 귀뚜라미 소리처럼 잦아들게 됩니다. 처음 에는 ‘너는 못해! 너는 못해!’라는 음성이 나중에는 우리 를 향한 박수 소리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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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서 모세가 호렙산에 올랐을 때 그는 ‘신발

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자리는 거룩한 자리다’라는 신 의 음성을 듣습니다. 왜 거룩한 자리입니까? 모세가 신 을 만난 그 자리는 근원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 서 있는 자리, 그 중심은 근원의 자리이며 생명의 힘 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빛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참 나를 향해 마음을 다해 절하 고 의심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세상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 자신에 대해, 생명에 대해, 근원에 대해 우리 안에 있는 의심이 사라지면 똑같은 상황이 닥쳐도 완전히 다 르게 보입니다. 나약함을 향해 절하는 동안, 의심이 있 는 동안, 믿음이 없는 동안에는 다 문제투성이였던 모 든 상황이 기회의 세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의 생명의 힘이 솟아오르기 시작하고 그 힘 안에서 세상을 보면 모든 게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작음, 좀스러움, 쪼잔함, 사사로움을 만드는 우리 안의 믿음 없음, 의심 이 사라질 때 우리는 자신을 넘습니다. 참된 쪽을 바라보고 온 존재가 제대로 엎드리는 것이

성통性通, 즉 성품을 통달하는 것입니다. 참이 아닌 자신 에게 더 이상 절하지 않고 세상을 함께 책임지는 것입니

다. 자신 안에 갇혀있는 동안은 세상을 품고 책임질 수 없습니다. 자신을 넘어 세상을 책임질 때 비로소 참 사 람이 됩니다. 자신 안에 갇혀 쪼잔하게 있을 때까지는 진짜 사람이 된 게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자신을 넘 어서 세상을 책임지는 사람,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때때 로 볼 수 있습니다. 단지 나이가 많은 어른이 아니라 자 기를 넘어 세상을 품고 책임지는 사람이 바로 어른입니

다.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위기에 당면했습니

다.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세상을 함께 품고 책임지는 어른들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의 핵심 열쇠는 어디에 절 할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반드시 나약함 의 느낌, 패배감, 남아있는 의심에 절할지 아니면 생명 의 중심, 힘의 근원, 빛의 나에게 절할지 선택하는 순간 이 옵니다. 작은 선택의 순간도 있고 존재를 변화시킬 만큼 거대한 선택의 순간도 있지요. 작은 선택의 순간 이 왔을 때 연습을 잘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큰 선택의 순간이 올 때 생명의 중심에 절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생명의 중심을 향하려고 해도 나약함에 절하는 것에 익숙하게 끌립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고 느낄 때, 다 끝난

것처럼 보일 때, 내가 하는 모든 길이 다 막히는 듯 보 일 때, 자신이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그 초라함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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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내가 완전히 쌓여있을 때, 그때가 결정적인 순간입니 다. 나약함과 의심에 끌려들어 갈지 아니면 ‘이것은 진 짜가 아니구나!’하며 근원적 생명의 힘으로 돌아설지 선 택해야 합니다.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힘을 내어 선택하면, 끝이 납니다. 짙고 깊은 초라함 안에서 ‘이것은 진실이 아니고 사실이 아니야. 그 너머 나의 빛 나는 근원, 이것이 진실이야’라며 진실을 향할 때 더는 초라함으로 돌아서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이 걸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부처님 같은 큰 존재들 만 할 수 있는 어려운 선택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위축되지 말고 거침없이 날아라

당신의 과거가 수치스럽나요.

그 경험이 당신에게

걸인의 옷을 입으라 하면 당당히 거절하십시오. 도망가서 숨지도 마십시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에고의 목소리에 속지 말고 날개를 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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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은 정말 아름답네요. 어제 저는 아내 마샤와 돌문화공원에서 열린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근처 벌판에 잠시 멈춰 섰지요. 우리 둘은 고요한 해 질 녘을 음미했지요. 사람들이 다 떠난 벌판에는 새 소리만이 들렸습니다. 땅의 기운이 웅장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온몸으로 만끽했습니다. 마샤와 오후에 한 명 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별안간 오랜 친구 부부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2년간 만나지 못한 친구였지요. 친구 부부는 지난 2년간 삶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했다 며 우리를 꼭 만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만났다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 텐데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한 순간에 만난 덕분 에 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지난 2년의 공백을 훌쩍 뛰어넘었지요. 그런데 저는 친구 부부뿐 아니라 많은 이에게 지난 2 년의 세월이 매우 어두운 터널이었음을 느낍니다. 터널 을 방금 통과한 사람들, 혹은 아직 터널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1864 년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의 마지막 전언이죠. 사 형 직전, 수운 최제우는 감옥에서 해월 최시형에게 자신 의 곰방대를 건넵니다. 이 곰방대에는 최제우의 마지막 편지가 담겨 있었는데, 그 편지엔 ‘고비원주高飛遠走’라고 쓰여 있었지요. ‘높이 날아서 멀리 가라’는 뜻입니다. 동 학 혁명의 제일 커다란 위기 시점이었죠. 탄압은 거셌고 창시자는 사형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 암흑의 순 간에 최제우는 남겨진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말을 남겼 지요.

어떤 이는 이 말을 ‘이 어두운 상황에 너까지 잡혀서

처형당하면 안 되니 멀리 달아나서 숨어라’라는 의미라 고 해석합니다. 간단하게 하면 ‘튀어라!’라는 뜻이죠. 물 리적인 차원에서 현명한 지시일 수 있겠습니다. 더 지적 인 차원의 해석도 있습니다. ‘전국을 뛰어다니며 이 진 리를 포교하라’는 해석이죠. 마지막으로 영적인 차원의 해석도 있습니다. ‘이 하늘과 땅 안에서 거침없이 진리 를 대표하라!’, ‘높이 날아서 멀리 가라. 거침없이 진리를 대표하라!’는 뜻이라는 것이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두 려움 앞에 쪼그라들지 말라! 거침없이 하늘을 대표하 라. 높이 날아서 멀리 가라!’는 것이지요. 어두운 사이클 을 통과하고 있는 모두에게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삶에서 어려움을 경험할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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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움이 올라옵니다. 그 두려움은 수치심으로 이어지고 이내 우리는 위축되고 작아집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진리도 좋지만, 그냥 타협해서 편안하게 사 는 게 뭐 나빠’라는 물러서는 마음이 생깁니다. 수운 최 제우의 말을 전달받은 해월 최시형도 아마 당시 두려움 이 몰려오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낀 다음에 그것을 믿고 쪼그라들고 타협을 했다면 오늘 우리가 동학을 기억하겠습니까?

“우리 안에 남아있는 아직도 올라올 수 있는 두려 움과 수치심을 직면했을 때 쪼그라들지 말라. 지옥 이 나를 둘러싼다면 거기서 거침없이 하늘을 대표 하라”

이것이 수운 최제우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을 대표하라. 두려움, 수치심에 쪼그 라들고 떨고 타협하고 소심해지면 그 감옥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수치심이 올라오는 것을 그대로 경 험하면서 ‘이 수치심, 이 두려움은 내가 아닌, 우리 인류 를 감금한 감옥이고 우리가 그 감옥을 믿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구나’와 ‘나는 바 로 하늘이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남은 두려움과 수치심이 올라올 때 자신에게 절하십

시오. 자신이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수운 최제우는 첫 며느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며느리에게 큰절 을 했다고 하지요.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 니다. 사실 최제우는 며느리에게 절한 게 아니라 인간 에게 절한 것이었지요. 인간 안에 담겨있는 존재, 하늘, 진리에 절했습니다. 그 시대에 며느리 신분은 조금 쪼 그라든 신분이었습니다. 최제우는 “너의 위축된 신분에 동의하지 마라. 너는 하늘이요, 위대한 존재다”라는 것 을 말한 겁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우리를 위축시킵니 다. 하지만 자신이 위축되지 않는다면 외부의 그 무엇 도 당신을 위축시키지 못합니다.

지난 시간이 어렵고 두려웠고 수치스러웠나요. 어떤

경험이 우리에게 걸인의 옷을 입으라고 권해도 거절하 십시오. 겉으론 화려하지만,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안감 을 댄 옷들도 입지 마십시오. 결국, 똑같은 걸인의 옷입 니다. 밑바닥에 수치심이 있으면 모든 옷이 똑같습니다. 우리는 구걸하는 걸인이 아니고 위대한 하늘을 가져오 는 존재입니다. 수치심을 거부하고 거침없이 멀리 날아 가십시오. 두려움과 수치심은 초라하고 구걸하는 옷입니다. 허 상이며 허깨비입니다. 실제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절하 는 것은 곧 하늘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어둠이 엄습해 온다 해도 도망가서 숨지 마십시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미 너무 작아졌고 위축되었고 오랫동안 그 걸 진실이라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사실이 아닙니다. 에 고의 장난입니다. 지금까지 속았습니다. “높이 날아 멀리 가라.” 이 깊은 진리의 메시지가 당신에게 왔을 때 버려야 할 익숙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친구이며, 연인인 에고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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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부 경이로움


리입니다. 이 소리는 버리기 어렵고 아깝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도, 연인도, 내가 아닙니다. 참 자리로 돌아올 때가 되었습니다. 하늘에게 절하면서 높 이 날고 멀리 갑시다. 이 진리를 깊이 받아들이고, 큰 힘 으로 이 진리를 후손과 인류 전체에게도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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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근원으로 데려가는 꽃 한 송이의 경이로움

· 돌아서면 거기, 천국이 있네

· Appreciation

· 결과와 상관없이 사랑하라


당신을 근원으로 데려가는 꽃 한 송이의 경이로움

아픔과 두려움의 순간일지라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 아침 여기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더군요. 어떤 이에게는 안개가 우울함과 슬픔을 느끼게도 하지 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마법이 펼쳐질 듯 신비롭기도 합니다. 이 상이한 느낌을 결정하는 건 결국 보는 사람 의 눈과 마음이지요. 오늘 아침 잠이 덜 깬 상태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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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반쯤 뜨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요, 어느 순간 새소 리가 들렸어요. 참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멀리서 지저 귀는 소리였지요. 주변에 많은 소리가 있었는데, 멀리서 날아온 소리가 제 귀에 아름답게 들리는 게 신기했습니 다. 특별히 아름다운 노랫소리도 아니었는데요. 그 순 간의 선택인 거죠. 제가 감지할 수 있는 수많은 소리 중 에서 그 새소리를 들은 것은 제 내면에서 어떤 선택을 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작은 벌레 한 마리, 꽃 한 송이에도 감탄합 니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고 경이롭 습니다. 그런데 커가면서 우리는 경이로움을 느끼는 촉 감을 잃습니다. 언제,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침묵의 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쓴 책 『센스 오브 원더

The Sense of Wonder』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의 생애에 가장 큰 선물을 줄 수 있다면, 나 는 파괴할 수 없는 경이로움을 주고 싶다”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경이로 움을 선물하고 싶다는 거지요. 카슨은 이 책에서 조카 의 아들과 밤바다, 숲길 등을 거닐며 꽃과 나무와 대화 를 합니다. 그리고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 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많은 경우, 경이로움은 성인이 되기도 전에 사라집니 다. 우리 사회에선 아마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사 라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경이로움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저도 잃었다가 되찾았습니다. 저도 어릴 때는 경이로움, 신기함, 호기심으로 가득 찬 소년이었 습니다. 아홉 살에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외로움과 어 려움을 겪다보니 이 경이로움이 많이 사라졌지요. 그러 다가 경이로움에 가득 찬 사람을 만났습니다. 로베르타 Roberta라는 고등학교 친구인데요, 이 친구는 같이 다닐 때 늘 감탄을 합니다. 모든 것에 감탄하니까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애 같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진심이 느껴지면서 제 안에서도 ‘아, 진짜 그렇구나’하 고 가슴이 활짝 열렸습니다. 어느 날 초저녁쯤 길을 걷 고 있는데 로베르타가 하늘을 보면서 그러더군요. “나는 참 행운아야. 난 정말 축복 받았어.” 진심으로 고마움에 가득 차 하늘을 보는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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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저는 그 감동의 에너지를 그대로 전달받았습니 다. ‘아, 이거구나. 이것이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지요. 그 이후부터 점점 그렇게 세상에 대한 경이로 가득 찬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좋아하고 염원하니 더 가까워지게 되었지요. 경이로움 의 능력과 힘이 다시 회복되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이미 경이로움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을 만나서 점화되는 것입니다.

물론, 점화가 안 되는 때도 있습니다.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던 때였습니다. 봄에 친구와 같이 숲을 뛰다가 그 숲이 너무 아름다워서 “정말 아름답지 않니? 너무 좋 지?”하고 감탄했지요. 그런데 제 친구는 저를 쓱 보더 니 아무 말도 없이 뛰었습니다. 그 친구는 아주 딱딱하 게 굳어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한 번은 영성 지도 를 하는 친구를 초대해서 콜로라도 선라이즈 랜치 근처 에 있는 빅 톰슨 강에서 함께 카누를 타고 내려갈 때였 는데요, 역시 저는 “너무 좋다. 너무 아름다워”하고 감 탄했죠. 하지만 그 친구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름 다움과 경이로움이 모든 사람에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발견하 고 느낄수록 더 보이고 더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느 낄 수 있는 힘이 길러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볼수록 더 보이고 느낄수록 더 느껴집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 경, 사람, 사건 가운데에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의 순 간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습니 다. 그 수많은 ‘포착 가능함’을 잡아낼 수 있는 힘, 경이 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처음에는 보고 찾고 느끼는 의식적인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 다음부터 는 저절로 보입니다. 피아노를 배울 때, 처음에는 하나 씩 하나씩 기계적으로 배우고 연습해야 하지만 익숙해 지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능력도 처음에는 의 도적인 훈련이 필요하지만, 나중에는 저절로 보입니다. 이것은 준비된 감지력입니다. 계속 준비를 해왔기 때문 에 갖는 능력입니다. 똑같은 숲, 똑같은 강에 있어도 준 비되어 있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이 느껴지 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는 경향성이 됩니다. 어떤 상황 에 있어도 그것을 보는 경향으로 내 안에 자리 잡게 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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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로베르타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그 친구는 특 별히 복을 많이 받아서 혹은 운이 좋아서 자신을 둘러 싼 경이로움을 느꼈을까요? 아니면 스스로 그 경이로 움을 보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점점 운이 좋아진 걸까 요? 둘 다겠지요.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가 경이로움을 더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이로움을 계속 경험하면 축복이 따라오지요. 자신에게 오는 축에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경이로움이 키워질 때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와!”하고 놀랍니다. 그 신비를 발견할 수 있는 감각과 그러려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이로움을 되찾기 위해 저는 이런 훈련을 한 적이 있 습니다. ‘You are beautiful’ 이라고 적은 메모를 가지 고 산책하다가 떨어져있는 나뭇잎을 보며 “아름답다” 고 말합니다. 또 걷다가 작은 벌레를 보며 “아름다워” 라고 말했지요. 그 중에는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 려운 대상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고마움을 지 니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하는 지향을 지니고 세상 을 보는 훈련을 계속해 나가자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 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움을 보는 에너 지는 제 안에서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 에너지가 다시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제 아내 마샤는 늘 “아름다워 요”라고 감탄하는데요, 마샤도 처음에는 훈련이 필요 했습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 집중하다보니 어느 순간 저절로 사람과 자연과 세상의 아름다움이 느껴지 고 점점 더 감동하게 되었지요.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계속 그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건, 능력입니다. 힘이죠. 그리고 이 세상의 아름다 움은 우리를 그것 너머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꽃 한 송 이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설레고 신비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꽃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그 꽃 안에 있는 천국, 빛의 아름다움으로 가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름답구 나’하는 감탄은 ‘이 아름다움이 어디서 왔을까? 그 뒤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 뒤에 있는 것, 즉 빛과 근원의 아름다움에 닿게 됩 니다. 그러니 경이로움을 느끼는 능력은 끝내는 근원을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작은 아름다움을 봄으로써 우리 는 근원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신을 사랑하는데 신이 만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외치면서 창조된 세상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을 거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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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경이로움은 사실 도착지점입니다. 출발지 점은 감사지요. 감사하기 연습이 무르익으면 경이로움 의 세계로 넘어 갑니다. 감사가 피운 꽃이 경이로움인 셈이지요. 경이로움은 기쁨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기쁨 은 수평적이지만 경이로움은 우리를 하늘로 향하게 합 니다. 우리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그 너머의 것에 경 이로움을 느끼면 단단한 자기 방어가 사라지면서 위로 더 큰 것, 더 높은 것을 향해 존재를 열게 됩니다. 기쁨 보다 더 높은 차원이지요.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경이로움의 능력은 상처를 받

는 과정에서 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주의를 집중하면 아픔과 상처 속에서도 경 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마음이 아 픈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 아픔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의 달콤함, 향기, 따듯함을 느끼는 경험을 했습 니다. 동시에 이 두 가지를 느끼는 것, 참 아름답고 좋 은 경험이었습니다. 삶에는 언제나 좋음과 경이로움만 있지 않습니다. 몸

이 아프기도 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하며 큰 두려움이 엄습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 아픔의 순간일 지라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아름답구나.”

네. 우리는 분명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지요. 자연의 아름다움에 흠뻑 잠겨 그 경이로움을 깊이 느 끼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형태나 물질에 대한 경이로움 이 사라지고 경이로움 자체만 남을 때도 있습니다. 처 음엔 꽃과 나무를 보며 ‘참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지만, 깊이 들어가면 꽃과 나무는 사라지고, 경이로움의 느 낌만 남습니다. 그 느낌, 혹은 의식은 점점 위로 올라가 종국엔 근원과 연결됩니다. 경이로움은 우리를 다른 차 원으로 인도하고 그 끝에서 우리는 근원과 연결됩니다. 경이로움은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듯 저절로 근원을 찾 아올라 갑니다. 대상에 대한 경이로움에서 대상이 사라 지고 경이로움만 남을 때 진동이 높아지고 하늘과의 통 로가 됩니다. 경이로움이 하늘의 문을 엽니다. 우리는 모두 이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능력 을 기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 힘이 있습니다. 영국 의 화가이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이렇게 경이로움을 노래합니다.

“모래 알 하나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한 송이에서 천

국을 보다.”

매일 아침 명상을 할 때 마당에 있는 수선화를 세어

봅니다. 지난번에는 일곱 송이였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스무 송이가 피었습니다. 수선화 스무 송이의 아름다움 을 보고 있노라면 점차 그 안에서 천국이 보이고 빛이 보입니다. 이 능력은 주변으로 퍼져나갑니다. 제 친구 로베르타의 경이로움이 제게 전해진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건과 사람에 대해 아주 쉽고 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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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을 내립니다. ‘좋다’ 혹은 ‘싫다’는 판단이지요. 그 런데 ‘참 좋다’는 판단보다 ‘싫어’, ‘힘들어’하는 판단이 훨씬 많습니다. 에고는 긍정과 수용보다 부정과 거부 의 에너지로 나아갑니다. 경이로움의 훈련은 그 판단을 바꾸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싫어’, ‘힘들어’, ‘안 돼’에서 ‘아름다워’, ‘참 좋아’로, 바탕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탕 이 바뀌지 않으면 거기서 나오는 느낌도 바뀌지 않습니 다. 근본부터 바꿔야 거기서 많은 생각과 에너지가 바 뀝니다.

이 훈련의 첫 단추는 자신의 주의를 내면의 두려움과

걱정에서 바깥의 아름다움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 는 평소 내면의 걱정과 두려움에 주목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생각 안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밖을 제대로 보 지 못하지요. 내면의 걱정이 아닌 실제로 현존하는 세상 의 아름다움에 주목해 보십시오. 걱정을 더 한다고 결 과가 크게 달라지진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를 현존으로 돌려 거기 이미 있는 기쁨, 즐거움, 경이로움으로 들어 가 머물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만나고 힘이 올라옵 니다. 바로 ‘Attention Out’ 훈련이지요. 같이 합시다.

Attention out! Attention on presence!


돌아서면 거기, 천국이 있네

“짜증 나”에서 “아름다워”까지의 거리는 얼마만큼 인가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요. 여기, 아름다움의 자리로 지금 돌아서십시오.
“회개하라.” 

예수께서 광야에서 깊은 정화 과정을 거친 후 사람들에게 처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수도 없이 되풀이되고 있는 선언이지요.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십니다. ‘천국이 가까 이 왔다’는 선언은 ‘천국이 이미 여기 왔다’는 말입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요, ‘meta’ 는 ‘바꾼다’, ‘noia’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즉, ‘마음 을 바꿔라’, ‘다시 생각하라’, ‘다시 인식하라’는 의미지 요. 예수는 “다시 알아차려라. 천국은 지금 여기 와 있 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 천국이 와 있다고 믿으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물밑 잠재의식에 잠겨 있는 한, 우리는 지금 여기 있는 천국을 보지도 경험하 지도 못합니다. 여기 한 어머니가 10대 아들에게 ‘다시 봐’라고 말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저술가이며 개신교 목사였던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은 ‘긍정적 사고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우 리나라에도 『적극적 사고방식』, 『믿는 만큼 이루어진 다』 등 여러 권의 책이 번역된 걸로 압니다. 그가 1950 년대 출판한 책과 사상이 서양 문화와 의식에 끼친 영 향은 상당합니다. 어느 안개 낀 밤 어머니와 10대의 노먼은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건너가는 페리보트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머니가 말합니다.

“대단히 감동적이지 않니?”

“뭐가요?” 아들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이 안개, 이 밤 불빛, 방금 지나간 페리보트! 저기 봐,

저 빛이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 정말 감동적이 잖아.”

10대 아이 노먼에게 페리보트에서 바라보는 안개와

불빛은 감탄할 만큼 아름답고 특별하진 않았을 듯합니 다. ‘우리 엄마 또 흥분하시는구나’라고 여겼을 수도 있 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노먼은 이 순간을 회상하 며 어머니가 자신에게 준 가르침이 이것이었다고 말합 니다.

