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8, 2022

이남순 자서전(1998, 9월 14일) 버전 2

일선수기.docx - Microsoft Word Online

 

이남순 자서전(1998, 914) 버전 2, 책은 버전 3, 버전 1 (공책)도 있음

 

I. 출생(1922)부터 결혼(1944)까지

고향

서울로 (1934)

아버지

일본유학

황신덕씨에 대한 이야기

동대 조선인 유학생들: 김양하씨 부부와 박성철

 

II. 결혼(1944)부터 6.25동란의 시작 (1950)까지

결혼(194447)

반도호텔과 시청광장 분수대 사건

해방 후 아버지의 활동

어머니

 남편의 도미와 6.25전쟁 194911

동덕여고에 재취업

 

III. 1950-1951

6.25 전쟁과 피난

한강철교 폭파와 인력동원

부역자와 빨갱이

부산 - 방어진 - 용잠 (19514)

 

IV. 동경(1951) - 서울(1953) - 이민(1964)

일본으로의 비공식여행(밀항)

전후의 동경

부산에서 서울로(1953)

시부 사망

남편 귀국(1954)

유진 탄생

4.195.16

박대령에게 이민수속을 부탁 (1961 - 62)

인형과 은명이

시련의 인생시작

이민선

 

V. 브라질 이민생활 4년간 (1964-1968)

상파울로 생활(1965)

 

VI. 카나다 이민생활 정착과정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캐나다로 재이민(1968 10. 12)

 

VII. 나의 인생에 또다시 아버지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아버지와의 해우(1975. 9. 23)

평양방문

몸의 병을 마음으로 치료

이성으로서의 아버지와 남편

마음의 38(1978)

원불교와의 인연

 

VIII. 아이들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 (1968-1984)

옥경

은명이(Vana)

세진

유진

옥경

은명이(Vana)

세진

유진

남편의 사망 (198447)

 

IX. 홀로 서기 (1984년부터 현제까지)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

집수리

영혼의 편력

감성치유

 


I. 출생(1922)부터 결혼(1944)까지

 

고향

 

              나는 지금도 고향 마을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행복하다. 마을 앞에는 모래사장이 잔잔하게 펼쳐진 바다가 있었고, 뒤쪽으로는 옛날 나라에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연락수단으로 사용했다는 봉화대가 있는 높은 봉대산이 밭과 논으로 이어져 마을까지 쭉 뻗어 있다. 9살에 내가 입학했던 대현국민학교는 우리마을에서 10리나 떨어져 있었다. 위로 언니가 셋, 오빠 한 명이 있는 나는 5남매 중 막내로 바로 위의 언니와는 7살이나 나이 터울이 있다. 7년의 세월 동안 우리 어머니는 독수공방하셨다고 들었다. 외할머니께서는 당신 딸이 고생한다고 늦게 태어난 나를 내다버리라고 하셨다고 한다. 외할머니 댁에 어머니 심부름으로 내가 가면 방안에서 긴 곰방대를 입에 물으시고 내다보시면서 "순이 왔나?" 하시던 외할머니의 머리색은 지금의 내 머리색과 똑같은 깨끗한 은백색이었다.

              그 때는 남쪽에 바다를 끼고 있는 고향마을에도 눈이 많이 왔었다고 기억된다. 어촌인 고향은 바다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마을 앞은 모래사장이었지만 마을은 벗어 난 곳에는 큰바위들이 물가에서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물에 잠겨 있는 바위들은 갖가지의 해초로 덮여 있었다. 물이 빠져나갔을 때 해초 밑을 헤쳐 보면 고동, 해삼 때로는 새끼 전복도 있었다. 이런 것들을 잡아 바구니에 담고 해초도 따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연과의 어울림에서 느낀 행복감은 참으로 소중한 나의 인생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1922717(음력 윤달 57)에 아버지 이종만(李鍾萬)(1885년 음력 114~ 1987117)) 어머니 김두임(金斗任)(188372~ 1971218) 사이에서 14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젊어서부터 타향생활을 하시면서 작은어머니 장희선(張嬉善)(1893110~1974429)씨를 만나 그 사이에 아들 형제 네 명을 두셨다. 어머니를 기준으로 하면 언니가 셋 오빠가 둘 동생이 셋, 합해서 9남매 중 6번째다. 아버지께서는 가끔 물건을 사서 보내 주시곤 했는데 한번은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옷 중 타월지로 만든 예쁜 것이 있어 그 옷을 입고 마을로 나갔었다. 그런데 마을 청년중 한 사람이 "순이는 밤에 입는 옷을 낮에 입었네" 하는 말을 듣고 너무나 부끄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6학년이었던 언니가 1학년인 나를 아버지가 보내주신 망토 속에 집어넣고 보이지도 않는 10리 길을 걸어가곤 했다. 언니가 동생을 위해주던  정겹고도 따뜻한 마음을 지금도 내 가슴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나는 간직하고 있다. 내가 고향마을에 있는 동안 아버지는 딱 한번 다녀가셨다. 아버지께서 자주 오시지 않았기에 내가 4살 되던 해 어머니께서는 나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 함경도까지 가신 적이 있다. 그 때 돌아오는 기차에서 누군가가 준 감자를 먹고 심하게 체한 후 나이가 많을 때까지 나는 감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시골학교의 일본인 교장선생님께서 금줄이 달린 회중시계를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았다고 하시면서 나에게 보여 주신 적이 있다.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가 살아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같이 살아본 기억이 없다. 다만 아버지께서 보내주셨던 물건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면서 함께 살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한 것 같았다. 그 때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대부분 부모를 통해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배우지만 난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을 모시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지만 할아버지께서는 둘째 아들인 아버지와  함께 사셨다. 아버지께서 고향을 떠나신 후에는 어머니 홀로 시부모님을 모시게 되었고, 오랫동안 객지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는 작은어머니를 만나셨다고 한다.

              훗날 내가 서울에 올라와 아버지로부터 들어 알게된 사실로 아버지는 18세 까지 마을에 있던 서당에 다니시면서 한문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느 날 바다 쪽에서 들려오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이끌려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으로 가보았더니 큰배들이 불을 번쩍이면서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 광경을 지켜본 아버지는 '지금 바깥 세상에는 큰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고 느끼셨고 '나는 이 좁은 곳을 벗어나 더 넓은 바깥 세상으로 나가야겠다' 고 결심하신 후 고향을 떠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목격하셨던 그 사건은 바로 러일전쟁의 현장이었다.

              고향마을을 떠난 후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크게 성공하셨던 아버지는 민족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셨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오빠와 마을 청년들이 보여주는 신파극과 춤추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 때 보았던 춤이 러시아 민속춤이라는 것을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 마을에는 무당집이 있었는데 1년에 한 번 씩 굿을 했다. 그 때 무당이 놋쇠대야를 혀에다 부치고 빙빙 돌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내가 다니던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은 부인과 작은아들과 함께 2차대전이 끝난 후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큰아들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봉변을 면했다고 한다. 그가 다만  일본 사람이었기 때문에 살해된 것은 아니고 아마 다른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고향 산촌을 생각할 때 봄이 되면 산야를 덮던 할미꽃과 진달래꽃 그리고 바다 가까운 곳에  있던 언덕길옆을 보라색으로 물들였던 난초꽃의 아름다움은 항상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르곤 한다. 학교에서 토마토라는 것을 심어 처음으로 맛을 보았을 때의 그 비린 맛이 기억에 남아있다.  

 

서울로 (1934)

 

              학교가 멀어서 한해 늦게 들어간(한국 나이로 9)나는 서울로 옮기던 5학년 때 이미 13세였다. 나보다 한 살 위인 작은 집 시우 오빠가 울산 용잠까지 와서 나를 서울로 데리고 갔다.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울타리를 사이에 둔 오빠 부부가 사는 루하동 집이 나의 서울 첫 정착지였다. 청운 초등 학교로 전학했던 나는 시골학교에서 올라왔지만 상급학교 갈 준비를 하는 5,6학년 과정을 어렵지 않게 따라간 모양이다. 담임선생님께서 경기여자 고등보통학교에 추천을 해주셔서 시험을 보았는데 불합격이었다. 내 생각에는 정확한 답을 쓴 것 같은데 불합격이라고 하니 이상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았더니 답안지에 쓴 내 글씨가 너무 엉망이라 알아볼 수 없어 불합격처리가 된 것이라고 했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글씨 쓰는데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경기여고에 떨어진 후 나는 동덕여고로 입학을 했고, 조동식 교장선생님의 민족교육정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조교장 선생님은 수신시간에 숙제로 학생들로 하여금 펜글씨를 쓰게 하셨는데 그 이전에 누군가 조교장선생처럼 나에게 글씨 쓰는 연습을 시켰더라면 글씨 쓰는데 있어 열등의식은 가지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에대한 초보지식도 없던 나에게 첫월경은 나를 무척 당황하고 곤혹스럽게 했다. 여학교 2학년때 첫월경이 시작되었는데 그 전에 아무도 나에게 어떻게 처신 해야할 지에 대해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생리대를 삿는지는 모르겠으나 패드를 하지 않고 팬티만 입어 피 범벅이 되었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나의 무지에 대해 한심스럽기만 하다.

죽첨동에 위치한 큰집을 사서 이사를 한 뒤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오셨다.

 

아버지

 

              아버지는 여러 번의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신 경제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신 견지동에 사옥을 마련하시고 대동광업주식회사(大同鑛業株業式會社)를 창립하셨다. 대동광업주식회사(大同鑛業柱式會社) 안에는 1. 광업부(鑛業部), 2. 농업부(農業部), 3. 출판부(出版部) 4. 교육부(敎育部) 네 부가 있었다. 창립 당시 출판사에는 '광업조선' '농업조선' ' 교육조선'3가지 월간지를 발행하여 적극적인 대중계몽운동을 펼쳐 민족을 위해 기여 하셨다. 별도로 교육부를 두어 여러 학교와 장학재단을 설립, 육영사업을 활발하게 전개 하셨다. 평양에는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왕십리 빈민촌에는 배명학교, 용잠 고향마을에는 용잠국민학교를 각각 설립하셔서 시골마을 아이들이 10리나 걸어 학교를 다니던 번거로움을 덜어주셨다.

              그 후 용잠국민학교 졸업생들이 학교 건물 앞에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웠었지만 지금은 회사가 학교가 있었던 자리에 들어섰다. 이 학교를 헐고 회사가 들어서면서 아버지의 송덕비 처리 문제로 나는 울산교육청을 방문했었다. 나는 이 땅이 팔릴 때 이 비석문제가 처리되었어야 했다고 본다. 울산 교육청에서는 장생포국민학교 입구로 옮기자는 의견을 제시했고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던 나와 언니 그리고 작은 집 춘우 동생은 그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후 장생포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의 동의를 얻어 송덕비를 이전했다. 최근에 들은 바에 의하면 장생포국민학교도 또한 폐교가 된다고 하니 아버지의 송덕비는 도대체 어디로 갈 것인가?

              울산농고는 공립학교였었지만 아버지께서 많은 기부금을 내어 새로 교실을 짓고 이전하는 것을 도우셨고 동덕여고에도 많은 기부금을 내셨다고 들었다그 당시 아버지에 관한 일들이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고 칭송의 소리가 자자했다. 다른 부유한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식구는 사치한 생활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생활정도만 유지하도록 하시면서 민족장래를 위해 육영사업은 적극적으로 펼침으로서 많은 인재를 키워 내셨다. 그 때 길러낸 인재들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남북으로 흩어져 나라 건국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동광업주식회사 본사 건물은 후에 중소기업은행 본점이 되었다. 그 당시 광산업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 중에 최창학씨와 방은모씨가 있었는데 최창학씨는 김구 선생님이 기거하셨던 경고장을 지은 사람이고, 방은모씨는 조선일보를 창간했고 죽첨동에다 큰 저택을 지었다. 이 집에 훗날 지청청 장군이 살았다. 이리집이 죽첨동에 있었기에 이 집에 대해 잘 알고 있다.

              2차대전이 시작되자 일본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의 민족자본이 점점 커가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아버지는 점차 강도가 높아 가는 일본총독부의 악랄한 압박에 과감히 저항했으나 아버지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일본유학

 

              나는 1939년에 동경에 있는 일본여자대학 가정과 2(사범교육과)에 입학했다. 일본여자대학은 나루세라는 일본인 성각자가 일본을 이끌어 갈 남성들의 배필이 될 여성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한 교육기관이었다. 이 대학에는 영문과, 국문과, 가정과, 사범교육과, 사회과 등이 있었는데 내가 입학하기 직전 사회과 학생들의 좌경화가 문제되어 가정과를 1, 사범교육과를 2, 사회과를 3류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영문과, 국문과, 가정과 1, 가정과 2류는 4년제 였고 가정과 3류는 3년제 였다. 당시 일본여대 입학조건은 시험은 없었고 여학교 때 성적과 추천인 보증인이 필요했었다. 그때 나와 같이 가정과 2류로 입학했던 조선인 친구들로는 이기열, 김정희, 김숙재가 있었는데 김숙재는 4년 전 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가정과 2류를(사범교육과)를 졸업하면 여학교 선생이 될 수 있었지만 동경고사나 내랑고사졸업생 처럼 졸업생 모두가 학교 선생님이 되지는 않았다. 당시 일본여대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여학생 수는 10여명에 불과했다.

              나는 41회 히가시구미 동조였고 담임 선생님은 요도선생님이었다. 창설당시 일본여대에서는 전원 기숙사생활이 원칙이었지만 내가 입학했을 때는 학생수가 많아 동경시내에 사는 학생들은 통학이 허용되었다. 조선 유학생들은 여러 기숙사 건물에 분산되어 살았다. 기숙사는 일식 목조건물이었는데 내가 들어간 매이개이료는 침대가 있는 양식 건물이었다.

나는 이 기숙사에서 36개월 동안 기거하면서 후지하라 선생님, 미야모도 선생님, 우애노 선생님과 함께 나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한때를 보냈다. 4년제의 대학에서 36개월만에 졸업을 하게 된 것은 2차 대전이 급박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기에 단축해서 끝을 마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 외에 이 기숙사에 있었던 조선인 여학생으로는 훗날 장후영변호사 부인이 된 김정수라는 한 반 선배가 있었고, 41회 히가시구미에는 경기여고를 나온 김인실(金仁實 훗날 개명해서 김선유) 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때 만나게 된 이 친구와는 1939년부터 지금까지 60년간 변함없는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 당시 여성을 위한 최고학부로 국내에는 이화여자전문대학교가 있었고, 일본에는 동경에 위치한 일본여대, 동경여대, 내랑고사가 이었고 남녀공학으로는 동경고사, 동지사대학 그리고 몇 개의 전문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여대에서는 반별모임, 세로 모임, 가로 모임 등 많은 모임이 있었다. 그때는 그 많은 모임들의 뜻을 잘 모른 체 참석했었지만 훗날 돌이켜 생각해보았을 때 모임에 참가해서 내 자신의 생각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경험이 정말 소중했었다는 것을 알았다. 친구들은 여름방학이 되면, 집에 가지 않고 일본사람들의 별장지대로 유명한 가루이자와라는 곳에 있는 일본여대의 별장에서 개최되었던 수양회에 참석하면서 젊은 시절의 한 때를 만끽하곤 했지만, 여름 방학만 되면 항상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던 나는 한 번도 그 수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후에 생각해 보니 그런 기회를 가지지 않았던 것에 대해 무척 후회스러웠다.

              전쟁이 끝나가면서 일본은 초긴장상태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모든 사업을 강제로 동결 당한 후,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동경으로 오셨다. 제국호텔에 1년간 머무시면서 일본인 양심가들에게 조선총독부의 부당한 처사를 일본정부에 호소하는 일을 벌이기 시작하셨다. 아버지의 이러한 저항운동은 가마구라호텔로 거처를 옮기면서까지 계속되었다. 호소하는데 도움을 청한 대상자들 중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도야마미쭈루, 아배이소오 등이다. 이 일을 후에 생각해 보니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 때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고, 아버지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다급해짐에 따라 아버지는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국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전 재산을 총독부에 의해 차압당했다는 것을 훗날에야 알았다. 이 때 나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아베이소오 선생을 만나기 위해 그가 살고 있던 애도가와 아파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원래 일본여대는 4년제였지만 전쟁 상황이 급박해지자 6개월을 단축해서 나는 19429월에 졸업식을 가졌다. 대지가 넓은 곳으로 전교를 옮길 계획이 있었지만 일부만 이사하고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자 당시의 학교 책임자였던 이노우애 교장은 전범으로 수용되고 학교 완전 이전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졸업식 당일 촬영했던 사진들은 돈만 지불한 채 영원히 보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졸업했던 해 졸업사진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당시 일본의 긴장상태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에 대한 단편 적인 일례를 들자면 일본 부인이 한 사람이 버스를 타고 가던 중 미국인 포로가 허약한 몸으로 노역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가와이 조우니(가엾어라)" 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체포 투옥시킨 사건이 있었다.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어린 여자들을 정신대원으로 젊은이들은 청년 노력대원으로 강제 동원되어 전쟁 일선으로 보내졌었다. 그리고 일본국내에서는 학도보국대원 특공대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내가 있었던 기숙사에서도 먹을 것을 줄였지만 나와 같이 공부했던 학생들은 지방호족들의 딸들이라 그들의 집에서 내 생전 보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음식들을 딸들에게 보내 주었기에 오히려 난 당시 많은 색다른 일본 음식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때 처음으로 먹어 본 샌마이주깨는 지금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지만 그 중 한국에 와서 살고 있던 일본 사람과 일본 본국에 살고 있던 일본사람들간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좋은 공부였다. 내가 생활했던 기숙사  매이개이료에는 우지하라선생, 우애노선생, 미야모도선생 등 모두 세분의 독신녀 사감선생님이 있었다. 매이개이료의 책임 사감선생님이었던 후지하라선생은 당시 70이 넘었는데도 정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훌륭하신 분이었다. 이 때에는 일선에서 물러나시기는 했지만 3류 사회과의 책임자였던 그분에게서 나는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내가 2류 사범교육생의 필수과목인 일본요리, 양재, 화재(일본옷)등을 택하지 않고 3 사회과의 과목을 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신 배려에 대해서는 깊은 감사를 드린다.

기숙사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지만 간혹 규칙을 어기는 학생들도 있었다. 대학생들이 살고 있는 장소였지만 가끔씩 사감 선생이 각 방들을 시찰하면서 책상이나 장롱 서랍 안까지 열고 검사했다. 그런 엄격함을 통해 철저히 정리 정돈하는 것을 가리켰고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도록 지도 받았다.

              전쟁이 한창이던 중에도 기숙사에서의 모임은 계속되었고 상급학생들이 추는 사교춤을 처음으로 구경할 수 있었던 기회도 가졌다. 우리학교에서 일본 귀족자녀들을 위한 학교 학습원은 걸어서 20분정도 거리에 있었고, 와세다 대학이 언덕을 조금만 내려가면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히가시 선생이 담당하는 프랑스 요리를 선택했지만 나는 후지하라 선생님의 배려로 사회과의 몇과목을 3년 동안 공부할 수 있었다. 우리학교 선배 중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박순천, 황신덕씨등 유명하신 분들도 있다. 황신덕씨 와는 인간적으로도 가깝게 지냈고, 내가 그 분이 경영하셨던 중앙여고의 장학재단을 통해 학생들 몇 명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했었다. 황신덕씨는 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만났던 훌륭한 분들 중의 한 사람이다.

 

황신덕씨에 대한 이야기

 

              여름 방학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 방문을 열면 물씬 풍기던 곰팡냄새는 어떻게나 지독하던지 냄새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기숙사 생활에 있어서 사감선생님들은 부모님 역할을 했고, 상급생들이 순번을 정해 기숙사 살림을 책임지고 있어 사실상 모든 것은 학생중심으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이 운영 방식은 자립하는 것을 익히기 위해 도입된 것이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반드시 함께 식당에 모여 찬송가도 부르고, 여러 가지 공지사항도 전달했으며, 서로에게 저녁인사를 하도록 했다. 물론 기숙사에서도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모임이 있었다.

              전쟁 중이라 물자를 더욱 아껴야 하긴 했지만 매사에 있어 철저한 정리정돈과 절약을 완전히 생활화하도록 기숙사에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철저히 교육 시켰다. 자라면서 부모님에게서 배우지 못했던 여러 가지 부분을 기숙사 생활을 통해 몸에 익히게 된 것도 많았다. 그런 면에서 일본에서의 대학 생활은 나의 인생에 있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여대는 동경 고이시가와구 매지로다이에 있었기 때문에 매지로 여자대학이라고도 한다. 매지로다이에서 니시이구다 새교사로 졸업반에서 이사를 했다. 물론 기숙사도 신축한데로 옮겼다. 과목에 따라서는 매지로다이에 남아있는 본교사 까지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그리고 이 신교사에서 졸업은 했으나 마지막 졸업식은 매지로다이에 있던 본교사 강당에서 마쳤다.  

              내가 일본여대 다니고 있을 때 청운동 작은집에 김씨라는 가정교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난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꼈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반대로 인해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끝이 나고 말았다. 직접적으로 내게 접근을 해온 사람도 있었고 주위 사람들의 소개로 만나 본 사람도 있었으나 한 번 열다 말고 닫혀진 내 마음은 결혼 전에 다시 열어 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결혼 후 공인 받은 남성으로서 남편을 열렬히 사랑했었다. 나의 사랑에 대한 남편의 무덤덤 했던 태도로 인해 내 마음에 붙었던 사랑의 불꽃은 사그러 들었고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는 활짝 펴보지 못한 사랑의 불씨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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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하기 전 여름방학 맞아 귀국하던 길에 부산에 사는 올캐 언니와 아는 분이 중매를 하여 해운대 호텔에서 노변호사라는 분과 선을 본 일이 있었다. 처음 만남에 있어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만 상대방은 나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그가 나와의 지속적인 만남을 원했지만 난 거절해버렸다. 그런데 그 분은 훗날 경기고녀와 내랑고사를 졸업한 내 친구와 결혼을 했다. 1942년 내가 졸업했던 9월경은 전쟁상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내가 졸업하고 귀국 시에 타려고 했던 관부연락선 공고마루가 바다에 떠다니던 수뢰에 의해 침몰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배에 일본유학을 끝내고 귀국하던 조선 학생 몇 명은 배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대학을 졸업하자 나의 결혼문제가 구체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최남선씨 동생인 최두선씨 아들과 누군가의 소개로 선을 보고 난 후 서로가 호감을 가져 양가에서는 결혼식을 서둘러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결혼을 빨리들 했기에 고등 교육을 받은 남성들 중 많은 사람들은 아주 젊은 나이에 결혼을 했었다. 최두선씨도 일찍 결혼을 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유학 도중 내랑고사를 다니던 분과 사랑에 빠졌다. 최두선씨의 작은 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했고 나와 결혼 말이 진행 중이던 사람은 최씨 큰 부인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그 사람은 작은어머니와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내 어머니가 작은어머니로 인해 심한 마음 고생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이 결정된 후 그 사람에게 "어째서 어머니와 같이 살지 않고 작은어머니와 같이 사느냐"고 물어 보았다. 내가 했던 이 질문을 작은어머니가 듣고 노발대발했었다는 말을 전해듣고 '이 결혼은 불행하겠구나'라고 직감했다. 수 일 후에 그 사람이 찾아와 작은어머니가 나와 결혼을 하려면 자기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 역시 우리 결혼 말은 없었던 것으로 하기로 원했고 나 또한 그랬다. 최씨의 생모는 나를 한 번 보기 위해 우리 집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말도 없이 나를 지나보내기만 했었다. 그 부인은 머리를 비녀로 쪽을 진 차림의 부인이었는데 그 분의 서글픈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에 선연하게 남아있다.

              어머니는 내가 여자가 당연히 알아야 할 음식 만드는 일이나, 바느질하는 일등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음식솜씨나 바느질 솜씨는 참 좋으셨고,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당시 어머니는 그런 일을  내가 직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키더라도 알고 있어야 제대로 시킨다는 것까지는 생각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일을 집에서도 배우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배우지 않았으니 외국에 나와 비로소 음식 만드는 것을 시작해야 했을 때는 그 때까지 먹어 본 맛과 눈으로 보고 익힌 것을 합해서 나대로의 방식으로 만들기 시작했으니 순전히 내 창작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내가 음식 만드는 재주와 바느질에도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내게 여자도 남자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며 무엇이든지 다 배우라고 하셨다. 나는 어릴 때는 부정을 모르고 자랐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12살 이 후 아버지가 집으로 오실 때는 내가 아버지 밥상을 꼭 들게 하셨고, 아버지가 식사하시는 동안 옆에 앉혀 두시고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난 아버지의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21세기를 눈앞에 둔 현재, 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참신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때 받았던 아버지의 가르침 덕택이고, 그 가르침은 어릴 때 받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보상이 되고도 넘친다고 생각한다.

 

동대 조선인 유학생들: 김양하씨 부부와 박성철

 

              김양하씨는 동경제대 이공학부를 졸업하고 동경에 있었던 이화학 연구소(理化學 硏究所)에서 비타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던 화학도였다. 당시 우리 아버지가 이 분의 연구생활을 돕고 계셨다. 그는 뛰어난 천재였을 뿐 아니라 비타민 발견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들었다. 김양하씨의 비타민 연구에 대한 업적은 그 개인의 것으로가 아니고 일본의 이화학연구소(理化學硏究所)의 몫으로 돌아갔다는 말도 들었다. 김양하씨는 나의 동경 학창시절동안 보증인이기도 했고, 훗날 김양하씨 부인의 중매로 난 결혼했다.

              그 집에 가면 내가 갈 때마다 동대생 뿐만 아니라 동경에 유학와 있었던 조선학생들이 몇 명씩 와 있었다. 김양하씨의 부인은 사람이 쾌활하고, 너그러워 그 많은 학생들의 시중을 항상 웃는 얼굴로 들곤 했었다. 어느 날 내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 김양하씨 부인은 내게 어떤 학생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어 방문하는 길이니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병문안을 간다는 것이 왠지 이상해서 함께 가지 않았다. 그 때 김양하씨 부인이 나와 결혼하게 된 박성철씨의 병문안을 갔다는 것을 훗날에야 알았다.

