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0, 2022

3] 조성환, 이종만 선생의 개벽사상과 이상국가

이종만 선생의 개벽사상과 이상국가

조성환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1. 들어가며 – 대동과 개벽

이 글은 일제강점기에 ‘금광왕’으로 알려진,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잊혀진, 남호 이종만(李鍾萬, 1885~1977)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하는 시론이다. 지금까지의 이종만에 관한 학계의 연구는 서너 편에 불과하고, 분야도 경제나 산업에 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방기중, 「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한국사연구』 95, 1996: 139-178.

2. 전봉관,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의 31전 32기」, 『럭키경성 – 근대 조선을 들썩인 투기 열풍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살림출판사, 2007: 145-179.

3. 최윤경, 「일제강점기 이종만의 대동콘체른 운영에 대한 소고」, 『울산문화연구』 2집, 2010: 103-118.

4. 이준열 글・이달호 편저, 「대동사회를 꿈꾼 ‘대동콘체른’」, 『선각자 송장 이준열의 삶 – 3・1운동, 고학당 교육, 광주학생운동, 대동사업의 증언』, 혜안, 2012: 177-234.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부분 이종만이 설립한 ‘대동콘체른’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이다. ‘대동콘체른(大同Konzern)’은 이종만이 ‘대동’의 이념을 바탕으로 결성한 ‘기업결합체’를 말한다. 방기중은 이것을 ‘대동사업체’로 번역하고 있고, 이종만은 ‘대동체계’[1]라는 개념도 쓰고 있다.

그런데 이종만은 경영자나 자본가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이자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뚜렷한 ‘사상’을 가지고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자를 대우했기 때문이다. 그 사상이 바로 ‘대동(大同)’이다. ‘대동’은 “크게 하나 된다”는 뜻으로, 고대 중국의 유교 문헌인 『예기(禮記)』「예운(禮運)」에 나오는 말이다. 그 출전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하였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면 천하를 공(公)으로 여겨(天下爲公) 어질고 유능한 인물을 선택하고 (…) 남의 부모나 자식도 자기 부모나 자식처럼 여긴다. 노인은 생을 편안히 마치게 하고, 청년은 쓰일 곳이 있게 하며, 어린이는 길러지는 곳이 있게 하고, 환과고독과 병자들은 부양받는 곳이 있게 하였다. 남자는 (사농공상의) 직분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다. 재화는 (…) 자기에게만 감추어 두지 않았고, 힘은 (…) 자기를 위해서만 쓰지 않았다. (…) 그래서 도적이 일어나지 않았고, 문을 닫고 지내는 일이 없었다. 지금의 세상은 대도는 이미 감추어지고, 천하를 일가(一家)로 여기고, 자기 어버이만을 친애하며 (…).

이에 의하면 ‘대동사회’란 남도 자기처럼 여겨서 자기가 가진 것을 남들과 공유하며, 그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살아가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는 사회를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己’(자기)의 영역을 넘어서 ‘公’이 실현된 평등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예운」의 이 글이 나온 이후에 동아시아에서 ‘대동’은 하나의 이상 사회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가령 조선후기에 농민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시행된 재정제도의 명칭은 ‘대동법(大同法)’이었다. 19세기말에 중국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도 『대동서(大同書)』를 저술하여, 자신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대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냈다. 총 10장으로 이루어진 목차의 제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국경 없이 세계를 하나로”, “계급 차별 없는 평등한 민족으로”, “인종 차별 없는 하나의 인류로”, “남녀 차별 없는 평등의 보장”, “가족 관계가 없는 천민(天民)으로”, “산업 간의 경계를 없애 생업을 공평하게 한다”, “인간과 짐승의 구별을 없애 모든 생명체를 사랑한다.” 「예운」과의 차이는 계급이나 인종 또는 남녀 간의 ‘차별’을 없앨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인간과 짐승 간의 구별도 뛰어 넘은 무차별적 사랑을 말하고 있다.