“잘 봐. 이 세상은 아름다움과 감동으로 감격하고 있

어. 거기에 민감해 보렴. 알아차려야 해. 이 아름다움과 이 아름다운 곳의 사람들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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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격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이 이미 아 름다움과 감동으로 감격하고 있다니, 얼마나 아름답습 니까. 이는 자기 감격에 대한 공감의 강요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기쁨을 전달하고 있지요. 아들의 가슴 안으로 속삭였던 사랑의 말입니다. 처음엔 그 감동이 주는 힘이 무엇인지 잘 몰랐을 10대 아들은 그 에너지 안에서 무언가를 느꼈지요. 결국, 그런 아름다움을 느 끼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이곳 조이빌에 꽃을 잔뜩 심습니다. 심고 또 심 지요. 이 꽃들을 통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함 께 경험하고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은 지금 여기 이 미 있습니다. 천국은 한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짜증나 는 일, 복잡한 상황에 매몰되어 있을 때, 천국은 거기 있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아! 아름 다워”로 넘어가는 바로 그곳에 천국이 있습니다. “짜증 나”에서 “아름다워”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멉니까? 시간 은 얼마나 걸리나요? 예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 이 왔다”고 하신 말씀은 “짜증 나”에서 “아름다워”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다시 보고 돌아서라는 일침입니 다. 한 순간, 한 생각을 넘어 천국으로 돌아올 수 있습 니다. 하나의 생각을 넘어서면 천국이 있습니다. 지옥도 마찬가지지요. ‘저런 나쁜 놈’하는 하나의 생각 너머가 바로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한 생각 차이입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같습니다. “열반은 한 생각 넘어서다.” 원효 대사는 하룻밤에 이를 깨닫지 않았습니까. 꿀

맛 같은 맑은 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잠들었는데 깨어 나 보니 그것은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었지요. 그리고 깨닫습니다. 지옥과 천국은 생각의 차이라는 것을요. 바깥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천국에 머물 수 있습니다. 힘들고 아픈 순간에도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거기 에 정렬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해 드 리지요. 가슴이 찢어지듯 아픈 날이었습니다. 운전을 하 고 있었지요. 계속 갈 수가 없어서 차를 세웠습니다. 들 꽃이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꽃을 자세히 보았지요. 한 참을 자세히 보니까 꽃이 제게 아름다움을 전하기 시작 했습니다. 조금씩 깊은 의식이 돌아오고 그 아름다움이 온전히, 충분히 느껴졌습니다. 기쁨의 정원 안에 머물렀 지요. 훈련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시간이 조금 필요합 니다. 생각이 다른 데 가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꽃 앞에 서도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점차 생각이 여기로 돌아오면서 그 꽃이 보이기 시작하고 천국을 만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떠돌아다니는 생각들과 우리 안에서 올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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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수많은 느낌에 충성을 바칩니다. 전혀 충성을 바칠 만한 것들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떠오르는 수 많은 생각과 느낌은 상당 부분 세상의 두려움, 인류의 아픔 안에서 발생합니다. 내 생각, 내 느낌이라고 인식 하지만 이는 이미 인류 안에서 만들어 온 두려움과 아 픔, 즉 공해의 장場 안에서 올라오는 에너지입니다. 대부 분 내 것이 아니고, 믿을만한 것도 못됩니다. 그러니 아 픔과 두려움에서 발생되는 이 수많은 생각과 느낌을 진 짜라고 믿지 마십시오. 무게를 두지 마세요. 그리고 당 신 곁에 다가와 있는 아름다움에 주의를 돌리세요. 가 끔 무심함과 무딘 마음은 이 아름다움을 인지하지 못 할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연습하면 됩니다. 다시 시 작하면 됩니다. 어두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회개하십시오. 즉 다시

생각하고 다시 보십시오. 상황은 여러분의 존재를 뒤흔 들지 못합니다. 다시 보고, 다시 생각하고, 다시 아름다 움으로 돌아오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의 첫 선언 “다시 보라, 천국이 여기에 있다”가 ‘복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는 참되게 보는 것이고 곧 복음입니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무겁고 아픈 것이 아닙니다. 정말 기쁘고 좋은 소식이지요. 아름다움과 천국은 내가 다시 볼 때, 제자리로 돌아올 때 이미 여기 있다는 사실, 정말 기쁜 소식 아닙니까. 아랍어로 회개를 의미하는 ‘타으바tawba’ 와 히브리어 ‘태슈바teshuva’는 모두 ‘돌아오다’라는 의미 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계속 부정적으로 갈 때, 다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돌아오십시오. ‘천국이 여기 있다’는 말은 ‘아름 다움이 여기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생각을 넘어 아 름다움으로 돌아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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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reciation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고마워하는 것, 이게 우리의 일입니다.

에미서리 공동체에서 지낼 때 제 멘토였던 분 중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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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은 한창 바쁘게 일하는 중에 제 옆을 지나가면서 윙 크를 해주셨습니다.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 중에 보내 주셨던 찰나의 윙크는 내면의 여유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지요. 그 윙크와 웃음은 기쁨을 전해 주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내면의 여유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긴장과 불안이 가득 찬 문화 속에서 살아갑니 다. 불안은 우리를 즐기지 못하게 하고 만족하지 못하 게 합니다. 무언가 더 해야 하고 더 빨리해야 합니다. 그 걸 하지 않으면 무언가가 크게 잘못될 것만 같은 에너 지장이 형성되어 있지요. 특별히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강박감이 더 심한 듯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경쟁적으로 입시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긴장감 높은 노동 사회에 나가게 되지요. 평생 마음의 여유를 모르고 달리다가 은퇴할 때가 가까워지면 웰빙과 힐링을 찾습니다. 불안한 사회가 주는 긴장과 강박을 가뿐히 튕겨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변 에너지장이 긴장과 경쟁으로 차 있고 자기를 둘러싼 많은 이가 그 에너지를 따라 산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당신들이 그렇게 살아도 난 안 그 럴 거야”라는 아주 단순한 배짱이 필요합니다. 이런 여 유로움을 가질 수 있는 배짱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제 어머니 일선 님이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지셨습 니다. 연락을 받고 의식이 없는 일선 님과 구급차를 타 고 병원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긴장된 순간 저는 의식을 집중하고 그 순간의 완벽함이 무엇인지 찾고자 했습니다. 저의 초점을 훈련된 여유로움을 열기 시작하 는 의식에 두었습니다. 이렇게 훈련된 의식을 통해 압력 이 몰려오고 긴장되는 순간에도 여유로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제 아내 마샤는 미국 에미서리 공동체의 친 구인 밥Bob과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밥은 밖에 나가 서 몇 시간을 하염없이 앉아서 봄의 기운이 솟아오르 는 걸 ‘느끼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말을 할 때 ‘Appreciation’이란 단어를 썼는데요, 이는 ‘충분히 느 끼며 고마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서 이른 봄의 에너지를 온전히 느끼고 거기 고마워했다 는 것입니다. 그는 “이게 내가 할 일이야. This is my job”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봄이 오는 기운을 깊이 느끼고 음미하면서 고마워하 는 게 나의 일이다.”

어느 누군가는 봄의 솟아오름을 충분히 느끼고 고마 워해야 한다는 거죠.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첫 번째 책 임은 공부를 시키는 게 아닙니다. 일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지요. 첫 번째 책임은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고마 움으로 아이를 안내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느끼며 고마워할 때 아이는 따 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길과 소명을 찾아 갑니다. 또 한, 경이로움과 고마움에서 오는 여유로움이 우리 존재 를 채우고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다른 모든 것을 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루에 두 번 사물을 느끼며 고마워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첫 번째는 매일 아침 성화시간이지요. 추위 가 매섭지 않다면 늘 마당으로 나갑니다. 운동을 하고 옆에 있는 나무랑 꽃들이랑 풀들이 자라는 것을 봅니

다. 깊이 느끼고 좋아합니다. 이것을 매일 합니다. 지금 우리 집 마당에는 일곱 개의 수선화 봉오리가 맺혀 있 습니다. 매일 아침 일곱 개의 봉우리를 쳐다보며 “참 예 쁘구나. 아름다워”하고 감탄을 전합니다. 주변의 새들 과 나무들을 보면서 “정말 아름답구나. 고마워”라고 말 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떠오르는 해가 아름다워서 해를 향해 한참을 걸어가 보았지요.

두 번째는 점심 식사를 한 후의 ‘느끼고 고마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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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입니다. 영어로는 ‘Appreciation Walk’ 지요. 이 런 연습이 몸과 마음에 베이면 그 에너지가 쌓입니다. 쌓여 있으니 남고, 남으니 여유로워집니다. 외부에서 큰 타격이 오거나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할 때조차 내면의 여 유가 남습니다. 멈추어서 고마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순식간에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면의 여유를 기르기 위해서는 계속 연습을 해야 합 니다. ‘느끼며 감사하기’는 내면의 여유로움을 기르는 연습의 핵심입니다. 물론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느끼 는 훈련입니다.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사물을 느끼 며 감사합니다. 저의 매형인 에릭Eric은 매일 한 시간씩 ‘Appreciation Walk’를 합니다. 그는 집 주변 숲 속을 한 시간 동안 걸으며 자연과 땅의 모든 것을 의도적으 로 느낍니다. ‘매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꾸준히 계속해 야 내면의 여유로움이 길러집니다.

<어바웃 타임About Time>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연애

를 해보지 못한 주인공이 성인이 되자 아버지는 가문의 특별한 능력을 알려주는 데요, 바로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입니다. 주인공은 이 능력으로 진정한 사랑을 이루 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삶의 핵 심적인 교훈을 얻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 하죠.

“이 세상의 향기와 따뜻함을 의식하며 오늘 하루하루

를 살아라”

이것이 Appreciation 훈련입니다. 영화에서는 참으 로 섬세하게 이 교훈을 전달합니다. 일이 잘 풀리고 삶 이 쉽다고 여겨질 때만이 아니라 답답하고 암담한 때에 도 세상의 따뜻함과 향기를 의식하며 살아가란 거죠. ‘답답해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외부 상황이 답답하더라 도 동시에 따뜻함과 향기를 경험할 수 있는 여유를 연 습하라는 뜻입니다.

매형인 에릭과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의 훈련

은 다릅니다. 에릭은 의식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고마워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영화에서는 외부의 상황 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면서도 향기와 따뜻함을 의식하 는 것을 말합니다. 첫 번째를 충분히 연습하면 두 번째 는 훨씬 수월합니다. 하지만 첫 번째를 하지 않고 두 번 째 길을 걷기란 쉽지 않습니다. 경이로움과 고마움에 대 한 감각을 키우면, 이것이 우리 삶의 바탕이 되고 모든 것은 그 위에 세워집니다. 따라서 이것이 우리의 첫 번 째 책임이며 첫 번째 일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첫 계명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통해서 신을 사랑하고 신께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경이로움과 고마움을 깊이 느끼면 더 깊은 문이 열립

니다. 혜민 스님도 자신의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멈추기 전에는 안 보 였던 것들이 멈춤으로써 처음으로 보인다고요. 경이로 움과 고마움의 에너지가 우리 내면의 바탕이 될 때, 점 점 더 많은 사람이 이 에너지로 채워질 때, 이 공동체는


어떤 집단일까요? 경이로움과 고마움은 하늘과의 연결 문입니다. 경이로움은 받아들이면서 여는 에너지입니

다. 이 경이로움과 고마움의 에너지가 리더십 에너지의 핵심입니다. 세상에 제일 먼저 채워져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경이로움과 고마움이 자리 잡는다면, 다른 것은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밝고 상쾌하고 친절해지고 두려움 없이 대담해질 것 입니다. 그리고 책임감과 결단력 있게 일을 만들어 나가 고 솔선수범하면서 내면의 여유와 만족을 갖고 실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사물의 아름다움과 경이로 움을 의식적으로 느끼는 훈련을 계속합시다.


결과와 상관없이 사랑하라

두려워하고 판단하고 저항하면 그것과 동일시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내려놓으면 동일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걸 할 수 있지요.
바로 사랑입니다. 아픔대신 사랑을 표현하고 발산할 수 있습니다.


최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벗들에게 삶의예술학 교 활동에 관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16개월 만에 전하 는 소식이었어요. 그동안 어머니 일선 님이 쓰러지셔서 돌봐드렸고 일선 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가 하는 일 들이 갑자기 확장되어 쉴 틈이 없었습니다. 소식을 전 하자 노르웨이, 영국, 남아공, 호주, 미국, 캐나다, 세계 곳곳에서 답장이 날아왔습니다. 모두 우리의 활동을 기 뻐하고 고마워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16개월 동안 아 무 소식이 없었으니 무슨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 하기도 했겠지요.

오늘 아침에는 청년시절부터 20여 년간 가장 친한 친

구였던 브루스 알렌Bruce Allyn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그 친구를 못 본 지 벌써 20여 년이나 되었네요. 제가 영국 에서 영성 활동을 처음 할 때 만나 함께 활동했던 영적 형제죠. 우리의 관계는 함께 활동하는 동료 이상이었습 니다. 우리는 하나인 근원에서 함께 세상에 온 형제이면 서 하늘의 일을 하는 사명감을 나누는 동지였지요. 그 에게서 온 편지의 제목은 “Here Am I”, 즉 “내가 여기 있어”였습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내가 여기 있 어”라는 한 문장에서 “나는 여기에 깨어있고 우리는 같 은 소명으로 함께 하고 있어”라는 마음이 전해졌습니

다. 그 한 문장 안에는 ‘나는 하늘의 사랑을 가져오기 위하여 여기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왜 세상에 왔을까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인가요?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 합니다. 내 삶과 존재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지 않아요. 단지 잘 먹고 잘 사는 거라면 제 친구는 하버드 박사학 위를 받고 나름 잘 지낼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깨어 있었고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지요. 제 친구 는 많은 사람들이 잠자고 있는 애벌레 같은 세상에 나 비의 진동을 가져오고 싶어 했습니다. 20대 때 빛의 소 명을 함께 했던 그 설레는 자리에서 우리는 지금 이 순 간에도 만나고 있습니다. 이 길은 아주 신나지만 때로 는 외롭습니다. 소설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갈매기 조나단도 그렇습니다. 하늘의 진동을 느끼며 더 높은 이상을 향해 날지만, 때로는 같이 하는 벗이 아무도 없 어서 외로워합니다. 애벌레들이 주로 많은 이 세상에서 나는 나비들은 때로 외롭습니다.

지난주에는 몸이 많이 안 좋은 친구가 연락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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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친구는 요즘 두려움을 느끼고 존재의 축복과 빛이 멀게만 느껴진다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어 떤 상황에서도 사랑과 축복의 진동을 지금 여기로 가져 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지요. 즐겁고 행복할 때는 이 사명을 펼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플 때, 두 려울 때는 쉽지 않지요. 그러니 진짜 사랑의 진동이 필 요한 순간은 우리의 발걸음이 가벼울 때보다 아픔과 두려움, 어두움이 존재하는 구체적인 순간입니다. 그리 고 우리는 사랑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프고 두려울 때, 우리는 괴로움을 경험합니다. 괴로

움과 아픔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프더라도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괴로움은 아픔에 대한 저항입니다. 아픔 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거기에 저항하고 판단하며 두 려워합니다. 괴로움은 바로 그 저항에서 생기지요. 아픔 에 저항하지 않고 잘못된 거라고 판단하지 않고 두려 워하지 않으면 아픔 그 자체만 느낄 수 있습니다. 두려 움과 아픔이 당신을 찾아올 때, ‘무언가 잘못됐어. 내가 잘못된 거야. 뭔가 안 될 것이 일어나고 있어’하며 저항 하지 마세요. 우리는 아픔과 두려움조차 그대로 환영하 고 느끼면서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습니다. 판단, 저항, 두려움을 보태지 않으면 아픔과 두려움 안에서도 사랑 과 축복을 발산할 수 있습니다. 저항하지 않고, 잘못된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이곳, 이 구체적인 순간, 이것이 내가 사랑의 진동, 축복의 진동 으로 갈 수 있는, 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이구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두려워하고 판단하고 저항하면 그것과 동일시됩니 다. 하지만 그것들을 내려놓으면 아픔과 우리가 동일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걸 할 수 있지요. 바로 사 랑과의 동일시입니다. 사랑을 표현하고 발산할 수 있지

요. 어떻게 아프고 두려울 때 그게 가능할까요. 아주 구 체적인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두려움, 아픔을 경험하 는 그 순간, 나와 똑같이 두려움과 아픔을 경험하고 있 는 세상, 혹은 나보다 더 아파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사 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을 보내는 것입니다. 내가 아픔과 두려움을 경험하는 순간은 이 세상의 모 든 아파하는 사람들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 도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아플 때 거기 파묻혀버리지 말고 나의 사명을 펼칠 기회로 받아들여 봅니다. 아프 고 고통스러울 때 왜 이게 나한테 왔는지 억울하고 그 고통의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습니다. 뭔가 잘못된, 정 상적이지 않은 자리이니 바로 잡고만 싶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승복하십시오. 더 큰 사랑의 자리 로 나아갈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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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여기 있어. 두려움과 아픔의 순간 여기 있어. 사랑을 가져오기 위해. 나비의 진동, 하늘의 진동을 가져오기 위해.

이는 하늘의 뜻을 펼치는 벗들의 약속입니다. 어떤 경 험이 오든지 예외 없이 사랑과 축복을 보내겠다는 맹세 입니다. 방법은 간단하지요? 이 순간 나보다 더 아픈 사 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을 위해 사랑과 축복을 보내는 것 입니다. 괜찮습니다. 우리는 아프면서도 사랑할 수 있 습니다. 그게 우리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사 랑입니다.

사랑과 축복의 힘을 기르는 방법을 하나 더 소개해

드릴게요. 얼마 전에 스마트폰에 알람 앱을 하나 깔았 어요. 잠잘 때를 제외하고 한 시간마다 차임벨이 울리 게 해놓았습니다. 주머니 안에서 매시간 아름다운 음악 이 진동합니다. 제게 이 음악은 ‘경이와 감사의 벨’입니

다. 이게 울릴 때마다 잠깐 멈추어서 “아,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를 세상에 표현합니다. 다른 무언가에 빠 져 있다가도 이 벨소리가 울리면 깊게 호흡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찰 나의 멈춤은 저를 근원으로 데려옵니다. 제가 누구인지 잊지 않게 해 주고 존재의 현존과 중심에 바로 서게 해 줍니다. 그러면 한층 여유로워집니다. 고마움, 경이로 움, 아름다움이 먼저입니다. 그것이 여유로움으로 이어 지지요. 벨이 울릴 때마다 잠깐 멈추어서 세상과 자신 을 느낍니다.

“아, 내가 여기 있구나. 세상도 여기 있구나. 살아있는 지도 모르고 빠져 들어 있었어. 세상도 실제로 여기 있 구나. 고마워.”

의식적인 고마움, 의식적인 경이로움, 즉 의식적 여유 로움입니다. 이렇게 ‘내가 여기 있어. 이 순간, 이 상황 에’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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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의 세상에 나비의 진동을 가져오는 것은 경이 로움과 축복, 그리고 사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나비 의 진동은 곧 나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지 요. 나비의 눈이란 곧 사랑의 눈, 하늘의 눈입니다. 바 로 이 순간, 그리고 모든 순간이 사랑의 발산을 위하여 있음을 알아보는 눈입니다. 좋은 시간에만 사랑을 발산 하는 게 아닙니다. 하늘의 눈으로 보면 아프고 두려운 순간마저도 사랑과 축복을 드러내기 위한 순간입니다. 바로 이것이 나비의 눈입니다. 삶의예술학교의 가르침 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바로 이것이지요. 결과에 구애됨 없이 사랑이 발산되도록 하라. 오래전 몸의 기력이 바닥으로 떨어져 침대에서 일어 나지도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만약에 내가 이 렇게 기력이 쇠한 상태로 생을 일찍 마감한다면 어떻게 될까’란 생각이 떠올랐지요. 평소에 병원에 입원한 환자 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그 땐 ‘이 세상에 병원이 얼마나 있을까?’, ‘그 병원에 힘없이 누워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하면서 세상에 육 체가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식하게 되었습니 다. 그래서 그 순간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힘도 없 고 아프지만 그것만은 할 수 있지, 맞아, 그것만은 할 수 있지, 라고 생각했지요. 물론 누워있는 내내 그러지 는 못했습니다. 기도조차 잊을 만큼 완전히 기진맥진 할 때도 있었어요. 그럴 땐 조금 지나 의식이 돌아오면 그때 다시 반복했지요.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구체적 상황이 어떻든지 사랑과 축복을 세상에 보내 는 사람들이 바로 세상 안에 있는 빛의 몸체이고 사랑 의 몸체입니다. 때로 잊어버리고 고통에 휩쓸려 가더라 도 다시 사랑의 자리로 돌아오는 모든 이가 빛의 형제 자매들이고 이들이 빛의 몸체를 이룹니다. 세상 어디에 있든지, 상황이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아서 오랫동안 만날 수 없다 하더라도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와 제 친구 브루스가 그렇듯, 우리 모두 그렇습니다. 내가 여기 그대와 함께 있소. 하늘의 기운, 사랑의 기 운, 나비의 기운을 가져오기 위하여. 깨어있는 빛의 몸 체는 커가고 있습니다. 고마움, 경이로움, 여유로움을 훈련하고 경험하면서 함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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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부 회복

· 당신의 서러움을 안아줄께요

· 당신 마음 깊은 곳의 순수

· 칠흑 같은 밤하늘도 따뜻하게

· 좌절은 기회

· 마음을 다해 들으면

· 수신양호, 내가 듣고 있어요

당신의 서러움을 안아 줄게요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해서,
천대받고 존중받지 못해서 생긴 깊은 상처를
안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에너지는 결국 공동체와 사회의 에너지마저 좌우합니다.

삶의예술학교에서는 ‘서러움의 치유장場’을 엽니다. 우리의 가슴과 의식이 온전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충분한 존중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충분한 존 중과 보호는 한 인간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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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참 소중한 아이야.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야.

한 사람에게 이 메시지는 정말 중요합니다. 온전하게 성장하려면 이 메시지는 꼭 필요합니다. 어린 시절 이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면 어른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받 아야 해요. 이게 없으면 우리 의식과 가슴 안에 큰 멍이 듭니다. 존중받지 못해서, 보호받지 못해서 생기는 서러 움의 멍이지요.

현대 사회의 기운 안에서는 건강하고 온전한 사람들 조차도 경멸과 무시를 전혀 경험하지 않고 자라나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경멸은 상처 자국을 남깁니다. 이 자 국은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고 남아 우리의 생명을 훔쳐갑니다. 우리의 생명력이 계속 그 자국으로 몰리지 요. 블랙홀처럼 에너지를 빨아들입니다. 이 블랙홀이 서 러움의 멍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존중받지 못하고 보 호받지 못해서 생긴 서러움의 멍이 얼마나 짙게 남아 있 나요. 또 내 주변 사람들 안에는 얼마나 크게 남아 있나요.

빛과 사랑의 존재로서 깨어나려면 서러움의 눈물을 치유해야 합니다. 이 치유는 우리가 서로에게 해 주어야 할 몫이지요. 많은 사람에게 서러움은 깊이 가라앉아 있어서, 또 많은 것으로 덮어놔서 일상을 살아갈 때에 는 잘 드러나지 않을지도, 눈치 채지 못할지도 모릅니 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안에 그런 서러움의 눈물이 있다 는 걸 알 수 있지요. 우리의 주변이 자꾸 아픔과 슬픔, 두려움으로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왠지 모르게’ 서러워. 이유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서러워.