              졸업 후 나는 내 모교인 동덕여고에 근무하면서 '육아'를 가리켰다. 김양하씨 가족도 얼마 후 귀국했고 어느 날 김양하씨 부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자기 집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갔더니 사진을 한 장 꺼내 보이면서 동경제대 이공학부 기계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라고 소개하면서 "어떠냐"고 물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동경에 있는 애바라라는 펌프를 만드는 큰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서울 출장소로 나와 있다고 했다. 나이는 29세이고, 누님이 둘 있고, 광주고보 4학년 때 일본에 있는 야마구지 고등학교로 전학한 천재라고 했다. 그러면서 상당한 부자집 자손이라고도 덧붙였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이 말을 했더니 어머니는 오빠를 시켜 김양하씨 부인께 내 사진도 전하고, 그 분과 의논해서 우리 결혼을 진행시키도록 하셨다어느 정도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어느 날 김양하씨 부인이 다시 나를 만나자고 연락했다. 그리고는 박성철씨가 동경에서 과로로 급성결핵에 걸려 1년간 입원해 있다가 지금은 많이 회복돼 서울 출장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전에 동경에서 내게 입원하고 있던 사람을 같이 방문하지 않겠느냐고 했던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김양하씨 부인이 했던 말을 어머니에게 모두 전했다. 어머니께서는 내 말을 들으시더니 살아가는데 있어 건강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 모든 조건이 다 좋아도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오빠로 하여금 정중히 결혼에 대한 거절 의사를 전하도록 하셨다. 나도 그 사람과 연애를 해서 죽자살자 하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미련 없이 그 사람과의 결혼을 단념해 버렸다.

그런 뒤 얼마 후 일본여대 3류 사회학과를 나와 같이 졸업하고 평양이 고향인 친구 은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지금 아버지와 언니부부와 함께 조선호텔에 머물고 있으니 놀러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일본여대 같은반에서 유일한 내 조선인 친구였던 김인실과 이은희는 서로 친척이 된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기에 인실이에게 같이 가자고 전화를 걸었더니 바쁜 일이 있어 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은 나 혼자 예쁘게 차려입고 조선호텔로 친구를 찾아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 호텔에는 은희 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은희가 있었다. 은희 아버지께서는 전라도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 올 테니 여자들끼리 따로 저녁을 먹으라고 딸에게 당부하시는 것을 들었다. 이 당부는 딸을 위한 아버지의 깊은 배려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훗날에야 알았다. 은희의 아버지가 전라도로 떠나신 후 은희와 은희의 언니 나 이렇게 세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은희의 형부가 우리가 있던 방에 들어와 자신은 동경제대 법과를 졸업했다고 자기를 소개하며 인사를 했다. 나도 인사를 한 뒤  그 향부된다는 분이 한다는 말이 '장인께서는 여자들과 따로 저녁을 먹으라고 하셨지만 젊은 사람들끼리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식당으로 내려가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그 때까지 한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은희 형부는 자기 친구 한 사람이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해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 모두는 식당으로 내려갔고, 사진으로만 본 박성철씨의 실물을 거기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이 때의 일을 통해 운명의 장난이란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은희의 형부는 박성철씨를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과는 다르지만 동대를 같이 다닌 친구라고 했다. 박성철씨를 소개받았을 때 내심 적잖이 놀랐고 첫인상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결핵을 앓았던 사람 같지 않게 살이 쪄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이 사람과의 만남을 재미있게 전달했다. 어머니는 내가 그 때까지 결혼이 거론될 때마다 상대방에 대한 반응이 별로 없다가 그 사람에 대해서는 '건강해 보이더라, 인상이 좋더라'는 등 호감을 표시하자 오빠에게 다시 김양하씨 부인을 만나 일을 결혼에 대한 일을 재추진 할 것을 당부하셨다.

              나중에서야 난 친구 아버지가 그 때 전라도에 가신 것은 박성철씨의 고향 실정을 알아보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건 때문에 나는 인연이라는 것과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결핵을 앓았다하면 결혼에 있어 치명적인 악조건이었고, 그래서 혼사 문제는 중단이 되었는데 내가 당사자를 만남으로서 혼인 문제는 재론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때 박성철씨는 두 사람을 놓고 택일 해야할 형편이었다고 한다. 친구 아버지가 박성철씨 고향을 다녀오신 뒤 그쪽에서도 박성철씨에게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박성철씨는 나를 택했고, 우리의 결혼은 급진전으로 진행되었다.

              그 이후 은희와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고 단지 평양으로 돌아가 그때까지 결혼 말이 있었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과 얼마 뒤 결혼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은희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6.25 전쟁 때 남으로 내려왔으나 은희는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친구가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도 가끔씩 정말 궁금하다. 이제부터는 나의 운명의 전개를 기록해 나갈 것이다.

 

 


II. 결혼(1944)부터 6.25동란의 시작 (1950)까지

 

결혼(194447)

 

              박성철씨와 나는 1년 동안 사겼다. 처음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는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뒤쪽에 있는 지하 다방에서였다. 나는 시간에 맞추어 나갔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오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하게 되었나보다고 생각되어 근무하던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더니 한 던 일이 지체가 되어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1시간을 더 기다린 후에야 그가 나타났는데 이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내 친정집은 죽첨동에서 성균관 대학 근처로 옮겼다가 다시 삼선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북동으로 이사를 했다.

              한 번은 외출을 했다가 어두워진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가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따라 왔었다. 그 무렵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생각했기에 결혼해도 괜찮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집 근처는 인적이 드물어 조용했다. 그때까지 박성철씨와 나는 손도 한 번 잡아 보지 않았다. 그 날 내가 먼저 박성철씨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더니 그제야 그가 내 손을 꼭 잡는 것이 아닌가. 우리 둘은 서로가 일기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각자의 일기를 교환해 보기로 했다. 각자의 일기를 다 읽고 난 후 내 일기장을 돌려 받고 난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내 일기장에는 빨간색으로 잘못된 철자법이 모두 교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나는 다시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이 성북동 집에서 나는 194447일에 결혼했다. 결혼식은 성균관에서 전통혼례 방식으로 했다. 내 친구 김인실이도 1주일 후 414일에 대구가 고향인 경응대학 화공과를 나온 김씨와 결혼을 해서 우리 둘은 신혼생활을 같은 시기에 시작하게 되었다. 결혼 후 얼마동안은 친정에 머물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 사두셨던 시골 땅을  팔아 자그마한 집을 살 수 있게 되어 우리는 그리로 이사를 했다. 우리 어머니는 김양하씨 부인이 했던 말을 듣고 박성철씨가 집을 마련할 것으로 짐작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짐작했던 대로 되지 않자 뒤늦게 서야 서둘러 땅을 처분하여 우리집을 마련하도록 한 것 같다.

              첫날 밤을 친청에서 보낸 나는 아침에 요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당황하고 민망했던 생각이 지금까지도 잊어버릴 수 없다. 얼마 후 돈암동에 마련 된 자그마한 집으로 이사해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데리고 계시던 끝순이라는 여자아이를 나에게 딸려 보내주셨다. 나에게는 남편이 주위로부터 공인 받은 이성이자 연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을 열렬하게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때 2차 대전은 종말로 치닫고 있었고 모든 물자는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 되었지만 우리가 살고 있던 집에서는 소고기도 몰래 파는 사람이 있어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었다. 남편은 그 때 강원도 이원 철산으로 직장을 옮겼었고 나도 학교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던 우리는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194525B29 정찰기가 서울 하늘에 처음 나타나던 날 대피하라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집에서 나는 산파의 도움을 받아 큰 딸 옥경이를 순산했다. 내가 옥경이를 출산한 후 어머니는 매일 출근하시듯 오셨다. 친정에서 시집올 때 데리고 왔던 끝순이가 살림도 도와주며 아기도 돌보아주어 나에게는 참으로 큰 힘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는 그녀에게 느꼈던 고마운 마음이 지금 느끼는 감정과 같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끝순이에게는 지금이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하고싶다.

              남편이 강원도 이원 철산으로 직장을 옮겨 가 있는 동안 8.15 해방의 날을 맞이했다. 그 시절 우리 나라 남성들 대부분은 아내가 직장생활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남편은 다른 남성들과는 달리 오히려 내가 직장 생활 할 것을 권했다. 자신은 독자라서 나를 남자형제 같이 생각한다면서 여자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난 직장 생활을 계속해서 할 수 없었다. 19458.15로 전쟁은 끝이 나고 3.8선 지금은 북한 땅이 되어버린 이원 철산에서 남편은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다. 일본사람들이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에서도 철수하기 시작했으니 그 혼란스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애바라 직원은 아니었고 한국에서 애바라 일을 도 맏아 하고 있던 남편과 함께 사업을 하던 일본사람 중 아끼모도라는 사람이 갈월동에 있던 자신의 집을 남편에게 부탁하고 일본으로 갔다. 그래서 우리가족은 갈월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아끼모도씨는 애바라 회사의 일을 책임지고 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 갈월동에도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 삼판동에다 아주 좋은 저택을 짓고 살고 있었다. 전쟁에 지고 난 후 그렇게 영화를 누리던 일본사람들의 당황함이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리는 갈월동 집으로 이사를 했고 남선 언니네 가족들은 삼판동 집으로 옮겼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해방의 감격과 더불어 찾아온 정부의 공백 상태는 많은 사회적 혼란을 야기 시켰다. 치안을 담당한다고 조직된 서북청년단의 횡포는 사회불안을 증폭시켰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재출발해야만 했었다. 일본사람들이 모든 요직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가 다 떠나고 난 그 자리를 채우기란 자금과 경험부족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은 갈월동집에 대동공업주식회사(大同工業株式會社)란 간판을 내걸고 일을 시작했고 영등포에 있는 공작기계공장에서는 남편을 자기 회사의 관리인으로 위촉했다. 자본도 없고 경험도 부족하여 어렵게 일을 하고 있던 중 동경제대 법대를 남편과 같이 다니던 장병찬씨(화신백화점 박흥식씨의 사위이고 장택산씨와 장직상씨의 조카) 300만원을 투자하고 동업을 하자고 제의해 왔다. 그래서 남편과 장병찬씨는 갈월동집과 창고에 있던 모든 물건 그리고 영등포에 있는 공작기계 공장까지 모두 포함시켜 주식을 나누고 새출발을 시작했다. 이렇게 일을 진행시키던 중 나는 1946103일 둘째 딸 은명이를 의사가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던 삼판동의 민산부인과에서 순산했다. 참으로 건강하고 예쁜 아기였다. 내가 출산을 하여 정신이 없던 와중에 나를 도와주고 있던 끝순이가 뒤늦게 홍역을 지독하게 앓았다. 홍역은 어린이들만 걸리는 병인 줄 알았더니 어른도 앓는 수가 있다는 것을 이때서야 알았다. 그 때 끝순이가 어찌나 심하게 앓던지 옆에서 지켜보던 나도 같이 아픈 것만 같았다.

              남편은 위로 누님 둘을 낳은 후 얻은 아들이고 독자였기 때문에 시부모님들께서는 내가 딸만 둘을 낳은 것에 대해 무척 섭섭해하신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1947년 동업이 힘들었던지 남편은 장병찬씨와 갈라섰다. 그 무렵 우리는 북아현동에 집을 사서 이사하고 사무실은 덕수궁 부근으로 옮겼다. 북아현동 집에는 전에 살던 사람이 아들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는 감나무가 있었고 가을이 되면 조롱조롱 매달린 감들이 참으로 아름답고 인상적인 곳이었다. 이사를 한 뒤 시골에 계시던 시부모님들을 서울로 모셔왔다. 시골에 사시던 집과 딸려있던 전답들 그리고 기타 모든 것은 둘째 시누이가 관리하도록 하고 몸만 올라오셨다. 이것이 결국 모든 재산을 작은 시누이가 다 처분해 없애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땅들은 광주시가 확장되면서 적지 않은 재산이었는데 관리를 잘 못한 탓으로 다 없어지고 말았다.

              북아현동 집으로 이사한 후 남편이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사들여 온 타이어 재생기계를 돈암동에 장소를 빌려 설치하고 공장을 시작했다. 이 때 큰언니의 큰딸 임연이가 집에서 나대신 아이들을 돌봐주고 둘째 아들 덕완이가 사무실에서 남편 일을 돕고 있었다.

사회는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지 못하고 신탁통치에 대한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져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나는 19481020일 동대문 이대부속병원에서 큰아들 세진이를 순산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쁨은 대단하셨다. 남편은 마음속으로야 좋아했겠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아기를 순산하고 아들이란 말을 들었을 때 내 임무는 다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아기를 보러 들어오기를 기다렸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나중에 남편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빨리 가서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산모와 아기를 보지 않고 간 것을 미안해했다.

 

반도호텔과 시청광장 분수대 사건

 

              반도호텔에 설치된 양수기가 작동하지 않아 기술자를 찾다가 남편에게 연락이 왔었다고 한다. 가서보니 간단한 문제여서 그냥 말만 해주고 왔더니 중간에 소개를 한 사람이 아는 사람을 통해 많은 돈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시청광장 분수대에 설치 된 펌프가 작동하지 않자 다시 남편에게 연락이 왔지만 남편은 가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서도 장소와 때를 잘못 만나 아까운 재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반도호텔 양수기문제나 시청 분수대 폄프 문제도 남편 자신의 사업적인 수단이 부족했던 것인데 남편은 그렇게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했다. 그 때 시청에서 수리 조합 펌프공사를 입찰했는데 남편이 낸 견적 가격이 너무 높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규격에 비슷한 중고 펌프를 사용한 견적을 올렸고 남편은 규격에 맞추어 설계에서부터 목형을 만들어 주물을 부어 깎아 시운전을 하는 전과정을 새롭게 해야하는 작업이라 싼 가격으로는 경쟁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당국이 알아서 해야 했는데 그런 사정을 아는 사람이 시당국에도 없었다는 얘기다. 수리조합을 건설하는데 입찰공고에 나선 사람이 없어 남편이 수의계약으로 대형펌프를 만들어 성공시켰을 때 비로소 그 능력을 인정 받게되어 여러 곳의 신설 수리조합 일을 성공적으로 해냄으로서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나는 남편과 장병찬씨와의 동업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덕수궁 옆에 사무실을 얻어 대동공업주식회사(大同工業株式會社)라는 간판만 옮겨다 놓고 새출발을 다시 시작했다. 그 때 큰언니의 큰딸 임연이가 집에 와서 나를 도와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었고, 큰 언니의 둘째 아들 덕완이가 사무실에서 남편 일을 돕고 있었다. 이 때 유솜(UN기관)에서 계획했던 남한 발전을 위한 기술전문학교 설립이 진행 중이었다. 이 기술 전문학교에서 일할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남편이 선정되어 6개월간 미국 시찰 겸 견학을 떠나게 되었다.

              남편은 해방직 후 서울대학 이공학부에서 얼마동안 교단에 선 일이 있다. 수력기계학을 전공한 사람이 유일했음으로 조건으로 보면 경성제대 졸업생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을 텐데 경성제대 출신들의 텃세로 강의를 계속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 적이 있다. 이 일도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야 그만두게 된 이유가 간접적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서울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었던 시댁 조카뻘 되는 경성제대 졸업생이 이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고 나와 나는 정말 놀랐다. 사업을 하면서 남편은 한양공대 기계과 과장자리를 제의 받고 시간적으로 구속받지 않고 학생들을 가리키겠다는 조건하에 그 자리를 맡았다. 나는 남편의 오른팔이 되어 전력을 다해 남편을 도왔다. 그 때는 남편이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시작되었으니 무척 힘이 들었으나 열심히 노력한 만큼 하나 하나 성과를 이루면서 성장해 나갔다.

              원래가 잔정이 없고 무표정한 사람이 일에 몰두하다 보니 나와의 관계는 심정적으로 점점 거리가 멀어져갔다. 이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이 살아가는 도중에 걸려들기 쉬운 함정이라 생각된다. 나는 부부사이 뿐만 아니라 부모자식간에도 유대관계를 항상 돈독히 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살 때 인간적인 평화와 행복이 성취된다고 생각한다.

하루는 남편이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입고 나간 바바리 코트를 입지 않고 있었다. 바바리 코트를 왜 입지 않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어디다 잊어버리고 놓아두었다고 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나도 그 바바리 코트를 찾아오지 않아 왜 찾아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원래 거짓말을 잘 하지 못했던 사람이라 사실대로 말했다. 요정 마담이 자기를 좋아해서 자고 가기를 원했었는데 그냥 나오니까 바바리코트를 감춰버리고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전 일은 잘 모르겠지만 이것이 결혼 후 내가 알게된 첫 외도였다. 그 후 바바리 코트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 여자와 남편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이 때 나는 이혼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았으나 아이들을 생각할 때 도저히 나의 결심을 실행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남편은 상공부에서 표준규격협회 한 멤버로 모든 것의 표준 규격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도 열심히 일했다. 아무런 규격이 없던 당시 남편이 해야했던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해방 후 아버지의 활동

 

              한창 사회 혼란이 가중되고 있던 1948년 어느 날 아버지가 북아현동 집으로 찾아 오셨다. 들어오시라고 권해도 안들어 오시고 뜰에 서서 하시는 말씀이 먼 여행을 떠나니 잘 들 있으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 먼 곳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가족들과 아버지는 이날로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고, 나는 그 후 28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 북녘 땅에서 91세가 되신 아버지와 눈물의 상봉을 하게 되었다.

              1945815일자로 총독부에 의해 묶여 있던 재산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38선을 기준으로 국토가 반 동강이 난 후였고 재산 대부분은 38선 이북에 있었다. 성북동에 살던 오빠는 집을 팔고 울산으로 이사를 갔고 어머니는 서울에서 살고 싶어하셨지만 계실만한 집이 없었다. 아버지는 해방직 후 군정청에 의해 삼척지구 총관리인으로 임명되셨다. 그 때 삼척지구에는 일본사람들이 대륙침략을 위해 비축해 놓은 막대한 물자가 남아 있었는데 전쟁이 끝나고 무정부 상태가 되자 이 물자를 노리는 사람들이 파리 떼가 끓듯 덤비고 있었다. 아버지는 장관대우로 이 지구의 책임자가 되시자 그 물자들은 앞으로 건국사업에 쓰일 자본이라 하시면서 최선을 다해 지키셨다. 그러나 물욕에 눈이 어두운 모리배들은 아버지를 모함했고 아버지가 그것을 가만히 지키고 있도록 두지 않았다. 그 사람들의 모함에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 뒤 아버지에게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가족들에게도 푸대접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 사정이 이렇게 되자 삼판동 아기모도씨가 우리에게 맡겼던 집에 언니가족과 함께 계시기로하고 그 집을 아버지 이름으로 임대차 계약서를 만들었다. 아버지 이름으로 하는 것이 순리일 것 같아 언니식구의 이름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것이 빌미가 되어 훗날 서북청년단들의 부당한 처사에 의해 이 집을 비워주어야 했고 결국 언니가족은 갈 곳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서북청년단들이 아버지 이름으로 임대계약 했던 이 집을 뺏은 이유는 작은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도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 한 사람이 집을  두 채나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런 사람은 재산을 내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이름으로 임대차 계약을 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언니 이름으로 계약서를 작성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를 궁지로 몰기 위해 결정된 처사였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는 그 집을 내 주기로 결정 하셨다.

              어머니는 우리 집 가까운 곳에 내가 마련해드린 작은 집으로 아버지와 같이 이사를 하셨다. 그러나 언니가족은 갈곳이 없어 각자 다른 곳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내가 마련해 드린 그 집에 사실 때 북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셨지만 아버지가 작은 부인을 얻어 두 집 살림을 하시게 된 것에 대한 원망은 가슴에 사무치는 한으로 간직하고 계셨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 아버지는 갈 곳이 없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칠전팔기란 말이 부족할 만큼 평생동안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셨다. 매일경제신문에서 출간한 "거부열전"에 보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육영사업의 일환으로 전국 여러 곳에 많은 학교를 세우셨다. 일제 때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유일한 기술전문학교인 대동광업전문학교를 평양에 세우셨고, 고향 용잠 마을에도 학교를 세우셨다. 이 학교 졸업생들이 아버지의 공덕비를 학교 입구에 세웠고 그 비는 다시 학교 안으로 옮겨졌으니 용잠이 울산공업단지로 편입되어 "선경"이 들어서면서 아버지의 공덕비는 갈 곳 없이 팽개쳐져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울산 교육청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이 공덕비가 그 학교 졸업생들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된 사실이었고 아무도 이 일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울산교육청과 의논 끝에 장생포 초등 학교 입구로 아버지 공덕비를 옮겼으나 그 학교 자체의 존망이 확실하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앞으로 그 비석을 어떻게 처리할 지 의문이다.

              이 비석은 용잠국민학교가 폐교 처분될 때 당연히 적당한 곳을 찾아 이전이 되었어야 한다고 본다. 그 많은 재산을 사회와 민족발전을 위해 희사한 사람의 공덕비가 갈 곳이 없어 팽개쳐 진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그냥 넘어 가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버지는 해방 후 조선광업회(朝鮮鑛業會) 회장(會長), 조선산업건설회(朝鮮産業建設會) 회장(會長), 전력대책위원회(電力對策委員會) 회장(會長) 등을 역임하시면서 조국 건설을 위해 총력을 다 기울이셨다.  

 

어머니

 

              아버지가 둘째 아들이셨는데도 할아버지께서는 큰아들은 살림을 보내시고, 아버지와 함께 사셨다. 아버지와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계시다 아버지가 객지로 떠나신 후 어머니는 홀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자식들 키우시면서 외로운 청춘을 보내셨다.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하면 나는 같은 여성으로 가슴 깊이 동정을 느끼고 어머니의 명복을 빈다. 아버지와 같이 훌륭한 분을 남편으로 만나 주위에 있던 다른 부인들에 비해 물질적으로나마 잘 살 수 있었던 것으로 어머니에게 위로가 되었다면 하고 바란다

              내가 자라면서 늘 생각했던 것은 평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쌓이고 자란 무엇인가가 나로 하여금 그것에 관해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참으로 영리하시고 여자답게 예쁘게 생긴 분이셨다. 어머니 손을 거쳐 만들어진 음식은 무엇이든 정말 맛있었다. 내가 어릴 때 하루는 집 뒤 우물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심부름하던 말순이가 뚝배기를 떨어뜨려 깨버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말순이를 야단치시는 것이 아니라 혼자 말처럼 "그 뚝배기가 제 명이 다 됐나보다"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평생을 살면서 그 때 어머니가 하셨던 그 말씀을 잊지 않고 교훈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가 나에게 바느질이나 음식 하는 것 등 여자가 꼭 알아야 할 일들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것은 내가 그런 일을 몰라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잘 살기를 바라신 마음에 내 손으로 직접 그런 일을 하지 않기를 원하셔서 하신 말씀일 것이라고 해석한다.

 

 남편의 도미와 6.25전쟁 194911

 

              장병찬씨와의 동업을 포기하고 덕수궁 옆에 사무실을 얻어 이사한 남편 혼자 일을 시작한 얼마 되지 않아 군정의 산하기관인 유솜에서 남한계발사업의 일환으로 기술전문학교를 세우기로 계획이 됐다. 그리고 그 계획에 필요한 사람을 선발해서 6개월간 미국으로 보내 훈련 겸 시찰을 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고 남편이 그 일행 중 한 사람으로 내정되었다. 남편은 하던 일을 일단 중단하고 사무실은 큰언니 둘째 아들인 덕완이에게 맡겨두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렇게 되어 남겨진 조카 덕완이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울산으로 내려간다고 떠난 뒤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나는 그의 젊은 영혼을 위해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이와 같은 경우가 그 당시 어찌 이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겠는가? 그 당시에는 너무나 많은 인명들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죽어 갔다. 억울한 죽음 당해 이 세상을 떠난 많은 영혼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동덕여고에 재취업

 

              나는 동덕여고에 재취업을 하고 "육아"를 가르치게 되었다동덕여고에서는 이 과목이 처음으로 마련된 것이었고 나는 이 과목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서 교재를 준비해서 열심히 가르치기 시작했다. 남편이 미국으로 떠난 후에도 한양공대에서는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지불해 주었고 나도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내 수입으로는 금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왜 금을 사 모을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때 사 모은 금으로 6.25 전쟁이 터진 뒤 모든 상거래가 중단된 상황에서도 내 식구들의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전시였지만 동대문 시장 내에서는 금을 사고 파는 사람들은 있었기 때문에 수입이 전혀 없던 그 상황에서 그 금들은 경제적으로 우리식구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III. 1950-1951

 

6.25 전쟁과 피난

 

              북아현동 우리 집에서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학교까지는 거리가 멀어 통근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집에서 서대문까지도 언덕길을 걸어서 한참 가야했고 서대문까지 가서 전차를 타고 동대문에서 내려 창신동까지도 한참동안 또 걸어야 했다. 1950625일 집에 라디오가 없어 38선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고 북아현동은 서대문에서도 산 반대쪽에 위치해 있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온 북한의 전차 소리도 미처 듣지 못한 채 6.25사변을 맞이하게 되었다. 39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때를 돌이켜 보면 마치 필름을 거꾸로 빨리 돌릴 때처럼 소리 없이 내 머리 속에서 그 상황들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시부모님과 다섯 살, 네 살 두 살의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나를 도와주고 있던 큰언니 딸 임년이와 나까지 일곱 식구를 굶기지 않고 먹여 살려야 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남편이 결혼한 후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내가 직장을 가지는 것에 적극 찬성했던 이유가 이런 경우를 생각해서 였는 지도 모르겠다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전 나라에 전달되었으니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 나는 생각했다나는 식량을 구해야만 했는데 모든 가게는 문을 닫아버린 뒤여서 쌀 가진 사람들은 그 상황에 쌀을 팔 리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 학교에서 학생을 보내 출근하라는 말을 전해 왔다. 혼란의 와중에도 전차는 다니기에 비상 복장을 하고 학교까지 갔다나중에 안일이지만 두 명만 제외하고는 모든 직원들이 다 출근했다고 한다. 학생들도 몇 명 나왔으나 많은 수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별하게 눈이 띈 것은 몇 사람이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던 일이다. 몹시 긴장된 분위기였다. 나는 학교에 다시 근무를 시작한 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아 학교내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지만 선생들 중에는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도 더러 있었고, 좌익선생들을 감시하는 선생도 있었던 것 같다출근하지 않았던 두 명 중 한 사람은 그런 임무를 맡아 있던 사람이었고, 다른 한 선생은 부산이 고향이라 내려갔다가 올라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등교하는 학생들 수는 차차 줄었고 몇 안 되는 학생들이 붉은 완장을 두른 선생들의 지휘하에 움직였다. 전선이 남으로 옮겨가면서 장기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학생 수가 많지 않아 수업은 하지 않고 선전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날 몇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나를 불러냈다. 이것이 인민재판이라는 것을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붉은 완장을 두른 한 선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학생들은 나의 반동성을 지적하면서 성토했다. 그 이유 중의 한가지는 남편이 미국을 갔다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내가 수업시간 중에 반동적인 말을 했다고 1학년 학생 한 사람이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도 모른 체 듣기만 하고 돌아왔다.