특히 본 발표의 주제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그와 같이 가족제도가 사라진 상태의 사람들을 ‘천민(天民)’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2] ‘천민’은 20세기 초에 천도교에서도 사용된 개념으로, 그 기원은 19세기 말의 동학지도자 해월 최시형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천도교에서 사용된 용례를 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며, 경어를 쓰며, 서로 존중하는 데서 모두 다 심열성복(心悅性服)이 되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나눠 먹으라는 데서 모두다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그때야말로 천국천민(天國天民)들이었지요.”[3]

이것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충남 서산에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활약했던 홍종식(洪鐘植)의 강연의 일부이다.[4] 여기에서 홍종식은 차별이나 구별 없이 서로 나누고 돕는 동학 도인들을 ‘천민’이라고, 그리고 그런 사회를 ‘천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천국’은 『예기』나 캉유웨이 식으로 말하면, ‘대동’이 실현된 사회에 해당한다.

한편 홍종식이 말하는 천민 개념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해월 최시형이 말한 ‘천인(天人)’ 개념에 다다르게 된다. 해월은 “사람은 하늘사람이다(人是天人)”고 했는데, 이 본래의 천인(天人)이 실현된 상태를 ‘천민’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학과 천도교에서는 이와 같이 천민이 사는 천국을 만드는 사상운동을 ‘개벽’이라고 했다. 개벽은 원래 “하늘과 땅이 열린다”는 뜻으로 쓰이던 개념인데, 1860년에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가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사상용어’[5]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개벽’은 중국적으로 말하면 대동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나 행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동이 실현된 이상사회도 ‘개벽’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개벽한다”는 동사로 쓰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개벽세상”는 명사로 주로 쓰인다.

이처럼 중국의 ‘대동’과 한국의 ‘개벽’은 하나같이 이상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서로 상통하고 있다. ‘대동’을 말한 이종만을 ‘개벽’의 관점에서 고찰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종만은 ‘대동콘체른’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동사회’를 꿈꾸었다. 동시대의 천도교에서는, 1920년에 창간한 『개벽』이라는 잡지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개벽세상’을 지향하였다. 마찬가지로 1919년에 ‘불법연구회기성조합’으로 시작한 원불교에서도 ‘정신개벽’을 통해 모두가 하나되는 ‘일원(一圓)’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문에서는 먼저 이종만의 대동사상을 소개하고, 그가 지향한 이상사회가 어떤 사회였는지를 살펴본 뒤에, 그것을 동시대의 개벽사상과 비교하고자 한다. 다만 이 글의 제목을 「이종만의 대동사상과 개벽종교의 개벽사상의 비교」라고 하지 않고, 「이종만의 개벽사상」이라고 한 이유는 앞 발표자의 제목에 ‘대동사상’이 들어 있어서, 대동사상에 대한 내용은 어느 정도 소개되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개벽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보았다.


2. 이종만의 대동사상

이종만은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그가 『광업조선』과 『농업조선』에 쓴 권두언이나 「대동일람 서문」이나 「대동교학서 취지서」 그리고 당시의 신문에 실린 그의 인터뷰 등을 통해 재구성해야 한다.[6]

(1) 도덕지향과 정신수양

이종만은 1939년 6월 1일에 『삼천리』와 가진 대담에서[7] “선생의 인생의 락(樂)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대담자의 질문에 “나의 락(樂)은 도(道)를 닦는데 있다”고 답하였다. 이어서 ‘도’란 “옛 성현의 교훈”을 말하고, 그 도를 만분의 일이라도 닦고자 한다고 부연하였다. 여기에서 “옛 성현의 교훈”은 동양고전 개념으로 말하면 ‘교(敎)’에 해당하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수도(修道)’를 말한다.

