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26, 2022

브라질 이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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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어머니사][브라질 이민사] 브라질에 이민가서 어떻게 살았나? 왜 그렇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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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964년에 우리 가족이 브라질 이민선을 타는 이야기의 다음 편이다.
지난 글은 여기:
https://www.facebook.com/sejin.pak8/posts/10159598266837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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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글들은 우리 가족사의 코스를 제일 크게 좌우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왔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어머니사의 미스테리를 풀어보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번 글의 미스테리는 일제 시대에 각각 일본 대학에 유학을 한 사람들이 부부가 되고 가족을 이루고 1960대 초에는 40대에 중상층 생활을 하도록 가족을 이끌 던 사람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하게 <어떻게 브라질에 이민을 해서 부터는 블루 칼라가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이건 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처음으로 그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정보를 모아 답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4 형제들 사이에서도 이런 문제로 깊히 생각해 본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 아마도 우리 가족이 이민을 가지 않고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거의 틀림없이 중상층의 생활을 계속 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자식들도 적어도 중이상의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요즘의 한국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위 <은수저 집안>이다. 그런데 이민을 함으로 <흙수저 집안>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미스테리인 것인데, 물론 <거기서 해어나오는 이야기>가 따른다. 우선 브라질에서의 생활 수준을 알아야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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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라질 상파울로에서의 우리 가족의 생활 수준을 제일 간단하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어떤 곳에 살았는가가 제일 잘 말해준다. 간단히 말하자면 주택가 아파트촌인데, 주민들이 빈민층은 아니지만, 저소득층이다. 여러 종류의 아파트 건물이 있지만, 우리가 사는 아파트 건물은 거의 완베드룸 식인데, 거실이 베드룸보다 작다. 우리 식구가 살았던 곳에 대하여는 상징적인 외부 사진들이 있다. (사진 1,2,3) 우리 아파트에서 밤에 내다보이는 건너편 아파트 일층 길가의 사진인데, 밤이면 매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사진이 취미였던 나라서 이런 사진을 기록으로 찍었던 것이다. 상파울로에 처음 도착해서 약 6개월 후인 1965년 중순에 이쪽으로 옮겼다.  이사올 때는 그 거리에 이런 매춘 행위가 없었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도중에, 아마도 1966년 정도 부터 그렇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매춘을 하는 여성들의 일부는 우리 건물에도 살고 있어서, 그들이 손님을 대리고 자기 아파트로 올라갈 때 에레베타에 같이 타기도 한다. 이 여성들은 직업적인 매춘부가 아닐 수도 있다. 뚜쟁이가 없이 서비스 자영업을 하는 것이었다. 가난해서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나, 아파트 전체의 주민들로 보면 저소득층이지만 빈민층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 우리 가족은 이 아파트에서 약 3년 반을 살았다. 브라질에 처음 도착해서는 먼 친척이 되는 청년 두명이 사는 투 베드룸 집에서 방을 하나 빌려서, 우리 5인(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자식 넷) 가족이 한방에서 다섯명이 나란히 바닥에서 자곤 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살고 아파트로 옮겼는데, 이유는 그 아파트가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일본인 동내에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일본인 동내에 가깝고 아파트 월세가 낮은 곳으로 이사한 것이었다. 구글맵으로 그 동내, 그 길, 그 아파트 건물의 현재의 모습을 찾아보니, 6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별로 변화가 없는 듯하다. 여전히 저소득층의 주택가이다. (사진 )

- 사진 6은 우리가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1960년대에 살았던 원베드룸 아파트의 내부 구조를 나의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이다. 처음에는 5인 가족이, 일년 반 정도 후에는 아버지가 오셔서 6인이 살았다. 6인 같이 살려면 이런 사이즈의 아파트에서 같이 살려면 이민선 3등실의 이층 침대 생활과 비슷한 생활을 해야 했다. 아이들을 이층 침대 2개에서 자고, 부부는 다블 베드에서 잔다. 나는 이층 침대에서 자는 것이 답답하기도 하고, 공부를 늦게까지 하느라고 거실의 소파에서 자주 자곤 했다.  
-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가 브라질에서 살았던 주거 상태는 브라질이건 한국이건 하층 노동자 층의 레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진 1] Rua Oscar Cintro Gordinho, Sao Paulo, 1966년 경


사진 2] Rua Oscar Cintro Gordinho, Sao Paulo, 1966년 경


사진 3] Rua Oscar Cintro Gordinho, Sao Paulo, 1966년 경

사진 4] 




사진 5] Rua Oscar Cintro Gordinho, Sao Paulo, 2022년 경






사진 6] 우리가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1960년대에 살았던 아파트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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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면 어떻게 그렀게 되었을까? 