특히 어릴 때 받은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라나서 생긴 마음의 멍도 마찬가지죠. 가장 먼저 마 음 깊은 곳에 그 멍이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서러움은 필요한 존중과 보호를 받지 못한 데서 오는 아픔입니다. 어릴 때는 존중과 보호를 받아야만 합니다. 제대로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죠. 그 필요한 것을 받지 못했을 때 멍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존중받지 못한 것은 버림받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는 버림받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그런 적이 없다 하더라 도 말입니다. 버림받는 경험은 아주 큰 생채기를 남깁니 다. 우리는 서로의 멍을 헤아려야 합니다. 사랑과 보호 를 받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천대받고 존 중받지 못해서 생긴 깊은 상처를 봐주고 안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멍이 흐려져서 마침내 사라지지 않으면 에 너지는 결국 그 블랙홀로 가게 됩니다. 한 사람의 에너 지는 결국 공동체와 사회의 에너지마저 좌우하게 됩니 다. 천대받고 버림받고 판단을 받았던 사람들이 또 다 시 세상을 경멸하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받은 씨를 다시 뿌립니다. 현대 사회를 느껴보십시오. 경멸이 가득 차 있음을 느낍니다. 그것은 독毒이지요. 결국 이 깊이 스민 독毒을 빼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먼저 깊 이 들여다봐야겠지요. 그리고 우리 앞에 서 있는 한 사 람 안에 남아있는 서러움의 멍을 봐야 합니다. 그 멍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면 치유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입이 아닌 가슴으로 말합니다.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참 소중한 존재야.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의 손을 잡아주십 시오.

사랑하는 친구야, 보호받지 못해 서러움의 눈 물 흘리는 너를 혼자 울게 두지 않을 거야.

전쟁터의 군인들 사이에서는 “쓰러진 전우를 두고 오 지 않겠다”가 가장 큰 가치입니다. 생명의 전우들 사이 에서, 마음 제일 깊은 곳에서 이렇게 말해주세요.

“보호받지 못한 채로, 버림받은 채로 너를 홀로 두지

않을 거야.”

우리가 서로 안에 남아 있는 눈물을 보면서 사랑을

전할 때, 그 에너지가 전달될 때, 멍이 풀어지기 시작합 니다. 아파서 굳었던 가슴이, 얼어서 흐르지 못했던 눈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한참 흘러야 합니다. 한참 울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눈물은 서서히, 저절로 가십니다. 그리고 기쁨이 돌아옵니다. 모든 인간은 소중한 사랑의 존재입니다. 존중을 받는 세상을 만듭시다. 먼저 우리 사이에 이제 막 깨어나고 있는 가까운 벗들 사이에 남아 있는 눈물과 멍을 이해 하고 감싸 줍시다. 우리, 그렇게 합시다.


 당신의 서러움을 안아 줄게요 

당신 마음 깊은 곳의 순수

왠지 모를 그리움이 당신을 찾아오면,

상처받기 전의 당신을 되찾기 시작하십시오. 당신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겹겹이 입은 두꺼운 갑옷, 그 아래에 있는 순수한 가슴을 만나십시오.
생명의 종소리는 울려 퍼지며 말하고 있다.
깨어나라. 일어나라. 순수한 너를 살아라. 순수한 너는 살아있다.

신뢰는 우리 삶의 바탕이자 힘의 뿌리입니다. 삶과 생 명, 우주와 근원을 향한 신뢰, 근본적으로는 자신에 대 한 신뢰.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지요. 많은 사람이 순수한 자기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순수한 존재감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고, 흔적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나’는 살아있습니다. 봄을 기다리며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올 생명처럼 우리 의 모든 상처 아래에서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지요. 순수한 자신을 되찾아 그 힘으로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진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살고 있으므로 이 메시지는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순수하고도 성숙한 영혼 들은 아직 자신의 순수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흔들 어 깨웁니다. 이들의 에너지는 잠자는 영혼, 자기를 잊 어버린 영혼들 안에 진동을 일으킵니다. 이 안으로부터 의 울림은 많은 이에게 그리움으로 느껴집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때때로 불쑥 올라오는 그리움, 밤길을 걷 다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보는 순간 문득 올라오는 그 리움이죠. 많은 이가 이 원인 모를 그리움을 잊기 위해 술집을 찾고 일거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술을 아무리 마셔도 그 ‘왠지 모를 그리움’은 다시 돌아옵니다. 이 순수에 대 한 그리움은 인간의 근본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도 떨쳐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아무리 돈을 벌어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 중에 중년의 나이가 되면 ‘절에 가볼까, 교회에 갈까, 아 니면 명상을 해볼까’하며 발걸음을 옮깁니다. 순수에 대 한 피할 수 없는 그리움의 작동이지요.

깨어나십시오. 일어나십시오. 순수한 자신으로 사십시오.

이 순수로의 부름은 우리에게 저항을 불러일으킬지 도 모릅니다. “순수한 나로 살라니,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순수하면 손해 보고 상처받고 배신당한다고. 안 돼. 절대 안 돼”하고 말입니다. 현명한 순수함은 바보 같은 순수함과 다릅니다. 어릴 때는 그냥 순수하지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이미 순수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아 상처를 받습니다. 그 과 거를 되풀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눈을 뜨고 사람 안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줄 아는 현명한 순수로 살아가 면 됩니다.

순수한 나로 살라는 부름은 순수한 사랑으로 살라는 뜻과 같습니다. 이 역시 순수하면서 현명한 사랑을 말 하지요. 아무리 상처를 받아도 겹겹이 쌓인 상처의 갑 옷 안에는 상처 받기 전의 가슴이 살아있습니다. 상처 받기 전의, 서러움이 시작하기 전의 나는 곧 사랑입니 다. 상처가 불러 온 원망과 불신이 자리 잡기 전의 나이 지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원망과 분리가 시작되기 전, 불신이 시작되기 전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깊 이 기억해낸다면 서러움이 시작되기 전의 자신을 기억 해낼 수 있습니다. 깊은 곳에 있으므로 인간은 선함과 순수에 본능적으로 끌립니다. 진짜로 행복하고 기쁜 삶 을 살고 싶다면 그 기억을 되찾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평생 원인 모를 그리움 속에서 방황만 하게 될 테니까요.

왠지 모를 그리움이 당신을 찾아오면, 상처 전의 당신을 되찾기 시작하십시오. 인생에서 서러움이 시작한 순간이 오래전에 있었음을, 그리하여 원망과 분리, 불 신이 자리 잡기 시작한 날이 있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순수한 나에게서, 내 마음의 본래의 고향인 신뢰와 사 랑에서 떨어져 나온 어떤 날이 있었다는 것을요. 그 분 리 후에 우리는 어두운 날들을 보냈습니다. 알 수 없는 그리움에 헤매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서러움 뒤에 우리 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겹겹이 갑옷을 입고 무장을 했습니다. 순수함이 입은 상처가 너무 깊고 아팠기 때 문이지요.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우 리는 “다시는 상처받지 않을 거야”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확히 느끼며 알고 있습니다. 그 갑옷 안에 순수한 내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앞으로 올 시대는 순수와 지혜의 시대입니다. 지금 인

류는 과거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풍요롭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물질의 풍요로움이 커지면 ‘알 수 없는 그리움’ 을 외면하기란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가난했을 때는 마음의 갈증과 그리움이 물질적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고 물건을 삽니다. 더 좋은 걸 먹고 더 좋은 옷을 입고자 합니다. 그렇게 채워 도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때야 비로소 그리움이 결핍에서 오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되지요. 결국, 길은 하나, 순수한 자신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순수하고도 현명한 나로 살아가는 이들이  퍼져 있습니다. 그 수가 점점 늘고 있죠. 그들을 빛의 형 제자매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 같이 빛 의 자매와 형제들이 됩시다. 그리고 멋지게 신나게 생명 의 종소리를 울립시다. 갑옷을 벗고 싶어 하고 벗기 시 작한 이들에게, 깨닫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종소리와 빛이 되어줍시다. 서로에게 힘을 보태면서 순수한 자신 을 찾아 일어나는 사람들을 돕고 이끌어주는 이 일을 계속합시다.

칠흑 같은 밤하늘도 따뜻하게 근원적인 관계를 정화하면 삶에 흐르는 기본 정서가
밝음과 따뜻함과 사랑이 됩니다. 어두운 밤하늘도 사랑으로 가득 찹니다.
어젯밤, 어둠을 밝히는 수많은 반딧불과 길동무가  되어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별안간 제 앞에 작은 동 물이 보였습니다. 5m 정도 되는 거리였어요. 깜깜한 어 둠 속에서 검은 물체가 갑자기 나타나면 겁이 나잖아 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제 저는 하나도 두렵지 않고 ‘저게 뭐지?’하는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까맣고 작은 동물에게서 사랑스럽고 장난스러운 에너지마저 느껴졌 습니다. 그 순간 8년 전 미국에 살 때 길렀던 검은 고양 이 해피가 떠올랐어요. 이 까만 형체가 정말 행복 에너 지 자체였던 우리 해피라고 생각되었어요. 삶에서 어두운 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힘들 때도 있고 영혼이 깊은 어둠으로 침잠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어두 운 길 위를 벌벌 떨지 않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면 참 괜찮지 않겠습니까? 어제 어둠 속에서 검은 동물 형체 를 만났을 때 저는 왜 편안했을까요? 과거에 어두운 길 을 걷다가 갑자기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면 겁도 나고 놀랐을 텐데요. 저는 그것이 제가 치유되고 정화되면서 잠재의식 속의 깊은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에 어둠 속 에서도 두렵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산책할 때마다 ‘사랑 찬 밤하늘’을 경험하고 있 습니다. 밤에 어두운 길을 산책하면서 ‘밤하늘이 사랑 으로 가득 차 있구나’하고 느낍니다. 밤하늘을 보며 따 뜻함과 포근함, 축복을 경험합니다. 하늘은 자신의 마 음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경험됩니다. 쓸쓸하거나 외로 울 때도 있고 경이롭고 아름다울 때도 있습니다. 밤하 늘이 사랑으로 차 있는 것처럼 은혜롭게 느낀다는 것은 근원과 사랑과의 깊은 일치가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이 런 일치는 종교적 교리나 지식 너머의 경험입니다. 어쩌 면 밤하늘에 대한 우리 각자의 느낌이 우리 의식과 가 슴의 치유 정도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정화되고 치유된 만큼 밤하늘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에게 ‘사랑으로 가득한 밤하늘’은 가장 바탕이 되 는 관계들을 치유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우리 삶에 서 제일 바탕이 되는 관계는 부모님과의 관계지요. 아 버지와의 관계, 어머니와의 관계에 아픔이 남아 있으 면 세상이 불안하고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살아계실 동 안, 이미 늦었다면 돌아가신 후에라도 부모님과의 관계 를 온전히 치유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 관계가 어떤가에 따라 우리 가슴 깊은 자리의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돌아가 신 후에 하는 용서와 화해, 그 용서와 화해를 넘어 사랑 으로 아픔을 치유하기, 이 두 가지 단계를 이야기하려 고 합니다.

몸이나 마음이 너무나 아플 때, 혼자 앓고 있는데 누 군가 다가와 꼭 안아 준 적 있나요? 그 순간 별안간 엉 엉 울어버리게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울 거라고 예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안아주는 순간 저절로 울음이 복받쳐 올랐던 경험 말입니다. 여기에는 간단하지만 핵 심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아픔과 외로움이 사랑으로 넉 넉하게 감싸질 때 저절로 눈물로 올라와서 흘러나가는 거죠. 아픔이 사랑과 이해로 채워지고 눈물로 씻겨나갑 니다.

이 원리는 부모님과의 관계를 치유할 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나의 기도와 의식 안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가 가진 아픔을 “얼마나 아프셨어요”하면서 깊이 받아 들이고 감싸 안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물, 치유의 눈물이 올라와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부모님이 돌아가 셨든지 살아 계시든지 상관없이 의식 안에서 할 수 있 습니다. 살아 계신 부모님께 “얼마나 아프셨어요”라고 하면, 부모님은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저리 가라”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시도는 해 볼 수 있습니다. 직접 말을 꺼내기 어렵다면 가슴 안에서 할 수도 있습 니다. ‘얼마나 아프셨어요. 얼마나 외로우셨어요’를 반 복하며 점점 깊이 들어가서 부모님에게 남아있는 눈물 이 올라올 수 있도록 사랑으로 감싸 안습니다. 아픔과 고통의 눈물이 다 올라오고 끝내 치유의 눈물이 다 흘 러나갈 때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습니다. 겹겹이 쌓여 있 던 눈물이 다 흘러나오고 마지막에 사랑만 남을 때까지 ‘얼마나 아프셨어요’를 계속합니다.

저는 부모님의 상처가 더 이상 남지 않을 때까지, 부 모님의 눈물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을 때까지 이 작업 을 계속했습니다. 그 과정 끝에 ‘상처 너머에 있는 나의 어머니, 상처 없는 나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상처 없 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랑에 차고 빛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빛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고 나니 삶의 기본에 흐르는 정서가 밝음과 따뜻함과 사랑이 되었습 니다. 밤하늘은 자연스럽게 사랑차고 은혜로운 밤하늘 이 되었습니다.

이 치유작업이 성공한다면 밤하늘뿐 아니라 우리 조 상들도 달라질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이 미 예전에 사라지셨지만 아파했던 조상들이 우리 가슴 안에서 한 명 한 명 치유되면 모두가 사랑 찬 조상들로 변합니다. 위로하고 치유함으로써 사랑에 찬 빛나는 부 모들과 그 너머 사랑에 찬 빛나는 조상들이 우리를 둘 러싸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시공간에서 살게 될까요? 이것이 진화한 인류의 미래가 아닐까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큰 잘못을 했을지라도, 너무 큰 상처를 주었더라도, ‘얼마나 아팠기에 그러셨을까’를 느끼며 부모님의 사연과 아픔을 찾아 들어갑시다. 우리 는 이것을 하러 온 사랑의 존재들입니다. 핵심적인 땅의 관계들을 치유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아가며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들입니다. 부모님이 얼마 나 상처를 주었는지, 우리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상관없 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어두운 밤길에 그림자가 보일 때 두려움이 아닌 “오, 해피!”가 될 수 있습니다. 이 험 한 세상에서 어려운 길을 걸을 때, 어두운 그림자가 갑 자기 나타날 때, 편안하게 “저건 뭘까?”하고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제대로,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길 에서 만난 게 공격적인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편안하게 서 있을 때 그것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편안 함의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 질 수 있습니다. 사랑 찬 은혜로운 밤하늘을 이렇게 만 들어갑시다.



좌절은 기회

좌절의 목소리를 실패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온전한 빛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좌절의 에너지 패턴이 깨지면
생명의 종소리는 인류의 제일 깊은 곳까지 전달됩니다.

소금이 있으면 맛이 있듯 빛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나 아가 재미가 있습니다. 소금이 아주 적은 양으로 음식 의 맛을 바꾸듯, 적은 수지만 세상에 많은 영향을 미치 는 빛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런 존재들은 세상에 재미 와 맛을 주면서 세상을 활발하게 움직이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서 빛이 커져가는 과정에는 어떤 리듬이 있 습니다. 여러분 중 몇 분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또 는 교육 후 실천과 훈련을 통해서 내면의 빛을 확장시 켜 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 내면의 빛이 성장하는 모습 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결코 직선이 아닐 겁니다. 위로 올라가다가 내려가고 다시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리듬 을 탑니다. 어떤 때는 많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도 하 고 조금 올라갔다 내려오기도 합니다. 빛이 커져가는 과정에는 확장 사이클과 축소 사이클, 발산 사이클과 정화 사이클이 있습니다. 확산하다가 축 소하고 발산하고 난 뒤 정화가 오는 자연스러운 리듬 입니다. 이 자연스러운 리듬을 이해 못하면 신나게 확장 하다가 별안간 축소할 때 “왜 이러지? 뭐가 잘못 됐지? 이거 다 실패한 건가?”하고 좌절하거나 위축될 수 있습 니다. 실패도,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과정 이지요.

확장 뒤에 축소가, 발산 뒤에 정화가 옵니다. 빛의 발 산 뒤에 오는 사이클을 ‘돌아오는 주기returning cycle’라고 부릅니다. 빛을 발산한 뒤에는 주변의 ‘응답’이 돌아옵 니다. 그런데 정화되지 않은 에너지들도 함께 돌아오지요. 정화되지 않은 에너지는 우리 안의 것일 수도, 밖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큰 발산 뒤의 응답은 대부분 재밌 고 흥미롭고 신납니다. 그러나 정화되어야 할 에너지는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빛의 발산 후에 돌아오는 정화되지 않은 에너지 중

가장 큰 것이 좌절감입니다. 큰 빛의 발산 과정에서 우 리는 자신이 온전한 빛임을 깨닫고 “이제는 어떤 어둠 이 와도 빛으로 살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뒤 어떤 느낌과 상황들이 돌아옵니까? 삶의 예술학교 프로그램을 참가한 분이 집으로 돌아간 뒤 일주일 만에 이런 문자를 보냈습니다. “최고의 위기는 아내의 한마디로도 오는군요.” 어떤 식으로든지 그 에너지가 돌아오면 세상의 제약 과 어둠이 만만치 않다고 느끼고 안에서 좌절의 목소리 가 올라옵니다.

‘역시 안 되는구나. 다 소용없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미리 말했잖아. 너무 신나하지 말라고.’ ‘세상과 사람들을 신뢰할 수는 없어.’

‘더 이상 하지 마. 열었던 마음의 문 다시 닫아. 한번이면 족하지.’

이 좌절의 목소리는 빛의 발산 후 어느 순간이든지 반드시 옵니다. 인류의 의식 안에 이미 에고의 목소리가 깊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가 이 때 좌절의 목소리를 실패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 좌절의 목소리는 실패가 아닙니다. ‘기회가 왔다’는 신호지요. 역사가 깊은 지혜의 문화에서는 빛의 발산은 두 번 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빛의 첫 번째 발산 후 좌절의 목소리가 돌아왔을 때, 바로 그 순간이 온전한 두 번째 빛의 발산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안 되는구나’를 만날 때가 온전한 승리의 두 번째 발산을 해야 할 때입니다. 얼마 전, 한 지인이 실패가 계속된다는 좌절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 문자를 보냈습니다.

“완전한 실패를 27번 하셨습니까? 아니라면 좌절할 권리가 없습니다.”

27번의 실패는 저희 할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저희 할아버지 이종만 님은 일제시대에 ‘대동광업주식회사’를 만들어 광석 채굴 사업을 하셨지만 30년 동안 27번을 계속 실패만 하셨지요. 그러다 28번째 시도가 성공해서 조선 제일의 금광왕이 되셨어요. 그 분은 이미 할아버지 를 잘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제 답문을 바로 이해하 셨죠. 만약 그 분이 “저는 이미 28번 실패 했습니다”라 고 하셨다면 저는 “참 대단하십니다. 그래도 좌절할 권 리는 없어요”라고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존재들 에게는 좌절의 권리도, 이유도 없습니다. 삶의예술학교 에 오면 일단 좌절할 권리를 빼앗깁니다. “이 곳에서는 좌절의 권리를 빼앗깁니다”라고 뒤에 써 붙여 놔야겠습 니다. 우리는 빛이며 빛은 좌절을 모릅니다. 좌절을 모른다는 것은 좌절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의

미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좌절에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처절한 실패와 패배를 경험하면서 도 그 순간이 내 소명의 기회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 러니 실패와 좌절의 순간이 오면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빛을 발산하는 순간임을 알아차리십시오. 저와 함께 삶의예술학교의 세미나를 맡고 있는 재형

님이 얼마 전 “어떠한 상황도 우리의 존재의 표현을 막 지 못합니다”라고 하셨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깊은 좌 절감도 우리 존재의 표현을 막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사용합니다. 삶의예술학교는 ‘두 번째 빛을 발 산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첫 번째 빛을 발산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더 나아 가야 하지요. 두 번째 빛을 다시 발산하는 존재들, 그들 이 진정한 빛의 사자들입니다.

한 사람을 통해서 생명의 종소리의 울림을 시작해야

합니다. 한 사람 안에서 생명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 하면 거기에 공명하는 다른 생명들의 울림도 커져갑니 다. 이 생명의 종소리가 제일 크게 울려 퍼질 수 있는 순 간 중 하나가 좌절감이 돌아올 때입니다. 포기하고 싶 고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순간이 왔을 때, 내 안의 생명의 종소리를 가장 크게 울릴 수 있는 기회 로 이해하고 바라봅니다. 두 번째 빛의 발산을 통해 내면의 종을 울릴 때 ‘패턴’ 이 깨집니다. 좌절의 에너지 패턴이 깨지면 생명의 종소 리는 인류의 제일 깊은 곳까지 전달됩니다. 인류는 좌절 에너지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에너지를 깨고 통로 를 열면 그 길을 통해 다른 생명의 종들이 공진합니다. 좌절의 순간은 곧 생명의 종을 제일 크게 울릴 수 있는 순간입니다. 비디오 게임을 한다고 합시다. 5점, 10점, 50점짜리 목표물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아주 가끔 1,000점짜리 목표물이 나타납니다. 5점짜리 목표물을 200번 맞추는 것과 같은 점수죠. 좌절 에너지가 강하게 올라오는 순 간은 바로 1,000점 목표물이 나타난 순간입니다. 이 목 표물 하나를 맞추면 우리 정수가 열립니다. 그리고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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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빛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러니 미리 알고 준비합 시다. 더 환하고 커다란 빛을 발산할 기회니까요. 마음을 다해 들으면 한 존재를 향한 빛나는 눈빛과 집중력은 영혼을 끌어당깁니다. 강력한 사랑의 힘으로 밖으로 나오라며 손짓합니다. 판단을 내려놓고 마음을 다해 듣는 것,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며칠 전 어머니 일선 님과 함덕 해변을 산책했습니다. 제주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걷다보니 제가 영향을 주 고받았던 소중한 대화의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대 화들의 공통점은 아주 깊이 들어주는 상대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청하는 사람, 마음을 다해 듣는 사람은 정말 특별합니다. “그 사람은 말을 참 잘해”라고 할 때, 실은 그 말을 잘하는 사람 앞에 그의 말을 깊이 들 어주는 사람이 있지요. 때로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도 상대가 들어주지 않으면 할 수가 없어요. 진지 하게 이야기하는데 상대가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면 어떻습니까. 그 순간 말문이 막힙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이 나에게 완전히 마음을 집중한다는 건 참 대단한 일입니다. 내 얘기를 들어주 는 사람이 나에게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고 내가 마음속 에서 꺼내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보고 들어 준다면 나도 모르게 깊은 마음 속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저는 24살 때 3개월 동안 상담을 받았습니다. 일주일 에 두 번 상담가를 만나면서 ‘세상에 이렇게 깊은 관심 과 들음이 있을 수 있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저는 그 3개월 동안 제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던 것들을 꺼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제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것들이 다 나왔지요.