이로부터 이종만이 옛 성현의 ‘가르침’을 인생의 ‘길’로 삼아서,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옛 성현의 가르침에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없다. 단지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메시지가 있을 뿐이다. 이종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호의호식하지 않았다.”[8] 그래서 대담자가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의 즐거움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그런데 이종만은 옛 성현의 가르침을 어느 하나로 한정시키지 않았다. 석가든 공자든 예수든 “성인은 모두 숭배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중생 구제를 위한 석가의 구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한 예수의 가르침, 도를 실현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한 공자의 노력을 본받고자 애쓴다고 하였다.[9] 이것은 마치 신라의 최치원이 화랑의 풍류도를 설명하면서 “포함삼교(包含三敎)”라고 말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풍류도가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두루 수용하였듯이, 이종만 역시 동서양의 성인들의 가르침을 두루 실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대담자는 이와 같은 이종만의 구도의 노력을 ‘정신수양’이라고 표현하였고, 이에 대해 이종만은 정신수양 이외에도 “다 같이 잘 사는 길”을 찾고 있다고 대답하였다.[10] 이로부터 이종만의 궁극적 목적이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정신을 수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대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정신개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향은 1945년에 나온 「대동교학회 취지서」에도 이어지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을 맞은 직후에 쓰여진 이 취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타의 자비, 공자의 인의, 예수의 박애는 시(時)와 인(人)은 다를지언정 인류평화의 유일무이한 새생활 원리이니, 오직 이 원리의 실천만이 세계평화의 요체이다.

여기에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유교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창시자들이 설파한 핵심 윤리가 열거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윤리가 장차 인류평화와 세계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생활 원리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종만이 ‘평화’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통사상, 그중에서도 특히 종교사상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가 전통 도덕이나 정신수양에 관심이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종만은 어떤 평화사상을 말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금광왕’이라는 이미지는 ‘도덕’은 물론이고 ‘평화’와도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2) 산업평화와 인류공영

이종만의 평화지향성은 그가 ‘금광왕’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930년대 말부터 이미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1938년 8월에 나온 『광업조선』 2권 6호에 실린 「북지사변(北支事變)과 시국인식」이라는 글의 첫머리에서 이종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희구하고 애호해 마지않는 한사람입니다. 이 생각은 먼저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희구하고 애호해 마지않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11]

‘북지사변’은 1937년 7월에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 근처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린 것을 계기로,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만주와 조선에 대규모 군대를 파병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과 일본 간의 전면 전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직후이어서인지, 이 글에서 이종만은 동양평화는 물론이고 세계평화에 대한 염원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세계평화의 당위성은 이후에는 “인류동포”나 “만물일체”와 같은 사상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예를 들면 1945년에 나온 「대동교학회 취지서」나 「대동주의 강령」에는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교육에 있어서는 좁고 답답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보편타당성을 가진 진리를 지초로 하되, “인류동포 세계일체”의 정신으로써 국민정신의 기조를 삼고...

(「대동교학회 취지서」)

1. 원융화합의 정신으로 세계평화, 인류일가(人類一家)를 이상으로 한다.

2. 만물일체, 인류평등을 믿는다.

(「대동주의 강령」)


여기에서는 편협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더 나아가서는 인간중심주의까지 탈피해서 인류와 만물을 동등하게 여기는 화합의 정신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종만이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이 없는 상태도 평화라고 말하고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것을 ‘산업평화’라고 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자본주의의 결점을 말하는데 노동과 자본의 대립 현상을 든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도 과거 어느 한 시기는 노동과 자본이 극도로 대립되어 반목과 불평의 정도를 넘어 심각한 정치투쟁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한다면 일가(一家)의 생활도 가족끼리 불평이 있으면 행복한 가정을 건설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전 사회적인 산업체계에 있어서 서로 반목하고 불평하고 투쟁하고서야 어찌 완전한 산업발달을 도모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이종만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으로 노동과 자본의 불화(不和)를 지적하면서, 이러한 불화로 인해 산업발달이 저해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산업발달을 중시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37년 12월에 나온 『광업조선』 2권 10호에 쓴 권두언 「대관(大觀)하자」에서 이종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무슨 사업을 하든지 무슨 활동을 하는 것은 궁극에 있어서는 “잘 살아 보자”는 것이다. 농장・광산 등의 영리사업이든지 교육・문화 등의 사회사업이든지를 불문하고 모두 자기를 위하고 자기의 잘 살 길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 글은 1970년대에 우리에게 익숙했던 “잘 살아 보세”라는 표어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산업이나 교육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잘 산다”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잘 살기 위해서는 산업이 발달해야 하는데, 노사 간의 불화가 지속되면 산업의 발달을 저해하므로 노사 간의 평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 점은 위에서 인용한 「산업평화론」의 글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비로소 우리의 ‘산업평화’를 제창하는 이유가 있지만, 우리 산업이 완전한 발달을 하자면 첫째 그 기관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일상의 사소한 일이라도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서로 화합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된 정신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업평화의 길을 오직 공존공영의 협조정신에 있다는 것을 여러 번 제창해 온 바인데, 만약 우리 산업체계 안에서 생산의 분배가 균등하지 않거나, 작업상 대우에 차별이 있다거나 하면 이것은 결코 참된 공존공영의 협조정신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능률 향상에 나태하다든지 소비절약을 잊어버린다면 이것 또한 공존공영의 협조정신은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노사 간의 관계가 갈등에서 화합으로, 불화에서 협조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산업의 발달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산업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호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자본가는 분배의 공정과 차별의 철폐를 실천해야 하고, 노동자는 근면 성실과 근검 절약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산업평화는 노사 간의 상호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잘 사는” 공존공영의 대동세상을 만들기 위한 길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산업평화는 인류평화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실심실학과 평생교육