- 이 이야기는 어머니 자서전에서는 브라질에 이민하는데 수중에 돈을 미불 400불을 가지고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쓰여저 있는데, 나는 어머니가 자서전을 쓸 때까지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들었다고 해도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나지 않고, 브라질에 도착해서는 그런 사정을 알아도, 당장 살아가는 것이 바쁘니, 그걸 가지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살아가는 것이 바쁜 것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고, 50년 후인 어머니가 80대인 2000년대에 자서전을 쓰셔도, 그 부분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장남으로 어머니 유품 특히 일기와 편지 등, 글 쓰신 것들을 받았던 것들을 2022년인 드려다보는 지금에서야 그런 이슈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2010년에 출판 된 자서전에는 (사진) 브라질에 도착했을 대 가진 돈이 400불로 나오는데 실제로 1964년에 쓰여진 일기장에는 (사진) 200불로 나온다. 그렇다면 자서전의 나오는 이야기는 회상으로 쓰여진 것이고, 일기에 쓰여진 것은 그날 그날의 기록이었으니, 일기의 정보가 사실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400불이나 200불이나, 그 차이는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다. 사실 배를 타고 오면서 관광 등으로 쓴 돈도 있기 때문에 브라질에 도착해서는 수중에 돈이 거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 어떻게 한 식구가 브라질로 이민을 가는데 수중에 돈이 거이 없이 가게되었는가는 그 자체로 기가막힌 이야기이기는 한데, 이 부분에 대하여는 어머니 자서전에 대강 설명이 되어있기도 하고, 현재 나의 관심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세히 되풀이 하지 않으나, 아주 간단히 이야기해 두자면 브라질 이민을 떠나기 직전에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문제는 나에게는 미스테리가 아니다. 나에게 미스테리인 문제는 이런 상황을 어머니가 어떻게 다루었는가의 내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당시의 <어머니의 마음 상태>인 것이다. 1964년 당시에는 자식들은 사기에 대하여도 몰랐고, 어머니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브라질 가는 이민선에는 어머니는 자식들 눈에 뜨일 만하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고 나는 기억한다.   

브라질에 도착한 이후의 어머니의 마음 상태는 같이 살았으니 대강은 알았으나, 자세히는 몰랐다. 우리가 알은 것은 돈이 없다는 것었다. 브라질에 도착해서 얼마 안되자 9살 짜리 남동생 유진님 만 빼고 우리 가족 모두 (44세의 어머니, 16살의 나, 19살의 작은 누나, 20살의 큰 누나)가 아무 일이나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자서전에도 대강 나온다. 그러나 어머니 자서전을 읽어보아도 다른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도 사실 우리는 모두 이 시절에 대해 풀 픽처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모두 자기의 경험은 기억하나, 가족의 다른 사람의 생활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더군다나 마음 상태에 대하여는 서로 모른다. 누나 둘은 이일 저일 하다가 나중에는 일본인계 농협 사무실에 취직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브라질 신문사에서 주말 판 두꺼운 신문에 광고지를 끼어넣는 일을 했다. 우리 모두가 포르투갈어를 배우면서 언어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인 지역에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난 후로는 나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일본인계 출판사에 미성년 견습공으로 취직이 되었다. 그곳에서 약 2년 반을 풀타임으로 일한 것 같다. 어머니 역시 일본인계의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옷을 만드는 영세 공장이었다. 어머니는 브라질에 도착해서 어떻게 살아갈 까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은 없이 갔는데, 일기의 이곳 저곳에 나온 글로 보아서는 무엇이던지 하겠다는 각오와 자세로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펌프 장사라도 해야겠다는 말이 일기에 나온다. 한국에서 펌프 공장의 공장장을 했기 때문에 펌프에 익숙해서 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아버지가 브라질에 오면 긴 안목으로는 펌프 공장을 다시 시작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펌프 장사를 시작할 자본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봉재 일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일생동안 자봉틀을 써 본적이 없었다고 일기에 나온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소위 신 여성 교육을 받고, 일본 유학을 하여, 고등학교 교사, 회사 운영, 공장장, 그런 일 만 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뭐던지 할 각오가 있었고, 일본인계 봉재 공장에서도 경험이 없는 사람인데도 고용해 주어서 시작한 것이다 