              그 때 나의 반동성에 대해 증명했던 학생을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보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피난지에서는 나를 도와주었다.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 때의 경험 중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선전용으로 상영했던 석화(石花)라는 소련영화다. 영화 내용은 아름답고 순박한 러시아 민족의 사랑 이야기였고 지금 그 영화의 줄거리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때 그 영화를 보면서 느낀 사랑의 순수한 감정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한참 전선이 남쪽으로 계속 밀려가고 있을 때 나는 학교까지 걸어서 다니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들어 더 이상 출근할 수 없었다. 학교 출근을 중단할 것을 결정한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 시장에 들러 그 동안 사 모아 두었든 금을 몽땅 팔아 현금으로 만들었다. 쌀을 살 수 있는 방법을 그 동안 알아 놓았기 때문에 쌀 두 가마니를 사서 드럼통에 담아 비축했다. 학교를 쉬고 있던 어느 날 낯선 두 사람이 나를 찾아 왔다. 자신들은 보위부에서 나왔다고 소개하면서 모윤숙씨 집으로 자신들을 안내를 하라고 한다. 나는 그 때까지 모윤숙씨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신문에서만 얼굴을 보았지 직접 만나 본 일은 없었다그런데 별안간 모윤숙씨 집으로 안내를 하라니  그 사람 집이 어딘지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두 사람은 모윤숙씨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나는 모윤숙씨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니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다그러자 두 사람은 날더러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어디로 나를 데리고 갈라나  궁금하기도 하고 전쟁중이라 몹시 불안하기도 했다. 가지 않겠다고 해봤자 권총을 든 사람들 앞에서는 불가항력이었다. 그 때 나도 몹시 놀랐지만 식구들의 놀라움은 어떠했겠는가. 먼저 대문 밖으로 나가더니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자기 뒤를 따라오라면서 자기가 앞장 서 걸어갔다.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떤 집으로 가더니 잠겨진 대문을 두드렸다. 어떤 부인이 나와 문을 열자 앞서간 그 사람이 여기가 모윤숙씨 집이냐고 물었다. 그 부인은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나와 같이 간 두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나에게도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그 때 참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나를 앞장세우고 모윤숙씨를 찾을까?

내 이름이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모임인 여학사협회 회원명단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 명단에 이름이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모윤숙씨와 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 아닌가 라고 추측해 본다. 두 사람은 나를 마당에 세워 둔 채 그 집의 다락까지 샅샅이 다 뒤지더니 나와서 가자고 하였다. 집을 나선 두 사람은 나를 보고 돌아가라고 한다집에서는 내가 나간 뒤 무척이나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살벌한 전쟁 와중이라 사람의 목숨이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나의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도 두려움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급한 상황이나 어려운 상황을 여러 번 맞닥뜨렸지만 매번 나의 마음은 항상 그때처럼 평정한 상태를 유지했다. 이 특이한 심리상태는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겁이 없다' '간이 크다' '대담하다'라는 말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 가장 절친한 친구 선유는 나에게 너는 어째서 항상 그렇게 자신만만하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는 대담성이  그러한 심리 상태의 원인일까? 아니면 난 항상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느끼면서 살아왔는데 그 힘의 덕택이었을까?

              자꾸만 남으로 내려가던 전선은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이 후 양상이 달라졌다.

중부전선이 이화여대와 연세대학교 뒷산으로 이동하면서 북아현동에 있던 우리 집은 후퇴하는 인민군과 UN군의 교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식구들을 모두 집 뒤쪽에 있던 지하실로 모아놓고 나 혼자만 밖에서 진행되고 있던 상황을 지켜보았다얼마 간 그러한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있던 중 별안간 지척에서 들려온 사람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사람소리는 우리 집 뒷 쪽 언덕에서 들려왔고 위를 보니 흑인 한 사람이 누구와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산등을 타고 이대, 연대 뒤 산에서 우리 집 뒷산으로 이동해 온 모양이었다. 이 전선이 시내로 이동한 후 에는 우리 집에서 서대문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에는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 때로 부터 나는 길거리에서 많은 시체를 보게 된다.

 

한강철교 폭파와 인력동원

 

              38선이 무너지고 전차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오면서 시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시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서울을 지켜라. 국군은 곧 반격해 올라 올 것이다'라고 한 육성 방송을 시민들은 믿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빠져나가 피난길에 올랐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야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있던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돈이 있던 고위 간부들 가족이나, 군경 가족들은 모두 피난을 간 것 같았다.

우리 집 근처에도 어느새 구역을 관리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하루는 노력동원을 해야하니 한 집에 한 사람씩 어느 날 몇 시까지 어느 곳으로 모이라는 전갈이 왔다. 난 조카 임연이에게 그 일을 부탁했다. 조카는 노력동원에서 돌아와 그녀가 보고 왔던 끔찍한 광경들을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이야기 해주었다. 한강철교가 끊어진 곳으로 갔었던 모양인데, 철교가 끊어진 때가 캄캄한 밤이어서 차를 타고 질주하던 피난민들은 앞에 가던 차가 물에 빠진 것도 모르고 계속 달려가 얼마나 많은 차가 다리 밑으로 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빠졌던 차를 끌어내어 차안에 죽어 있던 사람들과 물건들을 끄집어내는 광경을 이야기 할 때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가슴 아파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패물종류는 당연히 싣고 갔겠지만 어떤 차안에는 화폐를 가마니에 넣어 가던 주인이 그 돈 가마니와 함께  시체로 들어내졌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유언비언지 실지 사건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펴져 나갔다.

              UN군이 인민군을 밀어 부쳐 서울을 탈환한 뒤, 권총을 옆구리에 찬 향토방위군이란 사람들이 위협적인 태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뒷집에는 송시열 후손이라고 자칭하던 노인 한 분과 그분의 딸인 노처녀가 사라졌는데, 그 할머니의 손자가 또 권총을 차고 나타나서 한바탕 소란을 떨었다. 대다수의 서울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조용히 변해 가는 정세를 지켜보고 있는 듯 했다. 한편, 서울시민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한 힘든 노력을 시작했다. 가지고 있던물건들은 값어치가 없고, 식량은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사람들은 물물교환으로나마 어렵게 식량확보를 하는 것 같았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쌀 두 가마를 사두었기에 이것을 절약하여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했다. 그 때 조카 임연이의 역할은 정말 컸다. 먼 곳까지 가 호박과 야채를 구해왔고 이것이 식구들의 양식에 큰 보탬이 되었기에 두 노인과 어린 자식들을 이끌고 내가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면 이처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어려운 순간 순간들을 잘 극복할 수 있었고 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에게 깊이 고개 숙여 진심으로 감사한다.

 

부역자와 빨갱이

 

              1950. 10 월 어느 날이었다. 두 남자가 나를 찾아와 경찰에서 나왔다면서 물어볼 것이 있으니 치안국으로 같이 가자고 하였다. 나는 잠깐 갔다 돌아 올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 나섰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서야 알게된 일이지만 뒷집 송씨 할머니의 손자가 나를 부역했다고 고발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 식구가 비축해 두었던 쌀로 연명을 해 나가는 것을 보고 내가 학교에 나가 부역하면서 배급을 받아 살았다고 오해한 것이었다. 나는 치안국으로 가서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조직된 조사팀에 의해 조사를 받게 되었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걱정보다는 오히려 식구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간단히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던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조사는 종로에 있던 치안국 지하 유치장에 머물면서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곳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좁은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다. 조사 받았던 곳 은 치안국 건물 건너편 이층이었고 그곳에서는 교육관계자들만 조사 받았다. 치안국 지하실 유치장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들을 고문을 했으며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의 피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며칠을 두고 매일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면서 조사를 한 뒤 하루는 꾸며진 조서를 내 앞에 밀어주며, 읽고 서명을 하라는 것이었다그 조서의 내용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었고 나는 그 내용에 대해 부인하였지만 그래도 사인을 하라고 하였다.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더군다나 내게 불리한 일을 했다고 할 수 없으니 사인을 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나를 다시 유치장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일을 몇 번 반복하다가 하루는 나를 타이르면서 사인만 하면 후에 자기들이 모든 일을 잘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이 때의 일은 나의 미숙한 탓으로 사인을 하고 말았는데 나에게는 크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 사람들의 "잘 처리해 주겠다"는 그 말을 받아들여 사인을 해 주었다. 그 조서에는 내가 공산당에 입당한 일이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는데 그 사람들도 모르는 일이었고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일에 얼마나 무지했었나 하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공산당원으로 만들어져 오재도 검사의 최종신문을 받게 되었다. 오재도 검사가 유치장으로 와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간단하게 면접을 끝냈다. 당시 나는 오재도 검사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오재도 검사와의 간단한 면접 후 나는 이제는 나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왜냐면 나를 신문하던 두사람들이 오재도 검사와 면접이 끝나면 나갈 거란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날 나는 형무소로 이송되게 되었는데 이송되는 도중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물 삼층인지 사층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곳에서 며칠을 지내야 했다.

              그 이 후 오재도 검사는 공산당을 날조해 내는 검사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악랄한 검사로 알고 있다는 것도 후에 알게 되었다. 내가 조사를 받느라 들락거리는 동안 돈을 주고 빼내왔어야 했었는데 내 주위에는 나를 위해 그런 일을 주선 할만한 사람도 돈도 없었다. 큰집 임정희 형님이 나중에서야 그것을 알고 일본여대 기숙사에서 나와 같이 있었던 한 반 위 선배인 김정수씨의 남편 장후영변호사에게 부탁을 했다고 했다. 이것도 나중에서야 안 일이어서 한번도 나는 내 일로 장변호사를 만나 본 일이 없었으며 영원히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 뒤 장변호사는 죽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들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사촌동서 임정희형님에게 그 때 나를 위해 수고해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오재도 검사가 빨갱이라는 근거 없는 잣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갔을까를 생각해 보면 끔찍한 일이다. 구금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였는지 나는 신세계백화점 건물 삼층바닥에서 며칠을 보낸 뒤 서대문 형무소로 옮겨졌다.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된 후 나 바로 위의 남선언니 이름으로 솜옷과 먹을 것이 들어왔다. 입고 들어온 옷은 갈아입은 후 내보내라고 해서 내가 끼고 있던 백금반지를 옷 사이에 넣어 내 보냈으나 훗날 물어보니 반지는 그곳에 없었다고 했다이렇게 해서 서대문 형무소생활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세 차례나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나갔다. 형무소 안은 바깥 세상과는 격리된 곳이지만 모든 필요한 뉴스는 신속하게 다 전달이 되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형무소 안에 들어가서 장변호사가 나의 변호를 담당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 때 배고픔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했다. 시식 들어온 것을 아껴 먹느라고 남겨 두었더니 어느 사이에 없어져 버렸다. 감방, 그 좁은 공간 안에서도 도둑은 있었다. 좁은 감방 안에 어찌나 많은 사람들을 수용했든지 마치 콩나물 시루 안 같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느 날이면 출감할거라는 날이 몇 번이나 지나가 버렸다

              세 번째 재판에서는 간단한 질문 후 사형구형을 언도 받았다. 사형구형을 받고 형무소로 돌아 왔더니 감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가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사형구형을 해서 겁을 준 다음 석방하는 것이 통례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나갈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형무소 안에 어수선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매일 밤 자정쯤 되면 몇 사람씩 불려 나가는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 밤중에 불러내 어디로 데려가느냐고 물었더니 재판도 없이 총살시킨다는 것이었다. 1220일이 지난 어느 날 밤 전날과 같이 또 호명이 시작됐다. 그런데 몇 명만이 아니라 호명은 계속됐었다. 이 때 감방 안에는 인민군이 반격해 내려오고 있다는 말이 퍼지고 있었다. 호명이 계속되면서 감방 안에 동요가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을 다 불러 낼 것 같다고 하였다. 그 말은 어디론가 옮겨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나갈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기에 크게 실망했다. 호명이 내 차례가 되어 나갔더니 불도 없는 공지에 편을 갈라 세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쪽으로 줄을 서라고 해서 그 줄에 끼였는데 그 줄이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는 것을 대전형무소로 가서야 알았다. 내가 섰던 편이 아닌 다른 편에 섰던 그 많은 사람들은 그 날 밤 그곳에서 모두 총살을 당했다고 들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줄로 사람들의 허리를 굴비 엮듯 엮어 형무소를 출발하여 도보로 서울역까지 왔을 때는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아 지나가는 행인을 볼 수가 있었으니 그들도 우리 행렬을 보았을 것이다.

              참으로 비통한 민족사의 한 토막 속에 나는 말없이 끼어 있었다. 서울역에서 화물차 속에 물건 취급을 받으며 실려져 대전 형무소로 갔다. 대전형무소로 이감이 되던 날이 1224일로 기억된다. 이 모든 일들은 대 혼란 속에서 진행되었다. 하루 밤을 대전형무소에서 지내고 다음 날 밤 1225일에 나는 그 곳에서 석방되었다. 석방되기 전에 같은 방에 있던 사람이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형무소 건물을 나갈 때 절대 주위를 살펴보지 말고 전속력으로 달려서 나가라는 것이었다. 지금 출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문 밖에 나가자마자 총살당하고 있으니 전신의 함을 다해 그 총알을 피하라고 덧붙였다. 아닌게 아니라 밖으로 나오니 분위기가 정말 살벌하였다. 길 양쪽으로 권총을 빼든 군복 입은 사람들이 위협사격을 하면서 무작정 나가는 사람을 옆으로 끌고 가 그 자리에서 탕탕하고 쏘아 버렸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함을 잃지 않으면서 앞만 보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한참 그렇게 걸어나가니 길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던 군복 입은 사람들은 없어지고 수감자를 기다리던 가족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지옥에서 빠져 나오는 사람들을 가족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반겨 주었다. 먹을 것을 파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돈도 없었고 기다리고 있을만한 가족들도 없었으니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에게 두부를 사주면서 살아 나와서 반갑다며 먹으라고 했다. 너무나 고마웠다. 이렇게 나는 살아오는 동안 고비마다 아름다운 인정을 경험했다.

              대전역으로 찾아가 서울로 가는 기차편이 있나 알아보니 여객 차는 물론 있을 리 없고 군용품 수송열차만이 통과할 뿐이라고 했다. 어떤 차든지 서울까지 갈 수만 있다면 타야했다. 가시도친 철조망 머리를 실은 군수송열차가 정차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차가 곧 떠난다고 하니 타기는 타야겠는데, 어떻게 저 위에 앉아 가느냐가 문제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종이상자가 있었다그것들을 들고 기차 위로 올라가 철조망 위이기는 했지만 앉아 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인간이란 자기 안에 정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나는 거듭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그 때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종이상자로 덮었다고는 하지만 날카로운 가시 철망 위에 앉았으니 그야말로 가시방석 위에 앉아 가는 것이었으니 그 실정이 어떠했을까 싶다.

              1225일 밤 엄동설한 자정을 넘은 시간에 가시도친 쇠 철망 위에 앉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가정이란 수련장에서 사회라는 수련장을 거치는 동안 그런 극한 상황을 극복하면서 이 시점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면 감개가 무량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 신기한 일은 그 이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고생스럽다, 어렵다 힘들다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 온 점이다. 어려운 고비마다 나는 자연스럽게 어떤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기에 나의 마음은 공포라든가 슬픔의 감정에 빠져 들지 않고 그 고비들을 무사히 넘겨 왔다. 아침 몇 시나 되었는지 시계가 없어 알 수는 없었지만 기차가 어떤 역에 정차했는데 역에 있던 사람이 이 차는 더 이상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역이 영등포역이라고 했다. 서울역까지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가 걸어서 북아현동까지 갈 일을 생각하니 아득하기는 했지만 갇혔던 몸에서 자유의 몸이 됐다는 것은 굉장한 것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때라 기차에서 뛰어 내려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대전 형무소에서 나오기 직전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통행증을 나누어주어 나도 받아 나왔었다. 영등포역에서 북아현동까지 걸어가는데 검문소를 몇 군데나 지났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많은 곳에서 검문을 받았다.

              이 검문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모두 달랐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 보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옳은 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어떤 곳에서는 마치 적을 수색해 내듯 위압적이어서 공포감을 조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검문을 하는가 하면, 내가 가진 통행증에는 대전형무소의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형무소에서 풀려 나왔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는데도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집에 가서 푹 쉬십시오' 라고 위로의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내 가슴에는 뜨거운 동포애의 파도가 휘몰아쳐 하염없이 눈물 흘린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때 그 말을 듣고 '이것은 민족적 수난이니 우리다 함께 슬기롭게 잘 극복해 나갑시다' 라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청파동 검문소를 지나 북아현동 검문소에 다다를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봇짐을 이고 지고 서울을 빠져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내 갈 길에 정신이 팔려 별 관심이 없었다가 나는 서울 안을 향해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데, 서울을 등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거듭 만나게되니 이상해서 물어 보았다. 그런데 한다는 말이 UN군이 밀려 내려오기 때문에 서울에서 피난을 나가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북아현동에 들어서면 배추밭이 있었는데 배추는 뽑아 김장을 다 했는지 없고 우거지들만 깔려 있었다. 북아현동에 들어서면서 거리에서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집이 가까워오면서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어디에서 날아 왔는지 까치 두 마리가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 앞에서 '깍 깍' '깍 깍'하면서 풀쩍 풀쩍 한참동안 나를 앞지르며 뛰어갔다. 내가 걸어가는데도 두려워하지 않고 '깍 깍'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니 내 머리 속에는 섬광과 같이 불길한 느낌이 지나갔다. 그러나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데 하면서 도대체 저 까치가 나에게 무엇을 알리려고 저러는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 나는 또 한번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경험했다. 배추밭 있는데서 집까지는 상당한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난 한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그 때 나의 심리상태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집에 도착해 굳게 닫힌 대문을 아무리 흔들어도 조용하기만 했다. 북아현동 우리 집은 집안에서 대문까지 나오려면 한참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다시 대문을 마구 두드렸다. 발자국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다시 대문을 막 흔드니까 시아버지께서 '나갑니다' 하시는 소리가 들려 왔다. 대문을 여신 시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너무나 놀라시며 반가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시며  말씀하셨다. 식구들은 큰집 식구들과 같이 며칠 전에 차를 얻어 타고 충청도 임창으로 피난을 떠났고, 시아버지는 내가 25일 나올 것이라 연락이 있어 기다리느라 같이 떠나지 못했다고 하신다.

              내가 나와서 집으로 오더라도 식구들 간 곳을 모르면 찾아 올 수 없다고 생각해서 남으셨다는 것이었다. 혼자 나를 기다리시던 중 만주에서 출발해서 걸어서 피난을 내려오던 세 모자가 시아버지를 만나게 되어 좀 쉬어가자고 해서 우리 집 사랑채에 머물게 되었는데 큰아들이 다리를 삐끗해 잘 걷지 못하게 되어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셨다. 그 사람의 어머니와 동생은 먼저 남으로 내려가고 큰아들이 걸을 수 있게 되면 시아버지와 같이 움직이기로 작정하고 있었는데 회복이 빨리 되지 않아 출발을 미루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다.

내가 크리스마스 전에 나온다고 해서 시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셨는데 내가 오지 않아 집에서 떠나려고 하셨단다. 만일 그 큰아들이 다리를 삐지 않고 1226일 전에 떠나셨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하다. 그런 식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산가족이 되어 뿔뿔이 헤어졌던 것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니 시아버지께서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지만 내 건강이 말이 아니라 금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몸을 좀 추스린 다음 떠나기로 결정은 했지만 그리 쉽게 회복될 것 같지가 않았다. 며칠이 지났지만 움직일 수가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뒷집 송씨 할머니 딸이 인사차 왔다며 찾아왔다. 너무나 의외였다. 내가 그 딸에게 모든 사람들이 다시 다 피난을 떠나는 이 상황에 어떻게 집에 머물러 있냐고 물으니까 자기 어머니가 죽어도 집에서 죽겠다고 하시며 피난을 가시지 않겠다고 해서 그냥 포기하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1.4후퇴 때도 서울에 남아 있는 사람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19501230일 서울시민 전원은 5114일 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이 전해졌다. 나는 정말 지친 몸이었지만 모든 짐을 차곡차곡 건너 방에 모아 잘 쌓아 두고 시아버지와 더불어 이불 한 장씩을 매고 11일에 집을 나섰다. 그 때까지는 집에 사람이 있었으니 집안에 있던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서울을 수복된 뒤 집에 다시 돌아 왔을 때는 집 몸체 외에는 문짝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아버지와 나 그리고 만주에서 피난 내려오다 우리 집에서 머물던 큰아들 우리 세 사람은 집을 나선 뒤 한강 쪽으로 얼마나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강가에 도착해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꽁꽁 언 한강을 걸어서 줄을 이어 건너가고 있었다.

              이상했던 것은 한강 둑에 몰려 강 건너기를 시도하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뿔뿔이 강 얼음판으로 내려갔지만 어느새 마치 개미떼나 벌레들이 이동할 때처럼 줄을 지어 강을 건너가는 것이었다. 질서정연하게 건넌다는 뜻은 아니고 혼란이 극심한 가운데 본능적으로 줄을 만들어 행동하던 그 장면이 지금도 내 기억에 선연하게 남아 있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시아버지와 헤어지면 안되겠기에 시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내 손을 놓지 마시기를 당부했다. 한강을 건너기 시작할 때까지는 같이 있었던 큰아들 김씨와는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그 사람은 남쪽으로 계속 내려갈 작정이었지만 천안까지는 우리와 같이 가기로 했었는데 한강 얼음판을 건너면서 그만 헤어지고 말았다. 얼음이 얼어있던 한강을 한참 건너는데 얼마나 걷고 난 후였을까? 얼음판에 금이 가는 쾅 하고 쩍하는 굉음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강을 건너 영등포역까지 왔을 때 기차 꼭대기에 빈틈없이 가득히 사람들을 실은 화물차가 서 있었다. 제각기 타보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군중들 틈에 끼어 우리도 혹시 타 볼 수 있는 틈이 있나해서 찾아보았지만 사생결단하고 덤비는 사람들의 힘을 이겨 낼 재주가 없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 단념하고 말았다.

              나는 다시 시아버지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살아오면서 내가 느낀 거지만 자기 혼신의 힘을 다한 사람에게는 어떤 다른 힘이 도와주는 것 같았다. 시아버지는 보통 때도 잘 걷지 못하시던 분이셨고 나는 도저히 걸을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도 계속 걸었다.