이종만이 산업의 발달을 중시하고 있는 점은 동아시아사상사의 개념으로 말하면 ‘실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교육에 있어서도 실물을 가르치는 실물 교육을 중시하였다. 1941년 4월에 『광업조선』 권두언에 쓴 「실물 교육의 의의」에서 이종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교육이라고 하면 옛날에는 경서 배우는 것으로 알았고, 지금은 학교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우리 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기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참다운 교육은 어디서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가? (…) 어떠한 사물에서든지 우리는 힘써 배우고 힘써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직장에서나 길거리에서나 사교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또 끊임없이 가르칩시다. 이것만이 우리 개인을 완성시키고 사회를 발달시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교육과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개인 완성과 사회 발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육 중에서도 특히 ‘실물 교육’을 강조하고 있는데, 실물 교육은 달리 말하면 실학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실물 교육에 대한 강조는 그가 인류 공영의 길로서 산업 발달을 중시한 점과도 상통하고 있다.

이종만이 실물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는 교육이 실생활과 결부되어야 한다는 실학적 태도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동교학서 취지서」(194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래의 교육은 실생활에서 유리된 이른바 학원 교육이었고, 종래의 산업은 교학을 떠난 고역이었다. 이리하여 교학과 근로가 서로 분리될뿐더러 교학하는 자는 교학만 전하고, 근로하는 자는 근로에만 몰두하여, 교학 없는 자와 근로 없는 자가 생겨나게 되니, 이는 국민을 기형화하는 것이다. 인생은 모름지기 평생 교학, 평생 근로로 수련과 보은에 끊임이 없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문화가 뒤떨어지고 산업이 초창기에 있는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교학과 근로의 일체화, 보편화, 평생화는 절대로 긴요한 것이다. 이것이 ‘직장 즉 교학’, ‘교학 즉 직장’을 제창하는 까닭이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교육과 생활의 분리, 교육과 노동의 분리를 지적하고 있다. 즉 배움과 생활, 배움과 노동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노동이나 직장을 하나의 인격 완성을 위한 활동이자 마당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 교학’과 ‘교학의 평생화’를 주창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평생 교육’에 해당한다. 이미 이 당시에 현대적인 평생 교육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이 또한 우리가 아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근대적 실학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근대적이라기보다는 ‘현대적’이라는 편이 어울릴 것 같다.

