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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의 대동사상 실천과 농촌사업 자료집
강종일 편저
이종만선생기념사업회
화 보
이종만 선생의 1940년대 초 사진
이종만 선생의 공덕 기념비
월성이종만공덕기념비(月城李鍾萬功德記念碑)는 1942년 5월 30일 대현면 주민들이 울산광역시 남구 용잠동 100번지에 이종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은 지붕돌을 갖춘 형태로 전체높이는 185cm이고, 몸체 높이는 138cm이며, 너비는 42cm에 두께는 19.2cm이다. 현재 비석이 있는 위치는 울산광역시 SK종합화학에서 SK가스 방면으로 가는 오른쪽 도로 옆에 세워져 있다.
공덕비의 전면에는 월성이종만공덕기념비(月城李鍾萬功德記念碑) 비제(碑題)가 세겨져 있고, 공덕비의 뒷면에는 공덕을 기리는 한시(漢詩)가 새겨져 있다. 이종만 선생의 공덕을 기리는 글과 한시는 아래와 같다.(저자 미상).
대현의 산은 기운을 길러내고/ 용잠의 강은 정기를 쌓았네/ 아, 저 대장부여/ 여기에 우뚝하니 태어났도다/ 사회에 이름이 드러나고/ 교단에 공이 이루어졌네/ 베푼 바가 넓어/ 아름다운 명성이 자자하도다/ 우리 고을의 사람으로/ 누가 사모하지 않으리오/ 황금으로 주조해야 마땅하거니/ 한 조각 빗돌은 오히려 가볍네.
현수육기(峴峀毓氣) 룡강저정(龍江儲精) 의여장부(猗歟丈夫) 유차정생(維此挺生) 사회명저(社會名著) 교단공성(敎壇功成) 소시사보(所施斯普) 자자령성(藉藉令聲) 신시본면(矧是本面) 숙불염정(孰不艶情) 황금의주(黃金宜鑄) 편석유경(片石猶輕)
북조선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리종만 선생의 비석
이종만(李鍾萬) 선생의 연보
- 1885년 1월 14일 경남 울산군 대현면 용잠리 220번지에서 아버지 이규은(李圭殷)과 어머니 김학열(金鶴㤠)의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출생
- 1902년 한학을 공부하다 병으로 16세 때 학업중단
- 1904년 학업 재개 후 결혼했으나 병 재발로 학업중단하고, 가업 승계
- 1905년 부산 어물시장에서 미역 판매(러일전쟁 중 미역은 지혈제 옥도정기 원로)
-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의 종결과 미역 시세 폭락으로 손해 봄
- 1907년 어선을 용선해 수산업에 종사했으나 폭풍 사고로 실패
- 1912년 향리에서 서당 7개를 통합해 대흥학교 설립하나 노인들의 반발로 실패
- 1912년 일제의 토지약탈에 맞서 농림주식회사 설립
- 1914년 강원도 양구 중석 광산으로 이익금 창출
- 1918년 세계 1차 대전 종전(終戰)으로 중석으로 번 돈 5만 원 낭비
- 1919년 금강산 목재업이 수마로 유실되었으며, 함남 영평 평야개간, 함남 북청 개간사업, 함남 동창광산, 함남 명태동 광산 등을 경영하면서 농촌 이상향 건설에 착수했으나 실패
- 1920년 공칭 1천만 원의 조선농림회사 창립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 1921년 향리로 낙향하여 농촌 개량과 농촌진흥에 노력
- 1923년 사회주의자 이준열과 경성고학당(京城苦學堂) 경영
- 1928년 신흥군 명태동에서 3년간 광업 경영하며 이상농촌 건설 시도
- 1931년 명태동 광산, 신흥군 광업개발회사, 기린광산 등 경영했으나 실패
- 1932년 영평금광 450원에 매입
- 1934년 영평금광 허가 후, 노다지 금맥발견
- 1936년 영평금광으로 40여만 원 수입 달성
- 1936년 장진광산 매입 후, 영평금광을 동조선광업에 155만 원에 매각
- 1937년 5월 대동농촌사에 50만 원 투자하고, 광부와 직원 위로금, 학교 기부금, 빈민구제금 등으로 12만 원 지출, 대동농촌사 50만 원으로 농토매입
-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북지위문품 대’ 1,000원 기부
- 1937년 9월 이종만의 개인 농지 167만평 소작료 3활 징수 발표
- 1938년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 대동농촌사, 대동출판사, 대동공업전문
학교 수장 취임
- 1939년 징병, 의무교육, 총동원 문제로 군과 조선총독부가 민간인 유지들을 초대해 개최한 조선호텔 좌담회에 참석
- 1939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축전첩신년(祝戰捷新年)⦁기무운장구(祈武運長久) 시국 광고에 참여
- 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 위원 역임
- 1939년 7월 일본군 위문대금 1,000원 기부
-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儒道皇民化)를 위해 전 조선유림을 동원하여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평의원 취임
- 1940년 7월 『삼천리』 잡지에 기고한 “지원 병사 제군에게” 주제의 글에서 지원병의 혈(血), 한(汗), 애(愛), 인(人)의 격려문 기고
- 1940년 12월 ‘황도정신의 진기(振起) 앙양(昻揚)과 내선일체의 철저’를 기하고, 사상 사건의 관계자를 선도·보호한다는 취지로 시국대응 전선(全鮮) 사상보국연맹을 개편한 대화숙(大和塾)에 참가
-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매입) 가두유격대에 참가하는 한편,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保國團) 이사 취임
-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 발발(이종만의 기업 콘체른 붕괴됨)
- 1943년 총독부의 금광정리로 대동광업 해체됨
- 1944년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재인수(후일 평양공업대학이 김일성대학 공학부와 김책공업대학으로 발전)
- 1945년 한국산업건설협의회 회장 취임
- 1945년 한국산업건설협의회 기관지 『독립신보』 설립
- 1945년 8월 일본기업체 삼척탄광 불하받음(30번째 사업)
- 1946년 5월 31일 삼척탄광 노동쟁의 (자주관리제 인정, 이종만 사장 유임, 임금인상, 미군정청 대리인 하경용 거부(곽병찬 자료)
- 1948년 월북(월북 도중 개성 경찰에 구금됨)
- 1949년 6월 25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대회에 남조선산업
건설협의회 대표로 참석
- 1950년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역임
- 1951년 1월 20일 전시공장복구를 위한 공장지배인 역임
- 1954년 북한 중공업성 지질탐사 관리국 고문
- 1955년 10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역임
- 1969년 12월 1일 광산지배인(로동신문 보도)
- 1975년 8월 15일 지질총국 지질탐사대 책임자(로동신문 보도)
- 1975년 9월 24일 평양에서 딸 이남순 상봉(3박 4일 숙식)
- 1977년 1월 17일 향년 93세로 타계, 애국렬사릉에 안장
- 1977년 1월 18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명의로 부고게재
(1월 19일 로동신문 보도)
- 1990년 8월 15일 북조선 조국통일상 수상
발 간 사
축 사
축 사
이종만 선생 자료집 편찬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종만 자료집 편찬 축사 요청 전에는 이종만 선생을 몰랐다. 그런데 이 [이종만선생자료집]의 편집본을 읽고 난 후에 자료집을 편찬하게 된 강종일 한반도중립화통일협의회 회장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갈라진 조국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오랜 고민을 긴 세월 동안 해온 평화통일운동가 한 사람이 북측의 이종만 선생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인생 전 과정(1885.1.14. 출생-1977.1.17.영면)이 민족수난기(청일전쟁-러일전쟁-일제강점-한국전쟁-분단 냉전기)에 두루 걸쳐 있다. 고향 대현면 주민들이 1942년 5월 30일 세운 그의 공덕비는 태생지인 울산광역시 남북구 용잠동 100번지에 있다. 동시에 사후(1977.1.17.)에는 북조선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이처럼 그는 남북한 모두 그를 칭송한다. 그는 광산업 사업가인 동시에 농촌구제가, 계몽사상가 그리고 교육운동가로서 가난한 농민과 수난받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한몸에 직접 체험했고 고뇌해 온 분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0월 친일인명사전에서 그를 친일파로 분류했지만, 이 자료집은 이종만 선생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위한 흩어진 자료를 편집하여 묵어낸 자료집 편찬이다. 그래서 친일 여부 최종 평가는 여기서는 별개로 하자는 강종일 편찬자의 서문에 동감한다.
다만 그가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라”라는 말을 1975년 9월 24일 평양을 방문한 그의 막내딸 이남순에게 한 마지막 말은 현재 한반도 상황을 직시할 때에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고 더욱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만한 가치 있는 유언이라고 본다.
북조선이 “영세중립” 용어보다 “중립”이나 또는 “중립화“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이종만 선생이 “영세중립 평화통일”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매우 특이하다고 강종일 박사의 이 책 서문에서 기술하였다.
“중립”이라는 말은 고전적으로 한반도 평화통일과는 직접 관계된 용어는 아니다. 고전적 “중립”이란 국제법상 교전 행위가 발생 시에 비교전자의 2가지 의무를 기초로 한다. 비교전자는 공평의 의무, 군사적 적대행위 금지라는 2가지 의무를 진다는 이론이다. 비 교전국이 교전국 어느 한 편을 불공정하게 편들거나, 군사적 적대행위를 하면, 상대국 입장에서 제3국을 전시 중립법규 의무 위반 적대행위로 간주, 제3국에 대해 무력행사를 하여도 국제법 위반이 아니다. 물론 1945년 UN 체제 이후 중립의 의미는 달라졌다. 1949년 전쟁포로에 관한 Geneva 협약 제4조는 중립국과 비교전자를 구분하고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사업가로서 광산업에 투신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여, 그 돈으로 농촌을 계몽하기 위한 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직접 운영하였다. 교육을 통한 민족자강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교육을 통해서 민족구성원 개개인들의 눈높이를 높여서, 전문성 제고, 이를 기초로 과학기술 발전, 냉철한 국제정세 인식의 바탕 위에서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남북이 민족 활로를 함께 개척하자는 것이다.
그가 남긴 글을 전체적으로 볼때에 그는 농촌구제 활동과 민족역량 강화(자강)를 늘 가슴에 품고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 보인다. 또 그는 이 땅의 민중의 삶에 항상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분단 조국이 좌우로 분단된 것도 외세라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반드시 외세가 물러가고 국내외정세가 좋아지면 영세중립 통일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확고한 꿈을 가졌을 것으로 본다. 그 이전까지 민족역량을 키우기 위해서 사업과 교육에 헌신한 것으로 추측된다.
근세조선의 개화파인 유길준 선생의 벨기에 같은 영세중립 시행 제안(1885.12.), 고종황제의 영세중립 노력(1891.6 이후)을 보더라도 한반도 민족통합의 길은 영세중립 통일방안이 과거나 현재에도 매우 현실적인 방안으로 꾸준히 추진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자료집은 북측에서도 이종만 같은 영세중립 통일방안의 사상을 가진 인물을 발굴하여 남북한의 평화통일 운동가들이 그를 기리고 영세중립 통일방안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공유하는 것은 민족통합 운동에 가장 기초적 작업이라고 보고, 자료집 편찬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바이다.
2023년 1월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국제법)
서 문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라.” 이 말은 남호 이종만(南湖 李鍾萬) 선생이 1975년 9월 24일 평양을 방문한 그의 막내딸 이남순에게 한 말씀입니다. 그 후 이종만 선생은 1977년 1월 17일 북한에서 영면함으로써 그 말은 그의 딸에게 준 마지막 유언이 되었으며, 이종만 선생의 통일사상과 이념이 두 단어에 함축되어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용어들은 또한 이종만 선생과 필자를 묶어주는 동아줄이 되었으며, 이종만 선생에 관한 자료집을 편집해야 하겠다는 힘과 용기를 주었으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나는 2015년 8월 남호 이종만(南湖 李鍾萬) 선생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내가 한반도 중립화 통일운동을 시작한 해가 1997년 1월이었으며, 이종만 선생이 1977년 1월 17일 향년 93세로 북한에서 영면하셨으니 이종만 선생과 나는 정확하게 20년 동안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위한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공유한 셈이 되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10월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서 이종만 선생을 친일파로 분류했으나, 북조선은 그를 애국자로 분류해 신미리 ‘애국렬사릉’에 안장했습니다. 남과 북은 한 사람의 자연인 이종만 선생의 사상과 행적을 정반대로 평가하였습니다. 남과 북이 이종만 선생을 평가하는데 그렇게 대조적으로 하게 된 원인과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 책은 이종만 선생의 장단점(長短點)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남북의 정부나 학자들이 이종만 선생을 재평가하는 데 필요한 참고자료를 제공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는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이종만 선생에 대한 어떠한 평가나 분석을 하지 않으며,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고 전달하는 자료집이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현재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고, 북쪽의 자료를 자유롭게 찾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종만 선생에 대한 보다 완벽한 자료를 모으는데 한계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종만 선생에 관한 자료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을 한 줄의 구슬로 엮어서 한곳에 모아두면 장차 더 자세한 자료집을 만드는 데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편집을 시작한 것입니다.
남북의 “영세중립(永世中立) 평화통일(平和統一)” 용어 중 한반도에서 논의된 영세중립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근세조선의 개화파인 유길준(俞吉濬: 1856-1914) 선생이 1885년 12월 러시아의 남진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벨기에와 같이 영세중립을 시행해야 한다는 “조선 중립론”을 정부에 건의했으며, 고종황제(高宗皇帝)도 1891년 6월부터 조선의 영세중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1904년 1월 20일 “조선은 영세중립국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당시 이종만 선생이 19세였으니 고종의 영세중립국 선포를 통해 ‘영세중립’ 단어를 인지할 가능성도 있으며, 남북전쟁의 참화를 경험한 세대로써 평화통일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는지 추정해 봅니다.
북조선은 ‘영세중립’ 용어보다는 ‘중립’이나 또는 ‘중립화’의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종만 선생은 “영세중립 평화통일”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 조금은 특이한 단어입니다. 북조선의 정치적 환경에서 이종만 선생이 “영세중립”의 용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영세중립”과 “평화통일”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남순, 2010: 384쪽).
나는 이종만 선생이 장차 남북의 진정한 재평가를 받게 되면 그가 ‘친일파’인지 또는 ‘애국자’ 인지를 가려지게 될 때를 대비해 자료집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이종만 선생이 남북의 진정한 재평가를 받을 수 있는 시기가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2022년은 이종만 선생이 서거 한지 45주년이 되는 해로 이종만 선생을 기리는 추모포럼이 지난 4월 15일 서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추모포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종만 선생에 대한 자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종만 선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보도내용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남북 간의 분단으로 이종만 선생에 대한 자료들이 부족한 상태이고, 확인하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이종만에 대한 원문 필자들의 출처도 다 확인하지 못한 부족한 상태에서 이 책을 편집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이종만 선생에 대한 자료집이 출판되기까지 여러 선생님의 많은 지원과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감사함을 드립니다. 그중에서도 이종만선생기념사업회의 지원에 감사드리며, 특히 김반아 박사님을 비롯해 박옥경 박사님, 이종만 선생의 일본어 논문을 한글로 잘 번역해 주신 박세진 교수님, 그리고 삶의예술학교 박유진 대표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특히 발간사를 써주신 양재섭 교수님을 비롯해 축사를 써 주신 윤경로 전 한성대학교 총장님과 이장희 전 외국어대학교 부총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남북이 이념과 사상의 대립 된 환경에도 불구하고 추모포럼에서 추모사를 해주신 한홍구 박사님께 감사드리며, 지난 포럼에서 사회도 해주시고, 이종만 선생에 대한 새로운 자료 발굴에 많은 수고를 해주신 양재섭 교수님, 포럼에서 논문을 발표해 주신 이달호 교수님, 조성환 교수님, 송순헌 정신세계원 원장님께 감사드리며, 토론에 참여해 주신 이병철 선생님, 신수식 박사님, 임형진 교수님, 신일섭 교수님들께도 아울러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에 이종만 선생에 대한 자료집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한문의 뜻풀이를 즐거운 마음으로 열심히 해주신 손정규 전국도인연협회 운영위원장님, 자료정리에 협력을 해주신 신수식 박사님께 감사드리며, 성실하게 자료를 정리해 준 중도에서통일까지의 이정희 대표님, 아르즈틴의 심상진님에게 아울러 감사드리며, 자료집 편집에 도움을 준 김준석 대학원 학생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책의 출판을 흔쾌히 허락해 주신 김성룡 사장님과 한신기획 출판사 임직원들께도 아울러 감사를 드립니다.