청년 시절 제 멘토였던 마이클Michael, 빌 벤Bill Bahan 과 대화를 나눌 때도 그랬지요. 제가 이야기 할 때 그들이 저한테 보내준 빛나는 눈빛과 집중력은 제 영혼을 끌어 당겼습니다. 밖으로 나오라며 환영하는 힘, 강력한 사 랑의 눈빛이었지요. 한 존재를 향해 깊이 집중하고 그 의 내면을 끌어당기는 빛나는 눈. 이것이 우리가 서로에 게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저의 스승이었던 마틴 세실 Martin cecil과 대화할 때도 그랬어요. 저는 그 분이 저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를 깊이 이해하 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나를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 실은 곧 세상이 내가 살 수 있는 괜찮은 곳이며 안전하 다는 느낌으로 이어집니다.

제 멘토와 스승이 제게 이렇게 깊은 헤아림과 경청을 해 줄 수 있었던 건 이분들이 수행하고 성장하면서 결 국 에고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에고가 없어져 사랑으 로 채워지면 타인이 온전하게 보이고 있는 그대로 들립 니다. 판단 없이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에너지 가 집중되어 있는 동안에는 자기 에고의 필터를 거쳐서 상대방이 보입니다. 자기 생각과 느낌이 상대방을 보고 듣는 데에 영향을 끼칩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충분히 채워지고 내가 비워지면 타인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합 니다. 타인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도 이렇게 채워지고 또한 비워지면서 저에게 ‘헤아 리는 가슴’이 생기는 것을 느꼈습니다. 헤아린다는 것 은 상대를 사랑으로 느끼며 이해하는 겁니다. 제가 열 일곱 살 때 쓴 일기 중 기억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세상의 외로움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이 민 온 젊은이로서 저도 외로움을 느꼈던 거지요. 이 세 상 안에 외롭게 울고 있는 여리고 순수한 눈물들을 느 끼고 들었습니다. 저는 일기에 “내가 결코 당신을 등지 지 않겠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결심이며 다짐이었지요. 헤아림의 가슴, 함께 느끼며 사랑하며 이해하는 가슴을 받아들이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울음소리를 등지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그 때 홀로 세상에 한 약속을 지킨 것이지요. 그 눈물이 가시 기를, 기쁨으로 다시 피어나기를 바라는 제 안의 하늘 의 기도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타인을 깊이 들여다보고 경청하면 결국 모든 타인은

나의 사랑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합니다. 관심이 자기 안 에 머물 때, 내 바깥세상의 만물은 나에게 필요한 무엇 이지요. 나에게 뭘 제공할 수 있을지, 나에게 무슨 이익 이 되는지 보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이 바깥으로 열리면 만물은 나를 채우기 위해 필요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생명 자체로 보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하나는

그를 깊이 느끼고 함께하며 그의 가장 깊은 가슴을 헤 아리는 것입니다. 그런 선물을 주는 사람을 삶의예술학 교에서는 ‘서버server’라고 일컫습니다. 서버는 우리말로 봉사자, 혹은 시중드는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의예술학교의 서버는 누군가의 곁에서 함께하며 참으로 돕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 가 있습니다. 먼저 깨어나 맑고 깊은 기운으로 세상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둠의 세상을 걷는 이들을 사 랑으로, 빛으로 인도할 수 있으니까요. 깨어나 자기를 비워내 빛을 발산하는 사람이 진짜 서버입니다. 사람과 자연 안의 제일 깊은 생명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염원하고 있는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깊이 들어 봅시다. 가슴에도 귀가 있습니다. 경청하기 위해서 는 가슴을 깊이 열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깊은 염원과 기도가 무엇인지 느끼고자 하면, 귀를 기울이면, 상대 방의 깊은 기도와 염원이 차차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의 생명의 깊은 기도와 염원을 함께 해 주는 것이 그를 깊 이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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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의 시작은 간단합니다. 상대방의 관심사에 관심

을 가져주는 거예요. 그러면 일단 재미있는 대화가 시 작되지요. 그렇게 시작해서 때가 되면 그의 관심거리 뒤 에 있는 더 깊은 염원과 바람에 닿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돕고 일깨우고 안내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관 심사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상대방의 에너지가 향해 있 는 지점이기 때문이지요. 깊이 들을 수 있다면 그 관심 사 너머의 정수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도 아 직 알고 있지 못한 정수이지요. 출발지점은 관심사지만, 도착지점은 훨씬 깊은 곳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연습은 상대에게만 집중하기입니다. 옆에 서 무슨 소리가 나도, 아무리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진 다 해도 내 앞에서 이야기하는 상대방에게만 집중하는 거예요. 사소한 소리와 자극 따위는 먼지 같이 여기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나의 우주가 됩니다. 간단하 지만, 이 간단한 집중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참으로 도우려면, 깊이 듣고 타인의 흐름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치상으로는 맞지만 당사자에 게 지금 필요한 게 아닌, 엉뚱한 것을 주려고 할 수 있 습니다. 이것은 나의 에고와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상대방의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슴 의 흐름을 따랐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 정 없이 이해나 분석에서 나오는 것은 참된 지혜가 아 닙니다. 교육자, 상담가, 성직자 등 그룹의 멘토인 사람 들 가운데에는 이런 직업병을 지닌 사람들이 종종 있지 요. 잊지 마세요. 듣고 헤아리는 게 먼저입니다. 참된 지 혜는 대상에 깊이 공감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역동과 염원, 기도를 느낄 수 있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그에게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 안에, 모든 자연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제 일 깊은 염원이 곧 하늘의 염원입니다. 존재의 심연에서 울리는 기도를 듣고 헤아리는 사람. 씨앗이고 봉오리인 기도의 꽃이 한 떨기 꽃으로 피어나도록 함께 해주는 참 존재들, 참 인간이 됩시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하도 록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내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사랑으로 이 세상이 가득 차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수신양호, 내가 듣고 있어요

불현듯 누군가가 보낸 아픔의 에너지를 받을 때 거기 휩쓸려 들어가 힘들어하지 마세요. 미소 지으며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세상으로 따뜻한 에너지를 발산해 보세요.

SNS 하십니까?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요 즘은 청년뿐 아니라 중장년층도 많이 하고 있지요. 그 럼 혹시 TSNS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TSNS는 Telepathy SNS입니다. 텔레파시를 통한 소셜 네트워크, 관계 맺기 서비스죠.

TSNS의 메시지 도착 신호는 다른 SNS 알람과 다릅니다. 소리도 진동도 아니지요. 휴대전화 전파보다 더 빠른 통신기계를 통해서 오는데요, 바로 우리의 가슴 heart입니다.

우리는 이미 텔레파시를 통한 SNS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이미 수시로 TSNS 메시지들을 받고 있지만, 메시지가 도착 한 것조차 모를 때가 많습니다. 텔레파시 능력은 특별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텔 레파시 통신이 작동하고 있지요. 혹시 기분 좋게 청소 를 하는데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거나 우울해진 적 있으신가요. 별안간 기분이 이상해지는 순 간, 그게 바로 TSNS입니다. 이런 순간들 대부분은 에너 지 차원, 진동 차원으로 서로 연결된 관계들 사이에서 흐르는 에너지를 느끼는 순간입니다.

대한민국 자살률이 OECD회원국 중 1위, 세계 전체 에서 3위 안에 든다고 합니다. 2015년 통계로 하루 평 균 자살자는 43명, 자살시도는 430여 건입니다. 에너지 로 모두 연결된 우리는 이런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유 없이 문득 아픔, 두려움이 느껴질 때, TSNS를 통 해서 ‘딩동’하고 전해오는 아픔의 메시지를 수신했기 때 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 죽고 싶어’하는 아픔의 메시지 말이죠.

텔레파시는 정신으로 전달되는 감응, 혹은 메시지를 뜻합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것으로 텔렘파시  Tele-empathy가 있습니다. 여기서 엠파시empathy는 공감이 란 뜻입니다. 즉, 텔렘파시는 공간을 뛰어넘어 전달되는 느낌이란 뜻입니다. 텔레파시가 전달되는 생각이라면 텔렘파시는 전달되는 감정입니다. 우리에게 도착하는 TSNS 수신메시지는 생각도 있고, 정서, 느낌, 에너지도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자신 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비밀 을 말씀드릴게요. 우리 안에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 대 부분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텔레파시와 텔렘파시를 통 해 공감과 공명을 일으킨 결과물이지요. 에너지 차원에 서 네트워킹이 되어있어서 같은 에너지 장場 안에서 떠 오르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TSNS를 통해 느낌과 에너 지를 서로 주고 전달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전달되는 느낌 중에는 기쁨과 환희와 평화 도 있지만 두려움, 슬픔, 분노와 외로움도 있습니다. 이 런 아픔은 상당부분 소셜 네트워킹 시스템 안에서 전달 되는 SOS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것이라 여겼던 아픔이 실은 세상으로부터 전달된 메시지인 것이죠. 그리고 아 픔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지금까지는 슬픔과 외로움이 몰려올 때 혼자만의 것 이라 여겼을 거예요. 그러나 이것이 ‘딩동’ 하고 우리에 게 온 메시지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안 에서 올라오는 아픔을 세상과 아무 관계없는 나만의 것으로만 여기면 아픔의 바다를 건너는 길을 찾기란 쉽 지 않습니다. 내 아픔의 원인을 찾아 고쳤는데 여전히 아픕니다. ‘원인이 이게 아니었나 보다’하고 다른 원인 을 어렵게 찾아 고쳐도 아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진 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 개인이 아니라 개 인이 모인 세상의 아픔에 있습니다.

언젠가 ‘사라지고 싶다’거나 ‘죽고 싶다’는 충동이 올 라온다면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충동은 당신 자신 이 아니라 어딘가의 누구로부터 또는 당신의 친구에게 서 온 것일지 모른다는 사실을요. 당신의 소셜 네트워 킹 속에서 누군가 당신에게 도와달라는 SOS를 친 것일 지 모른다는 사실을요. SNS가 일반통신이라면 TSNS 는 수퍼 통신Super Communication입니다. 수퍼 통신은 일방 통행이 아니라 양방통행이지요. 메시지를 받으면 당신 은 답신을 보낼 수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SOS를 치 고 답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 가 “나 자살하고 싶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면 “응. 그

래. 잘 가”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지 마. 거기 있어. 내가 지금 갈게”하고 달려가겠지요. 똑같은 메시 지를 우리는 텔레파시로 보낼 수 있습니다.

“괜찮아. 네가 정말 아프구나. 내가 손잡아 줄게. 내가 곁에 있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

하루 동안, 대한민국에서 “나 너무 괴로워 죽고 싶어”

라는 메시지는 몇 개나 날아다닐까요? 전송되지 않은 메시지는 얼마나 될까요? 열 배, 백 배, 아마 천 배 이상 일 것입니다. 에너지로 서로 연결된 친구들의 텔렘파시 소셜 네트워킹 안에서 이 메시지들은 수시로 전달됩니 다. 상당 부분은 마치 내가 아픈 것처럼 올라오지요. 수 신착각입니다. TSNS를 통해 아픔 메시지를 수신 받은 것인데, 내가 아픈 것처럼 착각합니다. TSNS로 우리는 사랑의 에너지를 발산해줄 수 있습니다. 가슴이 민감한 사람들은 좋은 수신기를 가진 것이지 요. 이들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더 많은 아픔을 느 낍니다. 때로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요. 그런 분들 은 간혹 메시지가 너무 많이 수신되는 때도 있습니다. ‘딩동, 딩동, 딩동’하고 알람이 계속 울리는 거지요. 저 도 상당히 민감한 수신기를 갖고 있어서 많은 것을 감 지합니다. 어릴 때는 슬퍼하는 사람 옆에 앉으면 스펀 지처럼 그 에너지가 그대로 저에게 들어오기도 했습니 다. 이제 답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을 하나 알려 드릴게

요. 쉬거나 자다가 깨어난 순간 이런 메시지를 받으면 미소를 지어보세요. 아픔에 미소를 짓는 건 쉽지 않습니 다. 일부러 입가를 올려볼 수도 있지요. 그러면 그 미소 의 기운이 내 몸 안에 감돌기 시작합니다. 발신이 시작 되지요. 가끔 저는 잠이 다 깨지 않은 상태로도 미소를 지으며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 니다”를 낮은 목소리로 반복합니다. 이 말들은 이미 제 안에서 체화되어 있어서 이 말을 중얼거리면 그 에너지 가 올라옵니다. 에너지가 올라오면 미소를 지으며 “사 랑합니다. 축복합니다”하면서 발신을 합니다. 아픔을 수신받을 때 거기 휩싸여 힘들어하지 말고 미 소를 지으며 따뜻함의 에너지를 발신해 보세요. “사랑 합니다”라고 말하며 그 안에 있는 에너지를 발산해 보 십시오. 아주 괜찮은 만트라지요. 여러분만의 사랑과 축복의 문구를 만들어 발신해줄 수 있습니다.




제 4 부 용서


TSNS가 조금 낯설고 수용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 예요. 하지만 앞으로 인류 의식이 더 깨어나고 진화하 면 이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예전엔 우리가 이걸 그토록 몰랐어”하면서 웃겠 지요.

여러분은 깨어나 앞서가는 개척자들이 되십시오. 과거에는 소수의 선각자, 고승들만 가능했던 것이지만 이 시대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딩 동’하고 수신이 올 때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사랑해 요. 축복해요”하며 미소를 보내십시오. 우리의 가슴에 는 수신과 발신 스위치가 있습니다. 많은 분이 수신 스 위치가 켜져 있다는 건 알지만, 발신 스위치가 켜져 있 단 사실은 잊고 계시지요. 가슴은 수신 장치만이 아닙 니다. 더 큰 기능은 수신을 넘어 발신하는 데 있습니다. 발신 연습을 시작하세요.

자전거를 처음 탈 때엔 휘청거리고 부딪히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두 바퀴로 바람을 가르며 씽씽 달릴 수 있지요. 가슴의 발신 장치도 똑같습니다. 점차 하다 보면 어떤 아픔의 수신 메시지가 오더라도 사랑 메시지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을 함께 배우고 키 워갑시다.

· 그러나 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 용서 연습 실패하지 않습니다

· 상처가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사랑의 아픔이 당신을 찌를 때,
· 당신의 미래를 바꿀 용서 그래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
근원의 사랑으로 들어갈 용기가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 미안해, 더 사랑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깨지고 포기할 건지, 아니면 더 깊이 들어가
· 가림막이 사라지면 실패 없는 사랑인 나를 찾을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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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조카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제게 주례사를 대신하는 축사를 부탁해서 다녀왔습니다. 제 조카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한국적인 정서와 문화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이번 결혼식에서도 다른 문화와 정서 의 차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작은 에피소드지만 앞으로 이 조카 부부의 가능성과 어 려움이 동시에 보였습니다,

어디 조카의 결혼 생활뿐이겠습니까. 가족, 친구 등 중요한 관계들, 그리고 사랑과 빛의 일치를 함께 키워 가는 벗들 사이에서도 어려움은 늘 있습니다. 그럴 때 포기하고 싶기도 하지요. 어렸을 때, 세상에 품었던 첫 신뢰가 깨져 상처입고 실망하고 포기했던 첫 경험이 기 억나시나요? 인간의 아주 기본적인 패턴입니다. 그런데 신뢰에서 시작해서 포기로 끝나는 경험 안에는 많은 고 통이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과 신뢰는 우리 인간에게 는, 나에게는 불가능해”라는 신념이 남게 되지요. 인간 적이고 유아기적 사랑으로는 지속적인 일치와 신뢰가 불가능합니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갈등하고 분노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지속되는 일치와 신뢰는 근원적 사랑 으로서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며 눈물 흘려본 적 있나요? 하지만 그렇게 아플 걸 예상해야 합니다. 성숙으로 나 아가는 여정에서 서로 안에 있는 아픈 상처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면, 꽃길만 걸 을 거라 생각했다면, 그런 순간과 사건을 만났을 때 금 방 실망하고 포기합니다.

동업, 결혼 등 모든 관계에서 미성숙에서 오는 상처 와 아픔은 아주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상하지 않는다 고 오지 않는 건 아니니까요. 어쨌든 옵니다. 불가피하 지요. 그러나 이런 갈등은 궁극적으로는 온전함을 찾아 가는 길입니다. 기회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예언도 사라 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그러 나 사랑은 실패가 없습니다. (1 고린토 13, 8)

성서의 말씀이지요. 정말입니까? 사랑은 정말 실패가 없던가요? 다 견디어 지던가요? 인간적 사랑으로는 실 패하고 견디기도 어렵다는 걸 우리는 많이 경험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실패 없는 사랑은 인간적 사랑 너머 더 깊은 근원적 사랑입니다. 이렇게 아플 줄 몰랐다며 다 포기하고 싶을 때, 우리는 근원까지 들어갈 용기가 있는지, 그리고 그 근원의 사랑을 찾을 것인지를 물어 야 합니다. 아픔이 왔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깨지고 포기할 건지, 아니면 더 깊이 들어가 실패 없는 사랑이 나라는 것을 찾을 것인지를 말이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여러 관계들을 통해 아픔과 실망으로 식어버린 가슴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식 어버린 가슴 안에는 아직 한 번도 식어본 적 없는, 실패 없는 사랑의 씨앗이 뜨겁게 살아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존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내 존재 자체가 사랑이기 때 문에 이유와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든 지 나는 나를 표현합니다. 내가 나로 있는 만큼, 사랑을 표현하는 만큼 실패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실패를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관계의 실패 든 사업의 실패든 외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회생 가능 성이 없는 것, 그걸 실패라고 합니다. 하지만 내면에서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실패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안에서 사랑의 힘, 생명의 힘을 포기하지 않을 때 실 패는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는다면, 실패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됩니다. 에고로 뒤덮인 세상은 진실한 사랑을 간절히 찾고 있 습니다. 실패 없는 사랑,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을 기 다립니다. 수없이 실망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도 맘 속 깊은 곳에서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서 그런 사랑 을 만나고 싶다’고 희망합니다. 진실한 사랑의 이야기 를 유튜브나 SNS를 통해 공유하는 것도, 때로는 드라마 의 사랑 이야기에 심취하는 것도 이와 같은 욕구 때문 입니다.

관계에서 아픔을 경험할 때, 우리는 혼란스러운 감정 을 느끼고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마저 혼란스럽 습니다. 자기 자신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아픔, 화, 절 망, 모멸감, 수치심, 억울함 등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자 신의 어지러운 마음을 느끼는 동시에 ‘안 돼, 내가 잘못 하고 있어’라고 판단합니다. 그런 자신을 문제 삼지 마 십시오. 괜찮습니다. ‘아, 내가 혼란스러운 감정을 지금 느끼고 있구나. 그럴 수 있어. 괜찮아’ 하고 말입니다. 이런 복잡한 감정과 정서를 문제 삼지 말고 이 힘겹고 혼란스러운 마음들 가운데에서 근원이 무엇을 드러내 고자 하는지를 물으십시오. 쉽게 포기하지 않고 견디면 서 깊이 근원을 계속 찾아가면서 사랑의 근육, 영적 근 육을 계속 키워나갑시다.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아 포기 하고 싶을 때면 더 깊은 사랑을 찾아 들어가십시오. 그 리고 말해주세요.

“나는 사랑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아.”


용서 연습

“미안해.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 내가 아팠어.

사랑해.”

타인의 순수에서 나오는 사과와 겸손,

그리고 눈물과 사랑이 우리를 용서로 이끕니다.

길거리를 걷다가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로부터 위협과 피해를 경험했다면 그에게 화가 나고 원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여기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 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원망을 품으면 두 배의 원망을 세상에 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는 위해를 가할 때 나에게 전달된 상대방의 파괴적인 업karma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에게 품은 나의 새로운 원망입니다. 원래 존재하던 원망에 내 것까지 보태 심었으니, 그 다 음엔 멋진 수확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농사를 해 본 분들은 압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피해에 대한 원망을 정화해야 합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위해를 가한 상대 방을 위해서도 그래야 해요.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고 느끼실 테지요. 하지만 그를 위한 정화가 곧 나를 위한 정화라는 걸 나중에는 알 수 있을 겁니다. 일단은 나를 위해서 시작 하는 게 좋겠지요. 원망 에너지를 정화해야 그것이 다시 심어지지 않고 열매 맺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노골적인 원망 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정화해야 할 대상이 지요. 은근하고 미세한 원망도 있습니다. 은근한 원망 이 우리에게 있는지 확인해 볼까요. 지금 ‘은근한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나 그 사람 벌써 용서했어. 그런데 좀 멀리 있으면좋겠어.”

좀 멀리 있으면 좋겠다는 건 아직 미세한 원망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저에게도 세 명이 떠오르네요. 바이러스 검사 프로그램으로 보니까 세 명의 거리두기 바이러스 가 잡혔어요. “그가 나에게 한 것에 대해서 다 이해했지 만 가까이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 봤으면 좋겠어” 하는, 미세한 원망이 남아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 니다.

원망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내가 온전히 반길 수 있는가, 환영할 수 있는가 확인해 보는 겁니다. 그를 만났을 때, 그대로 반 기고 환영할 수 없다면 내 안에 어떤 응어리가 남아 있 는 것입니다. 그 응어리는 미세한 원망 에너지로서 내 삶에 다시 심어지고 있습니다. 확실한 건 그 열매를 수 확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정화가 필요하지요. 불편한 그 사람들을 또 떠올려야 한다니, 그들을 더 용 서해야 한다니, 쉽지 않겠지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 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검색한 세 명의 사람에 대해 어떻게 정화 작업을 했는지 알려드릴게요. 첫 번째 떠오른 사람은 마음속에 서는 “난 이미 용서했어, 진짜 했다니까”라고 말하지만 그가 가까이 오면 왠지 좀 싫을 것 같았습니다. 제게 있 는 건지 그에게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좀 교만하 고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생각이 있음을 느 끼면서 그의 내면에 있는 부드러운 가슴을 느끼고자 했 습니다. 그의 존재 본연의 모습, 더 깊은 가슴, 순수한 가슴을 내가 어떻게 찾아 들어갈 수 있을까 한참 탐색 했습니다. 결국 통로를 찾았죠.

이렇게 나한테 피해를 주었던, 혹은 다소 껄끄러운 사람에 대해서도 존재의 가장 순수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상대방의 미성숙한 행동을 인식하면서도 말이지요. 그런 깊은 존재의 자리와 연결 되면 그의 가장 순수한 가슴과 거리를 둘 필요가 없음 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순수한 존재의 가슴과 용서와 화해를 할 수 있습니다. 실습을 해보도록 할게요. 나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느껴지는 사람에 대한 용서 실습입니다. 그림에는 네 가지 말이 적혀 있습니다. 가운데에는 그 사람의 존재의 가 슴, 순수한 가슴이라고 적혀 있고 화살표 네 개가 있습 니다. 그 화살표들은 그 사람의 순수한 가슴에서 나오 는 표현입니다.