한편 이종만의 실학관의 또 다른 특징은 단지 ‘실용실학’이나 ‘산업실학’만을 주창한 것이 아니라 도덕성까지 겸비한 ‘실심실학’을 지향했다는 점이다.[12] 그리고 이런 태도는 앞에서 살펴본 옛 성인을 흠모하는 종교적 지향성과도 상통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45년에 나온 「대동교학회 취지서」에는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마땅히 장차 도래하는 세계의 선구가 되기를 기약할 것이요, 이러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천품(天稟)을 발휘하여 인류의 진운(進運)에 기여함이 될 것이다. 이에 기초가 되는 것은 교육과 산업의 개조다. 교육에 있어서는 편협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보편타당성을 지닌 진리를 기초로 하되, 인류동포 세계일체의 정신을 국민정신의 기조로 삼고, 종교와 과학의 조화, 교장(敎長)과 직장(職場)의 합일로 양익(兩翼)을 삼을 것이다. 종교를 떠난 과학은 항상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도구,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폭력을 이루기 쉬우니, 자비와 인애의 근본정신 위에 선 과학이야말로 능히 이용후생의 본연한 성능을 발휘할 것이다. 산업도 종교를 떠날 때에 개인에 있어서는 물욕의 추구가 되고, 국가에 있어서는 침략의 동기가 되는 것이니, 세계가 최근에 경험한 양대 전후의 참화는 실로 종교를 떠난 과학과 산업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서 이종만의 세계 대전의 원인을 과학과 산업이 ‘종교’를 떠난 데에 있다고 진단하고서, 종교와 과학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양자가 겸비된 상태야말로 ‘이용후생’이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용후생’은 조선의 실학자들이 사용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홍대용과 정제두는 도덕과 양심이 바탕이 된 실학을 ‘실심실학’이라고 하였다. 이종만도 도덕과 종교에 바탕을 둔 과학과 산업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실심실학자’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다른 곳에서는 이와 같은 실심실학적 태도를 “물질과 정신의 통일”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1940년 3월에 『광업조선』 제5권 3호에 쓴 권두언 「물질과 정신의 통일」이 그것이다.

우리는 왜 물질적 생활이 윤택하지 못하며 정신적 활동이 풍부하지 못한 것은 한탄하는가? 이 결함은 오로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이 물질과 정신을 따로 떼여서 어느 한 편만을 편협하게 생각하는 데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물질적 생활에 탐닉해서 불의와 부덕을 감행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정신적인 유지에만 골몰해서 현실을 떠난 고담준론만 일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이런 폐해의 적절한 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의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양자를 균형있게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정신이 실심이라고 한다면, 물질은 실학에 해당한다. 이종만이 보기에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정신과 물질, 실심과 실학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원불교 식으로 말하면 물질개벽과 정신개벽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이종만의 사상을 ‘도덕’, ‘평화’, ‘실학’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세 가지 키워드는 그가 대동세계를 건설하는데 핵심이 되는 가치들이다. 그런데 이 세 가치들은 동시대의 개벽종교에서도 강조되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종만이 지향한 가치와 사상을 개벽종교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3. 개벽종교와의 비교

지금까지 살펴본 이종만의 사상은 동학/천도교나 원불교와 같은 개벽종교에서도 대부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하에서는 하나씩 차례대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도덕지향과 정신수양>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덕지향과 정신수양은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다만 19세기말~20세기초는 서세동점의 영향으로 이런 전통이 흔들리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대해서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도성립덕(道成立德)”이라고 하여 새로운 “도덕수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인의예지는 앞선 성인의 가르침이지만, 수심정기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다”(「수덕문」)고 하면서, 과거의 구도덕이 아닌 새로운 신도덕을 제창한 것이다. 나아가서 그 신도덕을 몸소 실천했는데, 가령 자신이 거느리던 두 노비를 해방시키고,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은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최제우를 이은 해월 최시형도 “반상(班常)의 구별은 사람이 정한 것이다. 하늘은 반상을 구별하지 않는다”(『해월신사법설』「대인접물」)고 하면서, 천민 출신인 남계천을 전라도의 통학을 통솔하는 ‘편의장’이라는 높은 직책에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물도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 만물시천주(萬物侍天主) 사상까지 설파하면서, 인간 이외의 존재까지도 인간과 같은 하늘님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존엄과 평등 사상은 캉유웨이가 『대동서』에서 말한 “인종과 계급의 차별이 없고” “인간과 짐승의 구별이 없이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는” 대동세상, 그리고 이종만이 「대동교학회 취지서」와 「대동주의 강령」에서 말한 “인류동포, 세계일체” “만물일체, 인류평등”의 대동세계와 상통한다. 특히 이종만이 「대동주의 강령」에서 말한 “인(人)과 물(物)의 신화(新化)와 신화(神化)”는 사람과 사물을 새롭게 하고 신성화한다는 점에서, 해월이 『해월신사법설』「개벽운수」에서 “인과 물이 새롭다(人與物亦新乎)”고 한 말이나, 천도교를 창시한 의암 손병희가 『의암성사법설』에서 설파한 “인여물개벽설(人與物開闢說)”과 상통한다.