해가 서산으로 거뭇거뭇 지면서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사람들의 행진이 느려졌다. 다리가 하나 나타났는데 그 다리를 지나면 평택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어두운 밤에 다리를 건너다 강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듣고 시아버지와 나는 거기에서 걷기를 중단했다. 그 다리 근처에 큰 창고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창고 속으로 들어가 제각기 자리를 잡고 가지고 온 쌀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우리는 쌀이나 먹을 것을 가지고 오지 못했기에 그 날 저녁은 그 창고에서 쉬기로 하고 자리를 찾아 매고 온 이불을 깔고 누웠다. 그런데 옆에서 밥을 짓던 사람이 나에게 밥을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자기들도 얼마나 더 버텨야 할 지 모르는 다급한 형편에 옆에 굶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 귀중한 음식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창고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 날 이른 새벽 다시 일어나 걷기를 시작했다. 창고 밖에 나와보니 나와 시아버지는 다행스럽게도 건물 안에서 하루 밤을 보낼 수 있었지만 건물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노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도착했을 때는 식구끼리 몰려 있다가 아침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하니 대 혼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람들 수는 많고 질서는 없었으니 가족들이 헤어지기 시작했다. 서로를 부르며 찾고 야단법석이났다. 참으로 딱한 대 혼란이 삽시간에 시작됐다. 그러한 혼란 중에서도 남쪽을 향한 행렬이 다시 시작되니 누구도 그 물결의 흐름을 멈추지 못하였다. 나와 시아버지도 남으로 향한 행렬의 물결에 합류했다. 그 때 그 사람들의 물결이 부산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다. 나는 피난 와중에서 여러 가지 기막힌 광경을 계속 보게 되었지만 어떤 젊은 여자가 업고 가던 아기를 길옆에다 남겨 두고 혼자 떠나가던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어떻게 자기 자식을 그럴 수가 있었는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얼마동안을 걷고있는데 비행기가 이 행렬 뒤쪽을 공습하기 시작해 다시 대 혼란이 일어났다. 남으로 향한 끊임없는 행렬의 대열에 섰던 사람들 모두는 길옆으로 내려가 엎드렸다. 하지만 행렬 뒤쪽에서 는 큰 굉음과 함께 폭탄인지 무엇인가 요란하게 터졌다. 한 차례 소란이 지나간 뒤 인간물결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남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그 때 피난민을 폭격했던 비행기는 UN군 비행기였고 피난민 행렬 중에 인민군 빨치산이 끼여 있다고 해서 공습을 했다고 한다. 그 공습으로 인해 많은 피난민들이 영문도 모른 체 죽어갔다. 천안이 가까워 오니 많은 국군들이 남으로 가는 길 일부만 터놓고 사람들이 피난민 행렬에서 빠져나가 옆길로는 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시아버지와 나는 의논 끝에 어쨌든 식구들이 피난 간 입장으로 가기로 했다. 군인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입장에 있던 사람들도 이미 남쪽으로 다 피난을 떠나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곳으로 가서 가족들이 간 곳을 확인해야겠기에 입장까지 가보겠다고 우겼더니 군인들이 우리를 통과시켜 주었다

              입장으로 큰 집 식구와 치과집 식구를 따라 우리 식구가 입장으로 피난을 가게 된 것은 치과의사인 사촌동서 이양숙형님의 사촌오빠가 입장에서 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정도 거리까지 가 있으면 곧 국군이 다시 밀고 올라 올 것이므로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단다. 천안에서 입장까지는 약 30리 정도쯤 된다고 본다. 천안에서 군인들이 말 한대로 입장 읍에 들어섰을 때는 다 피난을 떠났는지 사람들이 없었다. 면장집을 찾아야 하는데 사람을 만나야 물어보지 않겠는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찾아다니는데 개 한 마리가 어느 집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개라도 보니 너무나 반가웠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 개는 큰집에서 기르던 누렁이 진돗개가 아닌가시아버지께 그 개가 큰집 개라고 하면서 필연코 누가 개를 데리러 나올 것이니 그 집에서 기다려 보자고 말씀드렸다. 먼길을 걸은 후라 몹시 지쳐 있었기 때문에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가 저물어 점점 어두워지고 잇을 무렵 내가 예상했던 대로 큰집 가운데 조카 종일이가 그 집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너무나 반가워서 얼싸안고 한바탕 소동을 피운 뒤 모두들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보니 이 곳에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10리쯤 떨어진 곳에 방을 얻어 옮기고 있는 중인데 마지막으로 개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개를 같이 데리고 갔을 수도 있었는데 이 개로 인해 우리가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방을 얻어 후퇴한 곳에서 다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아 30리쯤 산중으로 들어간 곳에 호당리라는 광산촌이 있는데 일단 온 식구들을 그곳으로 옮겨 놓고 개를 데리러 왔다고 했다. 이 때 만일 개까지 같이 데리고 갔었다면 시아버지와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서도 또 한번 가족들과 헤어질 뻔했던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다. 밤길이 너무 어둡고 또한 낯선 곳이라 힘들게 가족들이 모여 있다는 호당리로 찾아 들어갔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산길이라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는데도 태산같이 높은 산봉우리가 저 멀리 희뿌옇게 위압적인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카 종일이 말이 광산촌 호당리는 저 높은 산밑에 있는 광산촌이라고 했다. 마을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우리가 가는 것을 알고 반겨 주느라고 짖었는지 이방인이 온다고 경계해서 짖었는지반가워서 짖었던 것으로 생각해야겠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리 큰 마을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돌담이 쳐진 골목길을 들어서니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마당에 들어서면서 조카 종일이가 큰소리로  "어머니, 무장댁 할아버지와 아현댁 아주머니가 오셨습니다"하고 외치니 방안에서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멈추고 누군가 문을 와다닥 열면서 "무엇이라고" 하면서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모두 말문이 막혔는지 한참 말이 없다가 서로 왈칵 부둥켜안으면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랫동네 개울 건너에 살았던 무당 순이 엄마가 우리들이 그 날 저녁에 만나 통곡 하는 것을 보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만난 것 같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집은 방 두 칸에 부엌이 딸린 집이었는데, 큰집 식구가 시백모님, 형님, 종일이, 종율이, 큰 형님의 이복여동생가족 두 명, 거기에다 우리 식구 시모님, 옥경, 은명, 세진, 시아버지와 내가 합쳤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날 저녁에야 어쩔 수 없이 그 좁은 두 방에서 날을 셀 수밖에 없었지만 다음 날 나는 서둘러 우리 식구들이 거처할 곳을 찾아 나섰다. 하기야 사실이 그러하지 않았든가. 마을 이래야 몇 집도되지 않았으니 치과집 이양숙형님네는 이미 다른 집을 얻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 식구가 거처할 마땅한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본 마을은 약간 산언덕바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 언덕을 걸어 내려가면, 산에서 내려오던 물이 꽤 큰 개울을 이루어 흐르고 있었다그 개울을 건너 무당 순이 엄마가 사는 집과 옆에 방 2개가 있는 자그마한 집이 있었다. 결국 우리는 그 집을 빌려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방바닥에는 아무 것도 깔려있지 않은 흙바닥이었고 그 흙바닥조차 편편하지 않아 마치 멍게 껍질처럼 울퉁불퉁했다. 일부러 그렇게 도배를 하려고 해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더라도 식구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니 고맙기만 했다.

              지금 내가 그 때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디에서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나왔는지 정말 기적 같은 생각이 든다. 인간 속에 간직되어 있는 힘이 얼마나 무한한 가를 살아가면서 이런 경험들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자연은 참으로 공평했다. 우리가 거처했던 그 집은 집 건물 자체는 형편없었지만 집 앞에는 맑은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개울이 있었고 뒤쪽에는 엄동설한인데도 불구하고 푸른 보리밭이 뒷산까지 이어져 있었다. 주위의 경치는 정말 아름다웠다.            

              다음 날부터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우선 당장 시작해야했던 일은 방을 따뜻하게 하는 일이었다. 나무를 해 다가 아궁이에 불을 때야했기에 산으로 가 마른 나뭇가지를 주어오는 일부터 시작했다. 땅에 떨어져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으니 나중에는 나무에 붙어 있던 가지를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꺾어와 불을 땠다. 하지만 우리가족이 그곳을 떠나올 때까지 추위에 떨지 않을 만큼 생솔가지로 몸을 대펴주기를 계속했다. 생솔가지로 불을 지피니 불이 잘 붙지 않고 연기가 나 혼난 일도 먼 추억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시모님은 허리가 굽으셔서 걸음조차 걷기 힘들어 하셨고 큰 딸 옥경이는 6, 은명이는 5살 세진이가 3살이었으니,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시아버지뿐이었으나 이 분 역시 평생을 생활하기 위해 일을 해 보지 않으셨던 분이라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집 앞에 흐르던 시냇물은 어찌 그리도 맑고 아름답던지. 날씨가 추우면 개울이 얼어 버려 얼음을 깨고 물을 퍼다 먹어가며 얼마동안을 그곳에서 보냈다보리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달래 캐는 것을 가르쳐 주었더니 너무너무 좋아라 하며 즐거워했다. 내가 12살까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것도 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집을 나서기 전에 시아버지께서 약간의 돈을 나에게 건네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큰 집 임정희형님 이복 여동생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사람인데 팔아서 돈이 될만한 것은 그 사람에게 다 맡기고 파는 대로 돈을 받고 계셨다면서 물건은 많이 가져갔지만 다 팔리지 않아 받은 돈은 이것이 전부라고 하셨다. 그 돈이나마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하고 허리춤에다 그것을 차고 다녔는데 얼마 지난 후 마을에서 누가 쌀을 팔려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쌀 한 가마니를 샀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었던가! 쌀만 있으면 식구들을 연명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큰집 임정희 형님은 6.25전쟁이 나기 전에 무주에 있는 산판에서 벌목을 해 실어내는 일을 감독하느라 그곳에 가 있다가 서울로 올라 오신 분이다. 우리 시댁 박씨집에는 아들이 넷, 딸 하나의 5남매 중 우리 시아버지는 막내아들이셨다. 큰집에는 용철씨, 남철씨, 만철씨 이렇게 아들 셋에 외동딸인 봉자 형님까지 4남매가 있었다. 임정희 형님은 지금의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 1회 졸업생이다. 큰집의 맏이인 용철씨는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분으로, 당시 뛰어난 재주를 가진 지식인중의 한 분이셨으나 일찍이 돌아 가셨기 때문에 나는 상면할 기회가 없었다. 큰집은 양반가문에 큰부자였었고 용철씨는 장남이니 일찌감치 정혼을 하게 되었단다. 정혼한 규수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데 신식교육을 받지 않은 것이 흠이었다고 한다.

              용철씨는 이 점을 깊이 고려해서 결혼하기 전에 그 규수를 교육시켜야겠다고 작정하고 자기 동생 봉자와 같이 집에서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었단다. 그러나 그 규수는 머리가 그리 좋지는 못했던지 공부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하지만 봉자형님은 오빠가 지펴 놓은 향학열을 억제하지 못해 서울로 공부하러 가겠다고 했다한다. 오빠인 용철씨는 대찬성이었지만 부모님들은 여자는 일찌감치 시집을 가야한다며 반대를 하셨다 한다. 용철씨의 주선으로 봉자형님은 서울 유학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봉자형님이 서울로 올라가 이화여전에 입학하면서 임정희형님과 사귀게 되었고 자연히 용철씨도 정희형님과 친해져 서로 사랑하게 된 모양이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의 씨앗이 생기게 되니 큰집에서는 용철씨와 정혼해 놓고 기다리고 있던 규수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규수에게는 상당한 재산을 건네주고 파혼을 했지만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평생을 수절하다 죽었다고 한다.

              호당리 피난처에서 어느 날 큰집형님이 나를 부른다기에 찾아갔다. 형님은 나에게 시아버지가 자기 동생에게 팔아 달라고 맡긴 물건들 중에 남은 것을 피난 오면서 가지고 왔는데 그 물건들을 도로 가지고 가고 그 물건에 대한 돈을 돌려 달라고 하였다. 내게는 그 말이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고 그 때의 내 처지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어 그럴 수 없다고 말을 했다. 나도 그 물건들의 거래 내역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정희형님 역시 동생이 처리한 일이라 그것을 알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계산을 하자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내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정희형님이 어떻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치과집 이양숙형님은 의사로서 한 몫을 하면서 그런 대로 괜찮은 피난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우리가 피난살이를 하고 있던 호당리 마을에 군인 찦차가 들어왔다. 우리 시백모님의 친정 조카뻘 되는 국군장교가 쌀 두 가마니를 가지고 와 급한 대로 나누어 먹고 어려운 고비를 넘겨보라고 한 뒤 돌아갔단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이양숙치과형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치과형님 말에 의하면 가지고 온 사람은 모두 같이 나누어 먹으라고 했다는데 받은 사람이 나누어주지 않는다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는 한 다리가 먼 사촌간이니 나누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돈을 가지고도 쉽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치과형님의 불만에 나 역시 공감했다.

              그 뒤 치과형님은 시부모님이 자기 남편 몫으로 분배해 주신 재산을 자신에게 한 푼도 나누어주지 않았다고 나에게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특히 치과동서의 막내아들 준수가 KBS PD 였는데 자금이 없어 자립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없어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문중 소유의 땅이 국가에 수용되면서 막대한 보상금이 문중 이름으로 나왔을 때도 (누가)독차지했다고 섭섭해하며 내게 말하곤 했다.

 

              어느 날 또 한번의 소동이 벌어졌다. 2방위선이 후퇴하니 호당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틀 내로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전갈이 왔다. 서울에서 입장까지 온 우리 식구들과 큰집 식구들은 짐을 싣고 피난 올 때는 차를 타고 왔지만 그때는 타고 갈 차가 없으니 걸어야만 했다. 남쪽으로는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어 천안 역까지 갈려면 입장으로 돌아서 가든지 산을 타야 했다큰집의 종일이, 종율이는 걸을 수가 있었어도 노인인 시백모님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치과집에도 아이들이 어려 움직일 수 없었고 우리집 역시 두 노인과 어린 세 아이들을 데리고 그 높은 산을 넘어 남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치과형님 말이 큰집형님이 "양숙이 식구들은 어차피 걸어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시모님을 맡으라"고 했다고 한다. 큰집에는 시백모님 외에는 큰집식구와 그 동생가족들인데 모두가 성인들이라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하니 그렇게 해보자고 한다면서 걱정을 태산같이 하였다. 치과형님과 나는 의논을 했다. 형편이 이렇게 되었으니 쌀로 떡을 해서 광산으로 모두 같이 들어가 며칠이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버텨 보도록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법석을 떨고 있는데 다시 제 2방위선이 북쪽으로 이동이 되어 호당리에서 그냥 있어도 되게 되었다. 치과형님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오래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2방위선이 북쪽으로 이동한 뒤 입장에 장이 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면 부산으로 내려 갈 수 있는 무슨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입장 장터로 갔다장터에는 어디서 왔는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트럭에다 물건을 싣고 부산에서 이곳까지 온 사람도 있었다. 그 장사하는 사람에게 우리 식구들을 부산까지 태워 줄 수 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럴 수가 없다고 하였다. 도중에 검문이 심해서 일반인들을 장사하는 트럭에 실으면 영업을 못하게 한다고 하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장에서 너무나 뜻밖의 일을 알게 되었다. 우편국이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나는 편지지와 봉투를 구해 그 자리에서 간단한 편지를 적어 울산 용잠에 계시는 어머니께 우리 식구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부산으로 내려갈 길을 찾고 있으니 찾아지는 대로 내려갈 거라는 소식을 전했다.

              돌아오는 길에 간고등어 두 마리를 사와서 먹었는데 어떻게나 맛이 있었던지 지금도 그 때 그 간고등어 맛이 내 혀끝에 남아 있다. 여기서 지금 사먹는 간고등어 맛은 그 때 먹었던 고등어만큼 맛이 없다. 요즈음 나는 간고등어를 사먹을 때마다 그 맛에 실망하면서 그 때 그 간고등어 맛을 되새기곤 한다. 사람들이 거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젊은 여자들이 머리를 빡빡 깎고 수건을 쓰고 다니는가 하면 모자를 쓰고 다니기도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유엔군인들이 젊은 여자들을 덮쳐 강간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저런 모습으로 다니고 있다고 하면서 그런 일이 벌어졌던 장소들을 들먹거렸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저녁을 먹은 뒤 방에 모여 앉아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가 막 잠을 자려고 하는데 호당리 마을 쪽에서 개가 요란하게 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따라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문을 열고 나가 마을 쪽을 건너보니 캄캄한 가운데 마을 앞길에 짚차가 헤트라이트을 켜고 멈춰서 있었다. 사람들이 흥분하여 웅성거리는 광경도 흘끗 보였다. 그 때 옆집에 사는 무당 순이엄마가 마을 쪽에서  뛰어 오더니 불을 끄라고 하며 다급한 소리로 한다는 말이 지금 호당리에서는 미군 두 사람이 마을에 들어와 아들이 군대에 가고 없는 시어머니와 갓난아기가 있는 며느리가 사는 집에 들어가 한 놈은 총을 들고 밖에서 지키고 번갈아 가면서 강간을 하고 있다고 조용하지만 흥분된 목소리고 말을 전했다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이라 가슴에서는 분노와 공포심이 범벅이 되어 치솟았다. 군인들이 여자들을 강간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지 정말 슬프고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나는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 놓고 답장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우리가 살던 광산마을 호당리와 입장까지 가는 중간 지점에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던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로 가는 길은 사격 연습을 하느라고 때때로 일반인들의 통행을 중단시키고 있었다. 군인들이 있는 곳이고 연합군에 배속된 한국인 카츄샤 병들이 있는 것을 보았기에 혹시나 할 일이 있을까 하고 찾아가 물어 보았다. 빨래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나는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집에서 내 빨래도 내가 해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거기 주둔하는 군인들은 제 2방위선을 지키는 외국군인들과 우리 군인들이 섞인 연합군대였다빨래를 모아 둘 테니 내일 오라고 그 군인은 하였다. 내가 한국군인과 만나 이야기하던 집 부엌에 김장김치 항아리를 묻어 둔 것이 보였고 무엇이든지 먹을 것을 구해야 되겠기에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누가 그랬는지 김치가 가뜩 찬 항아리 속에 똥을 소복하게 싸 놓았다. 먹는 음식이 든 곳에, 더군다나 김치 항아리에 똥을 눌 수 있는 사람은 한국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정이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똥을 싼 항아리에서 김치를 꺼낼 수는 없었다. 김치 항아리 옆에 두껑 닫힌 자그마한 항아리가 하나 더있어 열어 보았더니 고추잎 담아 둔 것이 있었다. 옆집에도 가서 묻어 놓은 항아리들을 열어보니 항아리마다 마다 똥을 소복소복 사 놓고 뚜껑을 덮어  놓았다. 그 광경을 보았을 때 나는 차마 표현하기 어려운 모멸감을 느꼈다

              나는 김치를 가지고 갈 생각은 단념하고 처음 집 부엌으로 돌아가 새끼줄을 찾아 고추잎 항아리를 새끼줄에 매어 등에 맸다. 상당한 무게였지만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내 안에 내재해 있는 가능성에 또 한번 도전하는 기회였다. 사격연습 관계로 길로는 갈 수가 없었기에 야산 산등성을 타고 걸어 넘어야 했는데 흙속에 서리가 자라 발을 짚을 때마다 푹푹 빠졌다. 10리가 좀 넘는 거리를 그 항아리를 등에 지고 집으로 와 그것으로 우리 식구가 호당리 광산촌을 떠날 때까지의 밥반찬으로 삼았다. 이 고춧잎을 하나하나 따서 맛있게 담아 놓고 먹지 못한 그 집주인에게 우리 식구들이 얼마나 그 고추잎을 맛있게 먹었는지에 대해 깊이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그 때부터 나는 고추잎을 무척 즐겨 먹게 되었는데 캐나다에서도 고춧잎을 팔기에 사다가 데쳐서 먹어 보았더니 역시 맛이 있었다. 그런데 또 사다 데쳐 무쳐서 먹었더니 그것은 아니었다. 맛이 없었다.

              내 경험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더니 자기도 같은 경험을 했다면서 한국에서 가지고 온 씨로 심은 고춧잎은 맛이 있어도 외국 고춧잎은 맛이 없다는 것이었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 나라는  기후와 토양이 서로 잘 맞아 땅에서 생산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맛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아버지 말씀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우주 대 자연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아왔다는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다음 날 빨래거리를 모아 놓겠다고 했기에 군인들이 머물고 있는 그 작은 마을로 찾아갔다. 군인들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휘발유를 끼얹어가며 태우고 있었다. 보니까 거의가 먹는 음식이었다.

              나는 어제 만났던 한국군인에게 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태워 없애버리는지에 대해 물었더니 제 2방위선이 북진하게되어 저장하고 있던 물건들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지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이 근처에는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불에 태워버릴 것이 아니라 나누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그 군인 말이 군에 속한 물건이라 그럴 수 없다면서 계속 멀쩡한 음식을 불에 태우고 있었다. 너무나 아까웠다.

빨래라도 해 볼 것이라던 기대도 허사가 되어 주인 없는 집에서 김치라도 얻어 올까하고 근처에 있는 집에 다시 찾아가 땅에 묻어 놓은 김치 항아리를 열어보니 여기도 항아리마다 똥을 싸놓고 뚜껑을 얌전히 덮어두었다. 김치는 결국 갖다 먹지 못하고 말았다

              입장 장터에 갔을 때 천안까지는 부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말을 들었기에 천안으로 가 보기로 작정을 했다. 어느 날 큰집 정희형님 이복여동생과 둘이서 천안으로 나갔다. 듣던 대로 천안에는 부산에서 트럭에 물건을 싣고 장사하러 온 사람들이 꽤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반인들을 차에 태우고 내려 갈 수는 없다고 하였다. 하는 수 없이 혹시나 하고 기차역 앞으로 가 보았다. 기차역 문 앞에는 병사 한 사람이 장총을 메고 지키고 서 있었다. 그 군인에게 내 친정은 울산이고 오빠는 부산에 살고 있다는 등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남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식구들이 굶을 형편인데 무슨 방법이 없겠냐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지금은 근무시간이라 길게 얘기할 수 없으니 다시 한번 더 오라면서 만날 장소를 말해 주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속담대로 나는 그 군인에게 큰 기대를 걸고 그 날은 그냥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호당리로 돌아왔다. 다음 날 다시 30리가 넘는 산길을 걸어 그 군인이 정해 준 시간에 약속했던 장소로 갔더니 그 군인은 평복을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반가웠다. 이름도 모르는 그 군인이 가족을 다 데리고 남으로 내려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닌가여객열차가 이 전시에 있을 리는 만무했고 군수품을 싣고 일선 가까이 까지 갔다가 물품을 푼후 남으로 내려가는 빈 화물차에 우리 식구들을 타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돈이 있어 보여 돈을 받을 목적으로 나를 도와  주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천우신조라고 하던가? 다음 날 밤 12시 정각에 짐을 가능한 간단히 꾸려 역 앞에 있는 식당 건물 안에서 불은 물론 켜지 말고 소리도 절대로 내지 말고 자기를 기다리라고 했다. 그 다음 행동은 자기가 하라는 대로 따라서 움직이면 된다고 하였다. 역 안에는 MP가 수시로 돌며 검색하니 절대로 소리를 내지 말고 민첩하게 행동하라고 하였다.

              남으로 내려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가족이 있는 호당리로 산길 30리를 날아가듯이 돌아갔다. 그리고 짐을 몽땅 싸고 부산까지 얼마나 걸릴 지도 모르지만 숨죽여 가야하는 고난의 여행 아닌 여행준비를 했다. 물과 밥, 대소변을 위한 빈깡통 등이 그 준비물들이었다. 호당리를 떠나기 직전 참으로 우연한 사건이 또 하나 생겼다. 길지 않은 동덕여고 교편생활 중 나에게 배운 일이 있다는 학생을 우연하게 길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우리 식구가 남으로 내려가기 위해 호당리를 내일 떠난다고 하니 자기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지게에다 짐을 실어 천안까지 갖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우리 식구는 형제들이 있는 부산을 거쳐 어머니가 계시는 내 고향 울산으로 가기로 했다. 큰집 식구들은 전라도로 가기로 정하고, 치과집 식구들은 이양숙형님의 친정이 있는 충청도 어딘 가로 가기로 결정을 해 놓고, 우선 젊고 튼튼한 종일이와 종율이가 걸어서 전라도까지 가 짐과 식구들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결정한 것까지만 알고 우리 식구는 다음 날 오후 천안으로 떠났다. 치과집 동서가족은 처음 피난목적지였던 입장 읍으로 나가 1년을 더 살았다는 이야기를 훗날 들었다. 천안으로 떠날 때는 4월 초였는데 개울물은 녹아 졸졸 흐르고 들에는 개나리, 할미꽃이, 산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한참 주변경관이 아름다울 때였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도 자연은 변함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펼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

 

어느 뜻밖에 배달부가 찾아와서 편지를 전해 주고 갔다. 울산에서 온 어머니의 편지였다. 내가 지난번에 보낸 편지를 받아 보신 뒤 막내딸과 그 식구들이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기쁘고, 놀라고, 감사한 마음에서 쓰신 답장이었다. 편지는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서울서 다른 사람들은 다 내려 왔는데 여태까지 아무 연락이 없어 다 죽었나 보다하고 초조하게 소식오기를 기다리던 중 뜻밖에 네 편지를 받아보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개나리 봇짐을 지고서라도 너를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주위 사람들이 말려 못 가고 있다박서방(남편)은 동경에 머물면서 나하고는 편지로 연락이 되어 가족의 소식을 물어 왔으나 울산에서도 모르고 있다는 회답을 보냈고, 우리에게서 무슨 소식이나 있기를 고대하고 있던 중 내 편지를 받으니 죽었던 사람들이 살아 온 것같이 반갑고 기쁘다. 울산에서 사람을 보낼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고 쓰셨다. 어머니 편지를 받을 때가 4월 중 어느 때였다고 생각된다. 남선언니 식구들은 바로 울산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남선언니께 나를 찾아 올라가주기를 부탁했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언니의 남편이 펄쩍 뛰면서 이러한 전쟁 북새통에 자기들 가족을 지켜야지 어떻게 위험한 일선 가까이 가겠냐고 하며 반대를 해서 오지 못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무도 갈 사람이 없으면 자기라도 개나리 봇짐을 메고 찾아 나서겠다고 해 주위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혼이 났단다. 부모의 사랑은 자기 목숨은 버리더라도 자식을 구하고자 하는 것인데 평택 다리 옆에 우는 아기를 버리고 간 젊은 엄마는 어떤 심정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생각하게 된다동덕여고에서 가르쳤던 학생 친척이 지게에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우리들에게는 무거웠던 짐을 지고 앞장서서 천안으로 향했다. 그 날은 유난히도 화창한 봄날이었다. 아이들은 소풍이나 가는 듯 기뻐했고 특히 둘째 딸 은명이는 펄쩍펄쩍 뛰면서 깔깔거리며 앞장서 가던 장면이 지금도 뇌리에 선연하게 남아 있다. 호당리에서 천안까지는 산길로 30리 거리였다. 시모님은 젊었을 때도 이런 거리를 걸어 본 일이 없었을 텐데 꼬부장하신 허리로 천안까지 걸어 가셨다이런 것을 보고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고 평상시에는 할 수 없는 일이라도 다급해지면 인간 안에 잠재하고 있던 무한한 능력이 발휘된다고 하는 것인가 보다.

천안에 도착한 뒤 전에 군인과 만났던 집에서 거의 자정 될 때까지 머물렀다. 자정이 가까워 진 후 역으로 나가 군인이 지정해 준 불도 없는  역전 식당으로 들어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천안 역 안에도  켜진 불은 없었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이어서 더욱 주변이 캄캄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유리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어슴푸레하게 주위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유일한 불은 MP들이 들고 다니며 비추는 손전등 뿐이었다. 역 플랫폼에는 물건 저장하는 자그마한 창고가 있었다. 이 창고도 우리 일행을 위해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 가족이 식당 안쪽에 몰려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를 도와 줄 군인이 드디어 나타나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걸어 둔 고리를 열어주니 재빨리 들어왔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의 MP가 정거장 안을 순회하는데 한번 지나갔다 다음 올 때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있으니 그 시간을 이용해 기차에 올라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날렵한 젊은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모험인데 나를 뺀 5명의 다른 식구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빈 열차는 이미 역 정거장에 정차하고 있었다. 자기가 손을 들면 조용하고 빠르게 움직이라고 하였다.  MP 두 사람이 손전등을 이리 저리 비추며 우리가 숨어있던 식당 근처를 지나갔다. 그 군인이 손을 들어 움직이라는 신호를 했다. 걸음도 민첩하지 못한 두 노인과 아이들 셋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세진이를 들쳐업고 시아버지의 손을 잡고 조용히 뛰어 플랫폼에 있는 작은 창고 뒤편까지 데려다 놓았다. 다시 뛰어와 시모님의 손을 잡고 옥경이와 은명이를 이끌고 창고 옆에 모아 놓고 군인의 손짓에 따라 기차 옆으로 조용히 다시 뛰었다. 군인은 기차 문을 조심스럽게 열면서 어서 안으로 올라타라고 손짓하였다. 짐을 먼저 기차 안으로 밀어 넣고 꽤 높은 화차 위에 뛰어 올라탔다. 그런 뒤 나는 위에서 손을 잡고 당기고 군인은 밑에서 밀어주어 식구들 모두가 기차에 올라 탈 수 있었고 식구들이 다 탄 것을 보고 군인은 잘 가라는 인사를 무언의 손짓으로 했다. 난 감동에 벅차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한 채 무언으로 그의 손을 말없이 꽉 잡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 뒤 그 군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이름도 얼굴도 기억할 수 없지만 그런 극한 상황에서 어디에 사는 누군지도 모르는 우리 식구들을 다만 인간애로서 도와 준 그 군인에게 지금까지 아니 내가 죽을 때까지 그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할 것이다.