[그림2-용서 실습]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는 이 표현들은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가장 순수한 가슴이란 걸 느끼 면서 들어가는 겁니다. 겉에서 드러나는 그는 아직 교 만하고 뻔뻔하지만 그 사람의 제일 순수한 존재의 가 슴에서는 더 깊은 말을 나에게 하고 있을 테니까요.

네 가지 중 첫 번째는 그 사람의 사랑의 표현이고, 두 번째는 사과의 표현, 세 번째는 눈물과 고백의 표현, 네 번째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제일 아래에는 ‘미안해’입니다. 그 사람이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의 인격 너머 제일 깊은 존재의 가슴 안에서는 ‘미안해. 내 가 그렇게 했던 것에 대해서 진짜로 미안해. 네가 그렇 게 아팠던 것에 대해 미안해’라고 말하고 있을 것입니 다. 그것을 느끼고 받아들여 봅니다. 다음은 그의 겸손입니다. 그의 겸손이란 그가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라고 인정함을 말합니다. 제가 떠올린 첫 번째 사람은 이 통로를 통해서만 용 서가 가능했습니다. 나머지 세 가지 표현과 마음은 전 혀 느낄 수 없었지요.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라는 마음 을 그의 제일 순수한 가슴이 갖고 있음을 느꼈을 때, 비 로소 제 가슴이 열리고 그의 존재성과 순수를 느낄 수 있게 되었지요.

용서의 통로는 다 다릅니다. 제게는 겸손의 통로였지 만 어떤 사람에게는 ‘미안해’ 통로가 가장 쉬울 수도 있 습니다. 어느 것을 사용해서라도 그 사람의 가슴으로 찾아 들어가 봅시다. 제일 쉽게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하나 찾아서 깊이 느껴보고, 넘어갈 수 있으면 다른 것 으로 넘어가 보세요. 나중에는 이 네 가지를 전부 다 해 보세요. 그 사람의 순수한 존재가 나에게 “미안해, 내가 틀렸을 수 있어. 내가 아팠어. 그리고 사랑해”라고 진 짜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사람 과 나의 거리두기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지금 이것 을 사용해서 작업해 봅시다. 내가 은근하게 거리 두고 있는, 약간 싫은 사람, 특히 나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존재가 이 네 가지 중의 하나 를 나에게 말하고 싶어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보세요. 용서를 위한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깊은 상상의

힘이 필요한데요. 눈을 감아 볼게요. 내가 용서하고 싶 은 상대가 죽은 뒤 육신을 벗어나 ‘아 내가 정말 실수가 많았구나. 당신에게 피해를 줬어’하면서 뒤늦은 후회와 고백을 나에게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는 거지요. 상대 방이 내 앞에 앉아 있거나 서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의 후회와 애통을 느껴보는 겁니다. 어쩌면 제일 빠른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미안해. 나도 아팠어. 사랑해. 겉으로 다 표현

하지 못했더라도 이게 내 진심이야. 고마워.” 그가 하는 이 말을 가슴으로 계속 되풀이 해보고, 그의 진심을 느 껴 보세요.

“진짜 미안해. 내가 너무 몰랐어. 용서해줘. 사랑해. 고마워.”

그 사람의 영혼의 사과를 받아 주세요. 진심의 사과,

영혼의 겸손을 받아 주세요. 내 안에서 아픔이 올라오 고 눈물이 올라온다면 그 사람의 더 깊은 사과, 진정으 로 미안해하고 울면서 사과하는 것을 느껴보세요.

“내가 틀릴 수 있어. 내가 다 알지 못해”라는 겸손함,

열림, 진실을 찾는 가슴의 자리를 느껴 보세요. 그 사랑 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세요.



상처가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소중한 무언가를 잃더라도 온전한 나를 찾으면, 생명을 되찾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이 생명의 자리를 찾아옵니다.
작은 것을 잃었으나,
생명을 얻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과거의 상처와 기억에 사로잡혀 있습 니다. 그래서 생명이 통통 피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어 린 아이들은 생명이 통통 피어납니다. 어른이 되면 그렇 지 않지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상처의 기억 때문 입니다. 과거의 상처가 던진 짐을 몇 십 년이 지나도록 들쳐 업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삐딱한 시선으로 삶을 대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음 어딘가가 꼬여 있습니다. 그래서 팔팔한 생명이 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어떤 쓰라림과 상처가 있었어도 지금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아 쓰라리다 해도, 지금 여기서 그것 너머에 있는 생 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한 미국 여성의 실화를 소개해 드리겠습 니다. 이 여성은 22명의 자녀 중 20번째 아이로 태어났 습니다. 태어났을 때 체중은 겨우 2kg이었고, 소아마비 를 앓았죠. 네 살 때 이중폐렴에 걸리면서 소아마비 증 상은 훨씬 더 심해졌습니다. 의사들은 아이의 엄마에 게 아이가 다시는 걷지 못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 나 엄마는 아이가 걸을 수 있다고 믿었지요. 어려운 살 림에도 매주 멀리 떨어진 병원을 찾아 물리치료를 받았 고 자신을 포함해 아이의 언니오빠도 아이를 위해 물리 치료법을 배웠습니다. 5년 뒤 아홉 살이 되자 아이는 특 수화를 신고 걷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걷고 싶었죠. 휘청거리며 한 걸음, 두 걸음씩 걷기 시작 했습니다. 많은 노력을 통해 11살이 되었을 때 보조화 를 벗고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3살이 되자 학교에 서 열리는 달리기 경기에 참가하고 싶었습니다. 다들 말 렸지만 아이는 참가했지요. 그리고 꼴찌로 들어왔습니 다. 하지만 아이는 이 경기가 너무 즐거웠고 다른 경기 에서도 뛰고 싶었습니다. 매번 다시 시도를 하며 뛰었지 요.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건 너한테 너무 힘들어. 그만 하는 게 좋지 않겠니?”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 경기에 나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꼴찌에서 두 번 째로 들어왔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경기에서 이겼습 니다. 그때부터 모든 경기에서 우승을 하기 시작했죠. 태어나면서부터 평생 걷지 못할 거라는 소아마비 판 정을 받고 의료장치의 도움으로 겨우 한 걸음씩 움직이 던 한 소녀가 뛰기 시작했고, 결국 모든 경기에서 우승 을 휩쓸었습니다. 21세가 되던 1960년에는 미국의 대표 선수로 로마 올림픽에 참가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윌마 루돌프Wilma Glodean Rudolph. 당시 100미터 육상의 유망 주는 독일 선수였죠. 아무한테도 진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승자는 윌마였습니다. 윌마는 200미터 달리기에 서도 그녀와 다시 마주쳤고, 또 이겼습니다. 400미터 계 주 결승에서도 역시 마지막 선수로 다시 붙었습니다. 거 의 똑같이 결승지점을 향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월마 가 그만 바톤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올림픽같이 큰 경 기에서, 그것도 단거리로 세계에서 제일 빠른 선수랑 같 이 뛰면서 그런 큰 실수를 했으면 이미 결과는 불 보듯 뻔했겠죠.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뛰었습니다. 질 게 분명한데도요. 결국 그녀가 이겼습니다. 소아마비로 태어나 “이 아이는 다시는 걸을 수 없습니다”란 선고를 받았던 아이, 아홉 살 때 겨우 의족을 떼고 기우뚱거리 며 걸었던 아이가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세계 최고의 선 수와 뛰다가 실수를 한 후에도 최선을 다해서 이겼습니다.

삶에 핑계란 무의미합니다. 어떤 상처가 있었어도, 그 상처 너머 상처 없는 생명을 찾아서 그것을 선택하고 뛰십시오. 그 상처 없는 생명은 소아마비 안에 이미 있 던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십시오. 어떤 상처가 있었어도 그 상처 너머에 있는 팔팔한 생명은 그대로 살아 있습 니다. ‘이 상처를 가지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본 적 있겠지만 거짓말입니다. 가능합니다. ‘당연히 가능하 지’라고 마음을 잡은 후에 다시 상처의 쓰라림이 올라 오면 ‘그럼 그렇지. 가능하긴 뭐가 가능해’라고 좌절한 적도 있을 겁니다. 최근 메일을 한 통 주고받았습니다. 제게는 아주 중 요한 경험이었죠. 그 메일을 보낸 사람은 저에게 굉장 한 쓰라림과 상처를 안겨준 사람이었습니다. 기회로 생 각하고 상대에게 상처 없는 생명, 상처 없는 사랑을 담 은 메일을 보냈습니다. 용서와 사랑, 축복을 담은 편지 였고 큰 나로부터 나온 상처 없는 사랑을 표현하는 기 회였습니다. 답장을 기다렸는데 한참만에야 온 답장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서늘함과 건조함이라니! 물론 그것마저 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냉랭함을 대면하 자 다시 쓰라림이 올라왔습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어 떻게 이럴 수가 있지’라는 억울함이었습니다. 저는 ‘좋

아. 당신이 그런 정도로 관계를 설정하고 싶다면 나도 그걸 받아들이지. 나도 이제 당신과의 관계를 그렇게 설정하겠어’하는 마음으로 냉랭하게 메일을 쓰기 시작 했습니다. 그 순간 과연 이 메일을 보내는 게 맞는지 의 문이 생겼지요. 아내 마샤에게 이 메일을 보여주고 객관 적인 입장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메일을 읽은 마샤는 “음, 냉랭함과 쓰라림이 담겨 있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도 상처 입은 제 마음은 계속 이 메일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제 마음의 소리를 더 듣고자 산책을 시작했습니다. 깊 은 사색에 잠겨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를 생각했 습니다. 상처 없는 사랑, 용서,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쓰라리고 아픈 마음이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 쓰라림을 내려놓기가 어려웠습니다. 쓰라려 하는 나 를 살펴볼 것인가, 그 너머의 온전한 나, 상처 없는 나 를 선택할 것인가를 계속 물으며 영혼의 소리를 들었습 니다. 끝내 상처 없는 나를 선택하고 그 쓰라린 편지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다른 메일 을 써서 보냈습니다. 상처 없는 생명을 선택한 것이었지요.

그 메일에 저는 “쓰라림이 남아 있을지라도”라는 표 현을 썼습니다.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가 남아 있을 때 는 쓰라립니다. 잃은 게 클수록 그 아픔과 쓰라림이 더 깊지요. 쓰라림이 남아 있을지라도 쓰라림 너머에 있는 온전한 사랑을 선택할 때, 너무나 소중한 어떤 것을 잃 었다 할지라도 그 온전한 사랑을 선택할 때 상처 너머 있는 상처 없는 나를 얻습니다. 상처 없는 나를 얻는 것 은 생명을 얻는 것이며, 모든 것이 이 생명의 자리를 향 해서 옵니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지만 온전한 나를 찾으면, 생명을 찾으면, 모든 것은 이 자리를 찾아옵니다. 상실은 아프지만, 그것 너머의 나, 상처 없는 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잃었으나, 생명을 얻음으 로써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에게 돌아온 답은 여전히 냉랭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유로워졌지요. 저는 끝내 사랑을 찾아서 표현했습니다.

쓰라림이 있을지언정, 상처 너머의 생명을 선택하십 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그럼으로써 우리는 결 국 모든 것을 얻습니다. 금메달 3개를 얻습니다. 운동 경기의 우승 금메달 세 개가 아니라 생명의 금메달 세 개를 얻습니다. 앞으로도 어렵고 심각한 상황들이 충분 히 올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 안에서도 상처 없는 상처 너머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는 선수들이 있다면, 그들은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등대, 등 불들이 됩니다. 우리 각자 안에 남아 있는 소아마비의 기억을 내려놓고 우리 안에 더 깊이 있는 온전한 생명을 지금 다시 시작합니다. 매일 매일 상처 없는 생명을 다 시 선택합니다.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워서 넘어졌을 때 에도, 상처 없는 생명을 선택합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당신의 미래를 바꿀 용서

누군가를 원망할 때,
그 거부와 심판의 에너지는
상대뿐 만 아니라 나에게도 옵니다.
동시에 나를 통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갑니다.
그 독毒은 멈출 수 없이 새어 나가서
결국 파괴를 가져옵니다.

신은 이미 삭제 버튼을 완전히 눌렀습니다. 잘못, 혹은 당신이 죄책감을 느끼는 어떤 일들에 관한 용서의 버튼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 습니다.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미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거부하지 않음을 동시에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용서받았다는 게 어떤 건지 상상하 지 못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를 원망하고 심판 할 때, 누군가를 거부할 때, 그 에너지가 상대를 향한다 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망, 거부, 심 판의 에너지는 그 사람에게 가는 동시에 나에게도 옵니 다. 나를 통해서 가고 나에게 옵니다. 그리고 의도하지 는 않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갑니다. 나는 분 명 여기에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데 원치 않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원망 에너지가 간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만 가도록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원망하 면 그 기운은 모두에게 퍼져 나갑니다. 원망의 에너지는 독毒입니다. 그 독은 제한할 수 없이 새어 나가서 결국 파괴를 가져옵니다.

‘쓴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bitter person’인데 요. 사람이 쓰다는 건 ‘독살스럽다’, ‘모질다’, ‘신랄하다’ 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그런 사람도 처음부 터 그랬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누구 한 사람을 원망하 는 것으로 시작하지요. 한 사람에 대한 원망과 거부는 독이 되어 점점 새어 나가서 자신에게도, 사랑하는 사 람에게도 새어나가서 결국 모두에게 퍼져서 그를 둘러 싼 전체가 독살스러움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기 마음의 원망과 거부를 거두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래를 바꾸는 것입니다. 물론 동시에 상대의 미 래까지도 바꿉니다. 따라서 용서는 단순히 개인 차원의 정화가 아닙니다. 용서는 지도력입니다. 힘입니다. 이 지구에 새로운 길 을 여는 힘입니다. 모두의 미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입 니다. 한 명의 독살스러운 사람이 품은 독이 새어나가 자신이 제일 사랑하는 것까지도 죽이는 것을 깨닫고 그 것을 거둘 때, 미래가 변하는 것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그와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래, 주변의 미래까지도 선명한 변화가 보일 것입니다.

리더로서 미래를 바꾸고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일로 써 용서를 받아들입시다. 그래서 새로운 모형template을 만듭시다. 용서의 주제는 아직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 용서하지 못하는 응어리와 독은 그것이 남아 있는 만큼 주변 사람들과 나를 괴롭힙니다. 이를 완전 히 이해했다면 그것을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이미 알고 있는 용서의 신은 큰 삭제 버튼을 이미 눌렀 습니다. 우리도 신을 따라서 같이 버튼을 누릅시다.



미안해,
더 사랑할 수 있었는데


모든 관계는 우리의 의식 안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재설정하고
업그레이드upgrade할 수 있습니다.
인연들을 하나씩 사랑과 빛으로 연결해서 다시 반짝거리게 합시다. 

삶에서 우리는 수많은 소중한 인연들을 만납니다. 인연과 관계는 시작한 후 업데이트나 관리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컴퓨터에 있는 소프트웨어는 최신 버 전으로 업데이트를 하지 않고 5년 이상 사용하면 제대 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최상의 상태로 사용하려면 최신 버전으로 계속 업데이트해야 합니다.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관계를 맺은 후 1년, 2년이 흐르고 10년, 30년 이 흐르면 그 관계에 대한 느낌은 과거의 기억과 과거 의 관계 그대로 지속됩니다.

최근 저도 오랫동안 옛 버전으로 있던 중요한 관계 들을 전부 최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업그레 이드를 하니 의식의 성능이 훨씬 좋아지더군요. 오늘 은 우리도 업그레이드를 좀 해볼까요. 업그레이드를 하 려면 먼저 그 사람의 겉 인격이 아닌 내면의 존재being 와 접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존재에서 나오 는 정보로 업그레이드를 하려 합니다. 한 사람의 존재 는 내면에 있는 영원한 빛이며, 이는 신성한 중심입니 다. 겉 인격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이며 진화하 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그의 겉 인격체와 동일 시하지 않고 그의 중심에 있는 신성, 곧 빛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관계를 몇 가지로 나눠 볼게요. 첫째는 사랑했지만 이미 돌아가신 분들과의 관계, 둘째 는 현재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셋째는 우리가 용 서하기 힘들었던 사람들과의 관계, 마지막은 나의 은인 혹은 친구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소원해진 관계입니다.

지금부터 원으로 앉아서 밖을 향해 앉겠습니다. 우선사랑했고 가까웠지만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의 관계 를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사랑하고 가까웠지만 이 세상 을 떠난 사람들이 없는 분들은 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 더라도 멀리 있는 친구 또는 누군가를 떠올려도 좋습니 다. 사랑했던,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을 기억하고 느껴 보 세요. 만약 그 사람과의 기억이 반짝이지 않는다면 이 프로세스를 통해서 지금 그 관계가 빛나는 관계로 업그 레이드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감정이 무엇인가요. 그리움, 외로움, 서운함, 미안함, 안 쓰러움, 죄책감 같은 것들이 있는지 한번 떠올려 보세요.

인간은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 영혼이 몸에서 나오고 해방되면서 몸에 있는 동안에 몰랐던 많은 것을 알아차 리게 됩니다. 그 중 핵심은 ‘내가 이 몸을 입고 사는 동 안 훨씬 더 사랑할 수 있었는데 그 사랑을 다 못했구나’ 라는 깨달음이지요. 그래서 영혼이 몸에서 해방될 때 대 부분은 가까운 인연들에 대해 미안함을 느낍니다.

‘아, 나의 가까운 인연들을 훨씬 더 챙기고 사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다 못했구나. 진짜로 미안해.’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걸 알아차렸 다는 걸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떠난 그 사람은 몸에서 나오자마자 “정말 미안해, 너를 더 사 랑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못했어. 미안해. 너를 너무나 사랑해”라고 느낍니다. 그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싶 지만, 우리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어요. 이 시간에는 그 떠난 사람을 떠올려 볼게요. 그가 몸 에서 나오면서 내게 ‘미안해. 내가 너를 더 챙겨주고 사 랑해 줄 수 있었는데 그렇게 못했어. 진심으로 미안해. 진짜 사랑해’라고 하는 모습을 내 앞에 바로 와 있는 것 처럼 느껴보세요. 그의 에너지를 그대로 떠올려 보세요. 당신에게 꼭 전달하고 싶었던 사과와 사랑을 깊이 느 껴 보세요. 그의 깊은 사과와 사랑을 받아 보세요. 만약 그 사람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그의 외로움과 두려움, 서러움이 느껴진다면 안아주고 함께 해 주면서 “진짜 미안해. 사랑해”라고 말해 보세요. 그의 외로움과 두려 움, 서러움을 그대로 함께 느껴 주면서 사랑을 전해 주 세요.

“그렇게 외롭고 두렵고 서러웠는데 내가 더 해주지
못했어. 정말 미안해. 사랑해.”

이미 떠난 사람들은 모두 몸이라는 지구복地球服의 제 한에서 나와 빛과 사랑으로 돌아가면서 그 빛과 사랑 의 존재로서의 시각을 갖습니다. 그래서 한결같이 사랑 과 미안함을 전하고 싶어 합니다.

“너무나 미안해. 진심으로 미안해. 더 사랑할 수 있었 는데 너를 더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너를 정말 사랑 해. 이 사랑을 네가 꼭 알았으면 좋겠어.”

‘미안해. 사랑해. 용서해’를 통한 화해와 사랑의 교류

는 지금 현재 빛나는 관계로 재설정되고 업그레이드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단계를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용서하기 힘들었던 사람들을 떠올려 볼게 요. 사랑했었는데 나에게 상처를 주었고 배신했다고 생 각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을 떠올려 보세요. 용서하기 힘 들었기에 내 의식 안에서 희미해지도록 멀리 떠나보냈 을 겁니다. 그 의식의 끝에서 다시 가까이 돌아올 수 있 도록 길을 열어주는 작업을 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며 그 사람은 당시 자신의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아차려 보겠습니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어. 그 정도밖에 몰랐던 거야. 그 한계 안에서 당시에 할 수 있는 최고를 했어.’

‘그렇게 행동했을 때 그도 아팠겠구나. 혼란스러웠 겠구나. 얼마나 아프기에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 사람 은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그 사람의 행동 뒤에 있는 무언가를 느껴 보세요. 그 사람도 당신처럼 외로움과 아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아픔의 자리,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마음의 자리 를 찾아가 보세요. 그 당시였을 수도 있고 그 훨씬 전일 수도 있는, 그 사람의 삶에서 혼자 아픔의 눈물을 흘린 그 자리로 찾아가 보세요. 궁극적으로 이 사람이 했던 어떤 상처 주는 행동은 그 사람의 서러움, 아픔과 연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가슴을 느끼고 그 눈물을 사랑으로 받아주세요. 내가 용서하기 힘들었던 이의 아 픔의 눈물을 느끼고 그의 절망과 아픔을 알게 되면 자 연스럽게 ‘나도 미안해’하며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람의 아픔을 충분히 느끼고 받아들이고 화해와 사랑 으로 관계를 재설정하세요.

다음은 좀 편한 관계들입니다. 은인과 친구들을 떠올 려 볼게요. 이들은 따뜻하긴 하지만 시간이 흘러 희미해 졌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머물고 있는 희미한 기억에서 지금의 반짝이는 에너지로 바꿔봅시다. 어떤 길에서 만 난 은인과 친구를 떠올리면서 역시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처럼 그의 존재를 선명하게 느껴 보세요. 과거가 아 니라 지금 바로 내 앞에 와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와의 에너지 교류를 느껴 보세요.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내 가 그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지 그의 깊은 영혼을 느 껴 보세요. 한 사람, 한 사람씩 떠올려서 느끼고, 연결 하고, 대화해 보세요. 그 은인과 친구는 나에게 사랑을 전달하려고 합니다. 오랫동안 소원했던 과거의 스승과 은인, 친구들을 지금 내 의식 안에서 다시 연결할 수 있 습니다.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모든 관계는 우리의 의식 안에 있습니다. 과거에 있지 않고, 바로 지금 우리 의식 안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관계를 재설정하고 업그레이드upgrade할 수 있습니다. 나와의 좋은 인연들을 하나씩 사랑과 빛으로 연결하고 다시 반짝거리게 합시다.


가림막이 사라지면

떠나버린 이들의 진심어린 사과와 사랑이 우리 주변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그 마음을 느끼고
그 방향으로 의식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가림막이 사라지면,
사랑의 세상이 열립니다.