2023년 1월
강종일
차 례
화보
이종만 선생의 연보
발간사/윤경로
격려사/양재섭
축사/이장희
서문
제1장 머리말
제2장 이종만의 대동사상 실현과 농촌구제를 위한 활동
제1절 이종만의 일제강점기에 쓴 글들
01. 生業(생업)에 奮鬪(분투)하자(권두언)
02. 成功家 諸氏의 鑛山經營祕訣公開 (성공가 제씨의 광산경영 비결공개):
나의 鑛山(광산)은 이러케? 勞資協調(조자협조)의 精神(정신)으로 한다
03. 大觀(대관)하자(권두언)
04. 農業(농업)의 合理化(합리화)
05. 朝鮮(조선)은 農業適地(농업적지)
06. 農夫(농부)의 功勞(공로)
07. 農民(농민)의 生活(생활)
08. 共存共榮(공존공영)
09. 자력(自力)으로살어보자
10. 訥言閔行(눌언민행)
11. 經濟(경제)와 節約(절약)
12. 不變性(불변성)
13. 學文(학문)의 길
14. 成功美談(성공미담) 나의 半生紀(반생기)
15. 償債(상채)의 길
16. 人間(인간)된 의무(義務)와 책임(責任)
17. 克己忍苦(극기인고)의 精神(정신)(권두언)
18. 餘裕(여유) 있는 生活(생활)
19. 禍福(화복)
20. 物質(물질)과 精神(정신)의 통일
21. 物心兩面(물심양면)의 開拓者(개척자)
22. 創造的努力(창조적노력) (권두언)
23. 産業平和(산업평화)의 길
24. 報恩(보은)의 生活(생활)(권두언)
25. 農家(농가)의 苦情(고정)과 覺悟(각오)
26. 새것의 意義(의의)(권두언)
27. 실물(實物) 敎育(교육)의 의의
28. 生活(생활)의 健全性(건전성)(권두언)
29. 生活十則(생활십칙)
30. 사랑의 반죽
31. 學問(학문)의 길
32. 時艱克服(시간극복)과 更生(갱생)의 길
33. 送年辭(송년사)
34. 非常時局(비상시국) 하의 생활 要諦(요체)
35. 世界新秩序(세계신질서)의 創建(창건)
36. 新體制(신체제)의 新生活(신생활)
37. 大同一覽(대동일람)
제2절 이종만의 북조선에서 쓴 논문과 보도내용
01. 사회주의 상업의 우월성을 높이 발양시키는 것은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중요한 담보
02. 이종만 수기 내용
03. 『통일신보』에 보도된 이종만의 수기
제3장 이종만에 관한 남북학자의 논문과 자료
제1절 한국에서 발간된 이종만 선생에 관한 논문과 글
01. 종만씨 5분간 인상기
02. 鑛業界의 美談! 快消息! (광업계의 미담 쾌소식): 鑛山(광산) 판돈 五十萬圓(오십만원)을 농촌사업에 밧친 李鐘萬氏(이종만씨)
03. 農村 理想鄕의 建設者 李鍾萬 氏의 人物(농촌 이상향의 건설자 이종만씨의 인물)
04. 人物月旦(인물월단) 李鍾萬論(이종만론)
05. 사장방문기: 이종만씨 사업관(씨는 대동광업사장, 대동농촌 사장, 대동공전교주)
06.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 그가 도전한 최후의 실험
07. 남북의 영세중립 평화통일론
08. 日帝末期 大同事業體의 經濟自立運動과 理念(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09. 근대광업과 식민지 조선사회 : 이종만의 대동광업과 잡지 『鑛業朝鮮』(광업조선)을 중심으로
10. 일제강점기 이종만(李鍾萬)의 대동(大同)콘체른 운영에 대한 소고(小考)
11. 대동 사회를 꿈꾼 대동 콘체른
12. 日帝末期 大同事業體의 經濟自立運動과 理念 (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13. 민족자본가 이종만 선생의 대동사상 실천운동
14. 이종만 선생의 개벽사
15. 남호 이종만 선생의 영세중립 평화통일 사상 재구성과 이상국가
제2절 북조선에서 발간된 이종만 선생에 관한 논문과 글
01. 태양의 품에 안기어 빛 내인 삶(이종만 편)
02. 리종만
제3절 북조선의 중립정책에 관한 논문
01. 조선 문제에 대한 김정일의 시각들
02. 북한의 중립정책에 대한 고찰과 평가
03. 북한의 중립정책에 관한 소고
제4장 이종만에 관련된 신문보도와 참고자료
제1절 이종만 선생에 관한 한국의 신문보도와 참고자료
01. 대동광업주식 보유현황
02. 오도에 긍(亘)하야 7백50광 소유
03. 社說(사설) 用財(용재)의 好模範(호모범)
04. 눈물 속에 반생(半生)을 보낸 이종만씨 부인 장희선(張熙善) 여사 방문기
05. 西(서)에大同工業專門設立(대동공업전문설립) 南(남)에農業專門(농업전문)을 計劃(계획) 工業專門(공업전문)은 兩科(양과)에三年制(삼년제)로 今春各四十名(금춘각사십명)을 募集(모집)
06. 詳細(상세)한 通知(통지)받기前(전) 校舍(교사)의貸借(대차)는 不能(불능)
07. 大同工專(대동공전), 女醫專(여의전) 不遠間(불원간)에 認可(인가)키로
08. 崇實(숭실)의 後身大同工專(후신대동공전) 五月一日頃(오월일일경)에 開校(개교)
09. 機械鑛山兩科(기계광산양과)에 三年間六學級完成(삼년간육학급완성) 確乎(확호)한財政(재정)의 內容(내용)
10. 理事五氏決定(이사오씨결정)
11. 待望(대망)의第二小學校(제이소학교) 兩面(양면)에一時設置(일시설치) 蔚山敎育界(울산교육계)의朗報(낭보)
12. 睡眠金鑛山(수면금광산)의復活(부활)로 ?金朝鮮(산금조선)의大飛躍(대비약)!
13 初代校長(초대교장)에는 石川博士有力(석천박사유력)
14. 大同工業專門學校(대동공업전문학교) 七月一日開校豫定(칠월일일개교예정)
15. 當分間鑛山科(당분간광산과)만 三年內(삼년내)로機械科設置(기계과설치) 大同工專生徒募集(대동공전생도모집)
16. 大同工專設立者招待(대동공전설립자초대)
17. 大同工專校長(대동공전교장) 吉川博士(길천박사)로內定(내정)
18. 大同工專開校式(대동공전개교식)
19. 成川中學期成會(성천중학기성회)에 巨財(거재)를奇附(기부)키로 李鍾萬(이종만),李冕均兩氏(이면균양씨)
20. 朝鮮第一鐵鑛(조선제일철광) 埋藏量一億旽(매장량일억돈),慈城(자성)에서發見(발견)
21. 大同工專校舍(대동공전교사) 明春工事着手(명춘공사착수)
22. 李鍾萬氏(이종만씨)에게引繼承諾(인계승낙) 磐石(반석)우에선貞信女校(정신여교)
23. 元漢慶氏(원한경씨)와 不遠最後協議(불원최후협의) 李鍾萬氏(이종만씨) 談(담)
24. 貞信女學校引繼問題(정신여학교인계문제)로元(원),李兩氏會見(이양씨회견)
25. 貞信女學校(정신여학교) 新生(신생)의 再出發(재출발)
26. 苦學堂協會(고학당협회)
27. 苦學活寫盛況(고학활사성황)
28. 蔚山敎育事業(울산교육사업)에 十餘萬圓喜捨(십여만원희사)
29. 消息(소식)育事業(울산교육사업)에 十餘萬圓喜捨(십여만원희사)
30. 장진광산개발, 대동광업 창립, 6일 창립총회 완료
31. 울산갑종농업교에 일만원 우복(又福)회사, 농교기부금 미해결을 돋고서, 대동광업 창립, 6일 창립총회 완료
32. 장진광산의 유래
33. 대동농촌사 사업구체안 발표
34. 금광왕 이종민씨 포부와 다채의 사회사업, 노동자와 농민의 친우
35. 조선유일의 대금산
36. 세계적 이채(異彩)! 자영광과 자영농창정(創定) 금광왕, 이종만씨의 양대(兩大
37. 대동광업회사와 중앙조합을 창립)사업전(全)
38. 광업가 이종만씨 62만원 희사
39. 이종만씨 천원 헌금
40. 작인 7 지주 3 농촌사업가 이종만씨가 소유토지에 실천
41. 이종만, 위문대 헌금
42. 산금계(産金界)의 대왕(大王) 이종만씨(李鍾萬氏)
- 대동공업주식회사와 대동광산 중앙조합 -
43. 조선제일의 철광상(鐵鑛床) 발현(發現): - 본지 사장 이종만씨의 소유 자성광산(慈城礦山) - 평안북도 자성군(慈城郡) 학성산 (鶴城山) 급(及) 판자봉(板子峰)의 철광상(鐵鑛床)
44. 장진광산(長津鑛山)의 개관(槪觀)
45. 이종만(李鍾萬)씨 위문대대(慰問袋代)로 천원을 헌납
46. 금광왕 이종만의 28전 29기, 실패끝 번돈 세상에 ‘화끈’하게 던졌다
47.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
48. 억세게 운 나쁜 사나이: 28전 29기 끝에 금맥
49. [곽병찬의 향원익청] ‘대동’ 향한 금광왕 이종만의 무한도전
50. 장성운의 이종만
51. 내 꿈은 조선 농촌을 갱생시키는 것이외다
52. 삼성사태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
53. 조선 제일의 금광왕 이종만을 아십니까?
54. 강동원 외증조부 ‘이종만’ 게시 글에 대한 오해와 진실
55. 강동원, 외증조부 이종만 논란 관련 공식입장 사실과 다른 부분 발견
56. 이슈팀, 주목 이종만, "천황을 위해 전장으로 나가 싸우자" 논란 확산
57. '강동원 외증조부'는 친일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58. ‘친일 논란’ 강동원 외증조부 이종만, 그는 노동운동가였다?
59. 이종만(李鍾萬)과 용잠초등학교
60. 강동원 증조부 '이종만', 자진 월북후 애국열사릉에 안장까지
61. 대동교학회 취지서와 인류의 정(正)과 의(義)
62.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자본가 이종만
63. 아까징기에서 금광왕까지 울산사람 이종만
64.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무이한 자본가
65. 경원선 기부왕 이종만을 생각하다
66.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 이종만
67.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의 31전 32기
68. 이종만의 발견만으로도 난 이책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69. 식민지 조선의 투기 열풍속으로
70.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자본가 이종만
71. 사회주의자로 자본가인 이종만, 존경할 만한 부자
72. 남호 이종만 선생을 기리며 –잘못된 집단기억-
제2절 이종만 선생에 관한 북조선의 신문보도와 참고자료
01. 리종만 광산(로동신문 1969년 12월 1일 1면 보도)
02. 지질탐사에서 계속 혁신
03. 리종만 선생의 서거에 대한 부고기사
04. 이종만(李鍾萬) 소개
제5장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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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머리말
필자가 한반도 중립화 통일운동을 시작한 해가 1997년 1월이었고, 이종만 선생(이하 존칭 생략)이 1977년 1월 17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북조선에서 별세했으므로 이종만과 나는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정확하게 20년 동안 시공(時空)의 차이를 두고 공유한 셈이다. 즉, 한반도의 ‘영세중립 평화통일’ 문제는 이종만과 나의 염원과 꿈을 묶어주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한국의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10월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이종만을 친일파로 분류했으나, 북조선은 그를 애국자로 분류하고 ‘애국렬사릉’에 안장했다. 남과 북은 이종만이 살아온 행적에 대해 정반대로 평가하고 분류한 것이다. 남과 북이 이종만을 그렇게 대조적으로 평가한 원인은 무엇이며, 기준은 어데에 둔 것일까?
이 자료집의 편집 목적은 이종만이 살아온 일생에 대한 장단점(長短點)을 평가하거나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남북정부와 학자들이 이종만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고 재평가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는데 초점을 둔다. 그래서 이 책은 이종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자료집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 이유는 현재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고, 북쪽의 자료를 자유롭게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종만에 대한 보다 확실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한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종만에 대한 자료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이를 모아 필요한 자료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한반도의 “영세중립(永世中立)”에 대한 역사를 보면, 근세조선의 고종황제(高宗皇帝)가 1891년 6월부터 조선의 영세중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한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1953년 6월 정전협정 제4조에 명시된 한반도에서 외국 군대의 철수 조항과 관련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국의 중립화를 제안했으나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와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북조선은 ‘영세중립’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중립화’나 또는 ‘비동맹중립’의 용어를 많이 사용했으나 이종만은 “영세중립 평화통일”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북조선의 그러한 환경에서 이종만이 “영세중립”과 “평화통일”의 용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영세중립 평화통일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남순, 2010: 384쪽).
2022년은 이종만의 서거 45주년이 되는 해로 그를 추모하는 포럼이 지난해 4월 15일 처음으로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추모포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종만에 대한 자료가 생각보다 더 많이 산재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종만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상당히 있음을 알았다. 다만 남과 북이 현재와 같이 사상과 체제의 대립으로 이종만을 연구하기가 어려운 정치적 환경에서 연구 학자들이 조용히 연구하고 있음도 알게 된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로 현재로서는 이종만에 대한 자료들이 남북관계의 단절로 인해 자료를 찾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향후 남북관계가 복원되면 더 알찬 자료집이 보강되기를 바란다.
이종만의 활동무대가 일제강점기 금광왕으로서 활동한 기록들이 많고, 또한 해방 후 집필된 논문과 글들도 시간이 경과 됨에 따라 원 필자들에게 자료집 게재 동의를 받기가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설령 이종만에 대한 글들이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외국에 거주하는 필진과 저자들의 접촉도 어려워 그들의 논문이나 글의 게재 동의를 모두 받지 못하고 책을 엮은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다만 이 자료집이 편저자 개인의 이익추구가 아니고, 남북의 이념과 사상의 장막에 가려져 온 이종만의 생애와 사상을 남쪽과 북쪽의 국민에게 소개하는 차원에서 편집된 것임으로 원 필진이나 독자분들의 양해와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이종만에 대한 여러 사람의 필진 들이 쓴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중복된다 해도 원 필진 들의 집필한 입장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중복된 내용을 삭제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소개하는 차원과 염원으로 정리를 했다. 다만 이종만이 직접 집필한 글과 일반 필자들의 글의 내용이 완전히 중복될 경우 이종만의 글을 우선해서 편집했다. 필자들이 한글 맞춤법이나, 두음법칙, 띄어쓰기 등을 모두 무시하고 원 필자들의 글을 그대로 소개를 했다. 이 글의 원본들은 모두가 내려쓰기로 작성되었으나 독자들이 읽기 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이종만의 글 중 한문에는 토를 달았으며, 가로쓰기로 정리했다.
이번에 발간한 자료집이 이종만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향후 이종만의 전기나, 평전, 시나리오, 또는 소설을 쓰는 분들에게 참고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남북정부가 이종만의 생애와 사상을 재평가할 경우 이 작은 자료집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아울러 기대한다. 게재된 모든 글의 일련번호는 편의상 붙인 것이며, 게재 순서는 글들이 쓰여진 시기를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이 자료집의 구성은 제1장 머리말에 이어, 제2장은 이종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1차 자료들이다. 여기에는 이종만이 직접 집필하거나 인터뷰한 내용이 포함된다. 제1절에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이종만이 직접 쓴 글들이며, 제2절에는 북조선에서 이종만이 쓴 글들이다. 제3장은 제1절과 제2절, 그리고 제3절로 구성했다. 제1절에는 일제강점기에 이종만에 대한 국내·외인사의 논문이나 글들이며, 제2절은 북조선에서 이종만에 대한 논문과 글들을 연대순으로 수록했다. 제3절은 앞으로 이종만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당시 중립에 대한 북조선의 국내정치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북조선의 중립정책을 다룬 논문 3편을 게재했다. 제4장은 남북에서 이종만에 대한 보도된 신문 보도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제1절에서는 이종만에 대한 남쪽에서 보도된 신문내용과 참고자료이며, 제2절은 북쪽에서 보도된 신문내용이나 참고자료를 소개한다. 제5장은 맺음말로 자료집 편집과정에서 경험한 부족한 문제와 남북이 하루속히 화해하고 협력함으로써 한반도가 하루라도 빨리 평화통일을 달성하여 이종만에 대한 재평가를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남북정부에 몇 가지 정책을 제언한다.
제2장 이종만의 대동사상 실현과 농촌구제를 위한 활동
제2장은 대동사상 실현과 농촌구제를 위한 활동과 관련해 이종만이 직접 집필했거나, 또는 언론사와 인터뷰한 내용 들이다. 이종만이 쓴 많은 글이 일제강점기에 쓴 것으로 그가 추구하고 실현하고자 한 대동사상 실현과 관련된 글들과 농촌구제 사업을 위한 구상과 활동 내용 들을 정리한 글들이다. 제1절에는 이종만이 일제강점기에 직접 집필한 글들이며, 제2절은 북조선에서 이종만이 집필한 논문이나 그와 관련된 글이다. 모든 글의 게재 순서는 편의상 연대순으로 분류했으며, 아라비아 숫자로 된 일련번호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참고로 붙여진 번호들이다.
제1절 이종만이 추구한 대동사상 실천과 농촌구제를 위한 활동
제1절은 이종만이 설립한 대동(大同) 회사들의 운영과 관련이 있으며, 한(조선)반도에서 대동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과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농촌과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활동을 통해 농촌의 이상향 건설을 위한 활동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01. 生業(생업)에 奮鬪(분투)하자(권두언)
이종만(李鍾萬)
우리사회가고대의 채취경제로붙어 생산경제에로 발전하여온과정은 專(전)혀 자연과 싸우고 자연을 정복한 전투사이다. 인간이자연에대하야 아주무력하고 자연에게 지배되든 태고시대에 극히저하 하던 생산력은 一旦意識的(일단의식적)으로 자연을 정복하기 시작하기붙어 장족으로 발전하야 금일의 찬연한 물질문명을이루었다. 그럼으로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농업이나 광업 등 생산업은 한전투(戰鬪)이오 그 작업장은 한전장(戰場)이다. 농업에잇어서 수십리 내지 수백리의 제방을 싸어서 횡류범람하는 홍수를 제어하고 강을 막고 산을 뚤러서 수로를 개통하야 한해(旱害)를 막는것 등이 모다 자연을 정복하는 전투이다. 광업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야 폭약으로써 암석을 발파하야 지하 수백 수천척(尺)을 들어가서 거미줄 같이 종횡의 갱도를 뚤고 험산과 밀림을 개척하야 도로를 만드는 것등이 역시 자연을 정복하는 전투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는 서로 이해충돌되는 때에 외교전이 이러나고 무역전이 이러나고 이권전(利權戰)이 이러나고 심지어 총검으로 상견(相見)하는 무력전이 이러난다. 국제간의 전투에는 국민 전체의 긴장, 견인(堅忍), 분려(奮勵) 등 정신과 열의를 철저히 요구하는 것이다. 농업이나 광업 등 생업의 자연과의 전투는 그 대상 성질 방법 규모에 있어서 국제간의 전투와 전연 다르다하더라도 그것을 정복하기 위하야 종업자의 긴장, 견인, 분려 등 정신과 열의를 필요로 하기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정복에 승리하야 목적한바의 성공을 얻기 위하야는 일상으로 전시에 처하고 전장에 나가는 기분을 가지지 않아면 않되는것이다.
종래 우리 조선에서 모든 사업이 중도에 좌절한원인을 찾어본다면 물론 그 중에는 의외의 장해와 계획의 불철저로 인한것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대부분은 일이 조곰만 호조(好調)를 띄여 나가면 기분이 풀리고 안일을 탐하야 일왈(一曰) 굉장한 가옥신축 이왈(二曰) 빈번(頻繁)한 유흥, 삼왈(三曰) 신사적 행세로써 일을 시작하던 당초의 열의를 상실하는 것이 그 주요 원인이다.
또한가지는 외우식이내환생(外憂息而內患生)이라는 격으로 일에 긴장 미가 풀리고, 열의가 냉각됨으로 인하야 한 기관안의 종업자 사이에 지위와 세력의 다툼이 생기고 무의의(無意義)한 지반구축공작이 생겨서 상호배격하다가 필경 그 기관을 망치는 일이 적지 아니하다. 무슨 기관이 하나 생가면 벌서 내홍(內訌)이 뒤를 따라 일어나는 것은 통폐(通弊)요 고질이다. 만일 개인 개인이 그 담임한 일에 충실하야 열의를 가지고 오직 일념이 사업성취에 있다면, 어느 겨를에 지위와 세력다툼을 할수있을것인가. 결국 이런 불미한 다툼도 비분이 이완되고 열의가 냉각된 틈을타서 일어나는 것이다.
또한가지는 우리 조선인은 일반으로 능률이 저하되어 있다. 조선인 광부는 선진제국의 광부에비하야 그 능률이 3분의 1밖에 되지 안코 조선인도 내지(內地)같은 곳에 들어가서 수삼년간 근무한사람은 역시 내지의 직공과 동일한 능률을 낸다고 하며 농민도 그러하야 조선인 농민은 선진제국의 농민에비하야 긴장한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한다. 대체 조선환경은 유한완만(悠閒緩慢)한 곳이라 우리 과거에 문명에 빠저서 큰 도포입고 팔자거름을 것고 서행(徐行) 후장자(後長者)로 행세하던 습관이 아직도 청산되지못하야 분투적 의식이 결핍하게된것이다.