              내가 이 은혜를 갚는 길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되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 군인과 뜨거운 감사의 악수를 나눈 뒤 나는 안에서 군인은 밖에서 기차 문을 조용히 닫았다. 기차 문을 닫기 전에 기차 안을 둘러보았더니 빈 드럼통들이 여러 개 있었다. 이것들을 움직여 문 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둘러쳐 놓고 식구들에게 그 안쪽으로 몰려 앉도록 했다. 이렇게  시작된 기차 피난여행은 부산까지 3일이 걸렸다. 우리가 타고 있던 기차는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다. 올라오는 차를 비껴서 다른 선으로 피해 있다가 다시 움직이곤 했기 때문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밥과 물을 준비 하기는 했지만 물론 부족했고 밥이 식어 굳어버려 어린 세진이가 먹고 체해 병이 났다. 기차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기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우리가 타고 있던 칸에도 사람들이 올라와 바깥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대구를 지나 삼랑진에 오니 차 승무원이 나타나 요금을 내란다. 그 때 내가 요금을 냈는지 여부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세진이가 열이 나고 몹시 아팠다. 초량역에 도착해서 초량에 사는 오빠네 집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여서 걸어갔다. 그 때의 우리 가족 모습은 영락없는 거지였을 테니 오빠와 올케가 보고 얼마나 놀랬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기가 찬다

              과거에 대동광업주식회사 외에도 여러 가지 사업을 했던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일단은 모두 오빠집을 거쳐 부산에 정착을 했단다. 우리 식구가 서울에서 바로 부산으로 피난을 올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그 때 집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댁식구들이 부산을 피난처로 생각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나는 우리 식구가 오빠네 집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날 바로 울산으로 가기로 결심한 뒤 울산으로 가는 방법을 알아보았으나 버스가 다니지 않아 쉽지는 않았다. 방어진까지 가는 배편이 있다는 것을 알아 낸 나는 선편으로 방어진을 거쳐 용잠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입장에서 어머니로부터 답장을 받은 후 남으로 내려가겠다는 데만 온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께 다시 편지를 띄우지 못한 채 피난길을 떠났다. 그리고 초량에 도착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내가 오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계실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부산 부두에서 배를 타고 방어진으로 갔다방어진에서 용잠까지는 산을 넘고 다시 배를 타야만 했었다

 

부산 - 방어진 - 용잠 (19514)

 

방어진에서 배를 내린 산을 넘어 얼마나 걸었는지 기억 수는 없지만 마침내 용잠마을이 건너다 보이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용잠마을에 사는 사람이 용잠에서 우리가 배를 기다리고 있던 곳까지 건너는 손님이 있을 때만 노 젓는 배로 왔다갔다하던 시절이었고 전화도 없던 그 당시 10리 이상되는 되는 그 거리에서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 배가 와서 우리 식구를 용잠마을로 실어다 주었다. 용잠 서쪽 마을에 배가 닿기도 전에 뱃사공 아저씨는 큰 소리로 마을을 향해 소리쳤다 "서울댁 막내딸이 옵니다"하고....  마을에서 누군가가 재빨리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뱃사공 아저씨의 외침도 그랬고 어머니에게 우리 식구가 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서로 돕고 사는 마을 사람들의 아름답고 소박한 오랜 전통이었다. 우리 식구가 집 문앞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 식구들 뒤로 우리 짐을 들고 따르는 사람을 외에도 동네사람들이 부대 행렬을 이루며 따라오고 있었다.

              집이 가까워오자 뒤따라오던 사람 중 누군가 "아지매요! 막내딸 옵니데이"하고 외친다. 집안에서 맨발로 뛰어 나오시는 어머니와 마당으로 뛰어 들어가던 내가 부둥켜안고 통곡을 시작하니 집안에 있던 사람이나 우리 가족들 그리고 뒤를 따라온 마을 사람들모두가 함께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한참 우시다가 사돈에게 인사를 하신 뒤 손녀손자들을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고 집안으로 이끄셨다. 짐은 시부모님이 사시게 될 사랑채 마루에 일단 갖다 놓고 온 식구가 안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대청과 마루에는 한참동안 마을사람들로 붐볐다. 이렇게 시작된 용잠에서의 피난생활이 몇 개월간 계속됐었다. 우리 식구가 용잠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동경에 있던 남편에게 긴 사연을 담은 편지를 보낸 뒤 오래간만에 심신의 휴식을 취할 시간을 가졌다. 바닷가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신선한 음식을 먹으니 내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었다.

              어머니는 사랑채를 수리하도록 시키신 뒤 시부모님을 그곳에 거처하시도록 배려하셔서 사돈집간에 불편한 점이 없으시도록 하셨다. 시부모님도 사돈집이기는 하나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 가족들이 함께 지내게 되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셨다그러나 내외가 많은 전라도 양반이신 시부모님이 아무리 전시라고는 했더라도 사돈집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마음 편히 계셨을까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그 때까지 서울에서 피난 떠나기 전 시아버님께서 물건을 팔고 남은 돈이라고 건네주신 그것을 아껴서 쓰고 남은 것을 조금 보관하고 있었다이제부터 다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했다. 우리 식구가 용잠에 도착한 즉시 남편에게 보낸 편지 답장이 예상보다 빨리 왔다. 남편은 동경에 있는 G.H.Q. UN군사령부에서 군속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군인 가족들을 위해 'CARE'라는 원조물자 상자를 부산으로 보냈으니 우선 그것을 받아 필요한 것은 쓰고 남은 것은 팔아 생활에 보태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소포로 물건을 보내겠노라고 써 있었다. 문제는 그 물건을 찾으러 부산까지 가야했는데 부산까지 가기 위해서는 용잠에서 울산까지 전시가 아니면 버스가 다니는 30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때는 울산 부산간의 버스는 다니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 때 형편에서야 30리 길을 걷고 2시간 버스를 타고 하며 하루를 길거리에서 소비해야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생각해 볼일이었다.

              하지만 부산에는 오빠 집이 있었고, 나를 도와 물건을 팔아 줄 사람도 있었기에 다른 피난민들에 비해 우리는 훨씬 나은 형편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몇 번을 왔다갔다했더니 돈이 좀 모아졌다. 먼 거리를 왔다갔다하면서 소비하는 시간과 돈도 수월치 않아 부산으로 이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시부모님이나 아이들을 위해서는 공기도 맑고 조용한 환경에 있는 것이 좋았겠지만 내가 너무 힘이 들어서 였다. 오빠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초량에 방이 3개 있는 자그마한 집을 사서 이사했다. 초량으로 이사한 뒤에는 동경에서 남편이 소포를 더 자주 보내 주었다. 나는 우리 식구가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 남기고 나머지를 다시 동경으로 부치기로 작정하고 나의 뜻을 남편에게 전했더니 남편이 돈 보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친정 아버지와 친분관계가 있던 분으로 화장품회사를 가지고 있었던 임사장이란 분이 동경과 부산을 왔다갔다하면서 향로무역을 하고 있으니 그 편을 이용하자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소포는 가끔만 보내고 돈을 그 분에게 맡겨 임사장이 하던 향로무역에 우리도 끼워 주겠다고 하셨단다. 이렇게 해서 가끔 보내주는 소포로는 필요한 것은 쓰고 남은 것은 팔아 생활비로 쓰면서 부산에서의 피난생활 몇 개월이 지나갔다.

 

 


IV. 동경(1951) - 서울(1953) - 이민(1964)

 

일본으로의 비공식여행(밀항)

 

              그러던 우연히 일본과 한국을 내왕하고 있다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자신은 한국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일본으로 남편을 만나러 가고 싶다면 데려다 줄 수가 있다고 했다. 그 당시는 전쟁중이라 민간인이 정식으로 여권을 발급 받아 외국으로 갈 수는 없을 때였다

              일본으로 안전하게 밀항을 시켜 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일본에서의 입국은 일본에 있는 사람이 보증하고 받아주니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간이 크고 겁이 없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어왔다. 내가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비공식적인 방법이지만 안전하게 일본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그 사람의 말만 듣고 일본에 가기로 작정하고 남편에게 이 일을 편지로 알렸다. 일본으로 가기로 의논을 한 뒤 떠날 날짜를 정하고 내가 쓰고 있던 방을 그 사람의 가족(부인과 아이 하나)에게 빌려주었다.

              일본으로 떠나기로 한 날 밤 그 사람을 따라 부둣가로 나간 나는 대마도까지 타고 갈 배라면서 그 사람이 보여 준 배를 보고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배는 단지 자그마한 모터보트였기 때문이었다. 배 바닥에 덮어 둔 뚜껑을 열면서 그 안에 들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고 했다. 배 안은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을만한 공간이 있을 뿐이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배는 조용히 시동을 걸고 부산항을 빠져나갔다. 한참을 타고 갔는데 이제 거의 다 왔나 하고 있을 때 배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달려가더니 한참만에 엔진소리가 꺼지고 배 뚜껑을 열면서 나에게 나오라고 하였다. 어떻게 된 것인가 하고 나와 보니 나는 도로 부산항으로 돌아와 있었다. 배가 가다가 경비선에 걸려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고 다시 돌아왔다고 하였다. 집으로 되돌아와 며칠을 기다린 후 다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이번에는 새우잡이 배였는데 처음 탔던 배보다는 10배나 더 컸다. 이 배에는 나 말고도 동행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다. 그 중 한사람은 당시 치안국장을 지내던 선우 종원씨의 동생이었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다.

              배가 큰 만큼 선창안도 꽤 넓었다. 처음 타고 나갔다 돌아왔던 배에 비하면 여유 있게 앉아 갈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혼자가 아니고 같이 가는 일행이 있다는 것이 나를 많이 안심 시켰다. 얼마나 갔던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으나 배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다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만에 선창 뚜껑이 열리면서 우리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올라오라고 했다. 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해안과 산이 어렴풋이 보였다. 부두가 없는 어떤 섬의 외진 해안 가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해안 쪽에서 손전등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배를 댈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바위를 타고 내려야만 했다. 내리면서 보니 섬 쪽에서 한 사람이 나와 있다가 우리들을 맞이했다. 그 사람이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다. 들어오는 배로 손전등으로 신호를 보내 섬해안으로 배를 안전하게 안내했고 사람들이 배에서 내릴 때도 일일이 불빛을 비추어 안전하게 육지로 내리게 해 주었다.

              김씨가 말한 데로 대마도에 가면 어떤 사람이 나와 맞이해 줄 것이라고 하더니 말한 데로 되어 가는구나하고 마음이 놓였다. 우리 일행이 다 내리자 그 사람은 앞장서서 바다를 낀 산자락 가파른 길을 손전등으로 앞뒤를 비춰가며 안내했다. 한참 걸어가니 마을이 나타났다. 그 마을에 있는 어떤 여관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그 날 저녁은 거기에서 쉬고 다음 날 다시 배를 타고 하가다로 간다고 했다. 여관에 도착해서 우리를 안내했던 일본 사람이 자기 소개를 했다. 자기 이름은 오까다이고 나의 남편을 동경에서 만났다면서 자기는 동경제대 법과출신이고 남편과 같은 때 동대법과를 졸업했다고 했다며 지금은 정부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가 남편에게 오까다씨를 소개했던 모양이었다. 여관에서 연락선을 타고 출발하기 전에 오까다씨는 우리 세 사람에게 배를 탈 때 검문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묻거든 한마디도 대답하지 말고 뒤따라가는 자기를 가리키라고 했다. 부두에 도착하니 우리가 타고 갈 배가 정박해 있었고 일본인 손님들이 그 배를 타고 있는 중이었다. 배를 타기 위해 줄 선 사람들 중에서 옆으로 나오라고 해서 줄에서 빼내지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우리 일행은 무사히 배에 올라탔고 오까다씨도 우리와 함께 배에 탔다. 배를 타고 부둣가를 보니 일렬로 줄을 지어 늘어 선 사람들의 손을 끈으로 묶고 있어 오까다씨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저 사람들은 전부 밀항해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밀항해 오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잡힌다고도 덧붙였다. 우리 일행은 비공식적으로 일본 땅에 발을 디뎠지만 일본사람의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안전하게 일본에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하까다에 도착한 뒤 오랫동안 기차를 타고 동경역에 내렸더니 남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하까다에서 동경 역까지 기차여행은 그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일본여대에서 공부하는 동안 1년에 한번씩 여름 방학이면 내왕하던 하관과 동경 사이의 길을 그렇게 해서 18년만에 다시 가게 된 것이었다. 동경 역에서 오까다씨와 헤어지고 남편은 나를 데리고 미리 빌려 둔 동경제대 정문 아까몽에서 가까운 히가시가다마찌에 다까하시상이란 모녀 둘이서 사는 집 2층으로 갔다. 다까하시상은 60세 가량 되어 보이는 분이었고, 딸은 혼기를 넘긴 노처녀였는데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이곳에 머물기 시작한지 며칠 뒤 사복 입은 경찰이 찾아 왔다. 오까다씨가 했던 말이 있었기에 크게 걱정 하지 않았지만 어떤 일로 왔는지 궁금했다

 

전후의 동경

 

              그런데 사람은 내게 일본 임시 체류증을 전해주러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임시 체류증을 항상 가지고 다닐 것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나는 38선이 그어진 이상 언제 또 전쟁이 터질지 모르니 내가 먼저 일본에 가 보고 상황이 괜찮으면 가족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부산을 떠나왔었다. 체류예정은 1년 정도로 하고 갔었는데 거의 2년을 동경에서 보내게 되었다. 다까하시상은 우리에게 응접실이나 부엌도 필요하면 쓰라고 했지만 우리는 응접실만 손님이 오면 가끔씩 사용했고 부엌은 쓰지 않았다. 내가 동경에 도착해서 얼마동안은 오랜만에 만난 남편에 대한 반가움과 그 동안에 겪은 어려움 때문에 아이들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지냈지만 날이 지날수록 아이들이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아이들이 보고 싶은 애절함은 어린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해가 질 무렵 뭉개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붉은 석양을 서서히 덮어 버리는 것을 보고 집 생각이 났던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무엇이라 형용하기 어려운 애틋한 그리운 감정,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가슴에는 그 때 느꼈던 것과 같은 느낌이 뭉개 구름처럼 피어 올라온다. 나는 동경에 오기 전에 부산에서 남편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 꿈이 적중해서 너무 놀랐다. 그 당시 동경에는 6. 25전쟁 전에 무역관계로 일본에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물고 있던 남편의 고향선배 두 분이 계셨다. 정사장과 박사장이란 분들로 이 두 사람은 우리가 살고 있던 다까하시상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홍고의 후지야라는 여관에 유숙하고 있었다.

긴좌에는 대창원(大昌圓)이란 한국 음식점이 은좌에 있었는데 그 음식점의 주인은 순창에서 남편과 이혼한 후 딸 둘을 데리고 동경에 와 음식점을 개업했다. 당시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국사람들은 자연히 그 집으로 몰려들었고 일본경제가 부흥을 하는 것과 발 맞추어 그 음식점 또한 번창하고  있었다. 대창원 주인은 얼굴도 미인이었지만 마음도 넓고 능력 또한 대단한 사람이었다. 정사장과 박사장 그리고 나와 남편 둥 우리 일행은 그 집에서 자주 식사를 했고 식사를 마친 뒤에는 그 집 안방으로까지 만남이 연장 될 때가 많았다.

              한번은 우리가 머물고 있었던 다까하시상 집으로 정사장과 대창원마담이 찾아 왔었다. 한참 이야기꽃이 피고 있을 무렵 남편이 양복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빼면서 종이 쪽지가 따라나와 땅으로 떨어졌다. 이야기하는데 열중해 있어 종이쪽지가 떨어진 것도 모르고 있기에 내가 집어들고 언뜻 보았더니 여자들에게  소모되는 물품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이것이 뭘까하며 내 옆에 앉아 있던 대창원 마담에게 그 쪽지를 보였다. 내가 너무 순진했다고 해야 할까 무지했다고 해야할까? 그 종이쪽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는데 대창원 마담은 그것을 읽더니 남편에게 그 쪽지를 건네주면서 "박교수 사고 쳤구먼"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여자가 월경할 때 필요한 물건들인데 왜 이런 물건들이 적힌 종이쪽지를 박교수가 가지고 다니느냐"며 남편에게 따지고 들었다.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던 일행은 별안간의 돌발사태에 어안이 벙벙해져 모두 입다물고 말았다. 그 때 남편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던 남편이 자초지종을 다 털어놓으면서 사과를 했다.

              미국으로 떠날 때는 6개월 예정이었던 것이 6.25전쟁이 터지자 귀국하기 위해 이미 짐을 몽땅 다 한국으로 부쳐 버린 뒤라 정말 당황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미국으로 갈 때는 일행이 여러 사람이었다고 한다. 유솜쪽에서는 이 일행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내 놓으면서 그 중 한가지를 택하라고 했다 한다. 한 가지는 학비는 다 부담해 주기로 하고 미국에 남아 공부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동경으로 가 UN사령부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 때 미국에 남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동경으로 온 뒤 UN사령부에서 일을 하는 동안 일본 아가씨 한 사람을 사귀게 되었고 그 아가씨가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남편이 기혼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의 자식이니 혼자서라도 애를 낳아 키우겠다고 했다한다. 그러나 잘 타일러 유산시키기로 합의를 보고 어떤 병원에 같이 가서 입원을 시켜 놓고 왔는데 그 쪽지에 적혀있던 물건들을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고 했다

              내가 동경에 오기 전 꿈에 내가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보기 위해 좌석에 앉았더니, 두어 줄 앞쪽에 어떤 남녀 한 쌍이 다정하게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세히 남자의 뒷모습을 보니 그는 남편이었다. 깜짝 놀라 깨고 보니  꿈이었다. 그 때 그 꿈이 현실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꿈이  잘 맞아떨어지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 꿈을 꾼 다음부터 왠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그 때 나는 혼자서 속으로 생각했다. 남자들은 가족이 죽은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경황 중에도 성욕이 생기는가 보다 하고...   이것이 내가 남편에게서 당한 두 번째 배신이었다. 하루 나는 일본여대와 홍고 근처를 혼자서 찾아 가 보았다. 내가 동경에 갔을 때는 일본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거지꼴이었고, 일부를 빼고는 동경이 아직 복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동경제대 정문인 아까몽(문을 붉은 색으로 칠해 놓아 붉은 문이라 한다)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홍고 일대는 완전히 다 타버리고 폐허로 변해 있었고 일본여대를 찾아 매지로다이에 갔더니 그 오래 된 목조건물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숙사가 있던 동네에는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통과해서 많이 오르내리던  언덕길로 발을 들여놓으니 방고료, 산개이료, 샌산료 그리고 미이개이료 등의 기숙사 건물들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지나간 학창시절이 주마등같이 떠오르며 만감이 교차했다. 내 기억으로는 20개정도 되는 많은 기숙사 건물 중 유일하게 양식으로 지어졌던 매이개이료도 내가 그곳에 살던 때 그 모습대로 서서 말없이 나를 반겨 주는 것 같았다. 이 기숙사 건물에 살았던 한국학생으로는 나와 장후영변호사 부인이 된 김정수씨 둘 뿐이었다. 같은 학급에는 김인실과 나 둘만이 한국 학생이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올케의 동생인 월미네에게 물건을 부치기로 하고 그것을 처분해서 우리 가족생활비로 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왔었다. 가족들의 생활비 문제는 그렇게 해서 해결이 되었지만 동경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생각은 나의 오산이었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동보(東寶)화장품회사의 임사장에게 맡긴 돈이 그 동안 불어나 상당한 액수가 되었다면서 한국으로 나갈 때 그 돈으로 물건을 사겠다고 했다. 일본에서 자동차 재생타이어 기계가 형이 바뀌면서 구형이 되어 쓰지 않는 것들을 싸게 살 수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 못 쓰고 버리는 타이어들을 재생시키면 유익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전문분야의 공작 기계를 살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전문과는 관계가 없는 분야의 기계를 사 가지고 갈려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때 내 생각을 남편에게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훗날에 가서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다. 목포에서 양조장을 해서 많은 돈을 벌고 있던 정사장은 남편이 미국으로 떠날 때와 같은 시기(1949. 11)에 동경에 와 그 때까지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정사장은 목포에 부인과 자식들이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창원 마담과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동경에서의 생활은 평온한 것 같아 보였으나 내 마음은 허무했다. 이 허무감은 아이들이 보고 싶은 감정을 부채질해 결국 나는 남편과 같이 귀국하는 것을 단념하고 먼저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남편에게 내 결심을 말했더니 남편도 내 결정에 동의했다. 일본으로 갈 때는 비공식 입국을 했으나 한국으로 돌아 올 때는 오까다상 덕택으로 정식으로 수속을 밟아 비행기로 돌아왔다. 부산에서는 시부모님들이 초량에 있는 원불교 교당에 다니시면서 아이들을 잘 돌봐주고 계셨고 시조카가 살림을 맡아 주고 있었다. 문제는 시아버지께서 할 일은 없으시고 무료하시니까 매일 술을 마시는 바람에 시어머니와 하루가 멀다하고  몹시 다투시는 일이었다. 시어머니께서는 자식들이 힘들게 번 돈을 그렇게 술만 마시면 되느냐는 것이었고 시아버지께서는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다툼은 계속되었다. 밥상이 내동댕이쳐지는 일이 빈번해지자 나는 고심했다.

              고향에는 시부모님이 사시다 고스란히 남겨두고 오신 집과 땅 기타 모든 것을 그대로 작은 시누이 부부가 관리하고 있고 딸도 자식이니 시아버지께서 고향으로 가셔서 산과 들로 다니시며 옛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가서 사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시어머님께 먼저 조심스럽게 내 의견을 말씀 드렸더니 시아버지께 말씀 드려 보라고 하셨다. 두 분이 그렇게나 싸우시면 서도 떨어져 사시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계셔 깜짝 놀랐을 것이다. 시어머니나 시아버지께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면 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더니 드디어 결론을 내리셨다. 시부모님은 다 늙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생이별을 하시게 된 것이다작은 시누이에게 편지로 연락을 해 놓고 나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송정리로 갔다. 아무리 딸자식과 같이 사신다고는 하더라도 가장 편안한 상대는 부인인데 시아버지 홀로 고향집에다 모셔다 놓고 오던 그 때의 내 마음은 영 편하지가 않았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그 때의 불편했던 감정이 떠오른다. 그렇게 해서 가신 고향집에서 시아버지는 얼마동안 지내시다 1953년에 우리 식구가 서울로 이사한 뒤 서울 집으로 올라 오셨다.

 

부산에서 서울로(1953)

 

부산 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보니 건너 방에 차곡차곡 쌓아 두고 갔던 물건들과 가구는 물론 문짝 하나 남아 있지 않고 기둥과 지붕만 앙상하게 있었다. 그나마 폭격으로 다 날아가 버리고 땅만 남은 집도 있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물건들이 없어진 것은 아깝지가 않았으나 사진첩이 몽땅 없어져 그 때까지 나의 자취들이 사라져 버린 것은 정말 애석했다. 그 뒤 나는 없어진 사진들이 너무나 아쉬워 형제들에게 가 있던 나의 사진들 몇 장을 돌려 받았다. 서울에서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에는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어져 가구를 산다든지 해서 벌려 놓고 살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어느새 전쟁의 기억은 망각의 저쪽으로 흘려 보내고 다시 열심히 물건들을 사 모으며 악착같이 살기 시작했다.

 

시부 사망

 

우리 식구가 서울로 올라간 다음 시아버지께서는 서울로 오셨고 그리워하던 식구들을 만나 무척 좋아 하셨는데 그만 1954523일에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61세로 생을 마감하셨다. 시아버지 시신은 화장해서 유골을 고향에 있는 우리 땅에다 안장했었는데 우리가 이민 나온 뒤 그 땅이 모두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 시아버지의 무덤을 옮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남편 귀국(1954)

 

1954년에 남편도 드디어 동경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 전에 사서 부친 타이어재생 기계를 돈암동 근처에 건물이 있는 땅을 빌려 설치했다. 정말 무모한 일이었다. 당시 아무도 타이어 재생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없었던 실정에서 일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남편은 고무 배합하는 것부터 책으로 공부해서 시작했다. 동경에서 타이어 재생기계를 사면서 공장에도 가보고 해서 조금은 본 것이 있었겠지만 그야말로 무에서부터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 공장의 책임자로 시골 송정리 집을 맡아 관리하면서 살고 있던 작은 시누이 남편을 불러 올렸다. 남편은 종류가 다른 기계지만 기계를 다루는 일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이라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아니지만 고무 원료를 사는 것에서부터 배합하는 과정 등 기초부터 공부해 가면서 그 사업을 시작했고 공원을 모집하고 교육을 시키는 것까지 혼자서 해야 했다. 다행히도 좋은 사원들을 만나 서툴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쓰고 버렸던 폐품 타이어를 재생해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재생이긴 했지만 자동차 타이어라는 것을 남편이 만들어 냈다.