우주에 사랑의 신이 있다면 이 깊은 신의 부재감은 왜 일까요? 사랑의 신이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왔었고 계속 존재해 왔는데도 우리는 왜 그 사랑이 온전히 느 껴지지 않을까요? 사랑의 신이 멀게 느껴지거나 느껴 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사랑했던 중요한 사람들과의 구체적인 관계에서 내 안에 서운함이 남아 있 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의 미성숙함이 나 외적 인격 때문에 상처를 받았거든요. 제일 사랑했 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긴 서운함은 그 사람뿐 아니 라 우주, 하늘, 인생에 대한 서운함으로 남습니다. 그래 서 신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장막이 되지요. 그래서 화 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과의 화해를 통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상 너머의 사랑을 만나고 온 우주와 신 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일선 님이 떠나신 지 두 달이 되었습니다. 일선 님이 떠나시던 순간, 몸에 갇 혀 있던 일선 님의 영이 해방되는 기쁨과 환희를, 그 영 의 사랑을 강렬하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달 동 안은 일선 님의 영이 멀고 희미하게 느껴지면서 쓸쓸함 이 올라왔어요. 특히 일선 님께서 아파하는 모습, 외로 워하는 모습, 슬픈 모습이 계속 떠오르면서 저에게도 슬픔이 올라 왔습니다. 그렇게 삶의 여정에서 일선 님이 겪은 슬픔을 느끼고 있을 때, 일선 님이 저에게 다가와 말씀하셨지요.

“나는 거기 있지 않아. 나는 여기 있어. 그 슬픈 모습에 있지 않고, 나는 여기, 해방된 모습에 있어.” 슬픔의 기억이 조금씩 가라앉았습니다. 저는 다시 일 선 님의 영과 연결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언젠 가 때가 되면 일선 님이 미처 다 흘리지 못한 눈물, 슬 픔, 외로움을 내가 그대로 느끼고 사랑으로 품으면서 울어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며칠 전 아내 마샤와 용두암 해변가에 있는 아름다운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과거 아주 가까웠던 분들 중에서 지금은 멀게 느껴지고 어떤 서운 함이 남아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지요. 그것이 장막이 되어 제 하늘의 경험, 사랑의 경험이 흐려져 있 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그레이스 반 두젠Grace Van Duzen인데요, 제 멘토인 마틴Martin의 비 서였고, 그 전에는 에미서리의 창시자인 요란다Uranda의 비서였지요. 여자로서 최고의 영적 리더 중 한 분이었습 니다. 제게는 영적 어머니이면서 멘토인, 아주 중요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세상을 떠난 후, 제게는 어떤 섭섭함이 남았습니다. 저를 더 지지해주고 더 축복 해주고 더 사랑해 줄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마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 초점과 의식이 그레 이스의 외적 인격, 그가 입은 지구복地球服의 미성숙함 에 가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레이스의 미성숙한 부 분 너머에 있는 빛을 느끼지 않고 제 초점이 거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 사실 을 깨닫고 초점을 그분의 존재, 영, 빛, 사랑으로 옮기 는 순간, 순식간에 어떤 통로가 열리면서 그분의 사랑 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강렬하게 느껴지더 니 그분의 메시지가 다가왔지요. “진심으로 미안해”라 는 메시지였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해. 그렇게 서운하게 느꼈던 것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도록 내가 행동했던 것에 대해서, 그것 때문에 그렇게 아팠던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미안해.” 그리고 그 순간, 제가 원했던 사랑과 지지와 축복이 온전히 제게 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레이스가 자신 의 몸을 떠나 영혼으로, 빛의 존재로 돌아갔을 때 살아 있는 동안 다 주지 못한 사랑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었 는데, 제가 몇 년 동안이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했던 사람들 중 떠난 분이 계신가요? 그분들이 몸의 한계를 벗어나 빛으로 돌아가실 때에 이걸 자각하 신다는 걸 기억하세요.

‘내가 이 몸 안에 있는 동안 더 사랑하고 축복할 수 있었는데 못했구나,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그걸 다 못했어.’

그러니 우리는 그 마음을 느끼고 그 방향으로 우리 의식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의 진심의 사과와 사 랑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맴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과 우리 사이의 가림막이 사라지면, 온 세상과 우 주에 대한 우리의 느낌도 달라집니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가려져 있던 세상이 열립니다. 바로 사랑의 세상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볼 때에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대신 텅 빈 공허함을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왜 텅 빈 하늘을 느낄까요? 하늘 때문이 아닙니다. 서운함의 장 막이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사랑했던 이들의 진 심어린 미안함, 그 미안함 뒤에 있는 깊고 애절한 사랑, 우리가 알아주길 바라는 애절함을 알게 된다면, 서운함 이 사라지고 가림막이 사라진다면, 텅 빈 하늘이 아니라 수많은 별들이 사랑으로 반짝이는 하늘이 느껴집니다. 공허함 대신 경이로움의 세상이 열릴 거예요. 비밀의 열쇠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외적 자아와 인격, 인간적 한계에 머물렀던 나의 시선과 마음과 에너 지에서 벗어나는 데에 있습니다. 내 의식과 마음을 그의 존재 깊은 곳으로 옮기면 그가 나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선 생님, 연인, 가족, 친구 등 가까운 이들의 원래 모습인 사랑과 빛에 재연결함으로 우리도 잠시 끊어져 있던 사 랑에 다시 연결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어머니 일선 님이 다시 돌아오셨습니 다. 멘토였던 그레이스도 돌아왔습니다. 제게는 굉장 히 큰 사건입니다. 특히 제 삶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 었지만 거리감을 느꼈던 그레이스와의 회복은 참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그녀에 대한 서운함이 완전히 사라지 고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돌아왔거든요. “나의 사 랑하는 아들, 나의 사랑하는 친구, 유진, 사랑해” 하면 서 말이지요. 여러분도 이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외적 자아에 가 있는 초점을 그 사람의 제일 깊은 진심, 제일 깊은 존재, 그 사람의 가려지지 않은 사랑으로 옮기세 요.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세요. 여러분의 밤하늘이 앞 으로 얼마다 더 아름다워질지,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질 지 기대됩니다.




제 5 부 리더쉽

· 세상이 우리를 통제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드는 당신
· JUST DO IT
· 판단을 유보하고 바라보라
· 당신 가슴이 빛으로 가득 찬다면
· 성장을 위한 보물


세상이 우리를 통제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우리의 의식은 세상이라는 작은 상자 밖에서 다른 문화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자의 영향력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두려움과 분리위에 세워진 사회의식 구조는 교도소일 뿐입니다. 

지난주에 WHO에서는 세계 자살률을 발표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45년간 세계 자살률은 60%나 증 가했다고 합니다. 현재 매해 1년에 100만 명씩 자살을 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매해 1,000만 명에서  2,0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매년 2000만 명도 놀라 운데 하물며 자살률은 계속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또 하나, 한국이 세계 자살증가율에서 3위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12년 동안 자살증가 율을 보면 북한이 2위 남한이 3위라고 합니다. 네티즌 들이 이에 대해 쓴 글들을 읽어 보았는데 그 중 하나는 ‘자살률 증가 1위는 사이프러스 섬이고 2위가 한국인 데, 실질적으로는 한국 상황이 훨씬 더 나쁘다’라는 것 이었습니다. 이유는 사이프러스 섬은 10만 명 인구 중 에서 2000년에 1.3명이, 2012년에는 4.7명이 자살했는 데 한국은 2000년에 10만 명 중 13명이, 2012년에는 20 명이 자살했다고 합니다. 즉 자살률 증가 1위인 사이프 러스와 비교했을 때 한국은 6배가 더 높기 때문에 자살 증가율에서 실질적인 1위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살률은 사회의 아픔과 압력이 그만큼 엄청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책 이야기를 할게요. 요즘 엄청난 화제의 베스트셀러 죠. ‘경제학의 록스타’라고 불리는 프랑스 경제학자 토 마스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 자본』입니다. 우 리나라에서는 지난 4월에 출간되어 벌써 30만 부 이상 이 팔렸고 서구에서는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경제학 분야의 책으로 이런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책은 역사적으로 없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시대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경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경제학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리고 좀 전에 언 급한 세계 자살률의 증가와도 깊은 관련이 있죠. 저자 는 경제 역사학자로서 지난 300년간 경제에 관한 데이 터를 과학적으로 철저하게 분석해서 그 결과를 발표했 습니다. 이 책은 빈부격차에 관한 것인데, 지난 50년간 빈부격차가 더할 나위 없이 극심해졌다고 말합니다. 폭 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건 그의 이런 결론이지요. 지난 30년간 경제를 이끌어 온 신자본주의 이론 즉, 대기업 과 최고 부유층을 도우면 그 부가 자연스럽게 나중에 분배되어서 모두가 잘 살게 된다는 게 틀렸다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201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 프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가 쓴 『불평등의 댓가』라 는 책은 2009년에서 2010년까지 미국의 데이터를 분석 해 “최상위 1%의 부유층이 1년간 미국 전체 수입증가 의 93%를 가져갔다”고 밝힙니다. 1명이 100조각짜리 피자의 93조각을 가져갔다는 거죠. 그는 정치적인 성향 과 상관없이 객관적인 데이터를 사용해 이를 밝힙니다. 또한 국제구호단체 옥스팜OXFAM에서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85명이 70억 세계인구 중 35억이 가진 부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피케티는 부의 편중이 구조적인 결과물이라고 설명 합니다. 그리고 극소수에게 편중된 부는 그들에게 경제 력, 정치력마저 가져다준다고 하지요. 그들은 경제력과 정치력을 동원해서 자기들만을 위해 법을 바꾸고 체제 를 유지합니다. 언론의 힘 또한 소유했지요. 세계 언론 도 극소수 부유층이 장악했습니다. 과거 인류는 군사력 으로 소수가 다수를 다스렸지만, 이제는 언론을 통해서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는 것이 제일 효과적인 방법임 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 깨어나는 사람들은 이런 사회의 흐름을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극소수가 지닌 의식의 통제력과 통제 수단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의식하 지 못한 채 그 통제의 영향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 금까지 인간이 지구라는 낙원 위에 만들어 온 인류문명 은 점점 물질주의적 교도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극소 수의 부와 권력이 거대해지고 그들의 통제력이 커지면 서 동시에 이 통제력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들도 늘어갑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포브스 잡지는 매년 세 계 갑부들의 리스트를 발표합니다. 상위에는 빌 게이츠 Bill Gates나 워런 버핏Warren Buffett같은 사람들이 자리 잡 고 있죠. 그런데 세계에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리스트에 올라와 있지 않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언론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 입니다.

처음 언급했던 자살률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한국 사람들도 나날이 극심해지는 빈부격차를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죠. 청년들에게는 일자리가 없고 경제 상황은 악화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언론과 정보 통제도 심해졌 습니다. 사람의 의식을 통제하는 주요 수단은 엔터테인 먼트와 쾌락입니다. 이 엔터테인먼트와 쾌락은 통제의 틀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덜 느끼게 도와주는 마취제입니다.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사원들을 위해 명상을 도입하고 있는데 어찌 보면 아주 좋은 소 식이지만 다르게 보면 감옥에 가두어 놓고 그 감옥의 삶을 견딜 수 있게 도와주는 명상을 하라는 거나 마찬 가지 아닐까요? 우리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이뤄지는 사 회적 통제에 대해서 깨어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의 식은 이 통제의 상자 바깥에서 활동해야 합니다. 얼마 전 가까운 지인 한 분이 자살을 했습니다. 아주 유능했고 굉장한 리더쉽을 키워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 지요.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현재의 시 스템에서 성공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음에도 너무 힘들었던 거 같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소식은 이 사회 적 압력과 아픔, 통제 안에서의 삶의 아픔이 먼 나라 사 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실감나게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때때로 포기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느껴질 때 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 안 에 깔려있는가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올라오 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들이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 수많 은 사람들이 이미 그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우리 안 에 그것이 올라오는 것이라고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두려움과 분리를 바탕으로 한 인류의식의 상자 는 아주 작습니다. 우리의 참 존재는 이 상자를 들고 있 는 큰 존재입니다. 이런 구조를 지닌 상자는 오래 지탱 하지 못합니다. 이 상자의 흔들림은 점점 더 심해질 겁 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이 상자가 붕괴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이 상자 밖에서 다른 문화와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상자 의 영향에 대해 계속 인식하고 있어야 하지요.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두려움과 분리로 만들어진 의식의 구조, 사회의식의 구조가 아무리 멋지게 치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교도소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교도 소는 교도소로 보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멋있게 치장되 어 있다고 해도 근사한 삶의 터전이 아닙니다. 언어학자 놈 촘스키Noam Chomsky는 『여론조작 Manufacturing Consent』이라는 책에서 소수의 권력층이 경 제 정치력을 지배하면서 대중의 합의를 만들어 내고 조 작해 내고 있는데 이 제도는 대중의 허락이 있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권력자들이 어떻게 대중의 합의와 허락을 창출하고 제도를 유지하는지 세밀하게 분석하죠. 대중의 허락이란 대중이 제도의 가치관에 동 의하도록 통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깊은 영혼으로 깨어있음으로써 그런 제도의 가치관을 거절할 수 있어 야 합니다. 좋은 소식은 이 교도소가 낙원 위에 있다는 겁니다. 사회 자체가 아니라 사회의 의식 차원에서지요. 집단의 식의 상자 바깥의 공간이 안의 공간보다 훨씬 더 큽니다.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드는 당신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오직
“지금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입니다.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진리를 선택하십시오.
상황을 엉망으로 만든 자신을 자책하고 후회하며 세상에 분노하기를 이제 그만 하십시오

물이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은 메마른 사막에도 신비로운 은총이 있지요. 바로 오아시스입니다. 오아시스는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지하수가 지형적 특징 때문에 부 분적으로 밖으로 괴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오아시스 주변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고 마을이 만들어지고 교역 이 이뤄지고 농사도 지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막 의 꽃이죠. 사막에 생명을 불어 넣는 물줄기입니다. 사 막에서 생명이 오아시스를 찾듯이, 인간의 영혼도 오아 시스를 열망합니다. 숨 쉴 수 있는 곳, 피어날 수 있는 곳이죠.

사막 같은 세상 안에서 오아시스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본질에 뿌리내리는 사람들입 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그 자리에서 사랑의 힘을 잃지 않고 오아시스를 만듭니다. 그들은 사막에서 물이 샘솟게 하고 생명을 키웁니다.

얼마 전에 삶의예술학교가 이곳 조이빌에 오기 전에  이 곳을 방문했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전에 조 이빌을 방문했을 때에는 기운이 차갑고 황량해서 빨 리 떠나고 싶었는데 우연히 다시 방문해 보니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며 깜짝 놀라더군요. “외관은 별반 달라 진 게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기운이 좋아질 수가 있습 니까?”라며 신기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전과 달리 무 언가 사랑과 정성이 느껴진다고 말했습니다. 삶의예술 학교는 메마르고 거친 사막 가운데에서도 풀과 나무가 자라는 오아시스처럼, 우리와 주위 사람들의 영혼에 생 명을 샘솟게 하는 샘물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 력은 눈에 보이는 외관 자체가 아니라 그것 너머 깊은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런 변화를 신기 하게 느낍니다.

오아시스를 만든다는 것은 이 땅에 천국을 가져오는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사랑이 현 존하고 생명이 피어나며 진리가 샘솟는 바로 그곳이 천 국입니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됩니다. 사랑, 진리, 생명에서 사랑과 생명은 있으나 진리가 없거나 진 리와 생명이 있는데 사랑이 없다면 천국이 아닐 것입니 다. 우리는 빛에서 와서 빛으로 돌아갑니다. 그 사이에 는 빛으로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빛으로 산 다는 것은 빛답게 살며 빛의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 아 니겠습니까?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래가 말하는 것처 럼 말입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 오라는. 지난 몇 달 동안 깨어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 다. 깨어남이란 천국과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여 기 있음을, 내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지요. 깨어남은 생 각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제가 25세 때 옥스퍼드에서 공부하러 영국에 갔을 때 입니다. 저는 그곳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여기에서 더 버티기 힘들겠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완전한 마음 의 사막, 정말 황폐한 사막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그 무 렵 에미서리 공동체를 만나서 6일간 삶의예술 세미나 에 참석했습니다. 그 세미나에서 저는 천국이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여기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세미나를 마 치고 옥스퍼드로 다시 돌아올 때 기차 안에서의 느낌 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깊은 신뢰와 신념을 품 고 황폐한 사막으로 여겨졌던 도시 안으로 걸어 들어갔 지요. 그 신뢰는 “이곳은 사막이 아니라 천국이다”라는 것이 아니었어요. 여전히 사막은 사막이었지요. 그것도 아주 황량한. 하지만 마음이 달랐습니다.

“역시 사막은 사막이구나. 나처럼 느끼는 수많은 학 생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들도 사막 같은 이곳에서 고 생하고 있을 텐데, 내가 여기서 오아시스를 만들면 되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드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겁니다. 그 후 35년 동안 제가 해온 일 이 바로 이것이었어요. 나에게 다가오는 사막에,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드는 작업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사막이 있습니다. ‘여기서 오래 견디지 못할 거야’라는 절망적인 마음, 다 포기하고 떠나고 싶 을 때가 모두 우리의 사막입니다. 그런 모든 순간과 상 황이 사막입니다. 사막 같은 상황에서 오아시스를 만 들려고 할 때 무엇보다 먼저 여기서도 오아시스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능성을 보 지 못한다면, 시작할 생각조차 안 할 테니까요. 가능성 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3년 전 어머님 일선 님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구급차로 함께 병원으로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장면, 구급차 안에 쓰러져 있는 어머니와 옆에 앉아 있는 제 가 있는 장면도 오아시스가 될 수 있을까요? 과연 이 시공간이 천국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그 구급차 안에서 자신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답이 왔지요.

“내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그 눈으로 보기 시작하자 그 장면 안에 있었던 구급 대원의 배려와 노력, 그리고 이렇게 준비된 구급차에 대 한 고마움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마웠지요. 이 배 려와 고마움을 통해 이 순간의 완전함perfection을 경험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천국이 바로 여기, 오아시스가 바로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런 깨어남은 한 번의 알아차림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 지옥 같을 때, 사막처럼 느껴질 때, 그때 또다시 깨어나야 합니다.

깨어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천국을 보았고, 경험했으니 이제 자기만 행복하게 살아가면 되는 건가 요? 그런 사람은 정말 깨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깨어난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사랑, 진리, 생명의 오아시스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깨어남의 내용이면서 또한 깨어난 다음에 해야 할 일입니다. 예전에 아내 마샤와 1년에 한 번꼴로 여행을 다녔습 니다. 주로 작은 섬에 갔었죠. 한 시간 안에 걸어서 둘러 볼 수 있는 정말 작은 섬들이 좋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너무 좋아서 몇 년 동안 계속 갔던 산호섬이 있는데요, 그 섬에는 맥Mac이라는 흑인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캠프 장이 있었어요. 우리 부부는 그 작은 캠프장에서 텐트 를 치고 2주 정도를 지내다 돌아오곤 했었습니다. 이 캠 프장 옆에 있는 숙소들은 하루 숙박에 육십 만 원 정도 였고, 우리가 머문 캠프장은 하루에 이만 오천 원 정도 였는데도 캠프장이 훨씬 좋았습니다. 나중에 그 옆에 있는 다른 숙소에서 2주일을 묵었는데 맥의 캠프장이 너무나 그리웠죠. 맥의 캠프장은 소박하지만 아름다웠 어요. 직접 나무로 집을 짓고 야외 화장실은 예쁜 색으 로 하나하나 칠을 해서 하나는 아담, 하나는 이브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지요. 구석구석 정성과 사랑으로 심은 꽃들이 가득했고요. 그리움이란, 화려함과 안락함이 아 니라 소박함과 정성을 향합니다.

작년에는 몇 년 만에 태국으로 휴가를 갔습니다. 태국은 첫 방문이었지요. 섬을 워낙 좋아해서 작은 섬에 있는 리조트를 찾아갔습니다. 아주 작은 리조트였는데 우연인지 거기도 숙박비용이 하루에 이만 오천 원 이었 어요. 소박하지만 정성과 사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2 주 동안 머물면서 주변에 있는 다른 리조트들을 둘러봤 습니다. 훨씬 비싼데도 전혀 맘에 들지 않더군요. 사랑 과 정성이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였습니다. 우리가 머문 작은 리조트에서는 아침 일찍 직원들이 조그만 성소 같 은 자리에 모여서 사랑과 정성을 담아 청소를 한 후 기 도를 올리고 각자의 자리로 가서 오아시스를 만들고 있 었습니다. 혼자 멕시코로 여행을 간 적도 있었는데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아쉽게도 정성과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곳에 머무는 2주 동안 휴식을 취하 면서 이곳을 오아시스로 만들기 위해 작은 행동을 했어요. 주변에 있는 수백 개의 페트병을 주워서 한곳으로 모아 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주인도 저 사람이 뭐하나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어요. 그런데 제가 한참 동안 페트병을 줍고 있으니 본인도 같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지만 분위기가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게 치워 놓은 모습이 훨씬 아름답다 는 걸 경험했으니 그 뒤로도 계속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막 같은 곳에서 오아시스를 만들었던 에미서리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짐바브웨에서 호텔을 운 영하고 있었어요. 짐바브웨는 남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로 그 당시 전쟁 중이었죠. 시골에 있었지만 내전 지역 이어서 낮에는 군인들이 밤에는 게릴라들이 번갈아 가 며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다른 곳들과 달리 신기하게도 낮에는 군인들이, 밤에는 게릴라들이 이 호텔을 보호 해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친구가 오랫동 안 자신의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 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시간 을 통해 모든 사람의 신뢰와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내 전 상황에서도 양쪽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요. 전쟁 터 안에서도, 오아시스는 계속 솟아날 수 있습니다. 요즘 조금씩 깨어나는 기업들이 보입니다. 

기업이란 기본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이지요. 하지만 기업 들도 주변 사회와의 관계에서 오아시스를 만드는 것이 직원들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 는 걸 알지요. 직원들의 행복감이 생산성을 높이고 건 강한 기업 이미지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삶의예술학교도 오아시스를 만들어 갑니다. 최근 삶의 예술학교 세미나에 참가했던 한 분은 6개월 전에 시 작한 직장생활이 지옥 같아서 견디기 어려웠다고 고백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불평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라는 생각이 생겼다고 해요. 그래서 작지만 간단한 것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를 하고 동료들의 책상 위까지 정돈했습니다. 물론 자기보다 훨씬 어린, 갈등 관계에 있던 상사의 책상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처음에 는 다들 “뭐하는 거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시작으로 사무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고 하 더군요. 오아시스는 이렇게 변할 것 같지 않던 단단한 암벽 사이에 틈을 냅니다. 고차원적이고 어려운 게 아 닙니다. 간단해요. 정성과 사랑의 단순하지만 지속적인 표현입니다. 행동이지요.  