우리의 종사하는 모든 생산업이 한전투인 이상 우리는 일시일각이라도 긴장, 견인, 분려 등 정신을 잃어버려서는 않된다. 그러한 정신을 일허버린다는 것은 즉 능률의 저하와 생산의 감퇴를 의미하는것이다. 더욱이 광산같은곳은 다수의 종업원을 사용하는곳이다. 종업원 전체가 혼연일체되야 광산정복에 총동원하지 않하면 않되는것인데 만일 광부에 대한 대우가 박하든가 광주(鑛主)가 광산의 이익을 독점한다거나하면 마치 전장에 나가서 모든 대우가 장교에만 후하고 병졸에게 박한때 사기가 부진하는것같아서 도저히 소기의 성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생업전투의 승리는 긴장, 견인, 분투의 정신을 최대한도로 발휘하는 자의게만 귀(歸)할 수 있는 것이요 종업원의 그러한 정신의 진작(振作)은 오직 노자(勞資)가 일체 되어야 동감동고(同甘同苦)하고, 명랑한 기분으로 작업하는데 만 있는 것이다. (이종만, “생업에 분투하자”『광업조선』(1937. 01. 01, 2-3쪽).
02. [成功家 諸氏의 鑛山經營祕訣公開] (1) (성공가 제씨의 광산경영 비결공개):
나의 鑛山(광산)은 이러케? 勞資協調(조자협조)의 精神(정신)으로 한다
이종만 인터뷰
내가 鑛山(광산)을 었떻게 經營(경영)하는가 하고 무르신데 對(대)해서 簡單(간단)이 말슴하고저 합니다. 내가 鑛産業(광산업)에 從事(종사)라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鑛(광)이란 참으로 容易(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惑(혹) 鑛山(광산)에서 成功(성공)하였다면 흔이 말하기를 운(運)이 좋와서 성사(成事)되었다고 하는 것을 뜻임니다. 鑛山方面(광산방면)에 모든 일을 자서히 모르는 분이면 그리 生覺(생각)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로서 볼때에는 運一分(운일분)에 努力九分(노력구분)의 比例(비례)라고 볼 수 있을 넌지요. 努力(노력)의 두 글짜는 人間社會(인간사회)에 있어서 가장 神聖(신성)한 字句(자구)입니다. 이 字句(자구) 中에는 忍耐(인내)도 드렇고 誠意(성의)도 드렇고 血汗(혈한)이 뭉처들어 있습니다. 어느 일에나 努力(노력)없이 되는 일이 단 한가지라도 있겠습니까? 이 字句(자구)를 언제나 腦裡(뇌리)에 색여두고서 每事(매사)에 일을 始作(시작)합니다. 普通金鑛(보통금광)을 經營(경영)한다는 분들을 본다면 돈을 몇 百圓(백원) 몇 千圓(천원) 드려서 二三鑛區設定(이삼광구설정)이나 해 놓고 서울다가 집은 두고서 안방에 드러누어서 몇 百里(백리) 몇 千里(천리) 밖게 있는 金鑛(금광)에서 언제나 노다지가 나올가? 하고 生覺(생각)을 하고있는 方式(방식)의 經營法(경영법)으로는 아모리 좋은 山(산)을 가젓드라도 成功(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金鑛(금광)은 시골서 하는데 一年(일년)에 열 한달은 서울서 안방 身勢(신세)나 지고 있는 京城駐在式 金鑛經營(경성주재식 금광경영)은 努力(노력)이 있다고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卽(즉) 그 態度(태도)는 남이 돈을 번다니가 或時 運數(혹시 운수)가 좋와서 벼락 富者(부자)나 될줄 알고 되어도 좋고 안되어도 좋고 되는대로 냈처두고 일보는 사람이 시골 서울로 쪼차단이면서 하는 報告를 밧고만 있는 鑛主(광주)는 전여 成功(성공)치 못할 줄 압니다.
몇 千鑛區(천광구)를 가졌든지 단한곳에 鑛區(광구)를 가졌든지 自己自身(자기자신)이 발벗고 나서서 망치를 들고 일도 하며 直接監督(직접감독)도 하여야 되겠다는 生覺(생각)으로서 나는 直接勞働(직접노동)을 하고 있음니다. 이것은 效果(효가)로서도 좋은 것이고 硏究(연구)가 되는 것은 勿論(물론)이오 鑛業家(광업가)로서 一生(일생)을 마친다던지 成功(성공)을 하려는 분은 다 必要(필요)할 줄 압니다. 必要할 줄을 뻔연이 알면서도 實行(실행)을 못하는 것은 努力(노력)과 誠意(성의)가 없다고 볼 수 밧게 없습니다. 내가 經營(경영)하는 山(산)에서는 내가 直接(직접) 일을 하는 까닭 인지모르지만 或(혹) 그 關係(관계)도 있겠지요. 全員(전원)이 一致(일치)하야 明明(명명)한 氣分(기분)으로 일을 하게 됨으로 自然(자연)이 能率(능률)이 나는 줄도 압니다.
그리고 鑛山(광산)에서 일을 하는데 能率(능률)이라는 것에 第一效果的(제일효과적)이고 産金增進(산금증진)의 原因(원인)이 되는 것은 資金支拂問題(자금지불문제)입니다. 첫재로 勞働(노동)하는 분들이 피와 땀을 내며 일을 해 주는데 對(대)하야 一定(일정)한 날 못주게 된다던지 延期(연기)를 한다던지 또는 심지어 주지 못하는 곳도 없지 안어 있음으로 全(전)혀 그 目的(목적)으로 勞働(노동)을 하는 그네들에게 勞働資金(노동자금)이 싯그럽게 되면 해도 그렇게 신통할게 없으려니 하는 生覺(생각)으로 作業(작업)을 시들스럽게 알게 됨으로 誠意(성의)가 안나게 되고 誠意가 나지안음므로 能率(능률)이 나지 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만으로도 좋게지만은 한 사람 두 사람 가버리게 되면 그 所聞(소문)이 나서 鑛夫(광부)를 차즐수 없게 됨으로 能率問題(능률문제)는 둘째로 치고 일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點(점)에 對(대)하야서 우리 鑛山(광산)에서는 規律(규율)있게 一定(일정)한 날 꼭꼭 支拂(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妻子(처자)를 거느린 그네들도 홧김에 술을 먹는 일도 업고 일에 對한 誠意(성의)도 나고 愛着(애착)도 나고 趣味(취미)를 가지도록 됩니다. 그리고 우리 鑛山(광산)에 特性(특성)인 것에 하나인 勞資協調(노자협조) 이것입니다. 全從業員(전종업원)에게 利益(이익)의 절반을 分配(분배)합니다. 이것은 勞資協調의 根本精神(노자협조 근본정신)으로 第一重大(제일중대)한 것에 한 가지라고 生覺(생각)하고 實行(실행)합니다.
鑛山(광산)에서는 全的生産(전적생산)을 技術的(기술적)으로 할수밧게 없으며 探鑛(탐광)은 積極的(적극적)으로 하여야 되겠습니다. 朝鮮(조선)에는 坊坊谷谷(방방곡곡)에 鑛山(광산)이 雨後竹筍(우후죽순)같이 없는 곳이 없으리만치 있습니다. 勿論(물론) 대자본을 가지고 하는 곳도 만치만은 大部分(대부분)은 極(극)히 적은 資本(자본)을 가지고서 하고있는 것입니다. 가령 한 곳에 鑛區(광구)를 我見(아견)해서 作業(작업)을 하다가 成績(성적)이 不良(불량)하다면 그때까지 일을 하든 것만이 損害(손해)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님니가. 제 生覺(생각) 가타서는 分散式(분산식)으로 各自(각자)가 따로따로이 하는 것보다 組合式(조합식)으로 서로 힘을 合(합)처서 大大的(대대적)으로 일을 한다면 여러 곳에서 失敗(실패)를 한다고 하드라도 單(단) 한곳에서는 成功(성공)만 하면 個人的(개인적)으로 한 곳만 하다가 그만두는 것보다는 나을줄 압니다. 우리 鑛山(광산)에서는 大大的(대대적)으로 着手(착수)합니다. 그리다가도 成績良好(성적양호)한 곳을 發見(발견)하면 소소하게 한 곳만 가지고 한다는 것보다는 났게 되는 까닭에 探鑛(탐광)에는 積極的 努力(적극적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會社(회사)에서는 勞資協調(노자협조)의 情神(정신)을 그대로 實行(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야 全利益(전이익)에 半分(반분)을 全從業員(전종업원)에게 고루고루 分配(분배)하고 잇습니다. 앞으로는 具體的(구체적)으로 말슴하겠기에 우선 대강으로 말을 합니다(文責在記者: 문책재기자) (『농업조선』 제2권 제10호 1937.12. 36-37쪽).
03. 大觀(대관)하자(권두언)
이종만
우리가 무슨사업을 하던지 무슨 활동을 하는 것은 궁극에 있어서 잘 살어보자는 것이다. 농장, 광산 등 영리사업이 던지 교육문화 등 사회사업이 던지를 불문하고 모다 자기를 위하고 자기의 잘살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평면적으로만 본다면 사회사업가가 공익을 위하야 모든 노력과 많은 재산을 사회에 바치는 것은 그 본의가 전혀 자기를 희생하고 사회를 위하는 것이요 결코 자기 개인이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입체적으로 본다면 그를 사회사업가가 사회를 위하는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특수한 예를 除(제)한 외에는 자기를 전연 희생하고 오직 사회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도로혀 보다 더 크게 보다 더 잘 살기 위하야 사회사업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요, 사회사업가 자신으로서도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가면이 없고 진실미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영리사업 즉 사회사업이 되고 말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물론 농민이 농사를 지어서 생산이 증가되는 때에 사회도 따라서 부유하게 되야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일치되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나, 영리사업과 사회사업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으니 즉 양자가 함께 자기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면서 그 방법에 있어서 착안하는 판국의 대소가 다르다. 안국(眼局)이 적은 사람은 자기 개인의 안전이익만이 보이고, 자기가 소속하여 있는 사회의 사정이 자기에게 어떠한 영향을 및이는 것 같은 것은 전혀 안계(眼界)에 들어오지 아니함으로 소위 모든 활동이 오직 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중심하여 행하게 되는것이요, 그렇지 않는 사람은 자기 개체를 보는 동시에 또한 자기가 소속하여 있는 사회를 본다. 그리하야 그들은 원칙적으로 사회 전체가 행복하고 평화하여야 한다. (이종만, “대관하자” 『광업조선』 제2권 제10호(1937.12.) 2-3쪽).
04. 農業(농업)의 合理化(합리화)
이종만
조선은 기후풍토가 좋아서 농사에 적당한 곳이다. 다시 말하면 천혜를 많이 받은 농업지이다. 그러나 조선의 농업생산은 다른 선진국에 비교하야 뒤떨어져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농업기술의 계몽기에 있는 만큼 아직 토지의 생산력을 충분히 발휘시키지 못하는 것, 잉여노력의 안배가 잘 되지 못해서 농가 수입의 저하를 보고있는 것 등, 참으로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는 터이다.
금후 이러한 방면에 있어서 심오한 연구와 부단한 노력을 다하야 토지 생산력의 증진과 작업능률의 향상 급 농업의 과학적 경영을 행하면 정말 이상으로 훌륭한 농업국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농촌의 미화와 아울러 西瑞以上(서서이상)의 농원지대화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일즉부터 당국에서도 이에 대하야 제반시설과 연구를 하고 있으나 우리 각자는 더욱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내집은 물론이요 내 마을을 충실히 하며 이상화하기에 노력을 아껴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조선인구의 대다수는 농민이요 조선산업의 중추도 농업이므로 농민자신이 각성하야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일보일보 개척하여 나아가서 天賦(천부)의 농업조선을 사해에 자랑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종만, “농업의 합리화” 『농업조선』 제6호 제6월호, 1938. 06. 7쪽).
05. 朝鮮(조선)은 農業適地(농업적지)
이종만
조선은 대륙에 접속된 반도로 기후풍토가 농업에 適宜(적의) 한다. 이러한 천혜의 地(지)임으로 일즉이 과학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 있어서도 종래의 영농법으로 능히 식량문제를 해결하여왔다.
근래에 이르러는 錦上添花(금상첨화)로 그 풍부한 자연요소 우에 고도의 과학을 응용하야 영농방법을 일신한 결과 각종농산물을 년년 증가의 일도를 시하야 昭和(소화) 11년의 조선농산액은 실로 12억 8백여만원에 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농사에는 개량을 가하여야 할 것이 많고 또 각지에는 아직 농경지로 가능성이 있는 미간지가 상당한 면적에 달하야 농경지의 부족을 완화할 여지를 다분히 남기고 있음은 주목할 바이다.
이러한 현세에 감하야 농민급 관계방면에서는 더욱 일치협력하야 天賦(천부)의 농업조선을 앙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종만 “조선은 농업적지” 『농업조선』 제7호 제7월호, 1938. 07. 7쪽).
06. 農夫(농부)의 功勞(공로)
이종만
농부의 공로를 생각하여야 된다. 누구나 아시는 바와 같이 생활의 삼대요소는 의식주인데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나 의복을 입을 때나 안주할 가옥에 들어갈 때에 반드시 이것이 누구의 덕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의식주의 자료중에는 그 어느 것이 농부의 노력한 핏땀의 결정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자고로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 공로를 져버려서는 안되며 나아가서는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여야 될 줄 생각한다. 그 보답의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피폐한 농촌을 윤택히하며 빈약한 농민을 여력있는 대로 도와서 그 생활을 향상시키기에 성심을 다하야 조선 전체를 이상적 농업국으로 만드는 것이 적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나라를 물론하고 특히 식량문제는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는 전혀 농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는 일로 세계 제국이 농경에 힘쓰고 있는 것도 이당한 일이다.
현하 열강 중에는 식량에 대한 脅威(협위)를 받고 있는 나라도 없지 않아서 그것이 국민생활의 피폐를 유치하는 원인이거든 丁抹(정말)과 같은 나라는 소국이지만 세계적으로 모범이 되는 농업국이어서 국부민안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 식자는 모름즉이 농민의 공로를 깊이 인식하야 농민을 돕고 농촌을 이상화하기에 힘을 앗껴서는 안되리라고 생각한다.(이종만, “농부의 공로” 『농업조선』 제8호 8월호(1938. 08. 7쪽).
07. 農民(농민)의 生活(생활)
이종만
“봄에 갈고 여름에 김 맬때에 밭 가운데 떠러진 땀의 괴로움도 추수단을 안고나니 기뿐 생각뿐이로다. 5월농부 8월선 인간의 사는 맛도 때를 따라 다르고나 자연과 협력하야 없는 열매 맺게 하니 신성하기 짝이 없다. 향기조흔 신도주와 보기조흔 송편송이 함포고복 먹고나서 풍년가를 불러보자” 조선의 농민이여 각오가 잇는가? 건재한가? 우리는 농부를 본받아서 노력의 결정으로 곳곳이 열매 맺어 기쁘게 살아가자.
(이종만, “농민의 생활” 『농업조선』 제9호 9월호(1938.09.01.), 7쪽).
08. 共存共榮(공존공영)
이종만
기생충이 되지 말고 벌과 같이 규율 있고 근엄한 생활을 합시다.
우리집 정원에는 낙엽송 삼번과 과실나무와 화초가 있습니다. 그런데 낙엽송 삼번 중에는 제일 크고 조흔 두 그루가 하나는 하부가 마르고, 또 하나는 기엽이 쇄약하여짐으로 나는 매일같이 그 원인을 조사한 결과 드디어 病原(병원)을 발견했습니다. 하부가 마른 나무는 근상 중요부에 소혈이 있어 백색가루가 나오므로 다시 조사해본즉 그 구멍속에는 白身黑頭(백신흑두)충이 있었고, 지엽이 쇄약한 나무를 검시한 즉 지피속에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벌레가 무수히 있었습니다. 나는 이 해충을 날마다 열심히 구제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어서 드디어 두 나무는 말러 죽어버렸습니다.
나는 이 조그마한 예를 가지고 우리 인간사회에 비취어보았습니다. 나무의 해충뿐이 아니라 일을 겨을리 하며 무질서 방종한 생활을 하면 사회를 해하는 해충에 다름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다시 새삼스러히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생충이 되지 말고 규율 잇고 근엄한 벌의 생활을 본받읍시다. 우리 정원의 낙엽송 두 그루가 그렇듯 참화를 입었음에도 과실나무와 화초에는 벌들이 모혀 와서 화밀을 취하는 동시에 이꽃의 화분을 저꽃에 저꽃의 화분을 이꽃에 매개 교배하야 훌륭한 결실을 맺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자신도 잘 살고 결실도 잘 맺게 하는 그 공존공영의 실적이야말로 우리의 본받아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이종만, “공존공영” 『농업조선』 제10호, 10월호(1938.10.) 7쪽).
09. 자력(自力)으로 살어보자
이종만
자력으로 살어보자는 警句(경구)는 자고로 여러賢人(현인)들이 혹은 정치상, 혹은 종교상 그 밖의 온갖 방면에 가지가지 표현으로 세상을 일깨어온 말씀이려니와 더욱이 오늘날의 이 비상시국에 있어서는 새삼스리 더 절실하게 느끼어지는 시국의 표어가 되어있다. 그러므로 귀에 젖은 이 말씀을 또 되풀이함은 듯는 이로 하야금 하품을 자어내게할런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千萬(천만)번되풀이하더라도 진리는 진리대로 攝取(섭취)해서 물리지 않는 것일뿐더러 같은 한 진리를 표현하더라도 때에따라 사람에따러 각각 맛도 달고 빛깔도 다르며 좇아서 감응의 힘도 다르다 할 것이다. 어떤道人(도인)의 갈파한 말을빌어 진리를 과실의 씨라고 하면 그 詮表形式(전표형식)인 인격의 취미는 씨를 사서 이것에다 甘香(감향)한 생명의 운김이 서리게 하는 살과 같다고나 할까. “자력으로살어보자” 나는 또 나대로의 체험을 통하야 이 말씀을 한번 다시 阮味(원미)해보려한다.