              제대로 쓸 수 있는 타이어를 만들기까지는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남편이 처음부터 공부해가며 공원들과 함께 타이어를 만드는 동안 나는 자금 조달하는 일을 나는 뒤에서 도왔다. 당시 재생타이어에 대한 관심은 높았었다. 원자재가 부족한 우리 나라에서 재생타이어 공장은 애국적인 사업으로 여겨졌다.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자금회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금을 책임지고 있었던 나는 공장에 자주 가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공장을 책임지고 있던 시누남편 양서방은 내가 가끔 갈 때마다 안 보였다. 공장사람들에게 양지배인이 어디 갔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장장에게 직접 물어 보았더니 조금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씽긋이 웃으면서 극장에 갔겠지요 하고 대답했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아침에만 공장에 잠깐 얼굴을 보이고는 영화관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자금 조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또 자급자족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사자가 총력을 다해 합심 노력해도 어려운 초창기에 놀면서 지낸다고 하니 할말을 잃을 수밖에. 나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내가 직접 나서야 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어 나는 나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없었던 타이어 재생공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남편은 타이어 재생공장을 차려놓고는 영등포에다 또 공작기계공장을 빌려 펌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타이어 재생공장이 자원을 재활용하는 애국사업이기는 했지만 그 사업을 하기 위해 들인 돈과 피와 땀을 생각해보면 공작기계를 사와서 남편의 전문 분야였던 펌프를 제대로 만들었어야 했다고 본다남편은 그 뒤 모터도 자기가 직접 설계하고 재료를 구입해서 만드는데 성공했다. 펌프를 팔려면 반드시 모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갈월동 아기모도씨 집을 인계 맡아 대동공업주식회사(大同工業株式會社)를 시작해 놓고 자금이 없어 300만원을 투자했던 동대법과 동기생 장병창씨와 동업을 했다가 갈라선 일이 있다. 그 뒤 장씨는 영등포에 있던 변압기공장을 인수 모터도 만들어 내고 있었는데 남편은 펌프를 팔 때마다 모터관계로 장사장과 거래를 해야하게 되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가 직접 펌프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나는 타이어 재생공장에 매달리면서 남편이 하고 있는 기계공장 쪽에도 자금을 대주어야 했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진 탄생

 

이렇게 바쁜 생활을 하고 있던 내가 임신을 했다. 남편이 독자라고 해서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면 하는 버램은 시부모님이나 나나 마찬가지였기에 낳기로 했다. 19541231일 집에서는 설 준비하느라고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데 게벅녁에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해 점심을 먹고 동대문 옆에 있던 이대부속병원에 입원했다. 유진이는 밤 1015분에 탄생했다. 1954년을 2시간도 못 남겼기에 출생일자를 195511일로 했다. 그래서 유진이는 자기 생일날 특별하게 따로 채려 줘 본일이 없다. 옥경, 은명, 세진이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으셨지만 유진이는 자기 아버지가 작명했다. 딸 둘을 뱄을 때는 태몽으로 과일 꿈을 꾸었는데 세진이 때는 돼지 꿈을 꾸었고 유진이 때는 호랑이 꿈을 꾸었는데 내가 그 호랑이 잔등에 타고 어디론가 가는 꿈이었다. 유진이가 났을 때 시부모님과 남편의 기쁨은 대단했었다. 나 또한 그랬다. 딸 둘, 아들 둘. 이상적인 가족 수다. 서양에서는 이런 경우를 king size family 라 한다.   

 

4.195.16

 

타이어재생공장이나 펌프, 모터공장 모두를 무에서 시작해 겨우 자리를 잡아갈 무렵 4.19가 터졌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특히 생산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동요는 큰 걸림돌이다. 판매는 되지 않지만 생산은 멈출 수 없으니 자금압박이 극심해진다. 빚을 얻어 겨우겨우 공장 문을 닫지 않고 버티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5.16군사쿠데타가 터졌으니 업친데 덥친 격이었다. 우리 부부는 사업을 하면서 땅을 사두었던 것이 있어 그 땅과 돈암 시장 앞 큰길 옆에 위치해있던 땅을 바꾸어 그 자리에 반 지하 3층 벽돌건물을 지었다. 3층에는 주택을, 1층에는 점포를 반 지하에는 보일러실과 공장을 만들어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4.19가 나서 그 집 옥상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을 지켜 본 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사업하는 사람이 자기 돈만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가능한 남에게 돈을 빌려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었는데 4.195.16이 연속적으로 터졌고 거기에다 새로 집을 짓느라고 개인 빚을 좀 얻어 쓴 것이 있었다. 생산은 계속하면서 판매는 부진하니 자금회전이 점점 어려워졌다. 군사 쿠데타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군정이 계속될 가능성이 많고 아버지가 북으로 가신 후 아버지와 연계된 사람들은 항상 감시당하고 있는 분위기에서 앞으로는 감시가 더 강화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남편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학자였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인해 학자로서의 길만 갈 수는 없었고 사업을 병행해야 했다. 남편은 사업을 하면서도 한양공대에서 기계과 과장으로 재직하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생산성본부에서 미국에서 들여와 개강한 기업경영학 강의를 6개월간 수강하였다. 이 때 공부했던 기업경영학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던 사업도 진단을 받아 보았다. 나는 남편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로 이민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을 했더니 그 때는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다. 내 생각이 해외 이민 쪽으로 기울면서 일본 작가 이시가와 다쯔조가 쓴 '파도'라는 책을 시조카에게서 빌려다 보았다. 그 책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자기 국민을 하와이로 이민을 보낸 사건을 다룬 책으로 그 책에 비쳐진 일본인들의 하와이 이민 실정은 너무나 비참했다. 결국 작가는 책을 통해 이민이 아니라 나라가 돈을 대어 백성들을 해외로 갔다 버린 기민(棄民)이란 평을 하고 있었다. 그 책을 읽은 것이 나로 하여금 해외로 이민 갈 결심을 굳히게 했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각오를 단단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책을 통해 단단한 각오를 한 다음 이민을 떠났기 때문에 이민생활에서 오는 모든 어려움을 나는 긍정적으로 잘 헤쳐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즈음 신문에 한백문화협회가 조직되어 일행 12명이 1차 브라질로 가 브라질이민 가능성을 타진할 것이라는 기사가 났다.

 

박대령에게 이민수속을 부탁 (1961 - 62)

 

우리 부부는 기사를 읽은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로 나가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미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미국이민에 대해 알아보니 쿼터제가 있어 신청해 놓고도 얼마를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고 했다. 하루는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 박대령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한백문화협회 사절단 12명 중의 한 명이라고 했다. 그 사람에게 우리 가족의 이민을 부탁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박대령 일행이 브라질로 갈 때 그 일행 대부분은 령관급 퇴역군인들이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 난 후 많은 군인들이 제대를 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그들을 수용할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남미로 이민 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박대령 일행이 1차로 브라질에 갔다 돌아 왔을 때는 이민문제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2차로 다시 브라질로 갔을 때에는 결국 이민문제를 성사시키고 돌아왔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브라질로 이민을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박대령 가족이 이민 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인형과 은명이

 

              4.195,16 사건들이 터지기 전까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도 하고 친척들 간의 유대강화를 위해 식사대접도 하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살았다. 한번은 아이들과 외출했을 때 미도파백화점에 들른 적이 있다. 예쁜 인형을 보고 은명이가 몹시 가지고 싶어해 값을 물어보니 꽤나 비쌌다. 점원 말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수입해 가지고 온 것이라 값이 좀 비싸다고 하였다금액을 생각하면 어린 딸을 위해서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내가 보아도 너무 예쁜 인형이라 은명이에게 그것을 사주었다. 어린 시절에 선물 받았던 인형이라 그런지 은명이는 그 인형을 마치 동생같이 사랑했고 나이가 든 후에는 옷도 만들어 입히고 이불도 만들어 덮어주는 등 정말 애지중지하더니 결국 17살에 이민을 나오면서도 그 인형을 가지고 나왔다

              브라질에 가서는 공부하랴 일하랴 너무 바빠서 인형을 들여다 볼 사이가 없었다. 캐나다로의 이민수속을 끝냈을 때 나는 은명이가 그 인형을 캐나다까지는 가지고 가지 않겠지 하고 혼자 판단하여 브라질에서 가깝게 지내던 홍이네 엄마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그 인형을 주었다. 그 집에는 딸이 셋이나 있고 작은딸이 그 인형을 인계 받아 은명이처럼 그 인형을 잘 돌봐 줄 수 있는 적절한 아이라 생각되어 주었던 것이다. 나는 은명이 못지 않게 그 인형을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가는 그 인형이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훗날 이일을 안 은명이는 몹시 슬퍼하고 아쉬워했다. 말을 하면 가지고 가겠다고 할 것이 뻔해 인형에 대한 집착을 끊으라고 은명이에게 말을 하지 않고 인형을 다른 아이에게 준 것이었는데 은명이 마음을 너무나 상하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시련의 인생시작

 

              공장 문을 닫을 수는 없어 생산량을 줄이기는 했지만 돈암교 근처에 신축한 건물에서 타이어 재생공장을 계속 가동하면서 펌프공장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 자금사정이 어려웠다. 그 때 우리는 은행 빚과 사채 쓴 것이 조금씩 있었는데 우리가 신축했던 건물을 팔면 이 빚들을 다 갚고도 이민 갈 여비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하던 사업만 누군가에게 잘 물려주면 어느 정도의 돈은 마련할 수 있으리라 기대도 했었다. 그 당시 한국경제 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인지 남편이 하던 펌프공장인 대동공업주식회사(大同工業株式會社)를 인수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이 일은 기술과 돈 모두가 있어야 했는데 그 때 당시 그런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해방 후 그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은 남북을 통 털어서 박성철 한 사람 밖에 없었다고 들었다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인재의 능력이 제대로 쓰여지지 못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남편은 대동공업주식회사(大同工業株式會社)에서 한양공대를 졸업한 제자 두 사람을 그 분야의 기술자로 키우고 있었다. 남편은 그 사업을 맡아서 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두 제자들에게 맡기기로 결심을 하고 그 두 제자에게 가능한 한의 돈을 마련해 보도록 했다. 그래서 우리는 공장에서 손을 떼야 했는데 자기들이 일을 맡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이 공장을 계속 운영해야 하는 바람에 우리에게 줄려고 준비했던 돈을 회사 일이 급하게 되어 써버렸다고 하였다.

              남편은 하는 수 없이 자기가 마지막으로 자기 몫으로 펌프설치공사를 따내고 그 돈을 수금해서 우리 가족의 이민 여비를 마련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공사를 끝마친 뒤 돈을 수금해야 떠날 수가 있었는데 떠나는 날자는 점점 다가왔지만 수금은 되지 않았다. 사체 빚을 준 내 친구의 친구는 건물이 커서 잘 팔리지 않고 있자 자기가 직접 건물 살 사람을 구해서 데리고 왔다. 그 사람은 자기 빚을 청산한 다음 조금만 남을 정도의 금액으로 건물을 팔라고 졸랐다. 이민을 가기로 결정을 해 놓았으니 도리가 없었다. 집을 싼값에 팔아 사채와 은행 빚을 청산하고 조금 남은 돈으로 그때 마침 주인이 멕시코 대사로 나가 있어 비어 있던 집으로 알고 지내던 복덕방사람이 소개를 해 주어 그리로 이사를 했다. 남편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출발하는 날짜를 미루기로 하고 일부 돈이나마 받아 떠나는 가족에게 주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때 이민자들을 실어 나르던 배는 네덜란드 국적 화물선을 임시 개조하여 사람과 화물을 같이 실어 나르고 있었다.

              돈을 마련하는 것이 늦어지는 바람에 결국 우리 가족은 5차선을 타게 되었는데 네 사람의 뱃삯까지 지불하고 난 뒤 남은 돈 미화 400$을 손에 쥐고 이민선을 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두 제자 중 한사람에게 남편이 자기 몫으로 받기로 했던 돈의 수금을 부탁한 뒤 우리 가족은 부두가 옆 이민선 보이스배인이 정박해 있던 근처 다방에서 그가 돈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떠날 시간이 점차 다가와 나머지 식구들은 선창가로 데려다 놓고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제자가 돈을 가지고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배가 떠날 시간은 다되어 가는데 돈 가지고 올 사람은 나타나지 않으니 그 때의 그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 있을까!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그 때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돈을 가지고 오기로 했던 제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미화 400$만 달랑 손에 쥐고서 우리 다섯 식구는 배로 두 달이 걸리는 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 제자는 돈을 수금해서 잠적해버린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이 일을 다시 돌이켜 생각 해 보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하고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는 아마 우리 식구들이 그렇게 가진 돈이 없이 떠날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한다. 우리보다 먼저 치과집 이양숙동서의 친정조카 둘이 이민선을 타고 떠나 브라질 상파울로에 정착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떠나기 전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놓고 떠났다. 이양숙동서의 조카 둘은 상파울로에 도착 즉시 일본사람들이 운영하던 농업협동조합에 취직을 했다고 하였다. 우리 식구가 브라질에 도착하면 그 두 사람이 우리 식구를 맞이해 줄 것으로 기대 했었고 실지로 그들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부산항 부둣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친지나 친구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수중에 단 돈 미불 400불을 가지고 다섯 식구가 그 먼 미지의 세계로 떠나면서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없다고 체념을 해버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되겠지 하고 희망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참 묘한 점이 있다. 한국 속담에 '억울하게 죽으면 죽을 때 빽 하고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을 가끔 느끼곤 한다. 배가 부두를 서서히 떠나면서 손에 쥐고 있던 오색 테이프가 한 가닥 한 가닥씩 끊어져 갔다. 그 때 심정은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 보내는 사람이나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만 같이 느꼈을 것이다. 할 말을 잃은 체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이민선

 

              일본사람들이 처음 하와이로 이민 때와 한국사람들이 브라질로 이민 때와는 시간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가는 사람들의 질에도 차이는 많았다. 우리가 탔던 배에서는 '파도' 라는 책에서 읽었던 비참한 사건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브라질의 산토스 항구까지는 두 달이나 걸렸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적으로 참 사치스러운 항해였다고 본다. 부산항을 떠나 배가 처음 정박한 곳은 일본의 오기나와섬  앞바다였다. 다음이 홍콩, 싱가폴, 말레이시아를 거치면서 각 항구에 배를 정박시켜 놓고 짐을 풀고 싣고 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항구에서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상륙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배에 타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흙을 밟아보기를 원했었다.

나도 항구에 배가 정박한 후 상륙해도 좋다는 곳마다 가족을 데리고 내려 구경을 했다. 전 가족이 비싸지 않은 세계 여행을 한 셈이었다. 세진이만 배에서 절대 내리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아마 두 달 동안 꼬박 배에서 지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남아프리카의 수도 케이프타운에서도 상륙했었는데 식당에는 물론 공원이나 2층 버스에도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에 들어 갈려고 했는데 흑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어 우리가 들어가도 되는지를 물었더니 들어가도 된다고 해서 들어 간 일이 있다. 2층 버스는 아래층에는 백인만 위층에는 흑인만 탑승할 수 있도록 구별되어 있었지만 타보지는 못했다.

              그 때 들은 이야기로 흑인들이 도시로 나와 일은 하지만 살수는 없었기에 도시주변에 흑인들만 밀집해 사는 지역이 있는데 그 실정은 정말 비참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보이스배인을 타고 가면서 그 배의 총지배인 노릇을 하고 있는 Law라는 중국사람을 만났다 케이프타운의 흑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 이  Law씨에게서 들은 것이다. 정말 마음씨 좋은 이 Law씨는 내가 우리 가족이 떠나올 때 제자직원이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300불을 주면서 어려운데 보태 쓰라고 했다. 그는 그 뒤에도 우리 식구들이 상파울로에서 정착해 사는 모습을 찾아와서 지켜보아 주었고 남편과 연락하면서 우리 가족을 위해 적극적인 협력을 해 주었다. 배가 브라질의 산토스항에 도착했을 때 치과집과 이양숙형님의 조카 두 사람이 마중을 나와 그들이 머물고 있던 곳으로 일단 우리가족을 안내했다. 그들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다음날부터 그 들 두 사람은 낮에는 직장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동서남북도 모르고 말도 전혀 할 수 없던 우리 가족들에게는 브라질에서의 대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V. 브라질 이민생활 4년간 (1964-1968)

 

상파울로 생활(1965)

 

옥경이와 작은 은명이는 한국을 떠나기 서강대학에서 박신부의  인도 하에 영세를 받고 영세명을 클라라, 소휘야로 받았다. 그 당시 브라질에는 일본사람들이 20만 명 가량 살고 있다고 들었다. 브라질에 온 일본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외부와의 접촉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은 브라질 말을 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대부분의 남미 나라들이 스페인말을 하는데 반해 브라질에서는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사람들이 많이 모여 장사하고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 보았다. 브라질 말은 몰랐어도 일본어는 한국어처럼 잘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브라질에 정착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 어떤 일본사람이 일본 사람들이 많이 나가는 성당을 알려 주면서 그곳에는 요시오까 신부가 계시다고 했다. 성당을 찾아가 요시오까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고 요시오까 신부님은 우리 식구가 상파울로에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성당과 일본촌이 가까운 곳으로 우리가족은 아파트를 구해 이사를 했다. 당시 브라질은 군인출신 대통령이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국민들에게 그는 별로 인기가 없다고 들었다. 최저임금제도가 실시되고는 있었지만 임금은 얼마 되지 않았고 인플레이션은 심했다. 최저임금을 받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브라질 현 주민이었고 그들은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돈이 없으니 자식들을 교육시킬 수 없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어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에는 기후가 따뜻해 아이를 낳고 바나나 나무 한 그루만 심으면 그 아이의 평생 먹을 것은 해결된다고 한다. 입을 것과 사는 집에 큰돈을 들일 필요가 없으니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처럼 돈 벌겠다고 악착같이 날뛰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말에 "아마냥, 아마냥"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일로, 내일로' 무엇이든지 내일로 미루자는 말이다. 오후 2시만 되면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2시간 내지 3시간 동안 낮잠을 잔다. 브라질 현 주민들은 마냥 사람 좋은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기후까지 더우니 자연히 게을렀다. 처음에는 이러한 모든 것이 놀랍기만 했으나 그런 생활모습을 보는 것에도 차차 익숙해져 갔다. 브라질은 한국과는 모든 것이 반대였다. 심지어 밤하늘의 달도 초생달과 그믐달의 모양이 한국과는 반대였다. 아파트로 이사를 해 놓고 아이들 학교부터 찾아 수속을 했다. 우리 가족들 중에 한국에서 포르투갈말을 들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도 서도 모르고 말도 모르는 이국 땅에서의 생활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옥경이는 상파울로 대학 영문과에 청강생으로 등록을 했고 은명이는 상업고등학교와 미술학교에 등록을 마쳤다. 세진이는 보통고등학교에 그리고 유진이는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시켰다. 한국을 떠날 때 옥경이는 서강대학교에서 1년을 공부했고, 은명이는 고 3, 세진이는 고2, 유진이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유진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직장을 가졌다.

브라질에는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대규모 농업협동조합이 2개 있었고  이 두 조합이 소유하고 있던 땅은 어마어마한 규모라고 했다. 두 조합 중 "고찌아조합"이 훨씬 규모가 큰 것이었고 치과집 이양숙동서의 친정 조카 둘은 이 "고찌아"조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소개로 옥경이와 은명이는 그 조합사무실에서 일하게 됐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서 걸어서 몇 분 걸리지 않는 곳에 일본신문사가 있어 세진이를 데리고 찾아갔다. 내가 일본말을 잘하고 나의 이력을 말하면서 세진이를 그곳에서 일을 시키고 싶다고 했더니 즉석에서 세진이를 채용해 주면서 내일부터 출근해 사진부에서 일도 돕고 일을 배우라고 했다. 사진에 소질이 있었던 세진이는 여기에서 일하면서 사진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고  캐나다에 와서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암실을 만들어 놓고 혼자 사진 인화작업을 하곤 했다. 세진이는 이민생활을 하면서 이유 없는 반항을 할 10대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겠지만 한편 많은 것을 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이들 문제가 일단 처리된 뒤 나는 요시오까 신부님 소개로 일본인 2세 디자이너를 소개받아 그가 일하고 있던 브라우스만 만드는 소규모 봉재 공장에 취직을 했다. 공장에 얼마동안 다니면서 공업용 재봉틀 사용법에서부터 바느질하는 것까지 모두 내 생전 처음으로 43세에 배우기 시작했다. 1개월 정도 공장에 다니면서 배웠더니 숙달이 되어 나도 틀질이나 바느질을 잘 할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공장으로 출근하여 일을 했었다. 그 무렵 일본여대 선배 한 분이 우리보다 좀 늦게 딸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을 와 우리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그 선배가 하는 말이 하루는 유진이가 나를 찾아와 "아주머니 나하고 밖에 좀 나갑시다"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하고 따라 나갔더니 같은 동네에 사는 브라질 이이들이 자기를 놀려대니 야단을 쳐 달라고 부탁하더란 다. 그 선배 말이 "내가 브라질 말을 아나 한국말로 냅다 야단을 쳤더니 다 도망을 가더라"라며 웃었다.

              이런 사건이 있은 뒤 나는 집에서 일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래서 낡은 재봉틀 한 대를 샀고 집에서 브라우스를 만들기로 공장 쪽과 합의했다. 얼마간은 브라우스만 만들다가 공장 쪽에서 브라우스 감 앞쪽에 주름 잡는 일을 해 보겠느냐고 했다. 큰 공장에서는 그 일을 기계로 하지만 규모가 작은 곳이라 삼이 재봉틀로 한 감 한 감을 박아서 그 일을 해야 했는데 그 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 주름 잡는 일을 시작한 뒤 처음에야 서툴렀지만 곧 숙달이 되어 여러 가지 종류의 주름잡는 일을 예쁘게 하면서도 빠르게 해냈더니 공장에서 무척 좋아라했다. 주름잡는 일은 브라우스만 만드는 것보다 수입이 훨씬 많았다. 그 공장에서 필요로 하는 양을 나 혼자서 다 해 낼 수 있을 것 같아 내 의견을 공장 측에 전달했더니 자기들이 일감을 배달해 주고 일을 마치면 자기들이 공장으로 가지고 가기로 하는 것에 합의를 보았다. 나는 집에다 주름잡는 공업용 기계를 샀고 그 결과 일의 능률이 많이 올랐다. 그 일을 해 보면서 나는 바느질에도 소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라질에서 우리가 살던 아파트 건너 편 건물 1층에는 빵 만드는 가게가 있었다. 그 집에 밀가루 빵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죠까라는 이름을 가진 칡뿌리 비슷한 식물 가루로 금새 구운 그 빵 맛은 어찌나 맛이 있든지 영원히 잊어버릴 수가 없다

              유진이가 우리 식구 중에서 제일 먼저 브라질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1년이 지난 뒤 학교에서 1등을 하기 시작 해 브라질에 있던 4년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아 상도 많이 받고 칭찬도 많이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브라질 사람들이 받는 최저 임금은 어찌나 적었든지 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브라질 사람을 고용해 청소와 빨래하는 것을 시켰다. 브라질 사람들은 더운 곳에서 태어나 자라서 그런지 동작이 대체로 느리다. 그들의 그런 태도는 우리 한국 사람들 눈에는 무척 게으르게 보였다. 브라질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아마냥"이란 말은 "내일로" 미루자는 뜻도 있지만 서둘지 말라는 뉘앙스도 담고 있다. 한국사람들이 잘 쓰는 "빨리 빨리"와 꼭 반대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브라질에 있는 쥐와 달팽이는 어찌나 크던지 달팽이를 대야에 담아 놓고  찍은 사진이 있다. 일본어에  "んて もだい "라는 말이 있는데 "だい "는 대미라는 생선을 일컫는 말이고 "んて "는 죽어도 라는 뜻으로 일본에서는 대미가 생선 중에서 제일 맛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먹어 본 대미는 그게 아니었다. 너무 맛이 없었다. 하지만 정어리는 한국에서 먹던 것과 같은 맛이 났던 걸로 기억한다. 왜 일까? 대체로 물이 다르면 맛도 달라지게 되어있다. 옛날에 아버지께서 우리 나라는 기후와 땅이 좋아 우리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다 맛이 있다고 하시던 말씀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브라질 말로 아침, 점심, 저녁 인사말과 고맙다는 말 그리고 숫자를 먼저 익혔다. 남편 없이 아이 넷을 데리고 처음에는 상파울로에 정착을 했지만 브라질에 오래 살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래서 캐나다로 다시 이민 갈 것을 계획하고 남편과 연락을 취해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가족들 뒤를 따라 곧 온다고 하던 남편은 몇 개월이 지나도록 브라질로 오지 않았다. 가족을 먼저 떠나 보낸 후 뒷정리를 하여 몫 돈을 손에 쥐고  우리에게 오기로 했었다.

              그러는 동안 브라질 입국비자 기한이 끝난 것도 모르고 있다가 재 입국 수속과정에서 남편의 신원 조회를 했더니 서울대학병원 산부인과 과장을 지내다 6.25때 행방불명이 된 사촌형이 있었는데 신원조회 과정에서 그 문제로 물고 늘어져 친구들의 도움으로 겨우 몇 개월만에 풀려났었다고 한다. 브라질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걱정할까봐 말을 하지 않아 나는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남편이 빨리 오지 않아 애타게 기다렸었다. 이민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신원조회는 이민 수속을 밟으면서 이미 상세히 다 했던 일이고 비자가 기한이 지났으면 브라질 쪽에서 재심사를 해야 할 일이지 한국정부 쪽에서 그것을 문제삼아 자국민을 괴롭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가 브라질에 온 뒤 18개월이 지난 후에야 남편은 상파울로에서 가족과 상봉하게 되었다. 그 때 캐나다로의 이민수속은 계속되고 있었고 캐나다 측에서 동경제국대학 시절 남편의 성적표를 보내라는 연락이 와 일본으로 연락을 취해 그것을 부쳐오는데 또 몇 개월이 지나갔다.