이렇게 보면 캉유웨이, 동학/천도교, 이종만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서양 과학의 위력 앞에서 도덕을 강조했지만, 그 도덕은 전통 도덕에만 머물지 않았고,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보다 확장된 새로운 도덕이었다.

두 번째로 <평화사상과 인류공영>에 대해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해월 최시형은 “천지가 만물을 낳은 부모”라고 하는 ‘천지부모설’을 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그 결과로서 만물은 천지라는 부모에게서 나온 동포라고 하는 ‘만물동포설’ 또한 설파하였다. 동학을 이은 천도교에서도 이돈화의 ‘한울’(『신인철학』, 1931)이나 ‘세계일가’(『당지』, 1946) 개념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세계주의’를 표방하였다.[13] 뿐만 아니라 원불교의 제2대 지도자였던 정산 송규도 원불교는 ‘세계일가’와 ‘세계주의’를 표방한다고 말하였다.[14] 이러한 사상들은 앞에서 살펴본 이종만의 “인류동포, 세계일체, 일류일가” 사상과 상통하는 것이다.

평화사상 역시 개벽종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특히 동학은 생명사상에 바탕을 둔 평화사상을 말하였다. 가령 최시형은 “어린 아이도 하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때리지 말라”는 설법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사상이 동학농민군의 규율에도 반영되어, 「사대명의(四大名義)」에 “절대로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切勿傷命)”는 조항이 들어가 있다.[15] 1919년의 삼일독립운동 때 비폭력 평화운동의 형태를 취한 것도 이러한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이종만과 같은 ‘산업평화’ 사상은 개벽종교에서는 직접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개벽종교는, 원불교식으로 말하면 도학과 과학 중에서 ‘도학’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종만은 과학 쪽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종만이든 원불교든 도학과 과학, 정신개벽과 물질개벽 중에서 어느 하나만 중시한 것은 아니다. 양자 모두 ‘겸전(兼全)’해야 한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실천 상에서는 상대적으로 각각 도학(수양)과 과학(산업)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심실학과 평생교육>을 보면, 이종만과 마찬가지로 개벽종교에서도 종교와 과학의 조화를 지향하고, 물질과 정신을 분리시키지 않으며, 직장과 교육을 병행하고자 했다. 이런 측면은 특히 원불교에서 두드러진데, “도학과 과학의 병행”이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슬로건, 또는 생활 속에서 불법을 찾는 ”생활불교”를 정체성으로 표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이종만이 1940년 8월에 쓴 『광업조선』의 권두언 「보은의 생활」에서 “사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원불교의 은사상(恩思想)과 상통한다. 먼저 이종만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신명(身命)은 실로 사회 각층의 무수한 인간의 협력의 소산으로 길러진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을 누리고 있는 동안 언제나 사회에 대한 은공(恩功)을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 (…)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리고 있는 이상, 그 삶이 존재하고 길러지는 근본을 생각하여 불평을 바꾸어 감은(感恩)의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직 보은(報恩)의 생활을 함으로써 이 사회를 더욱 유복하게 하고, 그 결과는 우리 일대의 행복을 증진함에 그칠 뿐 아니라, 대대손손 그 그늘을 두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939년 2월에 나온 『광업조선』 4권 2호에 쓴 「공존공영(共存共榮)」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또 나 혼자만 살 수 없는 세상이다. 남과 내가 서로 얽히어 비로소 삶을 얻게 된 세상이다.