때는 십수년 전 내가 서울 동문 밖 苦學堂(고학당)에 관여하고 있을적의 일이다. 小廣橋(소광교)로 지내다가 시장긔를 참을 수 없어 그 근처 호떡집에 들어가 호떡 한개로 창자를 채우고 일어서려 할제 맑은 曩槖(낭탁)에 分錢(분전)도 걸리지아니하야 짐즛 한배 아니엇지만 무전취식의 혐의를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야 하는 수 없이 칠원 오십전 也(야)의 만년필 하나를 볼모로 맡기고 간신히 봉변을 면하였거니와 이만한 은택도 好老爺(호노야)의 특별한 호의가 있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면 어떠면 젊은 掌櫃(장궤)의 억센 주먹을 뿌리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돌아서 나오려니 두 발이 천근만근이다. 지향도 없이 가노라는 데가 縱南山(종남산), 오르기 몇 시간이엇든지 발을 멈추니 萬戶長安(만호장안)이 一眸(일모)에 나타난다. 高樓巨廈(고루거하)가 櫛比(즐비)하게 널려있는 저 가운데 동분서주하는 人(인)총들의 그림자가 눈앞에 그려진다. 사람의 사는 길도 가지각색이요 그들의 누리는 分福(분복)도 또한 參差(참차)하다. 그러나 두어라. 그들의 일이야 어찌되었든 나의 살아온 길을 돌이켜 생각하니 都是(도시) 잘못된 것이 가심에 사모친다. 그렇다. 나는 잘못 살어왔다. 가지랴고 가지랴고 무엇을 애써왔던 것인가. 내가 지금의 一物(일물)도 가지지 못한 것은 결국 가지랴는 욕심이 앞섰던 까닭이 아닐까. 내가 가지지않해도 내 눈앞에는 만물이 스스로 배포되어 있고 있는 물건치고는 하나도 사람의 노력을 사양해 물리치지 않는다.
자연의 보고는 눈앞에 보이지안는가. 인간이 아무리 貧(빈)내보아도 또 가져보아도 그 無盡藏(무진장)의 보고는 덜럴리(理) 만무하다. 탐내기 전에 우리는 먼저 노력하자. 자연과 더불어 자연에 향하야 우리의 있는 힘을 다해서 일하는 것이 우리의 살어갈길이 아닐 것인가. <하로해 저물도록 봄찾어 헤매어도 어듸매 숨었는지 만날 길 없던 봄이 어이타 한가지 끝에 무르녹아 있는고. <盡日尋春 不遇春 春在枝頭 己十分>(진일심춘 불우춘 춘재지두 기십분)> 캄캄하게 잠겨있든 내 마음은 갑자기 광명을 맞어 열리어 기쁨이 넘치엇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새로 살어난 그 기쁨이었다.
「오, 대우주여, 당신에게 調和(조화)하는 것은 모다 나에게도 조화한다. 당신에게 알맞은 때는 또 나에게도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다. 오, 대자연이여, 당신이 사시로 철 맞추어 맨들어 내는 것은 모다 또 내 것이다. 만유는 당신에게서 나오고 당신에게 맡기어지고 또 당신에게로 돌아간다. 오, 아름다웁고나, 하나님의 都邑(도읍)이여」 나는 맨날 羅馬(라마)의 철인의 부르던 창가를 이날 縱南山(종남산) 위에서 和唱(화창)하고 십었다. 한 물건도 가지지 못한 나였으나 이제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萬有(만유)를 다 갖게 되었다. 자연은 우리의 노력을 기다리고 있다. 한울이 믿고 만인이 믿어줄 만치 우리는 노력하자. 한울이 물건을 맨들어 내일때에 무삼 慾心(욕심)이 있으리오. 우리 인간들의 노력도 또한 욕심없이 나타내지 아니하면 안된다. 여긔서 우리는 한울과 함께 일하는 느꺼운 기쁨을 누리며 한울이 四時(사시)로 철맞추어 맨들어내는 것을 내것으로 가질 수 있는 만족을 품게도 된다. 우리는 가지고 싶은 욕심을 내기 전에 일하고 싶은 發心(발심)을 하자. 이리하야 우리는 남을 믿지도 말고 怨妄(원망)도 말고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하야 노력하자. 이러므로써 우리는 비로소 新生(신생)의 기쁨을 나눌수있는것이다.(이종만, “자력으로 살어보자” 『농업조선』 제11호/12호 합본(1938. 11./12.), 8-9쪽).
10. 訥言閔行(눌언민행)
이종만
無漢三鎭(무한삼진)의 함락을 계기로 하야 장기건설의 위업이 때마침 시작된 이래 우리는 처음으로 신춘을 맞이하야 동아신질서에 대한 빛나는 희망과 국가 총동원 하의 뽐내는 의기가 스스로 가슴에 넘쳐온다. 이 희망이 의기로써 우리 농촌도 또한 오는 일년을 맞이함에 당하야 우리의 걸머진 임무의 중하고 또 큰 것을 돌이켜 재인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곳 식량, 피복, 연료 등의 군수품과 및 국민생활 필수품 등의 생산확충이 장기건설 전시체제하에 있어서 얼마나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기계화 해가는 근대적 산업에서 엄청나게 낙후된 농업국은 그중에도 봉건적 잔재가 케케로 싸힌 조선의 농업부문에 있어서는 가지가지로 개혁할 점이 많은 중 오늘의 장기건설기에 들어서는 농촌개혁이 초미의 급무로 나타나지 아니할 수 없다. 부족한 식량을 충실케 하자, 부채를 근절시키자, 현금수지의 균형을 도모하자, 이와같이 농촌갱생의 표어가 작금 육칠 년 간에 고조되어 그 실현방법으로는 全家(전가)근무, 소비절약, 생활개선 등의 주력해온 터이지만 한옆으로 用心(용심)과 훈련에 幾多(기다)의 결함을 내포한 인적 관계가 게재할 뿐 아니라, 또 다른 한편으로는 비료, 농구, 기타 일상생활품의 시가가 농산물의 시가보다 오히려 더 앙등해오는 물가의 영향이며 화폐가치의 하락에 따러 換物(환물)의 傾向(경향)이 농후해진 결과로부터 오는 地價(지가)의 등귀 등으로 말미암아 一面(일면) 자작농 創定計劃(창정계획)이 실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는 소작농의 수가 依然(의연)히 증가되어 갈 뿐으로 농가의 궁상은 救治(구치)될 길이 막연하다. 우리의 농촌은 평시에 있어서도 거의 숙명적으로 보이다싶이 불운 중에 헤매여왔지만 더욱이 전시체제의 국민경제로 들어와서는 농업생산 수산의 조달이 거북하게 되는 동시에 중공업 급 광업방면의 편중한 발달로 인하야 농업노동력, 그중에도 남자의 노동력이 이 방면으로 빼앗기는 경향이 갈수록 더해간다. 그리하야 농업생산력에 적지 않은 이상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경작자의 보호와 농업생산력의 증진이 여러방면으로 시급하게 희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의하게 실현되지 못함도 또한 추측하기 어렵지 안타.
그러나 상술함과 같이 장기건설단계에 들어서 농업부문의 임무가 다른 산업부문의 그것에 비하야 못지않게 중하고 큰 것을 인식할 진데, 좀더 근본적으로 농촌개혁의 노력이 나타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물심양면으로 전력을 경주하야 경작자 자신으로서 갱생의 일로를 찾아갈 것은 물론이어니와 다른 한편으로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지도기관의 합리적 정비통일과 책임자들의 농민생활에 즉한 성의있는 지도로서 하는 동시에 계급적 이해의 대립보다도 대국적 존영의 일치를 앞세워 시국으로 일한 희생의 均擔(균담)과 생산력 증진에 대한 적극적 관여에까지 이르는 지주층의 각성에 있다. 이와같이 경작자와 지주, 그리고 지도기관 등 삼자가 한 덩이로 뭉치어 긴밀한 보조로서 농촌진흥에 협력하지 않고는 우리의 농촌은 우리의 궁상을 면할 길이 없을뿐더러 나아가 장기건설에 대한 所與(소여)의 임무를 다하기 어려울 것이다.
농촌문제를 들어 말하는 자가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 대책의 나타난배 또한 훌륭한 것이 없지 않다. 그러나 말로나 안으로만 농촌이 갱생될 리 만무하다. 한걸음 나아가 지도 지관으로 이미 베풀어있는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형식적 지도자만으로는 효과를 들기 어려울뿐더러 기관이 많을수록 도로혀 기관 상호간의 마찰까지 일으키어 소기의 효과를 상쇄하는 결과까지 나타내인다. 그러므로 말보다는 행실이 귀하고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한 것이다. 농민은 비록 고루하나 단순한 일면이 있으니 이상의 말한 데 어덴들 통용 안 되리오마는 농촌문제에 있어서 더욱 적절하게 느끼어지는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사람이 믿고 하늘이 믿도록 묵묵한 가운데 말보다 행실을 앞세워 부지런히 노력해보자. 그러므로써 자연은 우리에게 응대하고 우리는 또 자연의 여택을 힘입게 된다. 장기건설기에 들어 우리는 농민이나 지주나 또는 지도자들이 다 함께 이 점에 유의하기로 하자. 연구에 생각나는 눌언민행의 이 한마디로써 오는 일년을 맞이하기로 한다(이종만, “눌언민행” 『농업조선』 제2권 제1호(1939. 01.), 8-9쪽).
11. 經濟(경제)와 節約(절약)
이종만
經濟(경제)라는 말이 經國濟民(경국제민)의 정치적 經綸(경륜)을 가리켜 쓰이기도 하지만 治家(치가)의 準則(준칙)이라는 의미에서 節約(절약)으로 轉用(전용)되는 예도 없지 않다. 前者(전자)는 支那(지나) 고대로부터, 後者(후자)는 希臘(희랍) 고대로부터 각기 출처를 달리하나, 경제는 크게는 국가정치의 토대를 이루는 동시에 적게는 一家(일가) 生計(생계)의 柱礎(주초)가 되는 점에 있어서 두 가지 의미가 함께 타당하게 보인다. 경제의 정확한 意義(의의)는 그 길의 학자의 설명을 기다릴 바이므로 여기서 이를 규명코저 아니하나 오늘날의 비상시 경제에 있어서는 경제해야 다시 말하면 절약해야 우리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상식적 견해에서 절약 곧 경제로 후자의 용례를 한번 玩味(완미)하고 싶다.
동양의 어떤 先賢(선현)은 分度(분도)경제를 제시하여 절약의 準則(준칙)을 말하였다. 자연을 보아라. 일년 사계(四季)에 春夏秋(춘하추) 三季(삼계)는 만물이 生(생)하고 長(장)하고 實(실)하다가 冬(동)에는 藏(장)하지 않는가. 冬臧(동장)한 種子(종자)는 明年(명년)의 生長(생장)을 약속함이다. 1일의 24 시간중 인간은 하룻밤의 6 시간의 安眠(안면)으로써 다음날 18시간의 활동을 약속할 것이라고 갈파한 동시에, 경제적 방면으로는 그 수입의 4분의 3으로써 생계를 세우고 나머지 4분의1을 저축하여 앞날의 생활의 기초를 만들 것이라고 계시한 것이 곧 분도경제의 골자이다. 어떤 자에게 있어서는 그 수입을 통털어 4분의 4를 다 가지고도 오히려 기아를 면치 못하는 경우도 있으리라. 그런 경우에는 분도경제가 현실성 없는 먼 얘기일 수 있으나 그러나 우리가 사회의 전체를 들여다 볼 때는 節儉(절검)저축의 분도경제가 있음으로써 도리어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이웃 사람들을 구출할 방도가 열릴 것이다.
사치와 낭비는 오늘날의 商工(상공)중심 사회의 특징이다. 유행, 사치, 그리고 가지가지의 낭비를 조장함으로써 상공업자의 배를 불리고 있다. 그러나 원료생산을 주로 하는 농업자는 상공업자에 대하여 사치와 낭비의 희생으로 날로 退嬰(퇴영)빈궁해가지 않는가. 농업의 생산규모는 옛이나 지금이나 별반의 진보된 자취를 느끼기 어려움에 반하여 농업자의 생활양식만은 隔世(격세)의 감을 주고 있다. 아리랑 가요를 빌 것도 없이 자동차 기차가 통하는 곳에 농민의 생계는 窮(궁)해진다. 이 어찌 심상히 간과할 바이냐.
원료생산을 담당하는 농민이라고 해서 원시생활을 강제함은 아니다. 요점은 생산은 원시적이면서 생활은 현대적 사치에 흐르는 모순을 밝힘에 있다. 그러므로 첫째는 어찌하면 농업의 생산방식과 그 규모를 과학적 규모 위에서 개량확충하여 다른 산업과의 경쟁에 낙후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가 급한 일인 동시에 그 다음에는 이러한 여유를 만들기 위하여 자기반성에 입각한 생활계획의 수립을 요구한다. 營養(영양)은 반드시 美食(미식)에 있지 않고 保溫(보온)은 오로지 비단에 한하지 아니하며 享樂(향락)도 또한 도시를 본받을 바 아니니, 생산은 자연의 옛 껍질을 벗기를 꾀하고 생활은 도리어 자연의 품속으로 친해듦을 바란다. 이러한 의미에서 절검저축이 농가경제에 얼마나 절실한 실제적 요구인가를 느낀다.
全家(전가)노동, 소비절약, 생활개선 등 갱생의 요체는 이미 귀익게 들어온 바이지만 이것을 실현하기에는 아직도 요원하다. 그 실현에 있어서 위정자의 지도감독의 크게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으나 그보다는 더욱 긴요한 것은 농민자신의 각성으로부터 일어나는 자치적 노력에 있다. 자치적 노력이 결여한 경우에는 제3자의 지도감독이 도리어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도감독의 요령은 오히려 자치적 노력을 환기시킴으로써 족한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농가 교육의 급함을 깨닫는다. 일부 부락지도자 一人(일인)의 양성은 목표를 각도 1개소의 단기 농어민훈련소 설치계획과 아울러 3개년 계획으로 각 郡島(군도)에 농어민 가정지도의 부인(婦人) 촉탁(囑託)을 배치할 계획을 금년부터 실시할 예정이 있음도 얼핏 들은 바이지만, 노인은 노인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또 주부는 주부대로 마을마다 지도할 기회를 자치적으로 만들진대 농촌의 계몽도 머지않아 달성될 것이다. 저 丁抹(정말)농촌의 발달이 기실 국민교육에 연유함이 많음을 생각할 때에 더욱 교육의 필요를 절감한다. 丁抹(정말)에 있어서 의무교육의 실시는 벌써 백년 이전의 일이요 국민고등학교에서는 매년 8천명 이상의 중견 남녀를 양성시키고 있음을 생각할 때에는 丁抹(정말)농촌의 발달이 어찌 우연한 일일 것인가. 조선에 있어서는 초등교육의 의무제나마 언제나 실현될 것인가.
농촌의 비상시는 요즘에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니요 벌써 현대문화에 접촉되던 때부터 나타났다. 생산기구의 본질적 침체와 생활양식의 급격한 변혁이 가져오는 모순과 아울러 지도기관의 不備(불비)가 농촌의 退嬰(퇴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는 이 모든 원인을 깊이 반성하여 많이 일하고 줄여 쓰면서 자치적 갱생의 길을 취하기로 하자. (『농업조선』제2권 제2호(1939. 02.), 8-9쪽).
12. 不變性(불변성)
이종만
세상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황금의 가치는 먼저 그 불변색에 있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가치는 그 무엇에 있는가. 이것은 물론 새로운 논의가 아니다. 새롭지 않은 것이 등안시 해도 좋다는 이유가 될 리는 없을 것이다. 再思(재사), 再考(재고), 이것처럼 튼튼하고 믿음성 있는 것이 별로 드물줄 안다.
묻건데, 사람 사람이 각자로 자신을 돌아볼 때, 자기야말로 애초에 잡었던 純一(순일)한 자기를 변치 않고 찾어오노라 단언할 이가 몇이나 될까.
虛慾(허욕)에 가루질리기 쉽다는 것이, 곧 자기의 순일을 장담치 못하는 인생의 큰 결점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이해타산에 밝은 것이 또한 사람의 장점이라 한다. 이와같이 타산이 밝은 인생으로서 한갓 허욕을 이기기 못하야 생의 가치를 잃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비타산적이 아닌가 한다.
정말 利(리)가 되고, 정말 害(해)가되고 안되는 판단을 찾을 만한 이성을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원래 亨有(형유)해온 것이다.
인생의 이 좋은 품성, 이 밝은 이성을 가지고, 그 確乎(확호) 불변함에 있어서 황금의 불변성을 부러워하고만 말 것인가.
인생의 영생은 곧 자기가 타고난 바 순일한 인간성인 불변성에 있을 것이다. 오직 이 영생의 진리는 다른 데 있지 않고 가장 가까운 자신의 있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종만, “불변성” 『농업조선』 제2권 제5호(1939. 05.), 5쪽).
13. 學文(학문)의 길
이종만
“내 일찍이 終日(종일) 먹지 않고, 終夜(종야) 자지 않고서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 보람이 없었다. 배움만 같지 못하다.”고 孔子(공자)는 말씀하였고 荀子(순자)도 또한 이와 같이 “내 일찍이 종일 생각해 보았으나 須臾(수유: 잠시)라도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비는 것은 발을 날쌔게 하는 것이 아니로되 천리를 갈 수 있고 배를 비는 것은 물에 능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로되 江河(강하)를 건느게 한다. 군자라고 나면서부터 남과 다른것이 아니다. 물건을 잘 비는 것(곧 배워서 아는 것)뿐이다”고 갈파하였다.
배우는 것이 귀함은 공자와 순자만이 가르쳐준 바가 아니다. 비록 평범한 사람들일지라도 배워 좋은 것쯤은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만 마음을 먹고 안 먹는, 간단히 말해서 存心(존심)의 공부에서 賢哲(현철)과 凡庸(범용)이 갈려질 뿐이다. 배움에 있어 물론 機關(기관)의 힘을 비는 그것이 많은 功效(공효)를 들수 있는 것이지만 비록 최고학부를 마친 자일지라도 성찰하고 存養(존양)함을 터럭만큼이라도 멈추게 되면 그 쌓은 공이 다 사라져 비탄함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학문의 길은 다른게 아니라 오직 그 놓아버린 마음을 찾아 구하는 것뿐이라고 孟子(맹자)는 말씀하였다.
혹은 기회가 불행하여 교육기관의 덕을 못 보는 사람도 허다하다. 그러나 存心(존심)의 功(공)을 열심히 쌓을진대 事事物物(사사물물) 時時處處(시시처처)에 하나하나 몸으로 체득하여 스스로 계발됨을 깨달을 것이다. 우주의 만상이 모두 배움의 대상이요 접하는 사람마다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선(善)은 선대로 섭취하고 惡(악)은 악대로 경계할진대 일생을 통하여 배워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로 나갈진대 있는 기관을 더욱 빛나게 하는 동시에 기관이 갖추지 못할지라도 이 우주, 이 사회를 통틀어 자기의 배움의 기관으로 삼아 쉬지 않고 배우고 끝없이 향상하게 될 것이다. 내 또한 말하노니 생각보다도 먼저 배움이 급하다(이종만, “학문의 길” 『농업조선』 제2권 제6호(1939. 06.), 7쪽).