우리는 아주 구체적으로 이 땅 위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작은 사랑이란, 하늘과 존재 차원 에서 이미 실제인 것을 땅에서 ‘형태’로 드러내는 것이지 요. 사랑이라고도, 진리라고도, 생명이라고도, 천국이라 고 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을 말입니다. 오아시스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막의 모래 아래로 깊이 흐르는 지 하수인 것처럼, 존재 차원에서 사랑은 이미 이루어져 있 는 사실입니다. 땅에 사는 우리는 그것을 땅의 형태로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없는 것을 창조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것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참 인간은 하늘 과 땅 사이의 교차점입니다. 그 교차점이 존재의 자리이죠. 즉 인간은 그 자리에 올바르게 서서 하늘을 느끼고, 그것을 땅에 가져오는 통로라는 겁니다. 현실적입니다. 우리가 존재 차원에서 느껴지는 사랑과 생명을 이 상황 에 어떻게 적합하게 적용해야 할지를 지혜로서 알아차려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도, 진리도, 무작정 여 기에 이 상황에 가져오려고 하면 땅에 받아들여지지 않 습니다.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혜롭게 파악해야 합니다. 세상이 필요한 방법으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교차점이 면서 또한 적용자가 돼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분은 자 기 직장 안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간단하고, 사람들이 다 받아들일 수 있고, 저항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이지요. 때로는 하늘의 것, 좋은 것이라 여겨 가져 왔는데, 엉뚱하게 사람들한테 저항을 많이 일으키는 때 가 있습니다. 지혜롭지 못하고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 아시스를 만들려면 상황에 적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늘, 지혜가 필요하지요.

깨어남은 의식을 전환하는 교육입니다. 삶에서 황량한 사막 같은 상황들에 직면할 때, 우리 안에서는 가장 먼저 “왜 이런 것들이 나에게 오지?”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올라옵니다. 깨어남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지, 내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에 왔지”라 는 답을 말입니다. “대체 왜?”라는 질문에서 바로 답으 로 전환하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오아시스를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래서 안 돼, 저래서 안 돼”라는 핑계는 소용도, 쓸모도 없어요. 우리는 바로 여기 모래사막 가 운데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참 인간의 모습이지요. 오아시스를 만드는 근력 이 길러지면 여러분이 어느 곳에 있든지, 거기 있기 때문 에 사막에 장미가 피어납니다. 이것이 참 인간의 모습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결과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아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야 했는데.” 하지만 일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지나 갔어요. 그러니 이제 남은 선택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 냐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붙잡혀 있지 맙시다. 우리의 물어야 할 질문은 오직 ‘그래서 지금 나 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입니다. 사랑을 선택하십시 오. 진리를 선택하십시오. 상황을 엉망으로 만든 자신 을 자책하고 후회하고 세상에 분노하는 것은 이제 그 만 하십시오. 누군가 나를 괴롭힐 때 이 상황을 끊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노 때문이 아니라 지혜로부터 나오는 선택일 때 그렇게 하십시오. 쓰레기는 계속 치우 고,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드는 사람으로 계속 성장 합시다.


JUST DO IT

지시를 한 번만 받고서 완수하기,
지시를 받지 않고도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서 하기, 그리고 겸손과 사랑
이 세 가지가 지도력의 핵심입니다.

한국에서 지도력이란 말은 권위주의의 색채가 강합니 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지도력이란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리더쉽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면 제 아 내 마샤의 이야기를 해드리면 좋을 것 같네요. 전에 마 샤가 “내 말은 곧 차용증”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나 는 한다면 한다”란 뜻이죠. 저는 마샤가 한다고 합의 한 것에 대해서 마샤가 할 건지, 언제 할 건지, 혹시 안 하면 어떻게 할지 등을 걱정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마샤 는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아무리 작고 간단한 것이라 도 분명히 하도록 오랫동안 훈련을 해 왔습니다. 혹시 라도 못하게 되면 그 사실을 일찍 알려서 말에 대한 책 임을 집니다. 그래서 마샤를 믿을 수 있습니다. 아내로 서가 아니라 리더로서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마샤는 항상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제일 필요한 것에 주목하며 검토 중이지요. 나아가 겸 손과 사랑으로 접근합니다. 마샤는 항상 “이런 아이디 어가 있는데 유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묻습니 다. 그래서 항상 함께 생각해 나갑니다. 저도 그렇게 합 니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가까운 파트너들에게 묻고 그 들의 의견을 받습니다.

품성은 참 중요합니다. 26살 때 저의 멘토 중 한 분이 셨던 빌 벤은 제게 『가르시아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 A Message to Garcia』라는 작은 책을 선물해 줬지요. 엘버트 허바드Elbert Hubbard가 쓴 이 책은 아마 경영과 관련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일 것입니다. 옮긴이의 글 중에서 한 부분을 소개 해 드릴게요.

이 책은 1899년 처음 발표되어 1913년까지 15년 동안 4천만부가 팔리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 년에 270여만 부가 팔린 셈이다. 이 작은 책이 전하 는 메시지의 무게와 중요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한 이 책은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의 많은 독자들에게 자신이 맡은 일에 임하는 성실한 태도, 신뢰, 명예, 가치에 대한 하나의 전형을 제시 하고 있다.

쿠바 반군 지도자 가르시아 장군에게 메시지를 전한 사람은 스페인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반발했 을 당시 미 육군에 복무 중이던 앤드루 서머즈로완 중위였다. 그는 맥킨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위험 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 르는 가르시아 장군을 찾기 위해 쿠바에 파견되었 다. 그의 겸손한 설명에 따르면 그는 수많은 장애 물과 부딪혔지만 내륙을 관통하여 결국 가르시아 장군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성공했으며 그 공 로로 미군 사령관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 리고 쿠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수 있 었다.

이 작은 책에 담긴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미국은 물론 러시아에서까지 애독서가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지난 한 세기의 양대 이데올 로기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몇 권 되지 않는 책 가운 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뉴욕 센트럴 철도회사 의 존 대니얼스가 허바드의 허락을 받아 50만 부를 인 쇄했는데, 소련에서 방문하고 있던 힐러코프 왕자가 그 당시 소련 러시아 철도회사 사장이었던 사람이 이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소련에 가져가서 번역해서 철도회사 모든 직원들에게 하나씩 주고, 그것 이 알려지기 시작해서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군대의 모 든 군인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러시아군 한 명이 일본 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이 책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서 일본군이 이 책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중요한 것이 라 생각해서 번역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일 본 천황 지시로 모든 공무원과 군인에게 보급되었습니다. 이 『가르시아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 중 리더십의 중요한 한 부분인 충성심과 성실한 집행력에 대해 이야 기하는데 그것은 지시를 받으면 반드시 완수하는 것입 니다.

쿠바에 관련된 이 모든 사건을 통틀어서 화성처 럼 기억의 지평에 우뚝 선 한 인물이 있다. 1894년 스페인과 미국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 정 부는 쿠바 반군 지도자에게 화급하게 전갈을 보낼 필요가 있었다. 당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 해 분투하던 가르시아 장군은 쿠바의 산속에 있었 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무도 몰랐다. 그곳은 우편 과 전보가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미국의 맥킨리 대통령은 가르시아장군의 협력을 아주 화급하게 보장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 인가? 그때 누군가, 대통령에게 말했다. “로웬 중위라면 틀림없이 각하를 위해 가르시아 장군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로웬은 가르시아 장군에게 전할 편지를 품고 쿠 바로 떠났다. 이 로웬이라는 사람, 이 편지를 받아 서 방수포 주머니에 넣은 다음 가슴에 잡아매고 임 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난 지 나흘 째 되는 날, 한밤 중 보트를 타고 쿠바 해안에 상륙하여 정글 속으 로 사라졌다가, 3주 만에 쿠바 섬의 반대편으로 빠 져나왔다고 한다.


그가 적군이 들끓는 내륙을 도보로 가로질러 가 르시아 장군에게 무사히 편지를 전했다는 등의 세 부적 내용은 지금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 가 아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다. 즉, 맥킨리 대통령이 로웬에게 가르시아 장군 에게 보낼 편지를 주었을 때, 로웬은 그 편지를 받 으면서 “그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는 점이다. 온 세상에, 이 땅의 모든 대학마다 불멸 의 청동 동상으로 만들어 세워야할 한 인물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책 에서 배우는 탁상공론이나 이런저런 일에 대한 교 훈이 아니라, 바로 책임에 충실하고 즉각 행동으 로 옮기며, 자신의 정력을 집중시켜 임무를 다하는 굳건한 자세인 것이다. 이제 가르시아 장군은 죽고 없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가르시아장군이 있다. 많 은 사람을 써야하는 사업을 해본 사람은 누구나 보통사람들의 둔함에, 어떤 일에 집중하며 임무를 수행하는데 대한 무능함, 또는 나태함에 경악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적당히 일하기, 멍청한 부주의 함, 천박한 무관심, 열의 없는 작업이 이제 거의 하 나의 규칙이 되어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래 서 이제는 올가미나 갈고리나 협박으로 남을 강제 하거나 뇌물을 쓰지 않고는 성공하기 어려워 보인 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천 사라도 보내주시길 기대하거나.

그래서 독자여, 한번 시험해 보시라. 지금 당신은 사무실에 앉아있다. 주위에 6명 정도의 직원이 있 다. 그중 한 명을 불러 이렇게 부탁해보라. ‘백과사 전을 보고 코레지오의 삶에 대한 짤막한 메모를 작성해주게.’ 그러면 그 직원은 과연, ‘알겠습니다. 사장님!’ 하고 바로 그 일을 하러 갈까? 결코 그렇 지 않을 것이다. 그 직원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당 신을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그가 누 굽니까? 어느 백과사전 말입니까? 백과사전이 어디 에 있는데요? 그게 제가 할 일인가요? 혹시 비스마 크를 찾으시려는 것 아닌가요? 아니, 저 대신 찰리 가 그 일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은 죽은 사 람인가요? 급히 처리해야할 일인가요? 제가 백과 사전을 갖다 드릴 테니까 사장님께서 직접 찾아보 시겠어요? 왜 알아보려고 그러시는데요?’그래서 당 신이 그런 질문에 대답해 주고 그 정보를 찾는 방 법과 그것을 왜 찾고자 하는지 설명해준다 해도, 십중팔구 그 직원은 다른 직원에게 가서 코레지오 를 찾아달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서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물 론 내 짐작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평균의 법칙에 의 하면 내 말이 맞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현명한 사 람이라면 그 조력자에게 코레지오가 K항목이 아 니라 C항목에 있다는 말을 하느라 골치 썩는 대신 에,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냥 자네 할 일이나 하게’ 라고 말하고 당신이 직접 그 항목을 찾아볼 것이다.(……)

나는 상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는 물론, 자리 에 없을 때도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사람에게 애정 을 느낀다. 그리고 가르시아 장군에게 보낼 편지를 받았을 때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지 않고, 또 가장 가까운 시궁창에 편지를 쑤셔 넣거나 딴 짓을 하 거나 미루는 법도 없이, 집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조용히 문서를 받아 넣는 사람에게 애정을 느낀다. 문명이란, 바로 오랜 세월 간절하게 이런 개인들을 찾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허락될 것이다. 모든 도시와 촌락에 서 모든 사무실과 작업장과 상점과 공장에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온 세상이 그런 사람을 소리쳐 구 하고 있다. 모두가 간절히 원하고 있다. 가르시아 장군에게 메시지를 전할 인물을.

한 번 지시를 받으면 완수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금 과 같습니다. 저는 26살 때 멘토 빌 벤이 준 이 책을 읽 고 ‘바로 이것이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겠 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로웬이 임무를 받았을 때 “하겠 습니다”라는 한 문장을 말했을 겁니다. “하겠습니다”라 는 한 문장에 담긴 집행력과 책임감. 리더십의 몇 가지 요소들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지시를 받지않고서 올바른 것을 하는 것’입니다. 지시를 받지 않고 도 제일 올바른 것, 가장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이를 자기주도력Initiative이라고 하지요. 지시를 받지 않고서 올바른 것, 제일 필요한 것을 찾아 서, 스스로 알아내서 하는 것은 한 번 이야기 듣고 완수 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 나 첫 번째가 안 되면 이것도 어렵습니다. 며칠 전 조이빌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돌이 흐트러져 있던 자리가 매끄러운 흙으로 다듬어진 길이 되어 있었어요. 너무나 보기 좋고 아름다웠습니다. ‘이 걸 누가했을까?’ 궁금했는데 관리사님이었습니다. 먼저 아이디어를 내서 다른 쪽에도 별 볼일 없이 쌓여 있던 돌들로 예쁜 돌담을 새로 쌓았습니다. 상사로부터 지시 를 받지 않고도 주의 깊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무엇이 제일 필요한가?’를 찾아서 스스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도력입니다. 이 세상은 그런 주도력 있는 사람을 찾 습니다. 리더십, 리더는 누가 그 자리를 주어서 되는 것 이 절대로 아닙니다. 리더 역할의 자리에 있지만 리더가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도력이 있 는 사람은 이 세상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거기에서 빠져나와서 성공합니다. 리더가 됩니다. 주도력 때문입 니다. 그 어려운 상황 안에서도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 인가를 보고 그것을 합니다. 이때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여기 있어주 세요”라고 합니다. 세상 모든 곳에서 그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밥 넬슨Bob Nelson이 쓴 긴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만 하지 마라. 제일 필요한 것을 해라 Please Don’t Just do What I Tell You! Do What Needs To Be Done』라는  책인데요. 이 책은 듣는 것만 하지 말고 제일 필요한 것 을 찾아서 하는 리더십에 관해 말합니다. 앨버트 하버 드도 『가르시아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을 때 주 도력에 관해 세 문장 정도 썼습니다. “이 세상은 제일 큰 상과 돈과 명예를 딱 한 가지에게 준다. 그것은 주 도력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주도력이란 “지시받 지 않고서 올바른 것을 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중 요한 것은 “지시 한번 받고 완수하는 것”이라고 말합 니다. 첫 번째가 주도력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딱 세 줄 만 쓰고, 나머지는 다 두 번째-지시 한번 받고 완수하 는 것-에 대해 썼다는 것은 주도력이 제일 중요한 것이 지만 그것보다 먼저 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경영 관련 서적이 되었습니 다. 『내가 말하는 것만 하지 마라. 제일 필요한 것을 해 라』는 바로 그 주도력에 대한 책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몇 가지만 짧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도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를 계속 보고 묻는 것입니다. 이미 하고 있는 일이나 벌어진 상황을 어떻게 더 잘,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지요. 주도력에서 두 번째 고려 해야 할 생각은 “어떻게 더 경제적으로 할 수 있을까?” 입니다. 책에는 두 번째에 대한 한 사례가 나옵니다. 한 잡지회사 직원이 출판하는 책의 크기를 조금만 작게 줄 이자는 제안을 사장에게 했습니다. 그 제안을 통해서 책을 보내는 우편료가 3등급에서 4등급으로 떨어지고 절약한 돈이 5억이었습니다. 그 회장이 말하기를, “내가 이 회사에서 23년 동안 일했는데 4등급 우편료가 있다 는 것조차 몰랐다. 그런데 이 직원이 그것을 알아내서 5억 원을 절약했다”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몇 가지만 더 언급하자면, “준비하라. 그리 고 조사하라”입니다. 주도력 중에 ‘준비하는 것’이 중요 한 부분입니다. 어떤 임무가 있을 때 준비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나타나 “어, 뭔가 필요했는데”하며 그때서야 하 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행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 가를 미리 조사하고 준비해서 그 자리에 도착한다는 것 입니다. 주도력의 또 한 부분은 “내가 모르는 것이 있 다는 것을 미리 알고, 그것에 대해서 알아보고 조사하 는 것”입니다. 이 말은, 벌써 일들이 어떤 식으로 되어가 고 있을 때, 거기에 나도 모르게 어떤 이유 때문에 이미 이렇게 되어 가고 있을 수가 있는데, 내가 이 상황에 대 해서 잘 모르는 것이 많이 있을 수 있음을 모르고 그것 에 대해 조사도 해보지 않고 이런 저런 제안을 해도 소 용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는지, 내가 무엇을 모 르고 있는지’를 더 알아보고 나서 제안을 하라는 것입 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아이디어에 구멍을 내라”입 니다. 발랄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구멍이 있을 지 생각도 안하고, 강력하게 제안을 했는데 나중에 보 니 구멍이 무수히 있었음을 알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까 지 다 같이 휩쓸려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수 많은 구멍을 내봐서 가라앉는지 아닌지를 확인해보고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지시를 한 번 받고 완수하는 것, 지시를 받지 않고도 제일 필요한 것을 찾아서 하는 것, 겸손과 사랑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과 사랑입니다. 주도력이 강한 사람들 은 때로는 스스로 너무 잘났기 때문에 겸손과 사랑이 약할 수 있습니다. 주도력이 강하면서도 겸손하고 사랑 이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됩니다. 겸손과 사랑이 있다는 것은 더 높은 지혜와 비전에 대해서 열려 있고 그것을 찾으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보다 더 높은 지혜와 비전을 계속 구하는 태도입니다. 한다고 말한 것은 꼭 집행하는, 제일 필요한 것을 찾아서 하는, 겸손하고 사 랑으로 차 있는 개인과 집단일 때 거기에서 드러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습니까? 이런 리더십을 함께 만들 어 갑시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 리는 가르시아 장군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라, 이 세 상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실 한 집행력, 주도력, 겸손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오늘부터 철저히 이것을 시작하고 완수한다면, 이런 내용에 대해 다시 말 할 필요가 없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집행합시다. 나이키의 유명한 광고문구인 ‘Just do it’에서 ‘do it’은 집행하라는 뜻입 니다. 그렇게 합시다.


판단을 유보하고 바라보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명확하게 가르는 것,
나쁜 것은 내가 아닌 대상이라고 판단하는 것, 모두 에고의 작동입니다. 그런 판단을 유보해 보십시오. 악이라고 쉽게 규정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그것이 의식전환의 중요한 지점입니다.

사랑만이 우리 안의 원인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삶의예술의 전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의 반대는 상황에 대한 반발이 우리의 동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크고 작은 압박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일이 몰아닥치고 급하게 다뤄야 할 것들이 많아질 때, 삶 에서 위기가 닥치거나 쉽지 않은 고비를 넘어야 할 때 우리는 압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에 여유 공 간이 없어지고 외부의 상황과 사람에 대해 반발이 올라 옵니다.

이런 순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간단하고도 강력한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영국의 창의력 전문가 에드워드 드 보노Edward De Bono가 말한 방법이지요. 우리는 어떤 상황을 접할 때 순간적으로 예스yes와 노no를 판별합니 다. NO쪽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훨씬 많지요. 그는 그 의 저서 『YES와 NO를 넘어서 PO로』에서 ‘포po’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포po’란 예스yes도 아니고 노no도 아닌, 맞는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닌, ‘그냥’이란 뜻 입니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판단을 유보한 채 다른 길을 찾는 방법을 말하지요. 상황과 사람, 결과, 행동에 대한 반발이 일어날 때, 중립상태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미국 에미서리 본부인 선라이즈 랜치에서 지낼 때, 저는 자주 산책을 했습니다. 친구와 아름다운 계곡을 낀 산책길을 걷고 있는데, 별안간 방울뱀이 우리 앞에 나 타났습니다. 제 친구는 보자마자 놀라서 기겁을 했죠. 그런데 저는 “그냥 뱀일 뿐”이라며 바라보았습니다. 그 상황을 제대로 다루려면 뱀에 대해서 반응 혹은 반발하 기보다 중립상태에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포po인 상태죠. ‘뱀이 있구나. 어떻게 다루어야 하지?’하는 상태 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감정이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상 황에 대처할 방법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맑은 정신으로 선 택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어 반응할 때에 는 대처방법이 상당히 제한됩니다.

뇌과학에서는 인간의 뇌 안에 상황 또는 사람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판단하는 비교적 시끄러운 머리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좌뇌에 있고 땅콩만한 크기입니다. 질 볼테 테일러Jill Bolte Taylor라는 뇌 과학자는 자신의 경험 을 통해서 이 위치를 과학적으로 밝혀냈습니다.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이 찾아왔는데 그 때 타격을 받 은 자리가 바로 그 자리였던 거죠. 그 부분이 마비된 상 태에서 세상을 다르게 경험합니다. 판단이 없고, 중립적 이며, 고요하면서 통합적인 상태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 를 통해 그는 그동안 자신이 깊은 고요와 온전함, 연결 된 상태를 잃고 너무나 번잡스럽고 시끄럽게 살아왔음 을 깨달았지요.

중립인 상태는 고요하고 감정이 격앙되지 않은 상태 이고, 주의가 깊으면서도 열려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 는 무관심과는 다릅니다. 여유롭게 바라보면서도 맑게 깨어있지요. 집을 잘 지키는 개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마당에서 마치 자는 듯 평화롭지만 귀는 주변을 향해 쫑긋 세우고 있습니다. 미세한 소리에도 번쩍 눈을 뜨 지요. 중립상태란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독이 있는 방 울뱀을 만나도, 누군가의 공격적인 언행에도, 중립상태 에서 주의 깊게, 동시에 여유롭게 보는 겁니다. 일상에 서 우리는 “이건 별로야. 이건 좋아”라고 성급히 판단해 버리곤 합니다. 에고의 습성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을 명확하게 가르는 것, 나쁜 것은 내가 아닌 대상이라 고 판단하는 것, 모두 에고의 움직임이지요. 그러나 그 런 판단을 유보해 보십시오. 악이라고 쉽게 규정하는 것을 멈추십시오. 그것이 의식전환의 아주 중요한 지점 입니다.

벗어난, 왜곡된,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을 우리는 악惡 으로 규정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상황과 사람을 무언 가를 악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악으로 보이 는 것들은 실제로는 진화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이건 사라져야 할 악Evil이야”라고 규정짓는 것 대신 ‘Evol’, 즉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얼마 전 우리에게 정성어린 식사를 준비해 주시던 조 이빌의 주방장님이 갑자기 그만두셨습니다. 이것은 나 쁜 일인가요? 좋은 일인가요? 노인가요? 아니면 예스?

‘그냥’입니다. ‘포PO’입니다. ‘Evil’이 아니라, ‘Evol’입니 다. 그 주방장님이 내일 돌아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 느 쪽일까요? 어느 쪽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모두 진 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모두가 과정입니다. 섣부른 판 단을 유보하고 중립의식 안에서 주의 깊게 바라보십시 오. 저항하고자 하면 가장 창조적인 길을 스스로 제거 하게 됩니다. 새로 집을 지을 때 멋진 설계를 해 놓고 설 레는 마음으로 공사 현장에 갔다고 합시다. 흙먼지와 시멘트 가루가 자욱하고 지붕도 창문도 없습니다. 그 공사 현장에서 여러분은 “이건 내 집이 아니야”라고 하 시겠어요? 아닙니다. 나중에는 계획대로 집이 완성될 것 을 알고 있습니다. 건설 현장은 진화하는 공간의 한 장 면일 따름이지요. 그러니 비록 그 과정이 흙먼지가 날린 다 해도 언젠가 완성된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란 것 을 신뢰합니다. 또한 우리도 과정 중에, 진화 중에 있습 니다.