여기에서 이종만은 세상은 나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나 이외의 것들의 도움 덕분에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도움을 ‘은혜’로 느끼면서[感恩], 그 은혜에 보답하는 보은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원불교의 교리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상이 원불교의 ‘은(恩)’ 사상과 유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불교에서도 내가 나일 수 있는 까닭은 나 아닌 것들의 도움이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는 ‘지은(知恩)’과,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보은(報恩)’ 사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6]


4. 맺으며

지금까지 이종만의 대동사상을 “도덕, 평화, 실학”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보고, 그것과 개벽사상과의 공통점을 고찰하였다. 물론 이종만과 개벽종교 사이에는 유사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과학과 산업에 대한 강조의 정도도 다르고, 조직의 형태도 종교단체와 산업단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즉 최제우나 최시형, 또는 박중빈이나 송규가 한 종교의 창시자나 리더들이었다고 한다면, 이종만은 한 기업의 창업자나 경영자였다. 뿐만 아니라 이종만이 개벽종교에서와 같은 ‘선천-후천’의 운도설(運度說)을 믿었다는 흔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모든 차별이 사라진 대동세계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같다. 특히 이종만은 광부나 농민과 같은 노동자들의 행복과 복지 실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점은 당시에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한 천도교도 공유하고 있었다. 이종만이 창간한 『농업조선』에 천도교와도 관련이 깊은 이성환(李晟煥)의 글이 실려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7] 이성환은 동경유학생으로, 1925년에 천도교에서 조선농민사를 창립하고 『조선농업』을 창간할 당시의 주역이었다. 이종만 식으로 말하면, 당시의 천도교와 이종만은 ‘농업평화’라는 이상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종만은 넓은 의미에서 근대 한국의 개벽사상 내지는 개벽운동의 한 흐름에 넣어도 큰 무리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광업조선』, 1936~1940.

이종만, 「대동일람 서문」, 1941.

「대동교학서 취지서」, 1945.

창랑객(滄浪客), 「사장 방문기(1) : 이종만씨 사업관, 씨는 대동광업사장, 대동농촌사장, 대동공전교주(大同工專校主)」, 『삼천리』 11권 7호, 1939년 6월 1일

박맹수, 「공공하는 철학에서 본 동학의 공공성,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14.

박맹수, 「전봉준의 평화사상」, 『통일과 평화』 9-1호, 2017.

방기중, 「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한국사연구』 95, 1996.

유병덕, 『원불교와 한국사회』, 시인사, 1986(개정증보판).

이준열 글・이달호 편저, 「대동사회를 꿈꾼 ‘대동콘체른’」, 『선각자 송장 이준열의 삶 – 3・1운동, 고학당 교육, 광주학생운동, 대동사업의 증언』, 혜안, 2012.

전봉관, 「금광왕 이종만의 ‘아름다운 실패’ -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의 31전 32기」, 『럭키경성 – 근대 조선을 들썩인 투기 열풍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살림출판사, 2007.

조성환, 「현대적 관점에서 본 천도교의 세계주의 : 이돈화의 지구주의와 지구적 인간관을 중심으로」,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84, 2020.

최윤경, 「일제강점기 이종만의 대동콘체른 운영에 대한 소고」, 『울산문화연구』 2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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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종만, 「대동일람 서문」, 1941.


[2] 『맹자』의 「만장(하)」에도 ‘천민’ 개념이 나오지만, 이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고, 문맥상 차별이 없어진 상태의 사람들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天生之民”, 즉 “하늘이 낳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伊尹曰: “天之生斯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 予, 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此道覺此民也.”


[3] 홍종식 강연·춘파 기록, 「70년 사상 최대 활극 동학란실화」, 『신인간』 34, 1929.04. 박맹수, 「공공하는 철학에서 본 동학의 공공성,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14, 175쪽에서 재인용(강조는 인용자의 것).


[4] 홍종식에 대해서는 박맹수, 〈(톺아보기) 잊지 못할 그날 - 3·1 독립만세운동의 전후〉(《독립기념관》 397권, 2021년 3월호)를 참고하였다.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52/post-548.html)


[5] “이 개벽이란 말이 사상(思想, Ideology)으로 전개되기는 1860년 동학사상이 나오면서부터라 생각된다.” 유병덕, 『원불교와 한국사회』, 시인사, 1986(개정증보판), 30쪽.