14. 成功美談(성공미담) 나의 半生紀(반생기),
이종만
내 고향은 慶南(경남) 蔚山郡(울산군) 大峴面(대현면) 龍岑里(용잠리)다. 농어촌으로 조그마한 동네다. 경치는 그다지 훌륭하지는 못하나 꽤 아름다운 촌이다. 어려서 글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깎고 大峴(대현)학교에 들어갔다. 그 대현학교가 지금 제2 공립 보통학교로 되었는데 나는 그 모교를 기념하기 위하여 최근에 일만오천원을 드리어 설립하였다. 그리고 내 고향을 기념하기 위하여 십만원의 경비로 자작 농촌을 만들기로 하였다.
내집은 크게 부유하지는 못했으나 자작농으로 백여석 추수를 하여 그다지 궁색함이 없었고, 평화하고 행복스러운 가정이었다. 나는 칠남매 중 셋째 아들로 이십세가 지나서 어떤 야욕을 품고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가서 무역상인이 어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기 좋게 실패하였다. 더구나 고기잡이 하는데 그 고기들이 푹푹 죽어 썩어지는 꼴이 보기 싫고 어부들이 술먹고 북치고 춤추는 것이 보기 싫어 어업을 중지하였다. 그래서 손해가 상당히 많아져서 땅을 팔아 그때 엽전으로 빚을 많이 갚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잘못으로 집안 살림은 어렵게 되고 농사를 지으려니 땅이 없어 부모형제의 가슴아퍼 하시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비상한 결심이 생겼으니 그것은 어떻게든지 이 쓰러진 가정의 재산을 회복시키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나는 눈물과 한숨을 고향 산천에 뿌리고 분연히 떠나서 경성으로 올라와 다시 강원도로 함경도로 개간사업을 하느라고 거의 십년동안 쏘다니었다. 그러나 성공이 되지 못하여 그때그때 비로소 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러나 자본이 없어 망설이다가 금강산 구경을 떠났다. 온정리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准陽(준양), 양구, 춘천 등지에서 금광을 하였다. 그러나 모두 실패하고 다시 경성으로 올라와서 농림주식회사라는 것을 조직하였다. 그것은 광대한 국유림을 불하하여 경영하겠다는 것인데 가능성이 충분히 있고, 잘 진행되었으나 인물이 없어 와해가 되고 말았다. 나는 다시 개간사업으로 들어붙어 함경도 북청 등지에서 시작했는데 결국은 부자 좋은 일만 시키고 이익은 그 부자가 차지하게 되어 홧김에 다시 서울로 뛰쳐 올라왔다. 그때는 돈 버는 것보다 사회사업을 하겠다고 苦學堂(고학당)이라는 것을 만들어 고학생을 공부시켰다. 학교건물이란 움과 같지만은 학생은 삼백여명이나 되는데 경비가 없어서 그때 선생인 이준열씨와 나와는 신문배달도 하고 석탄구루마를 끌기도 하였다. 학생가르치는 것은 이준열씨가 맡고 학생 먹이는 것은 내가 맡았는데 그때 고생이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때 고락을 같이 하던 李駿烈(이준열)씨는 지금 대동광업주식회사의 전무이다. 그때 여름장마 때나 겨울 눈치울 때의 여러 백명 학생을 데리고 고생하던 생각을 하면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내가 교육사업을 지금도 하고 장래도 하려는 것은 그때 그 고생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학당의 부채가 오육천원이나 되어할 수 없이 정리하고 문을 닫는 비운에 빠졌다.
도회를 떠나 이상농촌을 건설하자는 포부를 가지고 金麗植(김여식), 金昌俊(김창준)씨의 후원으로 永興郡(영흥군)에 갔었다. 그때 사금하는 데를 홍수로 실패하게 되어 나는 그 책임감으로 다시 금광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남 下原川(하원천) 明太洞(명태동)이라는 데서 남의 광산을 누구와 둘이서 동사를 했는데 성적이 퍽 양호하였으나, 그 이익을 동사하던 사람이 다 먹고 나는 겨우 십칠전을 가지고 그것을 떠나오게 되었다. 그 때의 悲憤慷慨(비분강개)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나는 그 뒤로 탄광을 하러 산을 헤매었다. 겨울 깊은 산 속에 얼음과 눈속으로 광맥을 찾을러 다니었다. 그때 빠진 발톱이 지금껏 나지 않고 지금도 여름이면 몹시 가렵다. 新興(신흥)서 玄昇鎭(현승진)씨의 후원으로 금광을 하였는데 이십만원이나 벌었다가 다시 실패하였다.
그 후 나는 定平(정평) 高山面 함평광산을 자본없이 단독으로 경영하다가 영평광산을 사백 오십원에 사서 4년 동안 채광을 하였다. 나는 거기에서도 자작 작업의 정신 밑에서 광산을 하였다. 의외의 성적이 양호하여 그것을 년전에 일백오십오만원에 매각하여 대동농촌사에 오십만원을 내놓았다. 그리고 내 자랑같지만은 그때 종업원에게 이십오만원으로 분배해주고 기타 몇십만원도 은인들에게 분배하였다. 현재 사업으로는 대동공업전문학교에 일백오십만원, 대동광업주식회사에 삼백만원, 광산조합에 십오만원, 대동출판사에 십만원, 이렇게 투자해서 경영하는 중이다.
광구로 말하면 長津(장진) 것이 연산액 삼천만원으로 가장 크고, 이백팔십구(구)가 되며 초산에 일백사십구, 자성에 삼백구, 여기저기 합하면 천구가 넘는다. 최근 발견된 철광이 있는데 일억만톤은 있다고 하니 시가로 수억원은 될 것으로 장래를 퍽 기대하는 바이다. 이 모든 재산은 내가 조금도 자랑하는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 재산이 아니요 사해의 것이며 조선의 것이라는 것으로 숨김없이 말하며 서로 기뻐하자는 것뿐이다. 나는 장차 생기는 재산으로 종합대학도 설립하고 싶고, 과학연구관도 지으려는 것이다. 평양에는 공업학교, 남선에는 농업학교, 경성에는 문과, 이과 같은걸을 두고 싶다. 나는 이것을 꼭 실현할 줄 믿고, 또 하늘께 비는 것이다.
그리고 농촌사업 自作農(자작농) 실시를 회사조직으로 해서 광범위로 하려는 것이다. 나의 좌우명은 직장교장, 노자협조, 농촌이상화 이 세 사업이 착수되면 각 기관을 다 그 적임자에게 맡기고 나 개인은 책임없이 떨치고 나서서 광산으로 가면 광부로, 농촌으로 가면 일농부로 자유스럽게 또는 한가롭게 여생을 보내자는 프로그램이다. 이것이 내 정해진 사업이요, 내 인생관이다. 有爲(유위)한 인재를 양성시키고 외국에도 유학시키는 것으로 지금부터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경영하는 회사는 어느 것이나 利(리)가 남으면 반을 갈러서 사원과 직공에게 분배한다. 그것이 언뜻 손해같으나, 실은 성적이 나고 피차에 보험이 든 까닭이다.
내가 지금 이만한 收穫(수확)이 있는 것은 금광으로, 일조일석에 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남이 모를 피와 땀이 있는 것이요, 누구나 노력 없이 부자가 되겠다는 것은 망상이다. 노력 없이 졸부가 되겠다는 것은 망상이다.
그러나 돈은 어디나 굴러있는 것으로, 아무나 노력하면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 정치나 금융기관도 돈을 만들어 놓고 달라고 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셈이다. 그 돈을 잡지 못하는 것은 방식이 틀렸고, 노력 없이 그대로 가지려고 하니 안되는 것이다.
첫째가 신용이다. 사람이 신임하도록 되고, 신이 신임하도록 되면 그에게는 불능이 없은 것이다. 신이 우주 만물을 창조해서 우리에게 다 주셨는데 돈인들 우리가 맘대로 가질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내게 잘못이 있고, 신이 미워하고, 사람이 미워하는 까닭이나, 정성과 노력이 있고 신용만 철저히 있다면 황금은 자연히 그에게 끌려가고야 마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다. 그리고 모르는 것도 많다. 나는 종교방면, 과학방면, 기타 만반의 지식을 선생에게 학생에게 배우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내 수양을 쌓아가는 것이 또한 큰일이다. 나는 책을 읽고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것을 유일의 낙으로 삼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참다운 인간으로 살아볼까 하는 것이다. 또한 만사를 善解(선해)하고 기쁘게 생각한다. (이종만, “나의 반생기(半生期),” 『학우구락부』 제1권 제1호(1939. 07. 01.), 90-93쪽).
15. 償債(상채)의 길
이종만
우리는 일생을 통하여 크나큰 빚을 짊어지고 있다. 모태를 떠나 한낱의 독립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그때부터 도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는 처음부터 끝가지 物心(물심)양면으로 빚에 빚을 짊어지며 살아가는 것이다. 강보에 싸여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다듬어 길러주신 부모의 은공이야말로 빚으로 따져 이보다 더 무거운 빚이 어디 있겠으며 우리의 생명을 있게 하고 우리의 생명을 유지 확충해주는 자연의 섭리를 생각할 때에 뉘 어찌 天惠(천혜)의 큼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무리를 이루어 생겨 나왔고 사회를 떠나서 잠시도 살길이 없는 존재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의 생활이 고도로 발달해갈수록 일상생활에 있어서 이웃 동포들의 피와 땀으로 뭉쳐진 노력의 산물에 더욱더 의뢰하지 않고서는 우리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사회에 대하여 지는 빚이 또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인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복리를 증진시켜주는 나라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 것이니 그 빚을 더 어디 비할 것인가.
이와같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산다는 그 사실이 이미 밖으로부터 빚을 진다는 사실과 다름이 없다. 우리는 이 빚을 어찌하면 갚아볼 것인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낱낱이 맞비겨 갚는다는 것은 - 사회로부터 고립한 개인의 생활을 시인할 수 없는 이상 - 도저히 불가능한 사실이나, 이미 밖으로부터 빌려온 公然(공연)한 빚을 공손히 받들어가지고 우리 자신의 능력대로 불리고 늘리어 형태를 바꾸어 갚는 도리밖에 없다. 이는 부모를 위하여, 신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갚는 빚이 안 될 수 없다. 그리고 금 한냥을 맡아 땅속에 파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주인에게 돌리는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금 다섯 냥을 받아 열냥으로 배를 불리어 갚는 착하고 신실한 종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내스스로 내자신을 돌아볼때에 나는 아직 빚을 갚기에 게으른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일생을 바치어 부모와 神(신)과 사회와 및 나라에 진 빚을 갚기에 있는 힘을 다하려 한다. 더욱이 東亞新秩序工作(동아신질서공작) 하의 조선사회에 있어서 빚갚을 마음이 더욱 급함을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이종만, “상채의 길” 『농업조선』, 1939. 7.).
16. 人間(인간)된 의무(義務)와 책임(責任)
이종만
인간은 만물의 靈長(영장)이요 조물주의 다음이라고 합니다. 저 조물주는 순간도 쉬지 않고 不絶(부절)한 노력으로 時(시), 空(공)을 이용하여 理氣(이기)를 融和(융화)시키며 陰陽(음양)을 配合(배합)하여 四時(사시)의 循環(순환)과 萬物(만물)의 生長(생장)을 總攬(총람)하고, 오직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의 首位(수위)에 놓았으니 우리 인간은 위로 신에게 대한 인간 된 의무를 더해야 할 것이며, 아래로는 만물에 대한 영장된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먼저 神(신)에게서 稟賦(품부)된 인간의 本性(본성)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상을 돌아보면 과연 이 인간의 본성을 잊어버리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대개 한 개의 작은 물건을 잃어버리고는 그것을 찾느라고 가진 애를 다 쓰지만, 인간의 인간된 所以然(소이연)인 동시에 또한 우리의 전 생명을 지배하는 인간의 본성은 잃어버리고도 오히려 태연히 모르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가여운 일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째서 우리의 본성을 잃어버렸습니까.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고성(古聖)의 말씀에도 君子孜孜爲善(군자자자위선), 小人孶孶爲利(소인자자위리)> 라고 한 바와 같이 순전히 우리의 日用(일용)행사가 본연의 원리에 순행하지 않고 탐욕과 사리에 사로잡혀 청정하던 우리 본성이 물욕의 노예가 되고 만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는 猛然(맹연)히 깨닫고 奮然(분연)히 일어나 하루바삐 私利(사리)에 사로잡힌 우리 私心(사심)을 버리고 원리에 따르는 우리의 본성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사리와 사심이 없이 신이 창조한 이 자연 속에서 우리도 그러한 신의 眞意(진의)를 체득해서 그 미완성품과 처녀지를 재창조 재개척하여 신과 만물 사이에 개재한 우리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이것이 곧 順天命(순천명)’의 大道(대도)이며 利用厚生(이용후생)의 원칙인 동시에 이로써 우리의 의무와 책임이 다 될 줄로 아는 바입니다. (이종만, “인간된 의무와 책임,” 『광업조선』, 1939. 08. 17쪽; 『농업조선』 제2권 제8호, 1939. 08. 7쪽).
17. 克己忍苦(극기인고)의 精神(정신) (권두언)
이종만
무릇 사람에게는 두가지 측면이 있을 줄 압니다. 그 하나는 자연적 측면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상적 측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인류로 하여금 자연적 상태에서 이상적 경지로 앙양시키고 승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란 우리의 지침도 될 수 있고 이상도 될 수 있지마는 이러한 문화가 항상 아름다운 결실을 하자면 그 밑에 우리의 강인한 정신력이 팽배하게 움직이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가령 우리가 自然的狀態(자연적상태)에서 理想的境地(이상적경지)로 昂揚(앙양)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본능의 욕구를 떠나 규범의 통제를 갖는다는 말이니 이러한 과정은 결코 文化的欲求(문화적욕구)에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우리 개인 개인이 가지는 克己(극기)의 정신 가운데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古聖(고성)의 말씀에도 ‘克己復禮’(극기복례)라고 하셨지만은 극기란 봉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人類社會(인류사회)의 秩序維持(질서유지)와 문화향상과 福利增進(복리증진)의 根本的動力(근본적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적은 예를 든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이 流金鑠石(유금삭석)의 더위를 못이겨 우리의 본능이 요구하는 대로 裸體(나체)의 생활을 恣行(자행)한다면 우리 사회의 질서는 紊亂(문란)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肉體的忍耐(육체적인내)와 心理的 節制(심리적절제)를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록 焦熱(초열)의 鎔鑛爐(용광로) 앞에 있드래도 심신이 함께 건전한 快感(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은 非單(비단) 避暑(피서)의 一策(일책)일뿐만 아니라 이러한 妙諦(묘체)는 우리의 全生活(전생활)에 비추어보아도 다 합리할 줄 압니다. 가령 한 개인의 행복이나 한 국가의 발전도 결코 무위에서 돌아오는 과보가 아니고 항상 고난의 실현 뒤에 오는 크다란 代償(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試金石(시금석)인 苦難期(고난기)에서 그것을 인내하고 돌파할 만한 克己忍苦(극기인고)의 정신이 없다면 우리는 개인으로서나 국가로서나 큰 행복을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금년과 같이 미증유의 한재가 우리의 생활을 위협하드래도 그렇다고 해서 한갓 절망과 流離(유리)와 자포자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도리혀 우리에게 더 큰 행복을 약속하는 한 개의 試鍊(시련)으로 알고 각각 극기인고의 정신을 涵養(함양)해서 天命(천명)에 順應(순응)해야 할 줄 압니다. (이종만, “극기 인고의 정신” 『광업조선』 (1939. 09. 01.), 13쪽.; 『농업조선』 1939. 09. 01.). 7쪽).
18. 餘裕(여유) 있는 生活(생활)
이종만
개인과 국가사회가 다 잘 살자면 어떻게 해야만 될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躊躇(주저)하지 아니하고 ‘개인이 자기의 義務(의무)와 責任(책임)을 履行(이행)하면서 그 생활을 개선하야 여유있게 맨든다면 국가사회도 따라서 개인과 함께 다 잘살수있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각자 직무에 충실하고 일보 나가서 타인에게까지 협조할 여유의 생활이 된다면 전 국가사회가 풍족하고 餘裕(여유)있게 될 것은 定(정)한 理致(이치)입니다. 즉 개인이 합하여 사회나 국가가 되었으니 細胞(세포)인 각 개인이 잘 살 수 있으면 따라서 단체인 사회나 국가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然(연)이나 일반 인심의 傾向(경향)은 잘살고 못사는 것이 다 자기 개인에게 있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다른데 있는 것처럼 녁이는 이가 많습니다. 잘 살기를 어찌 타에 구하겠습니까. 各自(각자)의 努力(노력) 如何(여하)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개인을 개인만으로 보지 맙시다.
개인이 잘 되면 이것이 곧 天下(천하) 사람이 다 잘 된다는 굳세인 관념을 갖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항언(恒言)에 ‘나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나! 하는 말을 마시고 개인 개인이 다 잘하자’고 힘있게 말하고 행합시다. 그 한점(點)에 있어서 개인으로부터 전 인류사회까지 잘 살 수 있고 없는 것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자신이 행하는 사물에 대하여 소흘히 또는 등한이 녁이지 맙시다. 천하를 좌우할 만한 여차 중대 문제가 각 개인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각자가 과거를 回顧(회고)하고, 현재를 審察(심찰)하며 미래를 고려하여 과실이 있으면 공자(孔子)의 過則勿憚改(과칙물탄개)를 본받아서 뉘우치고 고쳐 개선의 길을 취합시다.
물건도 기울게 놓으면 보기 실코 너머지기 쉬운 불안상태에 있지마는 그것을 고처서 바로 놓으면 반듯하고도 좋게 安靜(안정)하게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각자가 각자를 바르게 하는 것이 곧 온 천하를 바르게 하는 것이며 각자의 생활이 개선되고 여유 있게 되는 것이 곧 온 천하 사람의 생활이 개선되고 여유있게 되는 것이니 어찌 각자가 삼가 노력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다시 제삼 거듭 말쌈드린다면 개인의 여유있는 생활이 곧 전 국가 사회를 여유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종만, “餘裕(여유) 있는 生活(생활)” 『농업조선(農業朝鮮)』 제2권 제11호(1939. 11. 01.), 7쪽; 『광업조선(鑛業朝鮮)』 (1939. 11. 01), 15쪽).
19. 禍福(화복)
이종만
화복이 어데로부터 오는 것인가. 세간에 복을 구하는 자 혹은 산천과 목석에 머리를 숙이며 혹은 恒河砂數(항하사수)의 神明(신명)과 우상에 인연을 더듬어 무릎을 꿇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가. 그러나 화와 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인간 자신이 각각 그 人(인)을 맨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인을 쌓는 자에게 복이 돌아오고 악인을 쌓는 자에게 화가 돌아오는 것이니 악인을 쌓고 나서 복을 아무리 빌어도 복이 올 이치가 만무한 것이다. 선인을 쌓는 자라 해서 금방 복의 갚음이 없다 하자. 그러나 終當(종당)은 복을 받을지니 당대가 아니라도 반드시 자손에게 미칠 것이다.