              성적표를 보내라고 한 이유는 캐나다 정부가 남편의 이민자격을 기술자로 규정하고 그 이민조건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엔지니어'로서의 자격을 받기 위해 일단 캐나다에 입국해 면접에 합격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입국하기 전 캐나다의 기술자 자격을 먼저 받고 캐나다 엔지니어 자격자로서 다시 이민 수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 과정을 거쳐 우리 가족은 브라질 체류 4년만에 캐나다로 재이민을 했다. 캐나다에 도착한 후 우리는 즉시 미국으로의 이민 수속을 했더니 이민 허가가 수개월만에 너무나 빨리 나왔다. 그런데 남편과 나는 신중하게 생각을 한 뒤 미국보다는 캐나다를 우리 인생에 있어 제 2의 고국으로 결정 내렸다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그때 내린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국내에 있을 때는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외국에서는 그의 능력에 대해 인정을 받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브라질에서 고찌야 조합 기술고문으로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고찌야 조합 책임자보다 월급이 많았다. 일본사람들은 천황과 동경제대라면 조건 없이 고개를 숙이니 남편에 대한 대접은 각별했고 또 남편이 브라질에서 자기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고국 땅을 떠날 때에는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 더 넓고 열린 곳으로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브라질은 우리가 살 곳은 아니었다. 당시 브라질에는 그 나라 원주민들은 무척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외국에서 이민간 사람들만 잘 사고 있었다. 우리가 브라질로 이민 수속을 할 때는 땅을 사서 이민자격을 얻는 지주이민으로 브라질에 들어갔었지만 그 땅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가 보지도 않고 브라질을 떠나왔다. 샀던 땅값은 사실 이민을 하기 위한 수수료로 지불되었던 것이지 처음부터 우리가족은 농사이민이 아니었다. 브라질 사람들은 순박해서 좋긴 하지만 누가 질문을 하면  언제나 긍정적인 대답만 하는 특색이 있었다. 예를 들면 길을 물었을 때 어디어디로 가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긴 하지만 그 방향이 틀린 경우가 많다그 사람들은 몰라도 절대로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가 작은 일일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큰일인 경우 아주 황당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다.

              당시 브라질로 이민간 한국사람들은 바느질하는 일을 많이 했다. 그 중 특이하게 대구에서 직물공장을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하던 가족으로 훈이네가 있었는데 구슬가방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구슬을 끼워 핸드백을 만드는 일이었다. 훈이 어머니는 도량이 넓고 사람이 진실했다. 그 때 만난 이 후 그 사람과는 지금까지도 1년에 한번씩 꼭 서로 카드를 주고받고  있다. 브라질에 다시 한번 가 볼 기회가 있을지. 그 사람은 브라질에서의 소중한 추억 속의 한 사람이다.

 


VI. 카나다 이민생활 정착과정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캐나다로 재이민(1968 10. 12)

 

19681012일에 토론토 공항에 도착했다. 그 때 우리가 처음 만났던 이민관은 너무나 친절하여 캐나다에 대한 첫 인상은 정말 좋았다. 당장 어디로 가야할 지 참 막막했던 우리 가족을 위해 그 이민관은 어떤 호텔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서 일단 그곳으로 가라고 하였다. 우리 가족은 공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이민관이 말해 준 호텔의 이름과 주소를 말해 주었더니 택시 운전수는 우리를 시내 다운타운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호텔로 데려다 주었다. 일단 그 호텔 방에 짐을 놓고 나오는데 "박선생님이시죠"하며 어떤 젊은이가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 기대치도 않았던 한국말로 누군가 말을 걸어오니 깜짝 놀라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 소개를 하였다. 시아버지와 같은 하자 돌림인 분이 자유당 때 총무를 지내신 분이 있는데 자신은 그 분의 사위라고 했다.

              남편이 한국에서 이 아저씨의 딸이 캐나다에 산다는 말을 듣고 전화번호를 알아내 가지고 있다가 캐나다에 도착한 즉시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낯선 이국 땅에서 친척 조카사위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 반가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이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나는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호텔에서 오래 머물 수는 없어 우선 우리 식구가 지낼 수 있는 방을 구하기로 했다. 우리와 같이 브라질에 이민 와 있던 박선생이란 분의 아들이 캐나다 토론토에 우리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 사람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어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마침 집에 있었다. 우리가 있었던 위치를 말해 주었더니 자기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그 곳으로 오라고 하였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그가 있던 집 근처 2층에 가구가 갖추어진 방이 있어 우리가족은 잠시 그곳에 머물기로 하였다.

              호텔비를 지불하는데 100$짜리 미화를 주었더니 호텔 종업원이 깜짝 놀라면서 자기는 100$짜리 미화는 처음 본다고 하였다.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100$짜리 돈 좀 구경하자면서 모여드는 것을 보고 우리가 오히려 그 사람들을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서양사람이면 다 돈이 많은 걸로 생각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캐나다에서 살아가면서 알게 되었다. 임시 숙소에 짐을 옮겨 놓고 우리가 살집을 찾아 나섰다. 시조카 뻘되는 김씨는 우리보다 먼저 와 정착을 한 사람이라 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유진이를 데리고 김씨의 안내를 받으면서 아파트를 구하러 나섰다. 남편은 직장을 알아보느라 바빴고 딸 둘은 학교에 관해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가 캐나다로 올 때 세진이는 학교 문제가 어중간해서 나중에 불러 오기로 하고 혼자 브라질에다 남겨 두고 왔었다. 아파트를 구하러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다 거절당해 버렸다. 이유는 12살 된 유진이 때문이었다. 시조카 김서방이 나에게 제안을 하였다. 아이가 있다고 집을 빌려주지 않으니 좀 비싸더라도 새로 짓고 있는 아파트에 한번 가 보자고 했다. 그곳은 세인트 제임스 타운이라는 곳이었다.

              우리가 처음 갔던 그 때는 건물이 몇 채 밖에 지어지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큰 블록 전체가 고층건물들로 꽉 들어차 수만의 사람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아파트촌이다. 값이 좀 비싼 것이 흠이긴 했지만 새로 지은 아파트라 깨끗해서 좋았다. 32층 건물의 29층에 침실 3개 짜리 집을 빌려 그 때 돈으로 한 달에 250$씩 지불한 걸로 기억된다. 이 금액은 그 때로서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그래도 그 곳에 살기로 결정을 했다. 가구를 사기 위해서 신문 광고를 훑어보았다. 그 일은 남편 몫이었다. 누가 이사를 가면서 가구를 판다고 하는 광고를 보고 그 집으로 가보기로 했다. 쓰던 물건이었지만 가구들은 너무나 깨끗했다. 응접실과 방 셋을 채우는데 4,000$ 정도의 거액이 들었다. 새 아파트에 쓰던 가구를 둔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중고 가구들을 사서 배달을 시켰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물건을 샀기 때문에 혼동이 되기는 했었지만 배달된 가구와 처음 본 것과는 분명히 차이점이 있어 시비가 벌어졌다. 나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다. 한번 가 본 길, 한번 만난 사람의 얼굴, 심지어는 한번 본 물건도 정확하게 기억한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눈썰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과는 반대로 노래가사나 사람이름 그리고 영어단어를 잘 외우지는 못한다. 한 번 본 물건을 틀림없이 기억하는 내가 차이점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며 추궁을 하니 결국 가구를 팔았던 사람들이 사실을 말하고 말았다. 자기들이 보여 주었던 물건들은 쓰던 것들이 아니라 새것이었고 자기들은 가구를 파는 장사꾼이며 TV같은 것만 자기들이 쓰던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캐나다 사람과 우리 나라 사람들의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신문에다 이사를 가기 때문에 쓰던 가구를 싸게 판다는 광고를 낸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백화점이나 가구를 파는 가게보다는 질이 좋은 물건을 비교적 싸게 팔고 있었기에 그 때 산 가구들은 오래오래 잘 사용했고 농과 그릇장은 지금도 쓰고 있다

 

              옥경이는 토론토대학에 가기를 원했지만 입학허용 연령 제한선이 넘어버려서 입학 허용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구대 수학과에 들어갔다. 수학과를 공부하다가 생물과로 전공을 바꾸더니 동물 해부하는 것이 징그럽다고 그만두고 결국은 토론토대학에서 인류사회학을 다시 시작해 퀘백시에 있는 나발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은명이는 라이어슨 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옷 만드는 회사에 취직을 했고 옥경이도 은명이와 같은 회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세진이도 쌍파울로에서 데리고 왔다. 세진이와 유진이는 쟈비스 고등학교가 집에서 가장 가까워 그 학교로 전학했는데 이 학교가 이름 있는 명문 학교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세진이는 브라질에 있을 때 배운 사진기술을 토론토에 와서 즐겼다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어 현상과 인화도 본인이 직접 다했다. 그 때 찍은 사진들이 지금 보아도 아주 훌륭한 것들이 더러 있다. 유진이도 저도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하더니 우리가 살던 아파트 내에서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세대수가 꽤 많았기 때문에 자기가 쓰는 용돈을 벌어서 썼다.

              외국으로 이민을 나온 사람들은 개척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사람들이 영국에서 유럽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와 인디언들과 싸워가면서 광활한 땅을 개척했던 것만이 개척은 아니다. 새로운 땅에 발을 붙이고 언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낯선데서 하나하나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는 생활도 또한 개척이라 할 수 있겠다. 부모와 자식들이 모두 일치 단결하니 그리 어려운 줄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갔다. 나는 영어학교에 등록을 했다.  1주일에 5일 나가 영어를 배우고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42불씩 받아 가면서 공부를 하니 캐나다의 복지제도의 고마움을 절감했다대학까지 나왔어도 영어실력은 형편없어 ABC부터 시작했다내가 나가는 반에는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고 퀘벡주에서 온 불란서계 젊은 처녀도 둘이 있어 같이 공부를 했는데 내가 어찌나 열심히 했든지 그 아가씨들도 나에게 질세라 열심히 했다.

              1년을 이 학교에서 공부한 뒤 이 학교에서는 더 다닐 수 없어 돈은 받지 않으나 영어는 공짜로 배울 수 있는 다른 학교로 옮겨 1년을 더 영어공부를 했다. 공짜로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학교가 토론토 시내에 여러 곳 있었다토론토에 와서 꼭 영어공부를 해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되는 이유가 있었다브라질에서 4년 살면서는 포르투갈 말은 일상용어 몇 마디 정도와 숫자만 배워 돈 쓰는데 지장 없을 정도였으나 브라질에 사는 일본사람들의 1세 대부분은 말을 배우지 않고도 일본말만 쓰면서 살 수 있었기에 브라질말을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 남의 나라에 가서 그곳 말을 공부하지 않으면 수십년을 살아도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았기에 나는 열심히 영어공부를 한 것이다그러나 어학공부란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2년 동안을 영어공부를 하고 직장을 찾아 나셨다. 우선 브라질에서 배운 바느질하는 일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브라질에서 공업용기계를 사용해서 간단한 것을 해 보았지만 고급이상은 해 본 경험이 없는데 기왕 할려면 고급 옷하는 것을 배우겠다고 나선 것이 잘못이었다. 며칠을 시켜 보더니 안되겠다고 그만 두라고 하였다. 간단한 것들은 만드는 수에 따라 임금을 주기 때문에 시간당이 아니라 수량으로 임금이 지불되었다좀 해보니 여기서 배우는 것이 장래성이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일본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플라스틱을 녹여 선물용 물건을 만드는 공장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가 있기에 가 보았더니 채용이 되었다. 단순노동이지만 양을 내야하는 일이기에 머리를 좀 써야 했다. 동작관리를 해야만 양을 많이 낼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하루해야 할 일을 몇 시간만에 해치우니 주인이 놀랐다. 나는 한국에서 한국 생산성본부가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기업경영학" 코스 6개월 과정 1회 졸업생이었다사업을 하면서 아무 경험도 없이 무작정 해 나오다 생산성본부에서 '기업경영학" 코스를 시작한다해서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즉시로 등록을 했다.

              그 때의 우리나라 사정은 참으로 어려운 형편 속에 있었다. 해방은 되었으나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 사람들이 손을 떼고 떠나고 나니 그 실정은 너무나 한심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야말로 국내에서 개척기가 시작되었던 때였다. 나는 이 때 6개월간에 결쳐 연수한 "기업경영학"를 평생동안 유용하게 잘 활용해 오고 있다. 이 때 내가 플라스틱을 녹여 선물을 만드는 공장에서 내가 한 방법은 동작관리를 해서 최대의 효과를 내게한 것이었다. 집에서 살림을 할 때도 물건관리를 철저히 했다. 그래서 우리 집은 항상 깨끗하다. 물건은 처음에 그 물건이 놓여져야 할 적절한 자리를 찾아 놓여지면 사용한 후에는 반드시 같은 자리에 놓도록 하였기에 항상 주위가 정돈이 되어 있는 것이다. 밤낮 치우고만 있지 않아도 항상 깨끗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나의 이런 습관의 결과이다그 공장에서의 일도 나에게는 장래성이 없을 것 같아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 아파트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병원 다이애트리 디파트먼트에 취직을 했다. 여기에 취직을 한 이유는 영어를 더 배우고 경험을 얻어 영양사자격을 얻어 볼까하는 생각에서였다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해서 보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한국에서의 생활은 육체 노동이 아닌 정신노동이었기에 몸이 육체적인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 견디기 힘이 들었다. 모두 합해 3년 정도 일을 해 보고는 일하는 것을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아파트 빌리는데 지불하는 돈으로 집을 사도 모기지를 물어 나갈 수가 있기에 그동안 저축해 놓은 돈으로 다운패이를 하고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아이들이 토론토대학으로 갈 것을 생각하고 대학 가까운 곳으로 집을 찾아 다녔다집이나 사람이나 인연이 있는 법이라 지금까지 내가 살고 있는 알버니 이 집을 19708월 달에 사서 이사를 했다. 지금까지 이 집에서 살던 사람은 유럽에서 이민 온 지 오래 된 사람들인데 하나 있는 딸은 결혼해서 따로 살고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23층을 세 놓고 있었는데 세 준 사람들을 그대로 있게 하고 지하실을 개조하여 방을 만들고 그곳에서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젊은 사람들은 이민 오면 집은 안 사더라도 자동차를 먼저 사는데 우리 식구들은 차가 필요할 때는 택시를 이용하기로 하고 5년 동안 차를 사지 않았다그렇게 해서 돈이 모이면 다운패이를 하고 집을 한 채 두 채 사 나갔다

              한 채를 더 사면 두 채 사는 것은 수월했고 세 채도 샀다남편은 직장에서 받는 돈은 따로 챙겼다나에게 알버니 집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활을 하라고 하고 다른 집에서 나오는 돈은 저축을 해 나갔다집이 3 채가 되자 청소하는 것이 문제가 됐다. 는 집 청소를 사람을 사서 하자고하고 남편은 반대하니 의견이 상충되었다. 내 생각은 세 놓는 집들도 항상 깨끗하게 수입되는 것 중에서 지출을 하면 집을 더 사 나갈 수 있지만 자기 몸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내가 몸이 견디지 못하게 되니 남편도 어쩔 수 없던지 그 중 한 채를 팔아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 건물들이 싸다고 한국사람 둘과 합자해서 큰 아파트 건물을 사더니 얼마 가지 못해 집 한 채 판 돈을 날리고 돌아 왔다. 우리 둘이는 다시 의논을 했다. 집을 사서 세 놓는 일이 힘이 드니 모기지 사는 일을 해 보기로 하고 찾아 나섰다.

              우리가 집을 사서 이사한 다음 해(197134) 시어머님이 돌아 가셨다는 급보를 받았다. 캐나다 이민수속을 다 해 놓고 누가 캐나다로 오는 편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시부모님은 큰 집 큰동서와의 인연으로 원불교에 나가신 지 오래 되셨는데 돌아가실 때는 천주교 영세를 받으셨단다. 우리 가족이 서울을 떠나기 전에 서강대학에서 옥경이와 은명이가 영세를 받았고 이 신부님이 집에까지 오셔서 가족을 위해 교리강의도 하셨기에 시모님 생각에는 가족들과 같은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큰시누와 사촌동서 한 사람이 천주교 신자였고 그들의 권유가 종교를 바꾸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유진이는 천주교가 브라질의 국교와 같이 보편화 되 있었기에 학교에서 영세를 받았지만 세진이는 지금까지도 아무 종교와도 인연을 맺은 일이 없다시모님은 천주교 공동묘지에 모셔졌다.


VII. 나의 인생에 또다시 아버지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아버지와의 해우(1975. 9. 23)

 

              나는 토론토에 도착한 즉시 캐나다 적십자사를 찾아가 아버지의 생사여부를 문의하는 원서를 제출했다어머니의 한이 아버지의 생사여부만이라도 알아 보아 달라는 것이었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1년이 지난 후 적십자사에서 통지가 왔는데 북쪽에서 회답이 없다고 한다.  1973년경이었을까? 어디에서 인쇄된 지는 알 수 없으나 북쪽의 뜻을 가진 신문이 가끔 우송돼 왔었다. 한국 영사관에서는 이런 사실을 알고 신문이 배달되면 읽지 말고 버리던지 영사관으로 우송을 하라고 했단다. 당시에는 오타와에 대사관이 있었을 뿐일 때다. 이 말은 누구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이고 내가 직접 한국 정부기관사람에게서 그런 내용의 말을 들은 적은 없다나는 혹시나 아버지에 대한 소식의 단서라도 얻을까하고 신문이 배달되어 오면 샅샅이 읽었다.

              1974년 어느 날 문제의 신문이 또 배달되었다. 나는 전과 같이 신문을 넘겨보다가 어떤 월북 동포가족의 사진과 같이 쓰여진 월북수기를 읽기 시작했다. 사진에는 젊은 부부와 이이들이 넷 그리고 할아버지가 같이 방에서 책상의자에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해서 찍은 사진이었다. 전에도 월북한 사람의 수기가 실려 있었기에 같은 종류의 이야 기겠거니 하고 무심히 수기를 읽기 시작했다가 수기 쓴 사람의 이름을 보았을 때 어떤 설렘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금 더 읽었을 때 내 심장은 고동을 멈추었고 뚝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더 읽어 가는데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대동광업주식회사(大同鑛業株式會社)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 않는가나의 가슴은 벅차 올랐고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져 앞을 가리니 계속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눈물을 닦고 또 닦으며 북받쳐 나오는 기쁨과 서러움이 뒤범벅이 된 형용하기도 어려운 감정 속에 파묻혀 한참을 지난 후 가슴을 진정시키고 찬찬히 읽고 또 읽기를 되풀이하였다.

              아버지는 살아 계셨던 것이었다. 그 때 연세는 91. 어머니는 아버지가 긴 여행을 떠난다고 하시고 집을 나가신 후 소식이 끊어졌으니 집을 나가신 그 날을 제삿날로 정하고 계셨다. 그러더라도 돌아 가셨다는 말을 들으신 일이 없었기에 돌아 가셨다고 믿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91세가 되었고 그동안 6.25라는 큰 난리를 우리들은 겪었기에 반 이상은 돌아 가셨으리라 생가하고 희망만은 잃지 않고 있다가 너무나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아버지는 그 수기에 언제 무슨 이유로 이북을 가셨으며 그 후 겪은 일들을 적으셨다. 사진의 가족들은 형우 동생부부와 아이 넷 그리고 아버지였었다아버지는 고향이 울산이시고 서울이 사업의 본거지였으나 38선 이북에 아버지가 이룩하신 모든 것의 90%가 있었다아버지는 대동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해 본사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었고 훗날 그 건물은 중소기업은행본점이 되었다. 미일경제신보사에서 출판한 "거부열전"에는 78기가 아니라 3738기에 대한 자상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는 아버지의 수기를 읽고 나서 마음을 굳혔다연세가 연세이니 만큼 지금은 살아 계시지만 언제 돌아가실 지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서 상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평양에 갈 수 있을까하는 것이 그 때부터의 나의 화두가 되었다

              인간의 능력이란 참으로 굉장한 것이란 것을 그 때부터 나는 계속 경험하게 되었다. 사람이란 하고자 하는 일이 확고하게 마음에 정하게 되면 쉬지 않고 노력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 중의 한 가지다하루는 은명이 부부가 외출했다 집에 찾아 와서 한다는 말이 어머니께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왔단다. 자기들이 어떤 중국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그 집 주인인 중국 부인이 자기들 옆으로 와서 "한국사람이나"고 물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까 자기는 며칠 후에 평양에 갈 것이라고 하더란다은명이는 내가 지금 어떻게 하면 평양을 가수 있나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라 이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 왔다고 한다. 나는 물론 너무 기뻤다. 은명이는 그 부인의 전화번호를 알아 왔기에 즉시 전화를 걸었다

그 부인은 장씨라고 했다. 어느 날 몇 시까지 자기 음식점으로 오면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약속한 시간에 그곳을 찾아갔더니 자기가 평양에 가게 된 사유를 자상하게 이야기 해 주었다. 자기는 중국계 캐나다 사람이고 캐나다와 월남 사이의 장사 길을 터 주었고 앞으로는 중국과 캐나다 이북과 캐나다 사이의 장사 길을 터 주기 위해 캐나다 사람 10명을 데리고 중국을 거쳐 평양을 간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며칠 후면 자기가 연락절차상 의논할 것이 있어 평양에 가니 부탁할 일이 있으면 하라고 하였다.

              나는 장부인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대충하고 편지를 써 올테니 아버지께 전해주고 답도 받아 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다음 날 나는 편지를 써 가지고 다시 찾아갔다.

얼마 지난 후 장씨 부인에게서 돌아 왔다는 전화가 왔다아버지 편지도 가지고 왔단다. 장씨 부인을 찾아가 아버지 편지를 받아 집으로 돌아와 설레이는 마음을 억제하면서 봉투를 뜯었다. 그런데 편지를 보는 순간 나는 실망했다. 그 편지의 글씨는 아버지의 필적이 아니었다. 편지에는 내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는 것과 살아 계시고 잘 있다는 간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아버지께 다시 편지를 썼다. 아버지가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다니 너무나 기쁘다는 말과 살아 계시니 어떻게 해서라도 길을 찾아 만나 뵈러 가겠다는 것과 편지 필적이 아버지가 쓰신 것이 아닌데 직접 쓰시지 못할 사연이라도 있으신 지 가능하시면 아버지의 친필 편지를 보고 싶다는 말을 적어 다시 장씨 부인에게 부탁을 했다

              장씨 부인은 쾌히 승낙을 하면서 가능하면 자기가 직접 아버지를 만나 보겠다고 까지 하였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은혜를 받으며 살아 왔다. 나도 가능한 한도내에서 나마 누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도와 왔다. 장씨 부인에게서의 연락을 손꼽아 기다리던 중 전화가 왔다. 즉시 달려가서 편지를 받아 그 자리에서 뜯어보았다. 아버지의 필적으로 쓰신 편지가 확실했다나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나러 갈 것을 결심하고 장씨 부인에게 나를 평양으로 데리고 가 줄 것을 부탁했다장씨 부인은 나의 모든 사정을 들은 후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편지를 가지고 집으로 온 나는 읽고 또 읽었다. 내용인 즉 그 때로부터 6개월 전에 아버지는 양쪽 눈의 백내장 수술을 하셨는데 결과는 좋았으나 글을 오래 읽거나 쓰기가 힘이 드셔서 동생 형우가 대필을 했다고 하셨다

              형우동생은 17세 되던 해 6.25전쟁이 나 의용군으로 뽑혀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북으로 보내져 3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를 찾았단다. 아버지와 동성동명이 두 사람이 있었고, 혼란 중이었기에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는 3년이 결렸단다. 아버지가 백내장 수술을 하셨을 때는 86세 때였다고 한다. `연세가 워낙 고령이라 모두 주저하고 있을 때 어떤 젊은 의사 한 사람이 나서며 자기가 자신 있게 할 수 있겠다고 해서 맡기게 되었는데 수술이 성공적으로 되어 아버지는 안경을 쓰시고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내 마음은 아버지를 만나는 일로 들떴다. 그러나 그 때의 나의 건강은 최악의 상태였다. 1972년 내 나이가 50 고개를 넘으면서 갱년기 장애가 겹쳐서 일어난 복합적 현상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해 보는데, 그 때 내 주위에 그러한 상식적인 조언을 들을만한 사람도 없었고 의사에게서도 별 도움을 얻지 못 했었던 것 같다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으면 위에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중국 한의사가 용하다고 해서 가서 보고 약을 지어와 다려 먹으니 열이 나고 더 아파 약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중단했다.

 

평양방문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지를 찾아 준비를 했다. 첫째로 변호사에게 부탁해서 캐나다 외무성과 한국 대사관에 내가 28년간 소식을 알 수 없던 아버지가 평양에 생존해 계신 것을 알았고 연세가 많으시니 하루 속히 방문해야겠다는 뜻을 알리는 편지를 써 보냈다. 캐나다 외무성에서는 편지를 받았다는 답장이 왔고 한국대사관에서는 김씨라는 분을 보내 북에 가지 않기를 종용해 왔다. 그 당시 원불교 관계사람들이 우리 집 응접실에서 일요일마다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내가 여행을 하게 되어 우리 집에서의 원불교 모임을 돌아올 때까지 중단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아주기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교우들은 내가 여행하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은 것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는 캐나다 외무성과 한국 대사관에 공식적인 보고는 하고 가되 개인적으로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은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강력한 추궁을 당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없어 사연을 이야기했다

              훗날 안 일이지만 교우들은 나의 이북을 간다는 사실을 안 이상 대사관에 보고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 연명으로 편지를 쓰기를 제의했으나 연명해서 편지 쓰는데 동참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어 의사인 허씨가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이 천만이 넘는다는데 생사를 모르는 사람은 몰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90이 넘은 아버지가 살아 계신 것이 확인되었고 갈 수 있는 길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한번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볼 일이다. 남편도 내가 북에 가는 것을 반대해 여비를 대 주지 않겠다고 하였다하는 수 없이 은행에 가서 융자를 받아쓰고 오랫동안 갚아 나갔다.