[6] 이 중에서 『광업조선』의 권두언을 제외한 자료들은 김반아 선생님으로부터 제공받았다.


[7] 창랑객(滄浪客), 「사장 방문기(1) : 이종만씨 사업관, 씨는 대동광업사장, 대동농촌사장, 대동공전교주(大同工專校主)」, 『삼천리』 11권 7호, 1939년 6월 1일. 이 기사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한국근현대 잡지자료 <삼천리>”에서 열람이 가능하다(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ma).


[8] “실례지만 長安 부자 처노코 妻妾 거느리지 않은 이 드물고 또 부자 소리 듯는 이면 의례 阿房宮 같은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그리고는 美衣美食하는 것이 통례인데 선생만은 불과 수천원되는 조고만한 집에 게시고 寵妾햇단 말 못들었고 남들처럼 美酒美衣하시지도 않으니 선생의 인생의 樂은 어데에 있음니까.”


[9] 李: “나의 書架에는 經書가 노여있어요. 그것은 녯 성현의, 이것을 기회있는 대로 보면서 吾日三省吾身 하는 부즈런으로 이 세상에 아못조록 도음되는 몸으로서 지내려 생각하여요.”

기자: “釋迦서요.”

李: “녜. 釋迦께서는 환락의 王城과 고귀한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人世의 번뇌를 해결코저 중생을 구제하시려 몸소 그 艱難의 修道를 하시지 안엇슴니까. 저도 이 세상의 슲음과 쓰라림을 다만 조곰이라도 구하는 몸이 되어지이다 하고 염원하는 길에 섯슴니다.”

기자: “釋迦牟尼뿐이심니까?”

李: “성인은 다 숭배 함니다. 기독께서는 제 손소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까지 저의 원수까지 용서하실 것을 말슴하였서요. 나도 내 몸이 낫즌 것을 常時 생각하여 아모조록 또 어떠한 경우에든지 남을 용서하고 같이 잘 사라갈 길을 찻는 使徒가 되려해요.”

기자: “선생은 漢學의 素養이 깊으시다니 그리면 孔夫子께도.”

李: “네. 論語도 깊이 읽슴니다. 孔夫子께서 늙으실 때까지 轍環天下하시며 세상에 道를 펴시기에 애쓰신 그 정신과 노력을 본받으려고 애씀니다.”


[10] 기자: “그러한 정신수양 하시는 길 이외에 또 다른 일이 없음니까.”

李: “다 같이 잘살 길을 찻자는 일 이외에는 없오이다.”


[11] 이 발표문에서 인용하는 이종만의 글은 가독성을 위해 현대어로 약간 바꿔서 인용하였다.


[12] 일본의 유학연구자인 오가와 하루히사는 근대 일본의 실학은 실리와 실용만을 추구한 실용실학이자 실업실학이었다고 비판하면서, 실심(=도덕심)까지 같이 추구한 조선후기의 홍대용과 같은 실심실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오가와 하루히사, 「실심실학 개념의 역사적 사명」, 『한국실학연구』 18, 2009.


[13] 정용서, 「일제하·해방후 천도교 세력의 정치운동」, 연세대 박사논문, 2010, vi쪽, 77-78쪽 각주 111), 208-210쪽, 225-226쪽.


[14] 『정산종사법어』 제2부 법어 제13 道運編 24장, 33장. 원문은 인터넷 싸이트 <원불교 경전법문집>

(https://won.or.kr/bupmun) 참조.


[15] 동학농민군의 「사대명의」에 대해서는 박맹수, 「전봉준의 평화사상」, 『통일과 평화』 9-1호, 2017, 84-85쪽 참조.


[16] 정성헌, 〈(원불교용어) 44. 지은 보은〉, 《원불교신문》 1779호. 2015.12.04.


[17] 1938년 1월에 나온 『농업조선』 창간호에 이성환의 「친애하는 농민에게 – 시세와 농민의 자각」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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