더욱이 화복은 塞翁之馬(새옹지마)와 같은 것이니 눈앞의 화가 도리어 복으로 돌아오는 수도 있으며 눈앞의 복이 뒤집혀 화근도 되는 예가 非一非再(비일비재)한 것이다. 욥같은 현자의 고난길을 펴볼 때에 뉘라서 화복의 因果(인과)를 믿을 것인가. 그러나 하늘이 대임을 이 사람에게 내리시랴하매 반드시 그 心志(심지)를 苦(고)롭게 하며 그 筋骨(근골)을 疲勞(피로)케하는 것이니 天任(천임)이 크면 클수록 試鍊(시련)이 더욱 큰 것이다. 그리하야 그 시련을 극복하는 날에 크고 또 참된 복이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안을 짥게 해보면 화복의 飜覆(번복)이 無常(무상)타할지나 유구한 세월로써 자질한다면 善因(선인)을 쌓는 자에게 마침내 복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세인은 富(부) 곧 복으로 안다. 이는 그 字根(자근)의 공통되는 바 깊은 說文(설문)의 지식으로써 보지 않더라도 넉넉히 추측된다. 그러나 부 어찌 반드시 복이 되리오. 자기만을 위하는 때는 화가 반드시 따르나니 骨肉(골육)사이에도 이로 인하야 싸움을 일으킨다. 부의 본질은 화폐가 아니다. 參羅萬像(삼라만상)이 인간생활에 資賴(자뢰)되지 아니함이 없는 이상 무엇이고 우리 생활에 잘 이용되는 것이면 富(부)일 것이며, 그 부를 가지고도 자기만을 위하지 말고 남을 위하야 쓰는 마당에 선인을 쌓어 복으로 맨들어지는 것이다.
신춘을 당하야 사람사람이 다 새 복을 받고자 원한다. 그러나 복은 먼데 있지 않고, 가까운 마음속에 있는 것을 깊이 느끼자. 상서로운 봄기운에 만물은 새로운 생명을 吸呼(흡호)하고 있다. 만물은 서로 애낌없이 주고 또 서로 애낌없이 받는다. 우리의 一言一動(일언일동)을 한 터럭 사심없이 피어내릴 때 삼라만상으로서 다 우리의 부를 삼을 수 있으며 또 이로써 우리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종만, “화복” 『광업조선』 (1940. 02. 01.) 16쪽); 『농업조선』 (1940. 02. 01.) 7쪽).
20. 物質(물질)과 精神(정신)의 통일
이종만
사람은 자연을 정복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정복할 수 있으며 자연을 창조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물질적 생활이 윤택하지 못하며 정신적 營爲(영위)가 풍부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가. 이 결함은 오로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물질과 정신을 따로 떼어서 어느 한편만을 편협하게 생각하는 데에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물질적 생활에 탐닉(耽溺)해서 不義(불의)와 不德(부덕)을 감행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정신적 만족에만 골몰해서 현실을 떠난 高談峻論(고담준론)만 弄(농)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정히 이러한 弊害(폐해)의 적절한 예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폐해를 어떻게 해서 시정(是正)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물질과 정신의 완전한 통일을 보지 않고서는 안되겠음으로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職場卽敎場(직장즉교장)이라는 표현을 절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實物(실물) 그 자체대로 우리의 교육적 標本(표본)이 아닌 것이 없으며 이 사회의 모든 문화적 현상이 어느 하나도 우리의 생활적 요소가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古語(고어)에도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라고 했으니 하물며 수십 수백의 생산적 공동체일까 보냐. 진실로 우리는 생산하는 가운데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가운데 우리의 생산을 증대시킨다면 그때의 우리 생활이야말로 물질과 정신의 乖離(괴리)가 없이 완전 통일되고 渾融無碍(혼융무애)한 진리의 생활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만, “물질과 정신의 통일,” 『농업조선』, 1940. 03.).
21. 物心兩面(물심양면)의 開拓者(개척자)
이종만
廣漠(광막)하고 荒蕪(황무) 하던 대자연을 정복하고 개척해서 오늘날의 大都會(대도회)와 田園(전원)을 건설한 선구자들의 업적을 회고할 때 누구나 경건한 감탄을 마지않는 바이니 가령 컬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이라든지 워싱톤의 위대한 건설 사업은 아직도 나의 감명을 새롭게 하는 바이다.
그러나 선구자와 깨친 자의 끼친 바가 어찌 이에만 그칠까보냐. 인문과 교통이 아직도 未備(미비)되었을 때 修道說敎(수도설교)하기 위해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고난의 기록은 일일이 얘기할 수도 없거니와, 제왕의 지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한 석가라든지, 천하를 떠돈 공자라든지, 십자가상의 선혈을 뿌린 예수가 모두 다 우리의 인류를 위해 苦楚(고초)를 맛보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드린 인류문화의 개척자이며 선구자이다. 그러니 開拓(개척)과 先驅(선구)가 어찌 어느 특정한 사회에서만 필요할까 보냐. 지금 우리 눈앞에 벌어져 있는 자연과 문화, 그것도 오히려 새로운 개척자를 만나서만 더욱 발양될 것이며 더욱 신장 될 것이니 실로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선구자와 개척자의 중대한 책임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古語(고어)에도 “堯(요)임금은 누구이고, 舜(순)임금은 누구인가 堯何人也, 舜何人也(요하인야 순하인야)라고 했으니 이 光輝(광휘) 있고 중대한 책임을 수행함에는 오로지 우리의 私利(사리)와 偏見(편견)을 버리고 이 우주 속에 우리 자신을 통으로 내맡겨 영혼과 육체가 함께 봉사와 희생의 一念(일념)이 불타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세상에는 이러한 일을 가르쳐 어려운 일이라 하기도 하고 힘 드는 일이라고도 하나, 우리가 한 개인의 행복이나 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며 또한 그렇게 해서 얻은 행복은 그처럼 존귀하게 알면서 어찌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는 노력하지 아니하며 또한 인류의 행복을 위해 희생되는 것은 다 같이 받지 아니할까 보냐. 이는 오로지 우리를 小自我(소자아)의 편견에서 구제해내어서 大自我(대자아)의 포부를 가지고 眞實一路(진실일로)의 邁進(매진)을 하는 날 가능할 것이다(이종만, ”물심양면의 개척자“ 『농업조선』 제3권 제5호 (1940. 05. 01.) 9쪽); 『광업조선』 제3권 제5호(1940. 05. 01.) 15쪽).
22. 創造的努力(창조적노력) (권두언)
이종만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 들을 겪어오는 동안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의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무엇이든지 한번 일을 하면 반드시 거기에 해당한 결과가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란 반드시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것이어서 한 가지 원인에서 엉뚱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한다면 하나는 必然論的(필연론적) 見解(견해)인 동시에 다른 하나는 偶然論的(우연론적) 견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반드시 필연적인 因果律(인과률)에만 따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첫 번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출발만 잘하면 그 다음에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또한 세상일이 우연성에만 지배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애초부터 아무런 계획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한 원인을 지은 사람도 懺悔(참회)와 改過(개과)로 말미암아 善果(선과)를 받는 수도 있고 積善(적선)의 後期(후기)가 不測(불측)의 殃禍(앙화)를 받는 수도 있는 것을 본다면 모든 자연법칙이란 반드시 필연성과 우연성의 어느 하나만으로 따질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서로 겹치고 엉클리는 가운데서 사람의 운명이란 浮沈(부침)하고 消長(소장)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여기에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길도 스스로 밝아질 것이니 그것은 결코 법칙이 아니라 창조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씨도 안 뿌리고 좋은 열매를 기다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좋은 씨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도 미신입니다. 좋은 씨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것도 창조적 노력이 없이는 안 되거든, 하물며 나쁜 씨에서도 좋은 열매를 따자면 우리는 일 층 더 창조적 노력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노력만이 우리 앞에 막아있는 일체의 偶然性(우연성)을 배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이종만, “창조적 노력” 『농업조선』, 세3권 제7호 (1940. 07. 01.) 11쪽).
23. 産業平和(산업평화)의 길
이종만
흔히 資本主義(자본주의)의 결함을 말하는데 노동 근로와 자본의 대립 현상을 든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도 과거 어느 한 시기에 있어서는 勞勤(노근)과 자본이 극도로 대립되어 反目(반목)과 불평의 정도를 넘쳐 심각한 政治鬪爭(정치투쟁)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한다면 一家(일가)의 생활도 家屬(가속)끼리 불평이 있으면 행복한 가정을 건설할 수 없거든 하물며 全(전) 사회적인 産業體系(산업체계)에 있어서 서로 반목하고 불평하고 투쟁해서야 어찌 완전한 산업발달을 圖謀(도모)할 수 있을까 보냐. 여기에 비로소 吾人(오인)의 産業平和(산업평화)를 提唱(제창)하는 이유가 있지만은 또한 우리 산업이 완전한 발달을 하자면 첫째, 그 기관에 參與(참여)한 모든 사람이 일상 사소한 일이라도 서로 和協(화협)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며, 또한 서로 화협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共通(공통)된 정신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업평화의 길은 오직 共存共榮(공존공영)의 協調精神(협조정신)에 있다는 것을 여러 번 唱導(창도)해온 바이지만 만약 우리 산업체계 안에서 生産(생산)의 分配(분배)가 不均(불균) 하든지 작업상 대우에 차별이 있다든지 하면 이것은 결코 참된 공존공영의 협조 정신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能率向上(능율향상)에 惰怠(타태)하든지 소비 절약을 잊어버린다면 이것도 또한 공존공영의 협조정신은 아닌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어떠한 산업기관이든 거기에 한 번 參與(참여)한 이상에는 상하의 구별이 없이 모두 一心一體(일심일체)가 되어 공존공영이란 동일한 정신하에서 서로 아끼고 서로 도와서 休戚(휴척)을 함께 하는 평화한 기분으로 從事(종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완전한 산업의 발달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 개인의 利害(이해)는 한 기관의 이해와 동일하고 한 기관의 이해는 한 국가의 이해와 동일해지는 理想境(이상경)을 바로 우리의 앞으로 바라보고 勇往邁進(용왕매진)할 바이니 그러므로 우리의 日夜念念(일야염염)으로 생각할 것은 내 개인은 善惡(선악)을 물론하고 결코 내 한 사람이 아니고 항상 全體(전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종만, “산업평화의 길” 『농업조선』, (1940. 06. 0l.) 9쪽).(『鑛業朝鮮』 1940. 06. 01.).
24. 報恩(보은)의 生活(생활)(권두언)
이종만
衣食住(의식주) 세 가지는 인간이 생존함에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生活必需品(생활필수품)이다. 그러나 이 생활필수품 중의 어느 微細(미세)한 한 가지라도 개인이 단독 자신의 손으로 생산해서 직접 이용할 수 없는것이니 이와같이 생각하면 우리의 신명(身命)은 실로 사회 각층의 무수한 인간의 협력한 所産(소산)으로써 長養(장양) 됨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生(생)을 누리고 있는 동안 언제나 사회에 대한 은공(恩功)을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늘, 세상에 이 의식주 문제로 말미암아 도리어 적고 큰 불평에 마음을 사로잡히는 일이 許多(허다)하다. 물론 여기에 다 各各(각각) 이유가 있으리라. 더욱이 사람 사람의 生活程度(생활정도)가 고르지 못함에 있어서야 그 이유 삼는 바를 어찌 輕視(경시)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六祖慧能(육조혜능)의 말이 생각난다. 어떤 두 僧(승)이 塔(탑 )위에 꽂혀있는 깃발의 날림을 보고, 한 승은 깃발이 움직인다 하고, 또 한 승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고 다툴 때, 혜능이 이를 보고 이르기를 “바람도 깃발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 마음속에 어떤 물건이 있어 움직이는 것이다.”고 가르쳤다. 깃발이 움직인다 함도 이유 없는 바가 아니요 바람이 움직인다 함도 또한 이유 없는 바가 아니다. 人間社會(인간사회)에 있어 의식주로 말미암아 나오는 가지가지의 불평이 이유야 다 있겠지만, 한번 뒤집어 의식주를 이바지하는 사회에 대한 감사와 은혜의 생각이 움직일진대 富者(부자)는 부자대로 報恩(보은)의 實(실)이 더 있어야 할 것이고, 貧者(빈자)라도 생을 누리고 있는 限(한) 亦是(역시) 사회에 대하여 報恩(보은)의 길이 스스로 있어야 할 것이다. 豪奢(호사)로운 가운데 不平(불평)이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고, 貧寒(빈한)하나마 樂(락)이 그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불평의 因(인)은 반드시 貧(빈)에만 있지 않은 것이다.
要(요)컨대, 사회에 대한 불평이나 感恩(감은)이나 한갓 마음먹기 나름이다. 이미 우리가 이 세상에 생을 누리고 있는 以上(이상), 그 생의 存養(존양) 되는 根本(근본)을 생각하여 불평을 바꾸어 감사와 은혜의 길을 擇(택)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직 보은의 생활을 함으로써 이 사회를 더욱 裕福(유복)하게 하고 그 결과는 우리 一代(일대)의 행복을 增進(증진)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代代孫孫(대대손손) 그 그늘을 두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日用事物(일용사물)에 무엇을 보든지 사회가 다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여 줌을 깊이 느끼고자 한다. (이종만, “보은의 생활” 『농업조선』 제3권 제8호(1940. 08. 01.) 9쪽).
25. 農家(농가)의 苦情(고정)과 覺悟(각오)
이종만
오늘날 우리 農家(농가)에서는 여러 가지 苦情(고정)이 있을 것을 생각한다. 米穀(미곡)생산자로서 生産物處分(생산물처분)에 대하여 管理規正(관리규정)과 消費規正(소비규정) 其他統制規正(기타통제규정)에 직면하여 까다롭고 귀찮게 생각하는 不滿(불만)이 한두가지가아닐것이다. 가령 쌀에 있어서 自家用米(자가용미)를 除(제)하고는 一切(일체)의 쌀을 管理米(관리미)로 하여 供出(공출)하지 않으면 안 되며, 더구나 가격은 公定價格(공정가격)으로 一定(일정)되어 있으니 농가 각개의 生活內幕(새활내막)을 톡 털어서 露出(노출)시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農家從來(농가종래)의 觀念(관념)과 生活相(생활상)에 비추어서 적지않은 불편과 不自由(부자유)를 느낄 것도 事實(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나니 苦情(고정)을 고정만으로 不平(불평)하고 지나갈 때가 아니다. 바야흐로 一步前進(일보전진)하여 從來(종래)의 觀念(관념)을 淸算(청산)하고 現下(현하)의 米穀事情(미곡사정)에 도리어 협력하는 態度(태도)를 강하게 가지는 覺悟(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 하면 이렇게 해가는 것이 終局(종국)에 있어서는 農本主義(농본주의)와 農民精神(농민정신)을 살리어 농민도 남과 같이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인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從來(종래)의 우리의 農業經營(농업경영)에는 近代的(근대적) 資本主義(자본주의)의 影響(영향)을 받아서 極端(극단)의 自由主義的發展(자유주의적발전)과 商品經濟原則下(상품경제원칙하)에서 利益追及(이익추급) 주의가 너무나 徹底(철저)하였던 것을 否認(부인)할 수 없었나니, 그것으로 말미암은 토지의 商品化(상품화)는 土地兼倂(토지겸병)의 惡結果(악결과)가 되었고 米穀(미곡)의 商品化(상품화)는 價格騰落(가격등락)을 조정하는 投機輩(투기배)의 對象物化(대상물화) 하여서 個人主義(개인주의)와 利己主義(이기주의)와, 自由競爭(자유경쟁)이 激甚(격심)하여진 결과로 結局(결국)은 일인(一人)의 飽食者(포식자)가 出現(출현)하는 代身(대신)에 萬人(만인)의 饑餓者(기아자)가 생길만한 嫌(혐)이 있었다고 하면 이를 過言(과언)이라 할까. 이러한 현상은 결코 본래의 農民道(농민도)가 아니며, 本來(본래)의 農本主義(농본주의)가 아니며, 農民(농민)이 다같이 잘사는길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公益優先(공익우선)의 原則(원칙)하에 農家經濟(농가경제)가 一層(일층) 統制强化(통제강화)될것을 覺悟(각오)하여야 되나니 米穀管理(미곡관리)에서 米穀專賣(미곡전매)에까지 進展(진전)되는 과도기인것을 아라야 되는 동시에 농업이외의 他産業部門(타산업부문)도 一定(일정)한 計劃經濟(계획경제), 統制經濟(통제경제)로 履行(이행)되어 가는까닭으로 農家以外(농가이외) 다른 業者(업자)들도 過渡期的(과도기적)인 苦情(고정)이 있다는것을 알지 않으면안된다. 政府當局(정부당국)에서 實施(실시)하는 모든 規正(규정)도 統計(통계)의 完否(완부)와, 標準(표준)의 適否(적부)등 過渡期的備不備가(과도기적비불비)가 없지아니할것인바 이는 오로지 國民各層(국민각층)의 協力(협력)에 依(의)하여서만 過渡期를 速(속)히 過程(광정)할수있는것이다. 農家(농가)는 農民精神(농민정신) 그것의 本來(본래)가 公益優先(공익우선)이였고, 利益追及(이익추급)만이아니였든것을 宣揚(선양)하여 現下(현하)의 苦情(고정)을 克服(극복)하고 新體制下(신체제하)의 生活再編成(생활재편성)의 覺悟(각오)를 철저히 하기를 바란다. (이종만, “농가의 고정과 각오” 『농업조선』, 제3권 제11호 (1940. 12. 01.) 11쪽).
26. 새것의 意義(의의) (권두언)
이종만
新體制(신체제)의 出現(출현)과 함께 우리 生活(생활)은 모든 面(면)에 있어서 새롭다는 것이 全面的(전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 우리의 世界觀(세계관)에서부터 日常生活(일상생활)의 些少(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어느것이나 새로운것이 아닌것이없고 따라서 새로운 것이 아니여서는 안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國家的運命(국가적운명)과 態勢(태세)가 옛날의 그것을 一擲(일척)하고 새로운 局面(국면)을 열어서 새로운 出發(출발)을 하지않으면 안되게 된 만큼 우리國民(국민)들의 生活(생활)도 이 국가적 사실에 따러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새로운 것에 趨向(추향)하고 새로운 생활을 건설하려면 다만 새法令(법령)이나 새 제도에 순응하는 것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새로운 것을 創造(창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러자면 우리는 먼저 새로운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의를 다시 生覺(생각)해볼 必要(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새것이란 것은 흔히 옛것, 또는 묵은 것과 對比(대비)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것이 반듯이 單純(단순)한 묵은 것이나 옛것의 對照物(대조물)에만 끄친다면 묵은 것이나 옛것을 돌려놓거나 뒤집어 놓고도 새것이라고 할수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것이란 옛것의 대조일 뿐만 아니라 없던 것의 對照物(대조물)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없든 데서 새로 생긴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새것은 創造(창조)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생활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옛날 생활을 고치는 것뿐만 아니라 옛날에는 없든 생활을 새로히 창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새로운 法令(법령)이나 制度(제도)에 따르는 것은 물론이지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법령이나 제도를 日常生活(일상생활)로 具現(구현)하는 데는 國民各自(국민각자)가 創造(창조)적인 노력을 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政治(정치)는 국민에게 창조적 생활의 餘裕(여유)를 주는 것이고 優秀(우수)한 국민은 政治的大綱領(정치적대강령)을, 創造的生活(창조적생활)을 통해서 協調하고 翼餐(익찬)하는것이다.(이종만, “새것의 의의” 『농업조선』 제4권 제2호(1941. 02. 01.), 9쪽).