미국에서 길을 걷다 “I’m under construction”이라고 쓰인 티셔츠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건설 중” 이라는 뜻이지요. 상대가 건설 중이고 진화하고 있는 중인 것을 알면, 우리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더 큰 인내심을 갖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상황도 사람과 마 찬가지입니다. 감정적 반발과 저항은 정말이지 비효과 적입니다.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열려있는 의식의 상태 에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제일 건설적인 것을 알아차 리고 할 때, 가장 필요한 건축물이 나옵니다. 삶의 예술의 진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상황을 반발 없이 바라봅니다. 그리고 사랑만이 우리 안의 원인, 행동의 원인이 되게 합니다.

당신 가슴이 빛으로
가득 찬다면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 해도, 곧 끝나거나 뒤집힐 것 같아도,
우리는 저항 없이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근원의 막을 수 없는 힘과 재생력과 정렬하면서

2015년 12월 12일, 프랑스 파리에 모인 전 세계 195개 국가가 2100년까지 지구 온도 상승을 2°C 아래로 제한하겠다는 내용의 기후 협약에 합의했습니다. 196 개나 되는 국가가 자국의 이익을 넘어 전 지구적인 결 정을 내린 결과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협약을 실 행하려면 몇 가지 난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 협약의 핵심에는 석유 사용의 제한이 들어 있습니다. 그 러면 대체에너지 개발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2°C는 충 분한가에 대한 의문도 끊임없이 제기됩니다. 미국의 기 후학 전문가이자 미국항공우주국NASA 고다드 우주연 구소GISS 소장인 제임스 핸슨James E. Hansen 박사는 2°C 로 제한하더라도, 2100년 이내에 해수면이 5m 상승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따른 피해는 어마어마할 것이라 고 말합니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196개국이 만장일치를 이루었다는 것 자체가 인류 상황에서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인류가 어떤 한 가지에 대해서 일치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죠. 전체를 위해서 일치를 할 수 있다는 전례를 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Too little, too late”라는 말이 있 습니다. “너무 적게, 너무 늦게”라는 뜻인데요, 행동을 너무 늦게 하고, 너무 적게 함으로써 오는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때로는 온다는 의미입니다.

최근 20~30대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두 번의 강의를 했습니다. 하나는 금산에서 대안 교육 운동을 하는 분 들이었고, 다음은 상주에서 귀촌 운동을 하고 있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이었지요. 암흑과 같은 대한민국 상황 에서 새 방향을 찾아서 노력하는, 리더십이 있는 청년 들이었습니다. 두 군데에서 저는 1960년대 시작한 서양 의 귀촌 운동, 대안 운동의 역사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1960년대 서양에서 시작한 대안, 귀촌 운동은 당시 서 구의 탐욕적인 물질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는 운동이었 습니다. 히피 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요. 1960년대 평화 운동, 귀촌 운동, 히피 운동이 10년여를 거쳐 더 성 숙해 지면서, 다양한 대안운동이 사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중에는 인권 운동, 성 평등 운동, 정치 운동, 생 태 운동, 종교 다양성 운동, 문화다양성 운동, 뉴에이지 운동 등 각 갈래로 펼쳐졌습니다. 저는 이 강의를 통해 어떤 대안 운동이든 내면의 대안 운동이 동반되어야 한 다고 강조했습니다. 의식을 바로 세워 새 정체성의 축 을 세우고, 그것을 깊이 살아내는 대안 운동이 필요합 니다. 이 강연을 통해 청년들을 만나면서 제 20대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잘 상상이 안 되시겠지만, 당시엔 수염을 기르고 머리도 뒤로 묶고 다녔었거든요. 20대에 히피 운동의 마지막 세대들과 만나 그들과 같이 살고 일하고 활동 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30여 년 동안 동양인으로 서양의 대안운동을 함께 해 왔고, 이런 다양한 경험들이 저를 지금 이런 물줄기와 만나게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현재 한국 젊은이들의 상황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삼포세대, 오포세대, 칠포세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요. ‘삼포’는 세 가지 를 포기했다는 뜻으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아주 큰 것을 포기한다는 것 입니다. 이 세 가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것이 고 내면의 경험은 어떨지 상상할 수 있을까요? ‘오포’는 거기에 자기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다는 의미 입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지요. ‘칠포’는 꿈 을 포기하고 희망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 전한 절망의 세대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2015년 3 월, 한 취업 포털 사이트에서 3천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 한 결과, 오포 중 하나를 포기한 젊은이의 비율이 58% 였습니다. 그 중 결혼포기는 50%, 집포기는 47%, 출산 포기는 46%, 연애포기는 43%, 대인관계 포기는 39% 로 나왔습니다. 그 배경의 제일 큰 이유는 ‘돈이 없어서’ 가 50%, ‘현재 수입이 너무 적거나 없어서’가 43%, ‘돈 을 모아도 힘들어서’가 41%, ‘자신이 없어서’가 35%,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가 31%였습니다. 절망 이 구체적인 수치로 드러나니 충격이 컸습니다. 이번 강 의를 통해 만난 청년 네트워크의 핵심이 되는 리더가 있 었습니다. 30대 초중반 정도의 여성이었는데, 주변 동 료들이 요즘 그 친구가 매일 운다고 하더군요. 그 청년 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 눈물의 핵심은 절망이었 습니다. 대안운동의 핵심 역할을 해 온 그는 “모든 길이 막혀 있는 것 같다”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 니다. 삼포, 오포, 칠포를 이야기하는 20-30대보다 10대 들이 더 절망적이라고 했습니다. 뱃속에서부터 인터넷 시대에 태어난 10대는 대화라고는 SNS뿐이고 부모들 과 소통도 너무나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소통의 단절 은 곧 관계의 단절을 말합니다. 스마트폰이 생긴 지 5 년여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에 따른 변화는 정말 엄청납 니다. 그 청년은 10대들이 20대에 들어올 때를 준비해 서 그들을 이끌 수 있는 중간세대를 지금 키워야 한다 고 말하더군요.

그날 만난 청년과 젊은 세대 모두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절망적인 세상 안에서 사 는 모두에게 드리는 메시지이기도 하지요. 우리의 제일 여리고 순수하고 여린 가슴을 세상이 아닌 빛을 향해서 만 열어야 합니다. 제일 여린 가슴을 세상에 열면, 세상 의 모든 상처와 아픔이 다 들어옵니다. 그러니 여린 가 슴을 빛을 향해 열고 빛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우리의 더 발산적인 가슴, 사랑으로서 세상을 향하고 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대하 는 기본 의식의 축이며 원리입니다. 이 친구에게는 그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 요. 자신이 그것 때문에 계속 상처를 받아 왔다는 사실 을 알아차렸지요.

2주 전에 마샤는 쉼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깊은 쉼안에서 극성이 다시 세워질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으 로 영적인 수련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 수련은 간 단합니다. 깊은 쉼과 빛과의 교감을 위해서는 우선 시 간을 내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자신의 깊은 여유로움 을 경험해야 그 안에서 효율성과 힘을 더 얻는데, 그러 려면 쉼과 더 깊은 어떤 존재감과 교류할 수 있는 시간 을 절대적으로 할애해야 합니다.

이번 강연 중에 뒤집혀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을 두 군데서 들었습니다. 그게 지금의 사회는 너무 갈 데 까지 갔기 때문에 뒤집혀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 입니다. 현재 상황은 뒤집힘으로 가는 상황일 수 있습 니다. 이런 흐름에 대해 저항을 하려 한다면 힘겨울 수 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항 없이 이 흐름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더 어두워진다면, 더 뒤집힐 것 같 다면,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저항 없는 자리에 있을 필 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파괴가 아니라 재생일 수도 있습니다. 생명은 인간보다 큽니다. 생명은 어마어마한 재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무엇이 붕괴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구조이지, 생명은 아닙니다. 인류가 어떻게 흘 러가든지 생명의 재생력은 계속 다시 솟아오르고, 부활 할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적인 재생력은 언제든지 힘차 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표면의 상황이 어떻든 다시 솟 아오르는 생명의 힘은 계속 올라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힘과 재생력과 일치해 함께 움직이면 됩니다. 겉 으로는 혼란과 파괴가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씨앗을 계속 심고 그것을 키워나가는 일만이 우리의 길입니다.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을 남겼지요.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생명의 사과나무, 그 씨앗을 계 속 심고 키우겠다는 거지요. 이 절망하는 세대, 20대들 에게도 주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내일 모든 것이 멸망하 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희망이 없다고 보이더라도 생명 의 재생력을 의미하는 사과나무를 계속 심는 것입니다. 생명의 재생력은 인간보다 큽니다. 이 큰 생명의 씨앗을 우리가 지금 심고 함께 키우는 것입니다. 큰 산불은 어마어마한 땅을 한꺼번에 휩쓸어서 다 태워버립니다. 그런데 숲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파괴적인 것처럼 보이는 산불이 실제로는 재생을 위해 서 제일 필요한 현상 중 하나라고 합니다. 산불이 휩쓸 고 간 바로 그 자리에서 새 생명이 시작되고 그 전에 있 었던 것보다 더 큰 숲을 만드는 데, 이게 자연스러운 현 상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어쩌면 지금 그런 산불을 경 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절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의 사과나무를 계속 심고 키워갑시다. 충분한 쉼과 그 쉼 안에서의 근원, 빛과의 교감을 통해서 계속 우리 안 에서의 재생력을 키워갑시다. 그 안에서 이 흐름에 필 요한 통찰과 지혜가 옵니다. 각 상황 안에서, 설령 내 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작은 생명의 사과나무를 심으십시오. 그렇게 심어가는 사람들과 연대해서, 함께 합시다.

성장을 위한 보물

참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우리에겐 스승과 가르침,
그리고 함께 길을 걷는 도반이 필요합니다.

백호白虎는 털이 하얀 호랑이를 말하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영험한 상상의 동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아주 오래된 호랑이 이야기가 있지요. 바로 단군 신화인데요,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 다고 간청하자 환웅桓雄은 100일 동안 동굴에서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만 먹으라고 합니다. 곰은 성공했 고 호랑이는 도중에 도망칩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이 되는 데 성공한 곰이 아니라 실패한 호랑이가 한국의 핵심적인 상징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마스코트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상징하는 것은 어쩌면 인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짜 사람이 되려다가 그만 두고 도망간 인류 말입니다. 만약 단군 신화가 이어진 다면, 사람이 되지 못한 호랑이는 도망쳐서 헤매고 헤 매다가 많은 것을 경험하고 수행해서 사람으로 돌아오 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백호는 이 참 사람의 상징이 아 닐까요?

저는 백호를 사람됨, 참 사람의 상징으로 보고자 합 니다. 저의 꿈 하나는 대한민국의 상징, 앞으로 오는 인 류의 상징이 호랑이가 아니라 ‘백호’가 되는 것입니다. 백호는 부처를 상징하고 예수를 상징하고 깨어난, 깨우 친 존재를 상징합니다. 삶의예술학교가 추구하는 길도 우리 모두가 그런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참 사람이 될까요? 백호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고요와 근원의 자리에 어떻게 설까요? 영적 성장을 위한, 참사람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들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세 가 지는 불교에서 언급한 단어를 사용해서 이야기하겠습 니다.

불교에는 세 가지 보물, 삼보三寶가 있습니다. 삼보는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를 말합니다. 불보佛寶는 깨우 친 사람들인 부처를, 법보法寶는 깨우친 사람들의 가르 침을, 승보僧寶는 깨우친 가르침을 수행하는 승가, 도반 의 집단, 몸체를 말하며 ‘불법승’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 부처라고 말하는 불보佛寶는 진리를 투명하 게 대표하는 스승입니다. 누군가가 빛의 자리에 있어 야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그러니 하 늘과 진리를 투명하게 대표하는 스승, 깨어있는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필수조건입니다. 스승이 없다면 호랑이는 계속 헤매고 다니겠지요. 아쉽게도 우리는 이 스승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봐야 합니 다. 보고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알게 되고, 그런 모습 에 도전할 수 있게 됩니다. 드물게는 이런 과정 없이도 깨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드문 일이지요.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참 가르침입니다. 스승이 곁에 있을 때,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 기운 아래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지만, 느낌과 감각만으 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가르침과 진리, 말씀의 표현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있어야 우리의 다양한 삶 의 자리에서 구체적 배움과 성숙,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 다. 우리가 본래부터 온전한 빛의 존재라는 참된 가르 침 말입니다. 가르침의 방식은 다양합니다. 언어도 다르 고 개념도 미세하게 다를 수 있지만, 정수는 같습니다. 그러나 있다는 것만 알아서는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법보는 본디 “인간의 탐욕을 떠 나게 하고 본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존귀한 가르침”이 라고 정의됩니다. 즉, 자기중심성을 떠나게 하고 존재로 돌아오게 하는 존귀한 가르침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가르침을 함께 수행하고 움직이고 배 워가는 도반의 몸체, 도반의 집단이 필요합니다. 도반 은 도를 함께 실행하고 수행하는 친구죠. 멘토, 참 말 씀, 도반이 필요합니다. 

삶의예술 세미나 참가자들이나 다른 수행 프로그램 을 이수한 사람들은 간혹 집에 돌아간 후 도루묵이 된 다며 실망합니다. 그런데도 세미나가 의미와 힘을 지니 는지 궁금해하지요. 일시적인 한 과정의 배움, 강렬한 깨어남을 지속하려면 이 세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 고 적용해야 하지요. 세미나는 좋은 시작이지만, 절대 로 그것만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여기 한 가지 더 필요한 게 있습니다. 수행체계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부분입니다. 멘토를 만나고 참 가르침 과 법을 듣고 흡수하며, 그것을 함께하는 도반들이 있 다 해도 내 삶에서 이것을 체계적으로 실행하지 않는다 면 다 도루묵이 됩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러니 수행 체계를 통해 실체화되고 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 으면, 좋은 생각들, 좋은 말씀들이 머리에만 남는 것으 로 끝날 수 있습니다. 에미서리 공동체의 13가지 수행체계에 대해서 말씀드
릴게요.

첫째, 교육입니다. 세미나, 클래스 같은 영적 교육이
첫 번째입니다. 이런 교육이 없이는 시작하기가 어렵습 니다.

둘째, 말씀과의 조율입니다. 법과의 조율, 가르침과의 조율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말씀과의 조율은 에미서리 문화에서는 서비스에 참가하는 것, 그리고 서비스 말씀 을 읽고 듣고 보는 것들입니다. 흡수하고 조율하지 않 고는 어렵습니다. 

셋째, 멘토들과의 조율입니다. 성장을 촉진하는 데에 는 아주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입니다. 다른 것이 다 있 어도, 이런 멘토와의 교류가 빠지면 어렵습니다. 왜냐하 면, 때로는 혼자서 신나게 공부하고 여러 가지를 다 했 는데 멘토 또는 스승을 통해 점검이 안 되면, 한참 다른 쪽으로 가면서 다른 데로 가고 있는지조차 모를 수 있 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추어 줄 거울이 꼭 필요합니다.

넷째, 근원과의 조율입니다. 신과의 조율, 기도, 명상 입니다. 그래서 근원과 신과 조율하는 기도, 명상시간 을 갖는 것. 고요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다섯째, 어튠먼트attunement 주고받기입니다. 어튠먼트는 우리의 몸, 마음, 가슴을 근원과 연결시키는 강력한 에너지 조율 방법입니다. 에미서리 공동체의 특별한 방 법이지요. 이를 통해 깊은 명상에서 들어가는 고요만큼 깊은 고요와 존재의 자리에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 있 습니다.

여섯째, 응답훈련입니다. 응답훈련은 자기한테 전달 된 감응과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 입니다. 그러한 구체적 고마움의 표현은 전달된 진리를 더 빛나게 하고 또한 자신 안에 새겨지게 합니다. 응답 훈련의 한 방법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멘토에게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응답의 편지이면서 자기 삶을 주기적으 로 짧게 정리하는 편지이지요. 쓰는 동안 자기 삶을 돌 아보고 조율하게 됩니다. 멘토가 읽지 않아도 상관없습 니다. 자신을 위한 시간이니까요. 쓰면서 자기의식이 정 렬되고 자신의 열정이 그 편지로 바로 세워집니다. 간단 한 편지 한 장으로 정수만 정리하는 것도 좋습니다. 쓰 다 보면 길어지기도 하는데 이걸 줄이고 줄여서 정수만 뽑아보면 그 진리에 대한 열정과 의식을 상승시키는 데 효과적입니다. 

 일곱째, 고맙습니다Thank you훈련과 표현입니다. 매일, 매주 작고 큰 감사했던 일들을 돌이켜 보고 표현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혼자, 혹은 가족, 동료들과 감사의 마 음으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일상화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풍성해 집니다.

여덟째, 음미와 감사Appreciation훈련입니다. 이는 깊이 보는 훈련입니다. 각 사물과 생명 안에 있는 아름다움 과 빛, 진실을 깊이 보고 아름다워하는 훈련입니다. 감 사 훈련은 행동, 사건, 결과에 대한 고마움 쪽에 가깝다 면, 음미와 감사 훈련은 그 너머에 있는 존재의 빛과 아 름다움을 보고 느껴 들어가는 주의와 집중의 훈련입니 다. 결핍으로 가려는 주의를, 이미 있는 아름다움과 빛 으로 돌려서 아름다워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왜 늘 저렇게 하지’하는 마음을 돌려, 그 사람 안에 있는 참된 것에 주의를 계속 둡니다.

아홉째, 성화기도 시간 갖기입니다. 이 성화기도 시간 에는 자신을 성화하고 나의 세상 사람들을 축복합니 다. 이러한 식의 체계를 내 삶에서 도입하고 실천함으로 써 성장하게 됩니다. 열째, 자신의 참 정체성에 깨어 있기입니다. 항상 물어 야 해요. 자신이 지금 피해자의 자리, 저항의 자리에 있 는지, 아니면 그것 넘어 더 깊은 존재의 자리에 있는지 를 ‘매 순간’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판단, 비판, 남 탓을 하고 싶어 하는구나’를 깨닫고 다시 돌아오는 것 입니다. 앞으로 언급할 세 가지는 더 높은 차원의 훈련 들입니다.

열한째, 영적 지각훈련입니다. 이는 상황과 사람의 정 수를 보는 훈련입니다. 거기에는 정수를 보는 것과 진 동적 패턴을 보는 훈련이 있습니다.

열두째, 서버server의 훈련을 하고, 서버로서 기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수와 진동을 보는 것을 넘어 그것을 다루는 것입니다. 또한, 깨어나고 응답하는 사람을 안 내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열셋째, 영적 통치spiritual government입니다. 참 된 영적 통치가 세상에 자리 잡을 때 권력자들은 겸손 해지고, 부자들이 관대해 집니다. 영적 통치는 상황과 사건 안에 내포된 에너지 패턴과 의미를 볼 줄 알고 다 룰 줄 아는 것입니다. 나한테 등장한 이 사건, 이 상황, 이 무엇이 그냥 그 사건을 넘어 대표성을 지닌 진동적 패턴임을 인식하면서 그것에 대한 나의 영적 표현, 발산, 컨트롤을 통해서 그 패턴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 가 만나는 사람과 모든 일에서 나에게 오는 세상의 요 소들을 내가 진동적으로 에너지 차원에서 다스립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통 치입니다. 내가 직면한 상황 안으로 다가온 어떤 세계적 인 요소들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다스림으로써 그 패턴 을 세계 안에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진동 차원에서는 그것이 다스려집니다. 깨어난 이들의 정점에 바로 이 영 적인 통치가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열세 가지는 처음에는 훈련이지만, 나중엔 자연스럽게 됩니다. 누가 성화 시간 가지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근원과 조율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 라, 저절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나 답답해서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헤매는 호랑이가 아니라 백호가 됩시다. 그 백호의 소리를 이 세상에 우렁차게 펼칩시다. 그 소리가 인류를 깨우치고 돌아오라고 부르고, 권력자들을 겸손하게 만 들고 부자들을 관대하게 만드는 그 영적 통치의 자리에 끝내 들어오게 하는 거지요. 백호가 됩시다. 세상이 간 절히 염원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삶의예술학교는 

 삶의예술학교는 인간의 의식을 일깨우는 컨텐츠를 개발하고 안내하는 교육공동체이며, 현재 서울과 제주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존재는 자신의 빛을 발산하며 생명의 춤을 추기 위해 이 땅에 옵니다.

삶의예술학교는 이 길의 동반자가 되어 사람들이 참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고 깨어난 의식으로 세상에 사랑을 발산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삶의예술학교에서는

미국 생태영성공동체 에미서리Emissaries에서부터 깊이 연구해온 존재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삶의예술 코스와 다양한 워크샵을 진행합니다.

총 4단계로 구성된 삶의예술 코스는 깨어있는 정체성을 통해 근원과 연결하고, 참 생명의 힘을 일깨워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며, 이를 통해 세상에 기여하고자 하는 존재들에게 안내와 지지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내의 갈등과 그 이면의 상처의 뿌리까지 치유하는 강력한 심리치유 프로세스인 시간 여행 워크샵과 근원의 에너지와 조율함으로써 심신의 회복과 통찰을 가져오는 어튠먼트 워크샵 등이 있습니다.

삶의예술 코스 안내 

1단계 삶의예술Art of Living 코스 (2박 3일)


“가슴의 치유와 내면의 품성 깨우기”
참정체성True Identity/시간여행/창조의 과정 생명의 힘 세우기/인간발달주기의 이해

2단계 어웨이크닝Awakening Creator 코스 (3박4일)


“깨어나는 창조자 의식의 개발과 안내” 어튠먼트Attunement/의식의 구조와 기능
뉴머플러즘Pneumaplasm/제한 다루기

3단계 디프닝Deepening Spiritual Expression 코스 (3박4일)

“영적 표현의 심화, 리더십 개발”
신성한 의식 개발/대표성 원리Principle of Representation 존재의 디자인/서빙Serving

4단계 리빙 더 워드Living the word 코스(7박8일)
 
“존재적 리더십, 현존” 리더십의 4가지 품성/진리의 디자인 존재의 대화Let Being speak/ 당신의 영을 드러내라Bring forth your spirit
 
워크샵 안내 

시간여행 워크샵 - 대물림과 고착화된 내면의 상처 치유 프로세스

어튠먼트 워크샵

- 비접촉 에너지 치유 및 존재와의 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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