- 여기서 의미있는 점은 우리 모두가 일본인계의 회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어머니가 브라질 말을 하지 못해도 일어를 할 수있고,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본인계 회사들을 찾아다니며 자식들의 직장도 찾아주고, 자기 자신의 직장도 찾은 것이다. 자식들은 일어를 하지 못하니 브라질(포르투갈)어를 배워가며 브라질어로 소통하며 일했지만, 어머니는 직장에서도 일어로 소통하며 일을 하게된 것이다. 브라질에 이민한 한국인들 중에 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초기 이민이고, 나이가 어머니 처럼 중년이상이지 않으면 일어를 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 어머니는 처음배우는 재봉틀 일에 자신도 놀랍게도 빨리 익숙해저서 오래 일하던 사람 만큼 빨라젔다고 한다. 얼마 동안 회사에서 일하다가 집에서 내직으로 일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가 열살 된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식구가 아무도 없어서 혼자있게 되는데, 혼자 있으면 동내의 아이들과 트러블이 생기는 경우가 일어나서, 어머니는 아무래도 집에서 일을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서 하는 봉재일이 점점 진화되어 옷을 박는 일이 아니라 여자 브라우스에 주름을 잡으며 박는 작업을 전문으로 하게되었다고 한다. 브라우스에 주름을 잡는 작업은 물론 더 기술이 필요하나, 동시에 수입이 더 많은 일이었다고 한다. 집에 공장용 미싱을 들여서 하루 종일 그런 일을 하여 수입을 꽤 올렸던 모양이다. 일제 시대의 신여성 출신의 중상층 부인이 브라질에서 의복 봉재 일로 살아가게 될 줄이야 본인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 이런 일을 몇년 간 한 결과는 그 후에 카나다로 이민을 가서는 계속 아픈 어께를 가지고 살게 되는 면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 살았어도 일본인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본 잡지 <세까이>나 일본책 등을 읽으며 살았던 것이 다른 노동자와 다른 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우리가 브라질에 살았던 1960년대 후반기의 우리의 생활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서 당시의 한국과 브라질의 일인당 GDP를 비교하는 등 여러가지를 찾아보았다. 당시의 브라질의 일인당 GDP는 한국의 그것의 두배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의 일기에도 나오는데, 브라질 사람들은 한국인 처럼 열심히 일하고 살지 않는 다는 관찰이 있다. 어머니는 브라우스에 무니 잡는 재봉일에 집중하기 위해 우리 집처럼 저 수입의 가정인데 불구하고 빨래와 청소를 하는 도움이를 고용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보다 더 저임금의 도움이 노동을 이용하는 방법을 취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의 한국의 생활 수준을 알아보려고 하며 알게된 또 하나의 사실은 봉재 노동이라면 같은 시기에 전태일이 평화 시장에서도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브라질에 이민을 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같은 시기에 전태일의 일과 비슷한 봉제노동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 나도 마찬 가지로 한국에 살았다면 대학입시 공부나 하며 살았을 텐데, 브라질에서는 소위 소년 견습공으로 일을 하며 살게 된 것이었다. 나의 공부 생활은 브라질에서는 한국의 중학 졸업장을 인정하지 않아 중학 졸업 자격증을 따기 위한 야간 속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중학종업자격증을 따고 난 후에는 고등학교 졸업자격증 반을 일년 다니다가, 그 후로 보통 고등학교에 일년 정도 다니게 되어 카나다로 재 이민하기 전에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게되었다. 

- 우리 가족이 아버지 없이 브라질로 이민한지, 약 일년 반 후에 아버지가 브라질로 오게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도 잘 모르나 그 동안 사기로 잃은 재산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 동안 한국서 격은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기로 하고,  브라질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두가지 하자면, 한가지는 아버지도 일어를 하기 때문에 브라질의 일본인계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경제대 공학부 출신의 엔지니어라는 점에서 일본회사에서 대우가 좋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브라질에서 엔지니어로 취직이 됨으로서 우리 가족의 생활은 갑자기 훨씬 나아젔으나, 우리는 계속 같은 싸구려 아파트에 살았다 그 이유는 카나다로 재 이민하는 계획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돈을 모아야했다.   












사진 7: 2010년에 출판된 어머니 자서전의 제 8장




사진 8: 어머니가 

어머니가 취직한 일본인계 영세 봉재 공장에서 (어머니는 왼쪽에서 세번 째. 다른 동양인은 모두 일본인들이다.)  









5a] 집에서 공장일이 아닌 바느질하는 어머니


5b] 봉재 노동을 하면서도 인테리 일본 평론잡지 세카이를 읽는 어머니

브라질 이민으로 소년 견습공이 된 나


일본인계 농협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게 된 아버지







6] 




7] 




8] 9살에 브라질에 왔는데 2년 만에 전교 일등을 한 동생

9]


한인들이 다니는 성당, 신부는 일본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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