27. 실물(實物) 敎育(교육)의 의의
이종만
우리가 교육이라고 하면 옛날에는 經書(경서) 배우는 것으로 알았고 지금은 학교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우리 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기본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萬卷書(만권서)를 읽었다고 반드시 교육을 다 받은 것이며 학부를 나왔다고 반드시 훌륭한 교육을 받았느냐 하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경서나 學府(학부)라는 것은 우리의 참다운 교육을 받는 한 개의 안내이며 道標(도표)일 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참다운 교육은 어디서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가? 이것을 나는 확답하거니와 實社會(실사회)의 實物敎育(실물교육)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先哲(선철)의 말씀에도 善惡皆我師(선악개아사)’라고 하셨지마는 이것은 반드시 윤리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생활이란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것을 留意(유의)해보고 뜻있게 실천한다면 어느 하나도 우리의 교육적 표본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물에서든지 우리는 힘써 배우고 또 힘써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직장에서나 街頭(가두)에서나 사교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또 끊임없이 가르칩시다. 이것만이 우리 개인을 완성시키고 사회를 발달시키는 유일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종만, “실물교육의 의의” 『농업조선』, 1941. 04. 01.) 9쪽).『鑛業朝鮮』, 제4권 제4호(1941. 04. 01.).
28. 生活(생활)의 健全性(건전성)(권두언)
이종만
<健全(건전)한 肉體(육체)에 건전한 精神(정신)이 깃들인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일 個人(개인)의 境遇(경우)에서 볼때도 그러하지마는 이 事實(사실)을 한번 국가나 사회에 확대해서 생각해보드래도 결코 헛된 말은 아닌것이다.
가령 우리가 육체가 疲困(피곤)했을 때 우리 精神常態(정신상태)를 살펴본다면 顯著(현저)히 不健康(불건강)하고 頹廢(퇴패)한 것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國民生活(국민생활)이 불건전할 때 우리들의 國民精神(국민정신)이나 國民思想(국민사상)만이 健全(건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나 사상이 건전하자면 먼저 우리의 日常生活(일상생활)이 건전치 않어서는 안 될 일이지마는 또한 이보담 더 重要(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신이나 思想(사상)이 건전치 않고서는 결코 우리 생활이 건전할 수 없다는 역진리를 깨닫지 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찍이 個性(개성)의 放縱(방종)으로 말미암아 頹廢(퇴폐)한 生活感情(생활감정)을 도리혀 아름다운 것처럼 느끼는 人生(인생)의 迷夢(미몽)을 우리는 反省(반성)하지 않으면 안되겠으며 淸算(청산)하지 않으면 안될 階梯(계제)에 이르렀다. 그래서 새로운 局面(국면)을 향해 淸新(청신)하고 발랄하고 건전한 생활을 營爲(영위)하지 않으면 안될 때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更生(갱생)이라는 것은 生命(생명)의 物質的(물질적) 의미가 아니라 바로 생명의 生命的意味(생명적의미)에서 體驗(체험)하고 具現(구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종만, “생활의 건전성” 『농업조선』 제4권 제5호(1941. 05. 01.), 9쪽).
29. 生活十則(생활십칙)
이종만
1). 먼저 생활의 목표를 정하라. 그리고 백 번 넘어져도 그 목표를 바꾸지 말라. 성공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2). 凡常(범상)한 사물이라도 귀담아 듣고 눈여겨 보아라. 진리는 반드시 요원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3). 자기를 欺罔(기망)하지 말고 자기를 찾기에 충실하라. 분수(分數)를 지키는 자는 마음의 평형과 몸의 건강을 누릴 것이다.
4). 행복은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신에서 구하라. 禍福(화복)의 씨는 함께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5). 만사를 선해하라. 마음의 고통이 덜것이다.
6). 남을 섬기는 것이 곧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7). 驕慢(교만)하지 말라. 교만은 不德(부덕)의 근원이오 멸망의 장본이다.
8). 말을 삼가라. 한번 던진 말은 다시 거둘 수 없는 것이다.
9). 勤儉(근검)은 덕을 기르고 부를 늘린다. 티끌과 분초라도 낭비를 삼갈 것이다.
10). 매사에 능률을 올려라. 능률은 미세한 주의와 不絶(부절)한 연습에서 올릴 수 있다.
나는 이상 10칙으로서 나의 座右銘(좌우명)을 삼고 있다. 비록 평이한 말이나마 이것을 실행에 옮기기기는 그다지 쉬운 바가 아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밤에 누워 생각하매 항상 뉘우침이 많으니 쉬운 듯 어려움이 인생의 길인가 한다.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방편으로 나는 이 10칙을 마음 깊이 새긴다. (이종만, “생활십칙”『농업조선』 제2권 제4호(1939. 04.), 5쪽).
30. 사랑의 반죽
이종만
헤브라이 전설을 보면 인간의 시조 ‘아담’이라는 사나이는 흙반죽으로 뭉쳐 만든 몸덩어리에다가 숨을 불어넣은 ‘여호아’ 神(신)의 創作(창작)인데, 그의 배필 ‘이브’는 다시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흙반죽으로 인간을 만들어낸 하느님의 造化(조화)야말로 어찌 놀라울 뿐이리오마는 같은 한 반죽을 갈라 지아비 되고 지어미 되니 數(수)로는 둘이로되 도로 한 몸이다. 인간의 사회는 夫婦(부부)로 시작되어 千代萬代(천대만대) 億兆(억조)로 불어나되 근본은 한 덩이 한 반죽 되어늘 오늘엔 마른 고물 헤어지듯 利害(이해)로 갈리고 감정으로 부딪쳐 좀처럼 뭉치기 어려움이 도리어 인간과 인간이 아닌가.
무엇이 오늘날의 인간을 마르고 헤어지고 또 뿔뿔이 갈라서 원수로서 서로 害(해)하는 경우까지 만드는고. 에덴 낙원의 雨露(우로)를 못 받음이 이미 오래여서 그러한가. 차라리 헤지고 부서질진댄 어설피 뭉친 응어리 하나도 없이 가늘고 곱게 불면 날아갈 만한 가루로 아주 부서져 새 반죽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죽이 잘 되려면 첫째 가루가 고아야 될 것이요, 둘째로 물이 고루 퍼지고 배이도록 개고 주무르지 아니하면 안 된다. 먼저 무거리를 절구에 넣고 빻아야 할 것이니 인간사회에 있어서도 아욕(我慾)이 구르는 대로 부자연하게 형성된 굵고 적은 雜駁(잡박)한 무거리를 빻고 부수는 것이 첫째 힘쓸 일일 것이다. 아욕이 끊어지는 마당에 사랑의 샘물은 솟아나온다. 흐르고 흘러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물이 이웃을 적시며 이웃에서 또 그 이웃으로 그 샘물 번져나가 億兆(억조)의 마음에 고루 퍼질진댄 움직이는 대로 뭉쳐지는 인간의 새 반죽은 잃어버린 樂園(낙원)을 도로 찾아 여호아 신의 숨결에 접할 수 있을 것이다.
夫婦(부부)를 一身(일신)이라 하되 사랑을 뽑아내면 五體(오체)가 무너진다. 부부로 시작하여 넓혀진 인간사회도 크나 적으나 사랑 없이 그 本然(본연)의 기능을 나타낼 길 없음은 부부의 관계나 다름이 없다. 이름을 지어 이름을 戀愛(연애)라 하고 다른 하나는 同胞愛(동포애)라 할 뿐이다. 사랑은 ‘나’라는 것을 녹여 한 ‘나’와 ‘다른 나’를 한 반죽으로 만드는 것이다. 부부나 다른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사회’라 하면 벌써 ‘나’라는 개인과는 대립되는 명제인 이상 거기에는 사랑 없이 종합될 수 없는 것은 스스로 명백하다.
胡風(호풍)이 아직 차나 따뜻한 봄볕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다. 봄볕이 만물을 소생시키듯 우리는 사랑으로 인간을 새로 반죽하여 우리 사회로 하여금 長期(장기)건설에 一路邁進(일로매진)케 하자. (이종만, “사랑의 반죽” 『광업조선(鑛業朝鮮)』 제2권 제3호(1939. 03. 01), 8-9쪽.)
31. 學問(학문)의 길
이종만
“내 일찍이 종일 먹지 않고 밤새 자지 않고서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 보람이 없었다. 배움만 같지 못하다”고 공자(孔子)는 말씀하였고 순자(荀子)도 또한 이와 같이 “내 일찍이 종일 생각해보았으나 須搜(수수)라도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비는 것은 발을 날쌔게 하는 것이 아니로되 천리를 갈 수 있고 배를 비는 것은 물에 능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로되 江河(강하)를 건느게 한다. 군자라고 나면서부터 남과 다른 것이 아니다. 물건을 잘 비는 것(곧 배워서 아는 것)뿐이다”고 갈파하였다.
배우는 것이 귀함은 공자와 순자만이 가르쳐준 바가 아니다. 비록 평범한 사람들일지라도 배워 좋은 것쯤은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만 마음을 먹고 안 먹는, 간단히 말해서 存心(존심)의 공부에서 賢哲(현철)과 凡庸(범용)이 갈려질 뿐이다. 배움에 있어 물론 機關(기관)의 힘을 비는 그것이 많은 功效(공효)를 들 수 있는 것이지만 비록 최고학부를 마친 자일지라도 성찰하고 存養(존양)함을 터럭만큼이라도 멈추게 되면 그 쌓은 공이 다 사라져 비탄함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학문의 길은 다른게 아니라 오직 그 놓아버린 마음을 찾아 구하는 뿐이라고 맹자(孟子)는 말씀하였다.
혹은 기회가 불행하여 교육기관의 덕을 못보는 사람도 허다하다. 그러나 存心(존심)의 功(공)을 열심히 쌓을진대 事事物物(사사물물) 時時處處(시시처처)에 하나하나 몸으로 체득하여 스스로 계발됨을 깨달을 것이다. 우주의 만상이 모두 배움의 대상이요 접하는 사람마다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善(선)은 선대로 섭취하고 악(惡)은 악대로 경계할진대 일생을 통하여 배워도 오히려 부족할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로 나갈진대 있는 기관을 더욱 빛나게 하는 동시에 기관이 갖추지 못할지라도 이 우주, 이 사회를 통틀어 자기의 배움의 기관으로 삼아 쉬지 않고 배우고 끝없이 향상하게 될 것이다. 내 또한 말하노니 생각보다도 먼저 배움이 급하다. (이종만, “학문의 길” 『鑛業朝鮮)』 제2권 제9호(1939. 09. 01.), 7쪽).
32. 時艱克服(시간극복)과 更生(갱생)의 길
이종만
新東亞建設(신동아건설)의 聖戰(성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일과 폴란드 간의 戰端(전단)으로 말미암아 영국과 불란서의 참전한 소식을 듣고 보니 이야말로 東西(동서)대륙의 戰火(전화)의 피지 아니한 곳이 없이 우리가 일찍이 25년 전에 겪어온 世界大戰(세계대전)의 徵兆(징조)는 나날이 濃厚(농후)해가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三南(삼남)지방에 未曾有(미증유)의 가믐이 들어 금년의 減收(감수)는 예측도 할 수 없다고 하니 비록 當局(당국)의 救濟策(구제책)을 신임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평온함 속에 큰 걱정 없이 지내온 우리로서는 방금 내외로 최대의 시대적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개인이나 국가를 물론하고 험난한 경우에 다달아 고통을 인내하면 그것이 도리어 갱생의 시련이 되고, 자포자기를 하면 말라 죽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지라 우리도 이 험난한 時代(시대)를 만나 어떻게 하면 난국을 돌파하고 갱생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자력갱생의 정신이다. 가령 왕년에 소위 大戰景氣(대전경기)라는 것이 있었다고 해서 朝夕(조석)으로 변동되는 국제정세를 엿보고 투기와 이익추구에만 눈을 밝힐 것이 아니라 건전한 정신으로 착실한 業(업)을 붙들어 안으로는 일상생활에 모든 물자를 소비절약하고 밖으로는 근면해서 생산을 증가시키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유일한 갱생의 길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생활을 자력으로 확립시키고 고양시키려 하지 않고 다만 시운이나 기회를 엿보는 것은 진실로 어리석은 자의 할 바이나, 만약 우리에게 굴복하지 않는 자주독립의 정신이 있다면 스스로 절약하지 아니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며 스스로 근면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니 이러고서 갱생의 서광이 비치지 않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 하늘은 부지런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말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이종만, “時艱克服(시간극복)과 갱생의 길,” 『농업조선』, 1939. 10.) 7쪽).
33. 送年辭(송년사)
이종만
支那事變(지나사변) 3년인 이해를 보내면서 지난 일년을 회고하니 실로 多事多難(다사다난)한 바가 있었다. 밖으로 歐洲(구주)의 풍운이 미묘한 국제정세를 일으키고 안으로 事變(사변)처리의 대책에 부심하는 동안에 다행이 정통국민당의 재건운동과 함께 新(신)중앙정권이 태동하고 있어 대동아건설의 서광이 보이려 한다. 그러나 병참기지로서 또 식량공급지로서 중한 자리에 처한 조선은 불행하게도 일찍이 없었던 가믐으로 말미암아 금년 미곡수확이 심대한 數字(수자)로 減收(감수)되리라 한다.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는 조선에서 이러한 감수라는 것은 절대적 타격이 아닐 수 없으나 다행히 당국으로서는 이 대책에 최선을 다하고 이재민은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에 불사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霜風雪雨(상풍설우)의 嚴冬(엄동)이 닥쳐 몸을 덮을 옷이 없고 끼니를 이을 곡식이 떨어진 이재민의 생활을 상상한다면 비록 이재 구역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더운밥과 높은 베개로서 편안한 생활에 자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동안 조선사회사업협회에서의 이제 동정금 모금도 아직 소기의 액수에 달하지 못한 모양이나 있거나 없거나 서로 돕는 우리의 고유한 순박하고 아름다운 풍속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만났을수록 우리는 환란 속에서 서로 돕는동정심을 더욱 분발해서 한 쪼각 알곡이라도 있는 대로 서로 나누지 아니하면 안될 것이다. 그래서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돕는 미덕을 배우고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의 동정을 느껴 알줄 안다면 이 천재시간(天災時艱)이 도리어 우리의 아름다운 생활을 건설하는 한 개의 초석이 되며 우리의 무궁한 복지를 이로써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천하 독자제위의 송구영신에 복 많이 받으시길 마음으로 빌면서 이것으로 송년의 辭(사)를 끝막노라. (이종만, “송연사,” 『農業朝鮮』, 1939. 12.).
34. 非常時局(비상시국) 하의 생활要諦(요체)
이종만
聖戰(성전) 이미 3년에 銃後(총후)국민의 생활은 긴장한 가운데 단련되어왔다. 이웃 나라의 新(신)정부도 3월 30일로써 정식 성립을 보게 되어 聖戰(성전)의 목적이 이제 바라는 성과를 나타내려함은 기쁜 일이나 동아신질서건설의 위업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 공작이 시작될 것이니 銃後(총후)의 임무는 더욱더 무겁고 크다 할 것이다. 생각하면 건설은 파괴보다 더욱 힘드는 일이매, 인재와 물자가 종래에 비하여 오히려 더 많이 요구될 것임은 明若觀火(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므로 국민의 생활은 앞으로 일층 더 긴장하니 아니하면 당면한 비상시국을 타개할 길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그 수입 이하로 생활을 영위하도록 꾀할 것이다. 이는 ‘스마일스’가 역설한 金言(금언)으로 평상시에도 따라야 할 바이어든 하물며 비상시에 있어서랴. 만일에 개인 개인이 수입이나 생산 이하로 지출이나 소비를 줄인다면 그 남는 바는 개인의 생활을 윤택하게 할 뿐 아니라 국가의 부(富)를 축적케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수입보다 지출을 크게 하여 채무가 積滯(적체)되는 날에는 이 까닭에 자주독립의 생활기능을 상실하여 개인으로서의 멸망을 招致(초치)할 뿐 아니라 나아가 국가경제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야 마는 것이다. 小(소)로써 대(大)를 이루고 개체가 합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니 적은 것을 아껴 크게 하고 개인의 힘을 모아 국력을 강하게 할 것은 비상시 아닌 평상시에도 잊어 안 될 바인것이다.
물자가 귀할수록 화폐의 가치가 低落(저락)된다. 여기에 근로생활자의 悲哀(비애)가 있다. 그리고 또 비상시국하에 있어서는 생산부문 혹은 유통부문 가운데 跛行的(파행적) 경기가 나타나있다. 일부의 好景氣(호경기)는 일부의 낭비와 사치를 조성하고 이것이 또 원인이 되어 사회적으로 낭비와 사치의 악풍을 흘리는 예가 적지 않음을 目睹(목도)한다, 그 由來(유래)한 호경기가 시국에 관련되어 있고 그 호경기의 이면에는 불경기가 심각하게 침투되어 가는 현상을 살펴볼 때 어찌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것인가. 그 일시적 이득에 취하기 전에 먼저 시국의 장래에 신중한 사려를 멈추지 않고는 자신을 망하게 하고 사회에 해독을 끼쳐 제도할 수 없는 비운을 자초할 뿐이다.
다시 거듭 말하노니 지출은 수입 이하로 생활을 규율하여 그 剩餘(잉여)로써 생산에 보태게 할 것이다. 分秒(분초)의 시간과 털끝만한 물자라도 생활을 위하여 이용하며 생산을 위하여 제공하지 않고는 금일의 어려움을 타개할 길이 없을 것이다. 더욱이 국가를 떠나 개인의 존립을 허할 수 없음은 비상시국이 밝혀 증시한다. 총후의 국민으로서 자숙자계, 생활을 규율할 책무를 일층 깊게 느끼는 바이다. (이종만, “비상시국 하의 생활 요체,” 『農業朝鮮』, 제3권 제4호(1940. 04. 01.) 7쪽).
35. 世界新秩序(세계신질서)의 創建(창건)
이종만
支那事變(지나사변)과 歐洲大戰(구주대전), 이 兩大戰亂(양대전란)은 實(실)로 有史以來(유사이래) 未曾有(미증유)한 世界秩序(세계질서)의 一大變革(일대변혁)을 맺으려 한다. ‘가진나라’와 ‘못가진나라’와의 軍事的(군사적), 政治的(정치적), 經濟的(경제적) 抗戰(항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深刻(심각)한 뿌리를 둔 思想的鬪爭(사상적투쟁)에까지 展開(전개)되어 있다. 개인의 繁榮(번영)을 基礎(기초)로 한 自由主義思想(자유주의사상)은 오늘에 完全(완전)히 窒息(질식)되려 하고, 그 代身(대신) 국가와 사회의 번영을 第一義(제일의)로 삼는 全體主義(전체주의) 사상이 支配的權威(지배적권위)를 發陽(발양)하게 되었다. 日(일), 獨(독), 伊(이)와 같은 ‘못 가진 나라’가 英(영), 美(미), 佛(불)과 같은 ‘가진나라’에 對抗(대항)하여 오늘의 이 壓倒的優勢(압도적우세)를 누릴 줄이야 누가 일찍이 뜻하였을 것인가. 그러나 個人本位(개인본위)의 自由主義基礎(자유주의기초) 위에 선 舊秩序(구질서)의 危弱性(위약성)은 오히려 ‘가진’ 강점(强點)으로써 기울 수 없음은 물론. 이와 반대로 단결과 통제, 개인에 앞서 國家社會(국가사회)에 重點(중점)을 둔 全體主義(전체주의)의 新秩序(신질서)는 비록 ‘못 가진’ 弱點(약점)일지라도 克服(극복)할 뿐 아니라 더욱 그 기초를 공고(鞏固)히 할 것이다.
오늘에 있어 경제는 곧 정치이다. 지난날에 보던 모든 複雜(복잡)한 個人主義經濟(개인주의경제)는 한 歷史的記錄(역사적기록)으로 돌아갈 뿐이오 生産(생산), 分配(분배), 消費(소비)에 어떤 부문에나 통제가 徹底化(철저화)되는 날, 이런 經濟的問題(경제적문제)는 政治問題(정치문제)로 化(화)하고 만다. 독일 경제상의 金本位(금본위)廢棄說(폐기설) 같은 것도 정치문제로 볼때에 능히 實現(실현)될 것을 期約(기약)할 수 있다.
全體主義國家(전체주의국가)는 個人主義(개인주의)의 排除(배제)는 물론이려니와 民族主權(민족주권)의 分立(분립)도 容許(용허)하지 않는다. 利害共通(이해공통)한 블록 經濟圈(경제권)을 單位(단위)로 하여 民族主權(민족주권)을 揚棄(양기)한 政治形態(정치형태)를 나타내려고 한다. 西歐(서구)의 政治體制(정치체제)도 그리되려니와 우리의 실현하려는 東亞協同體(동아협동체)의 確立(확립)은 이미 이러한 根據(근거)에서 出發(출발)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의 신질서는 創建(창건)되려 한다. 이때에 있어 우리는 舊秩序(구질서)에 대한 未練(미련)과 慣性(관성)을 完全(완전)히 淸算(청산)하자. 개인을 버리고 전체를, 小我(소아)를 버리고 大我(대아)를 파악해서 나아가자. 領導的(영도적) 지위에 선 자나 被領導的地位(피영도적지위)에 선 자나 다함께 구질서 속에 浸染(침염)된 殘在(잔재)를 淘汰(도태)하자. 全體主義(전체주의)의 理想(이상) 앞에는 오직 국가와 사회를 위한 創造的努力(창조적노력)이 있을뿐이다. (이종만, “세계신질서의 창건,” 『農業朝鮮』, 제3권 제9호(1940. 09. 01.) 9쪽).
36. 新體制(신체제)의 新生活(신생활)
이종만
새해는 항상 새로운 希望(희망)과 計劃(계획)으로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새해를 맞을 때는 언제나 지난 일년간을 回顧(회고)하는 것이지만 사실 지난해를 돌아볼 때 우리는 먼저 皇紀(황기) 2600년 紀念奉祝節次(기념봉축절차)를 盛大(성대)히 擧行(거행)한 것을 비롯해서 新體制(신체제)에 의한 ‘大政翼贊會(대정익찬회)’의 誕生(탄생)과 조선 안에서의 國民總力朝鮮聯盟(국민총력조선연맹)의 結成(결성)이라든지 밖으로 三國同盟(삼국동맹) 締結(체결)과 日華基本條約(일화기본조약)의 成立(성립)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決(결)코 한개 한개의 따로 떨어진 事實(사실)이 아니고 正(정)히 國家的體勢(국가적체세)와 運命(운명)을 中心傴軸(중심구축)으로 한 모든 聯關的(연관적)인 事實(사실)이란 것을 特(특)히 主意(주의)한다면 이로써 우리의 國家的大方向(국가적대방향), 大軌道(대궤도)는 確乎不動(확호부동)하게 決定(결정)되었다고 볼수있는 것이다.
그러면 남은 問題(문제)는 무엇인가. 方向(방향)이 정해지고 궤도가 놓인 이상에는 다만 進軍(진군)이 있을따름이다. 그 정해진 방향을 향해서 그 놓인 궤도 위로 勇往邁進(용왕매진)하는 實踐的生活(실천적생활)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萬若(만약) 지난 一年間(일년간)을 우리의 偉大(위대)한 歷史的轉換期(역사적전환기)의 마지막 準備(준비)의 段階(단계)라고 한다면 새로 맞이하는 해는 또한 이 위대한 歷史的任務(역사적임무)를 띄고 實踐(실천)의 首途(수도)에 오르는 發足點(발족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希望(희망)과 計劃(계획)이 實現(실현)되는 것이어서 결코 卓上(탁상)의 空論(공론)이나 腦裏(뇌리)의 空想(공상)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지난번에 결정 발표된 ‘國民總力聯盟(국민총력연맹)’의 實踐要領(실천요령)은 우리 國民生活(국민생활)의 大綱領(대강령)에서부터 細目(세목)에 이르기까지 그 要目(요목)과 事項(사항)을 明示(명시)한 바가 있으니, 이로써 우리의 生活基準(생활기준)을 삼아야할 것은 勿論(물론)이지마는 이러한 실천이 우리 개개인의 생활에 있어서 서툴다거나 어울리지 않아서는 더욱 안 될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自進(자진)해서 한개의 基本義務(기본의무)로 實行(실행)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新體制(신체제)의 新生活(신생활)인 것이니 우리는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새로운 幸福(행복)을 希求(희구)해 마지않는 것이다. (이종만, “신체제의 신생활,” 『鑛業朝鮮』, 제4권 제11호(1941. 01.). 8-9쪽).
37. 大同一覽(대동일람)
이종만
1). 序文(서문)
(1). 人生(인생)은 만물의 靈長(영장)이라는 것이 한개의 僣稱(참칭)이 아니고 宇宙(우주)의 法則(법칙)에 비추어 俯仰(부앙)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실이라면 먼저 우리는 이 靈長(영장)된 所以然(소이연)이 무엇인가를 自覺(자각)하는 동시에 또한 그 本分(본분)을 다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2). 생각컨대 인간에게는 自然的(자연적)인 一面(일면)과 理想的(이상적)인 일면이 있어 우리가 날마다 이 자연적인 면을 除去(제거)하면서 이상적인 면을 開拓(개척)해 나가는 것이 곧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철(先哲)이 말하기를 인간은 神(신)과 惡魔(악마) 사이에 가로 놓인 橋梁(교량)이라고 했지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교량의 지위를 떠나 다시 한걸음 더 神聖(신성)한 境域(경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까.
(3). 실상 이 사회의 모든 不平(불평)과 不幸(불행)의 그 根源(근원)을 살펴보면 모두가 私心(사심)에서 시작된 것이니, 가령 傷人害物(상인해물)도 사심의 跋扈(발호)로 말미암은 것이며 弱戮强食(약육강식)도 결국은 사심의 所致(소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번 사심을 버리고 大自我(대자아)의 豁然(활연)한 心境(심경)에 이르면 우리 眼前(안전)에는 어느 것이나 差異(차이)나 구분(區分)이 없이 모든 것이 一如(일여)의 本相(본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4). 그러므로 개인과 사회가 利害禍福(이해화복)을 같이 하는 동시에 우리는 비로소 勞資協調(노자협조)의 質(질)을 드러내 共存共榮(공존공영)의 理想鄕(이상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곧 불초의 오십여 년간 抱懷(포회)하고 온 大同思想(대동사상)의 核心(핵심)인 것이다.
(5). 그러나 우리가 한 개의 精神(정신)과 理想(이상)을 實現(실현)하자면 거기에 適宜(적의)한 機關(기관)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6). 누구나를 勿論(물론)하고 다같이 共存共榮(공존공영)의 大目的(대목적) 大旗幟(대기치) 아래에서 上下(상하)가 동심(同心)하고 勞資(노자)가 協力(협력)해서 一毫(일호)의 私心(사심)도 容納(용납)되지 않는 동시에 職場(직장)이 곧 敎場(교장)이요 機關(기관)이 곧 家庭(가정)이라는 覺悟(각오)와 誠意(성의)를 가지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2). 大同敎學會 趣旨書(대동교학회 취지서)
(1). 인류사회에서 전쟁을 絶滅(절멸)하는 일사만이 오직 正(정)이요 義(의)요 인류의 物心(물심) 모든 노력의 唯一無二(유일무이)한 목표다.
(2). 대개 사람마다 天賦(천부)의 良心(양심)이 있듯이 민족마다 天命(천명)을 전하는 聖賢(성현)이 있어 인생 생활의 正邪善惡(정사선악)을 아는 자가 적은 것이 아니요 도리어 모르는 자가 드물다. 국가가 진실로 그 국민사상과 생활을 정의와 평화 一點(일점)으로 集注陶冶(집주도야) 하려 하면 결코 難事(난사)가 아니다.
(3). 현대문명의 모든 결함에 대하여 일대 수술을 감행하여 국가관과 인생관에 대수정(大修正)을 실시하여서 종래의 제국주의적, 상업주의적인 이기주의, 물욕주의를 제거하고 진정한 진리주의, 인도주의로서 각자 국내의 정치, 산업, 교육을 개혁하고. 그 제2계단이며 최후적 승패가 될 思想戰(사상전)은 이로부터 개시될 것이라고 믿는다.
(4). 모름지기 전인류를 구제하리라는 大悲願(대비원)을 기조로 한 독창적이요 超群的(초군적)인 국가를 건설할 것이요, 결코 옛것만을 답습하는 안일함에 빠지지 말 것이다.
(5). 대개 우리 민족이 혈통적으로 심히 우수하고 문화의 古(고)하고 高(고)함이 능히 漢族(한족)과 伯仲(백중)하여서 신라시대에 이미 東亞思想(동아사상) 集大成(집대성)의 業(업)을 이루었고, 또 우리 민족의 지리적 조건이 동아 諸民族(제민족) 문화산업 교류의 要衝(요충)에 처하여 있으니 이 혈통과 이 역사와 이 지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요, 겸하여 세계 大反省(대반성) 大改造(대개조)의 이 시기에 다시 건국을 한다는 것이 깊은 天意(천의)의 攝理(섭리)임을 自覺(자각)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6). 우리가 목적하는 바는 富强(부강)이 아니고 차라리 淸貧(청빈)이어니와 오직 도덕, 문화에 있어서는 단연히 列國(열국)의 모범이 될 것을 自期(자기)할 것이다.
(7). <力(힘)이 義(의)>라 하는 군국주의와 <富(부)가 義(의)라>하는 착취적 상업주의는 금후에는 天(천)과 아울러 인류의 양심이 용허하지 아니할 것이다. 相愛相助(상애상조)의 원리에 서서 공존공영의 인류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금후의 인류의 이상이요, 또 실천일 것이니,
(8). 그러므로 바야흐로 新歷史(신역사)를 試(시)하려는 우리는 마땅히 將來(장래)하는 세계의 先驅(선구)를 作(작)하기를 期(기)할 것이요, 이러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天稟(천품)을 발휘하여 인류의 進運(진운)에 기여함이 될 것이다.
(9). 이에 기초가 되는 것은 교육과 산업의 개조다. 교육에 있어서는 狹隘(협애)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보편타당성을 가진 진리를 기초로 하되 人類同胞世界一體(인류동포세계일체)의 정신으로써 국민정신의 기조를 삼고 종교와 과학의 조화, 敎場(교장)과 職場(직장)의 合一(합일)로서 兩翼(양익)을 삼을 것이다.
(10). 불타의 慈悲(자비), 공자의 仁義(인의), 예수의 博愛(박애)는 時(시)와 人(인)은 다를지언정 인류평화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새생활 원리이니 오직 이 원리의 실천만이 세계평화의 要諦(요체)이다.
(11). 세계의 평화는 결코 神通變化(신통변화)로 될 것이 아니요 진리의 日常實行(일상실행)이라는 평범한 경로로 실현될 것이다.
(12). 산업은 원래 인생의 의식주를 豊足(풍족), 安樂(안락)하게 함이 목적이요 業者(업자)의 蓄財(축재)가 목적이 아니다.
(13). 세계의 산업은 모름지기 本然(본연)의 正道(정도)에 復歸(복귀)할 것이니 토지를 경작하고 광물을 채굴하고 기계를 돌리는 것이 인생으로서 四重恩(사중은)을 보답하고 자신과 처자를 鞠養(국양)하는 신성하고 유쾌하고 자유로운 근로가 되게 하여야 할 것이다.
(14). 農漁鑛工(농어광공)을 물론하고 그를 위한 근로는 종교적 자유와 愉悅(유열)에서 나올 것이고 口腹(구복)을 위한 노예적 착취에서 구하지 말게 함이 또한 국가의 중대 本務(본무)일 것이다.
(15). 근로의 자유화 愉悅化(유열화)를 위하여는 敎場卽職場(교장즉직장) 職場卽敎場(직장즉교장)인 제도를 확립할 것이니 換言(환언)하면 모든 교장은 즉 산업의 직장이요 모든 직장은 즉 교육의 교장이 되게 하는 것이다.
(16). 인생은 모름지기 평생교학, 평생근로로써 修鍊(수련)과 報恩(보은)이 間斷(간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교학과 근로의 일체화, 보편화, 평생화는 절대로 긴요한 것이다. 이것이 직장즉교장, 교장즉직장을 제창하는 소이이다.
(17). 學勞一體(학노일체)에는 상술한 이상의 심원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인(人)의 神化(신화), 物(물)의 神化(신화)이다.
(18). 평생의 부단한 敎學修鍊(교학수련)으로써 인류를 神(신)의 영역에 引上(인상)하는 동시에 그의 근로에서 산출된 물자로 하여금 神物天物(신물천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19). 이 근로에 喜悅(희열)이 있고 이 희열은 작품을 통하여 그 작품을 쓰는 사람에게 통한다. 여기 微妙神秘(미묘신비)한 靈通(영통)이 있는 것이다. 노예적 근로에서 생산된 상품과는 判異(판이)한 것이다. 이러한 산업이야말로 인류를 神化(신화)하고 一家化(일가화))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니, 敎場卽職場(교장즉직장)은 이 정신의 道場(도장)이 될 것이다.
(20). 우리는 天理(천리)를 믿고 인류의 良心(양심)과 能力(능력)을 믿는다. 역사는 進展(진전)이요. 反復(반복)이 아님을 믿는다.
(21). 그러나 전쟁의 절멸과 세계의 평화가 다만 국제적 회의와 조약만으로 되지 아니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경험하였다. 이것은 오직 각국 각 민족이 교육과 산업의 一體(일체), 종교와 과학의 一體(일체)를 통한 人性(인성)의 歸正修鍊(귀정수련)을 통하여서만 실현될 것이요. 그 밖에 길이 없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22). 조선의 동포여, 세계의 동포여, 자손만대의 福樂(복락)을 위하여 인류의 명예를 위하여 大事一番(대사일번) 新生活(신생활)의 건설을 위하여 奮起(분기)하지 아니하려는가 생존경쟁의 국제생활의 舊習(구습)을 打破(타파)하고 相愛相助(상애상조)의 新世界(신세계) 질서를 건설하지 아니하려는가. 利己物慾(이기물욕)의 地獄相(지옥상)을 超脫(초탈)하여 愛他道義(애타도의)의 天國)(천국을 건설하지 아니하려는가. 天運(천운)의 願望(원망)이 바로 이것임을 우리는 確信(확신)한다.
3). 大同主義 要領(대동주의 요령)
(1). 圓融和合(원융화합)의 정신으로 세계평화, 人類一家(인류일가)를 이상으로 한다.
(2). 萬物一體(만물일체), 人類平等(인류평등)을 信(신)한다.
(3). 교육과 산업을 혁신하여 敎場卽職場(교장즉직장), 職場卽敎場(직장즉교장) 제도를 확립한다. 이리하여 人(인)의 新化神化(신화신화), 物(물)의 新化神化(신화신화)를 圖(도)하여 人長壽(인장수), 物長壽(물장수)의 세계를 致(치)한다.
(4). 종교와 과학을 조화하여 종교를 정신으로 하는 과학을 발전한다. 이러하므로 인생의 物神(물신)양면의 생활의 調和統一(조화통일)을 추구한다.
(5). 우주를 大道場(대도장)으로, 萬物(만물)을 經典(경전)으로, 生活(생활)을 修行(수행)으로 하여 인생의 일생을 且敎且學(차교차학)의 연속으로 한다.
(6). 相愛相助(상애상조), 共存共榮(공존공영)으로써 개인생활, 국가생활의 기본 원리로 삼는다.
(7). 大同朝鮮(대동조선), 大同世界(대동세계)를 건설하여 萬民皆樂(만민개락)의 地上天國(지상천국)을 실현한다.
4). 大同主義標語(대동주의표어)
(1). “나”라고 말자. 오직 “우리”라고 하자.
(2). 일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면서 일하자.
(3). 사람이 되면서 일을 하고, 일을 하면서 사람이 되자.
(4). 내가 만드는 물건은 동포가 쓸 물건.
(5). 살자고 하는 일인가 일하고자 사는 목숨이지.
5). 大同敎學會細領(대동교학회세령)
(1). 圓融和合(원융화합)한 인류사회의 건설을 기함.
(2). 교육제도, 산업제도를 혁신하여 敎場卽職場(교장즉직) 職場卽敎場(직장즉교장)하여 實物敎育(실물교육)의 실현을 기함.
(3). 종교와 과학을 조화하여 과학으로 하여금 인류의 진보와 원융화합을 해하는 일이 없게 하기를 기함.
(4). 인류의 생활을 極致(극치)로 향상시켜 平等(평등)을 이르게 함. (이종만, “대동일람,”『농업조선』 (194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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