나는 19754월에 이민 나온 후 처음으로 한국을 갔다왔다. 1964년에 한국을 떠났으니 11년만 이었다. 평양을 갔다오면 한국에 가는데 지장이 있겠으니 먼저 한국부터 가서 가족들 사정을 자상하게 알고 아버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해서였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아버지를 만나고자 하는 일편단심으로 평양 갈 준비를 진행하였다. 1975619일 아버지를 만나러 평양을 간다는 큰 모험적인 여행을 앞두고 나에게는 처음으로 둘째 딸 은명이에게서 손녀를 보았다. 1975923일 나를 포함한 캐나다 사업단 12명이 캐나다를 출발 미국, 북경을 거쳐 평양을 향해 떠났다. 나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정신력(보이지 않은 세계)은 육체(보이는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경 비행장에는 중국 쪽에서 사람이 나와 우리 일행 12명을 마이크로버스에 태워 북경반점에다 안내했다. 처음 오는 중국이고 말로 글로 듣고 읽어 알고 있던 중화민국의 수도 북경에를 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는 오직 아버지 밖에 없었고 내 건강은 나의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기에 자리만 주어지면 눕는 것이 일이었다북경 비행장에서 짐을 찾는데 내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안내원 말이 어디서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짐이 없어져 마음이 좀 찜찜했지만 안내원 말대로 어디서 나오겠지 하는 나의 긍정적인 성격이 짐 생각, 아픈 생각은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버스에 앉자마자 새롭게 전개되는 풍물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체적으로 중국은 땅이 넓구나 사람들 생활은 어렵구나하는 인상을 받았다

              버스가 우리 일행을 북경반점에다 내려놓았다. 로비에서 방 배정을 받고 있는데 어떤 중국 사람이 내 옆으로 오더니 내 짐이 저기 있다고 가리켜 주었다. 반가워서 가보니 내 가방이 틀림없었다. 배정된 방에 들어와 가방을 열어보니 내용물은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가방 사이에 끼워 둔 사진들의 순서가 내가 넣을 때와는 달랐다. 누군가가 가방을 열어보고 내용물을 점검한 것이 틀림없었다. 천안문 앞 광장, 만리장성, 왕릉 등 북경에서 34일 동안의 관광을 잘 끝마치고 평양행 비행기를 타려 비행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중국 청년 안내원이 나에게 가방을 찾았느냐고 물었다. 찾았다고 하니까 북쪽 사람들이 가방을 가지고 가서 안을 살펴보았을 것이라고 했다. 없어진 것은 없었지만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북경에서 캐나다 대사관을 방문했었다. 대사관 직원이 나와 일행들에게 평양방문을 중단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일정은 계획대로 진행  되었다. 일행은 드디어 북경 비행장을 떠나 중국민항기로 1시간 30분만에 평양 순창(?) 비행장에 도착했다.

              나는 비행장에 동생 형우가 나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계시는 집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가슴이 벅차 있었다비행장에서 나오면서 형우동생 얼굴이 보이지 않아 내 마음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는 사람은 한 차에 한 사람씩 탔고 차가 몇 대 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여러 대로 분승한 것은 기억한다. 평양비행장에서 세관원이 내 가방을 열려고 하니 그때부터 나를 안내하기 시작한 사람이 가방을 열지 말라고 하니 열지 않고 통과시켰다. 나는 안내원과 같이 혼자서 차를 타고 일행의 차 행렬의 앞장을 섰다. 안내하는 사람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호텔로 간다고 했다. 차가 지나가는 도로변에서 이이들은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하는데 어른들은 비켜서기만 했다. 중국에서 차로 지나가면서 본 그곳 사람들의 복장과 북에서 본 사람들의 복장은 달랐다. 북쪽 사람들의 옷차림이 훨씬 깨끗했다. 도착한 곳을 보통강 호텔이라고 했다. 나는 혼자 독방을 배당 받았는데 싱글 침대가 둘 목욕탕이 있고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방이 따로 있는 깨끗한 큰방이었다. 안내원 말에 의하면 이 호텔은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모든 것을 자기들 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는 좀 엉성해 보이기는 해도 잘 운행되었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평양에 10여 년만에 이런 호텔까지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평양에 도착하면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서 같이 지내면서 들을 말도 많고 할 말도 많은데 넓은 큰 호텔 방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 나의 마음은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강 호텔은 보통강가에 세워져 있었다이 호텔은 외국에서 오는 손님전용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 강이 장마 때마다 강물이 범람해서 그 일대가 물 속으로 잠겼단다. 이제는 관계사업이 잘 되어 있어 그런 문제는 완전히 해결이 되었다고 한다. 식당이 넓고 깨끗했으며 옆으로는 적은 수를 수용할 수 있게 된 별실도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남자들도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첫 날은 그렇게도 고대했던 아버지와의 상봉이 이루어지지 않고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에도 이씨라는 같은 안내원이 방으로 들어와서 "편히 쉬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한다. 오늘 점심 때 아버지를 만나러 갈 것이라고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근황을 이야기 해 주었다. 아버지는 지금 평양 수복을 할 때 처음 지은 사택에서 살고 계시고 아버지를 돌보아 주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같이 온 일행들은 식사시간 이외에는 만나지 못했으나 시찰, 관광을 할 때만 일행들과 행동을 같이 했다. 시간가는 것이 어찌도 그리 더디든지 점심때가 가까워오자 안내원이  나를 데리고 아버지가 계시는 집으로 갔다. 내 가슴은 벅찬 감격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몰아 쳐들어갔다. 드디어 아버지가 사시고 계신다는 집 앞으로 내려졌다. 아버지가 사시는 집은 일제 때 일본사람들이 흔히 쓰던 관사와 흡사한 건물이었다. 집으로 들어가니 아버지께서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맞이하기 위해 서서 기다리고 계셨다. 30년이 가까운 세월이 주마등같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가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는 나를 보시고 아버지께서 하신 첫 말씀이 "너 머리가 어째서 그렇게 희어졌느냐?"고 하셨다아버지는 체격이 좋으시고 잘 생기신 분이었는데 내 기억에 남아있던 풍채는 간 곳 없고 퍽 마르셨다. 얼굴에 주름살은 많지는 않으셨으나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쓰고 계셨다. 나는 달려가서 아버지의 두 손을 잡고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도 우시고 나는 한참동안 말없이 울고 난 뒤에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참으로 기적적인 만남의 인사를 올렸다. 감격이 극에 달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방에 들어가서 아버지께서 어떤 부인을 소개하셨다. 아버지를 돌보아 주시는 분이니 당연히 어머니라고 불러야겠지만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후에 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셔서 안 이야기지만 나보다 두 살 밑이고 대구가 고향이라고 하신다. 그러시고는 젊은 청년을 소개하시면서 아들이라고 하셨다. 그 부인에게서 낳은 딸이 하나있는데 나이는 그 때 19세이고 군대에 나가고 없다고 하셔서 남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아들은 전쟁고아로서 입양하셨다고 나중에야 알려 주셨다. 잘 차린 점심을 둥근 상에 둘러앉아 참으로 깊은 감회 속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참이라 별로 많이 먹지를 못하고 수저를 놓으니 아버지께서는 "왜 그렇게 조금만 먹느냐, 더 먹어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중간 주발에 소복하게 담은 밥을 거뜬히 다 잡수셨다내가 아버지를 만나고자 평양에 갈 때 종합비타민을 사서 갔었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셨다는 말도 훗날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평생동안 약이란 것을 입에 대보지 않으셨단다. 식사 후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호텔로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가 사시는 집은 온돌 방이 2개 다다미 방이 1개 현관 마루 부엌이 딸린 네모난 단층 기와집이었고 광과 목욕탕이 별채로 지어져 있었다. 집에 들어가는 현관 앞에는 등나무 넝쿨이 우거져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집을 돌아가면서 터가 있었는데 꽤 넓은 공간이었었다고 생각된다. 이 집 근처에 똑같이 지어진 집들이 있었다. 이 집들은 6.25 전쟁 뒤 폐허가 된 평양시에 수복하면서 맨 먼저 지어진 건축물들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지금은 이 일대의 건물들이 철거되고 고층건물이 들어섰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많은 분들과 같이 전쟁동안에 중국 땅으로 피난을 가 계셨단다.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1차로 귀국하였다고 하셨다. 남자 노인이 혼자 계실 수는 없으니 아버지를 돌볼 사람으로서 어머니가 정해 졌었는가 보다이렇게 해서 아버지와의 첫 상면을 감격과 흥분 속에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주위를 산보해도 된다고 해서 나는 해가 있는 동안에는 주위를 산책했다. 나는 매일 매일의 생활도 모든 일을 미리 계획을 세워가면서 살아가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 막연히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나흘 째되는 날 다시 한번 아버지를 방문했고 1주일 되는 날 일행들은 단장만 남고 모두 떠났다나는 단장과 더불어 하루를 그 호텔에서 더 묵었다엿새가 되던 날 나는 어느 방으로 안내되었다. 나와 같이 온 일행과 북쪽 사람 두 명이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 통역을 해 보라고 하였다. 나의 영어실력이란 형편없었는데 별안간의 일이라 좀 어리둥절하면서도 할 수 있는 대로하였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장씨 부인이 나를 동행시킬 때 나를 일행의 통역사로 수속을 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아마 그래서 형식적이지만 한번 통역을 시켰던 모양이다

              여드렛 째 되는 날 안내원이 나에게 내일은 내가 다른 호텔로 옮겨 아버지와 며칠 같이 보내게 해 준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이면 같이 온 일행의 단장마저 떠나는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걱정이 되는 중이라 일단 안심이 되었다. 아침을 먹고 방으로 올라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안내원이 와서 짐을 가지고 가자고 하였다간 곳은 중왕 여관이라고 하는 곳인데 그리 크지 않았으며 지은 지는 좀 오래 된 건물이었다. 안내 된 방에는 싱글 침대가 2개 있고 목욕탕이 붙은 방이었다. 안내원이 나갔다 다시 들어오더니 혼자 방을 쓸 건지 아버지와 같이 한 방을 쓸건 지를 물었다. 나는 곧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 생각 같아서는 같은 방에 있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망설여져서 독방을 쓰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안내원이 짐을 두고 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안내했다안내 된 방에는 아버지가 이미 와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세 번째의 상봉이다. 반가운 마음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내가 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시더니 짐을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고 물으셨다. 다른 방을 잡고 거기에다 짐을 두고 왔다고 하니까, 아버지께서는 왜 방을 두 개 쓸 필요가 있느냐며 침대도 2개 있으니 이 방을 같이 쓰자고 하셨다. 그러시니까 안내원이 그렇게 하시라고 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펄쩍 뛸 만큼 기뻤다. 이렇게 해서 34일을 방에서 한 발자국도 복도에도 나가보지 않은 체 밥도 방에서 날라다 주는 것을 먹으면서 아무도 제 3자가 없는 공간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에 잠자는 시간도 아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버지 건강이 염려되어 다음 날 밤은 아버지께 일찍 주무시기를 권했지만 그 날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아버지는 집을 나가신 후부터의 가족상황부터 물으셨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올 것이라는 말은 들으셨으나 믿어지지가 않으셨단다. 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없이 태어나서 아버지 없이 12살까지 자랐지만 이 34일 동안의 부녀간의 나눔은 세월의 길고 짧음을 초월해 버렸다. 아버지와 나눈 많은 이야기들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전에 한국에 갔을 때 동생과 조카가 38선 경계선상에 있는 문산 농장, 배명학교 등에 대한 처리문제를 아버지께 여쭈어 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는데 아버지께서는 동생과 조카가 나에게 부탁한 이야기를 들으신 후 "일단 사회에 환원한 것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놓아 버리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나는 아버지에게서 삶에 대한 올바른 비전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주어진 형편에 따라 하신 일이라 할지라도 여러 여자들 가슴에 많은 한을 가지게 한 부정적인 면도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가슴 아픈 일이다.

              아버지는 평양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사이 어머니 사이에 딸을 하나 낳은 후 또 아이가 생길까봐 그 부인과 성교하시는 것을 중단하셨다고 하신다그런 것을 보면 여자가 젊으면 남자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자식은 만들어지는 모양이다아버지가 91세 때 그 딸이 19세라고 했으니 아버지 연세 72세에 득녀하신 셈이다. 아버지는 목욕을 하겠다 시며 등을 밀어 달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지 등을 밀어 들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말을 많이 주고받았더니 나중에는 피곤해서 말을 계속할 수도 없어졌다. 아버지가 식사도 나보다도 잘 하시고 정정하시니 내가 돌아갔다 다시 와서 만나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천만 이산가족 중 나는 행운아이다. 아버지께 남쪽에 남기고 가신 가족들의 소식을 알려 드릴 수 있었고 남쪽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애달게도 가장 궁금해하시던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을 떠셨으니 저생에서 만나셨는지아버지를 작별하고 돌아와서 나는 무척 아팠다. 병원에도 가보고 한약도 먹어 보았지만 내 몸은 약을 거부하였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의 소개로 한국에서 유도하는 사람들을 치료했다는 전골사 김씨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의 독특한 치료방법이 내 몸을 회복시킬 수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3개월을 꼬박 1시간이상 결리는 거리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더니 많이 회복을 했다.

 

몸의 병을 마음으로 치료

 

              나는 그때부터 육체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책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김노인이 나에게 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일은 없다. 내 자신이 기에 대해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기와 연관해 고조선에 대해 그리고 선도수련에 맹렬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기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 매일 1시간 정도 호흡에 맞추어 내 식으로 된 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하루 1시간씩 하루도 빠지지 않고(여행을 할 때도) 했더니 그렇게 고질이던 관절염까지 때때로 침의 도움을 받으면서 회복되어 갔다. 나는 한국에서도 한국일보 창간호부터 보았는데 토론토에서도 한국일보가 발간되자 구독하기 시작해 읽고 있다. 하루는 신문을 펼쳐 보고 있는데 이북 단신이란 칼럼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이종만씨 117일 사망'이란 간단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보고 돌아온 후 나는 주위사람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분위기 탓으로 나는 아버지와의 연락을 스스로 끊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망기사를 읽고 나서 나는 가슴이 철렁해졌다. 돌아 가시리란 생각을 전연 하지 않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연세도 잊어버리고 있던 나는 반드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생각만 간직하고 있다가 별안간 깊은 나락 속으로 뚝 떨어져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서둘러서 형우동생에게 아버지의 사망여부를 확인하는 편지를 띄우고 북으로 다시 갈 차비를 시작했다. 그 때가 1977년 연초였으니 19759월에 갔다온 지 13개월 여 만의 일이었다. 동생에게서 아버지께서 사망하셨다는 확인편지를 받고 서둘러 평양으로 떠났지만 아버지는 다시는 만나 볼 수 없었다. 다시 만나면 물어 보겠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이제는 다 흘러가 버렸다고 생각하니 가슴 깊이 칼로 에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 때도 나의 건강은 바닥을 치고 있었으나 소생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육체가 지니고 있는 신비성에 마음의 눈을 떠가고 있었다. 나는 두 번 째 평양을 방문했을 때 큰 경험을 했다. 별안간 내 몸 안에 있던 어떤 것(흰 빛)이 머리 정수리를 통해 고래가 물을 뿜어 올릴 때처럼 순간적으로 터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때의 느낌은 흉하고 은백색의 빛이 터져 나가는 것 같았으나 생각해보면 그 색깔은 나의 육체의 눈이 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마음속으로 놀라기도 했고 이상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 순간에 느낀 흉하고 은백색의 빛이 머리꼭지에서 터져 나갈 때의 기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그 때 당시에는 몰랐고 그 사실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어왔다그런데 그 때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북쪽사람들은 유물론적 유교식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굉장히 순수한 힘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돌아와서 나의 건강은 차차 나아져갔다.

              나는 내 몸이 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안 후 김노인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터득한 기에 대한 관심을 책을 통해 공부하면서 내 식으로 순서를 만들어 하루에 1시간씩 아침마다 꾸준히 운동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작 ''에 대한 것을 눈뜨게 해 준 김노인 자신을 ''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시작한 운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행하는 동안에도 지극 정성 다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다그러면서 나는 육체와 마음(정신)의 상관관계를 터득한 바 있다모든 육체적인 병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원효대사가 남기고 가신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진리다라고 머리에서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육체를 통해 마음으로 그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런 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집착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마음에 갈등이 없는 한 내 몸에는 병이 없고 내 몸이 아플 때는 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을 환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성으로서의 아버지와 남편

 

              어느 딸에게나 아버지는 이상적인 남성 상이라고 하지만 나의 무의식 층에 자리잡은 아버지 상을 찾아냈을 나는 혼자서 놀랐다. 사실은 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막연한 것이 있었는데 의식하고 파 헤쳐보니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내 자신도 놀랐다. 나는 젊었을 때(대학생 때) 딱 한번 어떤 남성을 좋아 해 본 일이 있었다그것이 나의 첫사랑이었고 그 첫사랑은 말 한마디 표현해 보지 못한 체 과거의 어둠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그러나 그 추억은 영원히 지워져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결혼한 후 나는 남편을 열렬하게 사랑했다. 그러나 남편은 나와 같이 사랑의 불꽃을 태워주지는 않았다. 서로 몸을 섞고 자식을 낳고 살았지만 소위 말하는 이성간의 사랑은 아니었다. 내 마음은 공인 받은 남성이라 이성으로서 처음으로 내 감성에 불이 댕겨진 것이다. 그러나 이성간의 사랑이란 모성애. 인류애와 달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많은 한국부부들은 특히 옛날에는 결혼하고 사는 부부지간이라 하더라도 부부라는 사회적 법의 테두리에서 산 것이지 감성적인 사랑의 정열을 불태우면서 산 사람의 수는 극히 적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의 남편에 대한 정열의 불꽃은 반응이 없는 남편의 태도에 의해 식어갔다. 그저 그냥 부부라고 맺어진 인연의 테두리 안에서 인간애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마음의 38(1978)

 

              나는 어머니의 14녀 중 막내였다. 작은 집에서는 41녀 중 첫째로 낳은 딸은 어려서 죽고 아들만 넷이었다. 아버지가 사업하시느라고 고향을 떠나신 후 어머니가 둘째 며느리인데도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다가 아버지가 타향생활을 하시면서 사업하시느라 가산을 탕진하자 할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내보내시고 큰아들을 들어오게 하셨단다. 우리 형제들을 나를 포함해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마다 하나씩 낳은 자식들이다. 나와 나의 언니는 일곱 살이나 차이가 있다. 어머니가 6년간이나 생과부로 독수공방하셨다는 뜻이 된다. 아버지가 고향을 다녀가신 후 어머니가 나를 가지셨는데 시댁에서 내침을 당하신 후 어머니는 몹시 어렵게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 가셨다고 한다. 외할머니께서는 자기 딸이 나로 해서 더 고생한다고 내다버리라고 했다는 말을 어른들의 입을 통해 듣고 크면서 나는 몹시 슬펐고 그 말은 어린 가슴에 새겨졌다. 아버지는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시면서 그야말로 78기의 길을 걸으셨다. 나는 부모님들이 가장 어려웠을 때 태어났지만 아버지께서 성공의 길로 올라섰을 때 태어났으니 자라는 동안은 가장 호강을 하면서 자랐다. 12살에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나는 아름다운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성장을 했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은 순수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이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 위의 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나는 언니가 토론토에 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언제 온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기에 놀랐다. 언니 말이 온 지가 두 달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언니 전화를 받고 섭섭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의 따돌림은 나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제일 가까운 형제로부터의 외면은 나의 마음을 몹시 슬프게 했다. 그것도 내가 본인들에게 직접 무슨 잘못을 해서였다면 그 잘못 탓이라고 받아들이겠지만 조국이 두 동강 나서 남북으로 갈라져 많은 이산가족이 생겼지만 긴 역사를 되돌아보면 인류사에 되풀이되는 일인데, 이 일에 개인들이 집착을 한다면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언니의 사위는 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이라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았겠으니 그러기도 하겠다고 나 스스로를 달래고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리라 생각을 했었다. 그 뒤 나는 자기들이야 어떻게 나에게 대하던지 하는 한결같이 대하고 언니에게도 나의 최선을 다했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북에 갈 때 아버지를 만난다는 개인적인 것 외에 사람들 마음에 그어져 있는 무형의 38선에 구멍을 뚫겠다는 생각도 간직하고 있었다. 내 마음에는 북쪽도 나의 동포형제요 남쪽도 나의 형제동포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적개심이란 있을 수 없었다평양을 다녀온 후 어떤 사람이 나에게 북에 갈 때 무섭지 않더냐고 물었다나는 조금도 두려운 마음은 없었다. 어째서 두려운 마음이 있었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인사를 하면 얼굴을 돌려 외면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 중 한사람은 그 후 북과의 관계에 적극 나서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알지도 못하던 사람인데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해 그러자고 했더니 만나자는 장소가 참으로 묘한 곳으로 정해주었다. 어디냐 하면 배다스트 지하철 안 중간지점에 있는 커피 숍이었는데 왜 하필이면 그런 곳에서 만나야 하느냐니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란다. 좀 이상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그 장소에 가서 기다리는데 약속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내 육감에 어떤 사람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기에 건너편 쪽을 무심히 보았더니, 어떤 중년 백인 여자가 건너 편에 있는 빵 가게 안에서 빵을 진열해 둔 카운터를 뒤지고 이쪽을 보고 있는 것에 나의 시선이 갔다. 내 시선을 의식했던지 그 여자는 뒤로 돌아섰다. 처음에 무심코 보았으나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보니 다시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내 육감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문을 열고 나가 동쪽으로 가는 지하철 정거장 계단을 향해 가는데 나와 만나자고 약속 한 사람이 전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나는 그에게로 가서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하기에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그냥 걸어가자고 해서 밖으로 나가 근처 커피 숍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이 때의 일은 나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수수께끼이기도 하지만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짐작이 가게 되었다. 나를 만나자고 하고 그 뒤 나를 계속 만나던 그 사람은 정보관계의 일을 하는 숨은 인원이란 것을 거의 확신하게 되었다. 참으로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도저히 사람을 의심할 수 없었으나 결론적으로는 그 사람이 지금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으로 자기의 숨은 신분을 증명해 주었다나는 7천만 이산가족 중 다행이도 아버지가 장수하셨고 내가 캐나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합법적으로 평양에 가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던 행운아였었지만 나의 이 행운을 보은하기 위해 통일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한 민간단체를 만들고자 몇 뜻 있는 사람들과 같이 모임을 만들었다그 모임의 이름은 '통련'(통일문제연구회)이라 했다

 

원불교와의 인연

 

              우리 식구는 큰집 맏동서 임정관형님의 소개로 원불교를 알고 있었다. 시부모님이 초량으로 피난을 내려가서 사시는 동안에 원불교 초량 교당을 다니셨다. 나도 초량 교당에 몇 번 가본 일은 있었으나 법회에 참석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원불교전을 읽음으로써 대종사님을 알게 되었다. 진리를 쉬운 말로 설법하셨고 쉽게 일상생활에서 마음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으셔서 크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나는 이민 떠나기 전에 옥경이가 서강대학에 들어감으로써 천주교와 가까워지게 되었고 브라질에 있을 때 아이들과 같이 성당을 다녔었다. 토론토에 와서는 천주교가 토론토에서(비다스트 지하철정거장 건너편에 있는 교회별관 지하실) 불란서 유학 중에 왔다는 박신부에 의해 시작하던 날부터 아이들과 같이 일요일마다 성당에 나갔다. 그 뒤 성당은 단다스와 아배뉴로드 근처로 옮겨졌다가 또 다시 옮겨졌다. 그러면서 교리공부도 1년간 해 보았지만 나의 영혼은 거기에서 안식처를 찾지 못했고 따라서 영세도 받지 않았다. 나에게 교리공부를 지도하시던 신부는 그 뒤 환속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전에 원불교 교전을 읽고 대종사님에 대한 감명이 깊었기에 나는 다시 교전을 꼼꼼히 읽음으로서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어 원불교의 모임을 우리 집에서 가져 보기로 생각을 굳히고 몇 분과 의논한 후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보고 시작을 했다그러던 중 내가 아버지를 찾아 평양을 가게되어 우리 집에서의 모임은 중단되었고 최교무들이 토론토에 오게 되어 원불교 모임은 지금까지 그 두 분에 의해 이어져 오고 있다원불교가 한국사회에서 민족고유의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대중들의 의식수준을 높이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빠르게 변해 가는 사회실정에 적응해서 자체가 미처 변화하지 못함으로서 원불교를 긍정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많은 인재를 놓치고 있는 것 같으니 안타깝다나는 원불교에서 이화중(李和中)이란 법명을 받았고 화타원(和陀圓)이란 법호도 받았다.

 


VIII. 아이들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 (1968-1984)

 

옥경

 

큰딸 옥경이(1945년생)는 욕대학을 마치고 토론토대학 대학원에서 인류사회학 공부를 시작하더니 남자친구가 생겼다혼자 살고 있는 화란계 캐나다사람인 인류학 교수 Eric Schwimmer와 가까이 지내더니 그 교수가 프랑스 문화를 좋아해서 불어권인 Quebec주 퀘벡시에 있는 Laval대학으로 가니 자기도 학적을 옮기겠다고 한다.  Laval대학은 불어로 강의를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니까 불어를 공부하면서 해 보겠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공부를 그 대학에서 인류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첫아들 Felix를 나아 기르면서 성공적으로 끝을 마쳤다자기 전공분야는 인도네시아의 모계사회에 대한 연구였기에 인도네시아 말을 또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현지에 가서 Field work를 해야했기에 아들 Felix가 두 살 때 캐나다 칸슬에서 충분한 장학금을 받으면서 아들을 데리고 인도네시아에 가서 2년 동안 연구생활을 했다.

캐나다로 돌아와서 학위논문을 위한 연구발표회를 하는데 나도 참석했었다.  7명의 교수들과 여러 사람들이 참가한 가운데 당당하게 불어로 대답하는 딸이 나는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은명

 

둘째 딸 은명이(1946년생)는 토론토에 있는 라이아슨이란 기술전문학교 패션디자인과에 들어가 1년을 공부하면서 옷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했었다. 이 회사에서는 유망한 인재를 보았던지 좋은 조건을 제시하더란다. 그런데 그 일은 자기가 하고자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그만두고 토론토대학 철학과에 들어가 동양철학을 택했다동양철학은 한문을 알아야하니 한문 공부하느라 방이고 변소고 온 벽에다 한문단어들을 붙여놓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관심을 가지고 해 오던 미술과 패션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토론토대학에서 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첫 번 에세이를 써냈더니 담당교수가 이 길로 들어가는 것은 가망 없으니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드란다. 그런 말을 듣고도 은명이는 자기가 결심한 길을 바꾸지 않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시카고대학에서 석사학위 2개를 받고 하버드대학에서 교육철학박사까지 받았다사람이 무슨 일을 성공적으로 해 내는데는 무엇보다도 꾸준히 계속해서 한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진

 

세째 세진이(1948년생)는 토론토대학에 들어가서 물리학과 대학원을 2년까지 다니고서는 방향을 바꾸겠다고 해서 너무나 놀랐다. 자기가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다른 과목으로 바꾸겠다고 하기에 남편과 나는 물리를 계속해서 학위를 딴 다음 바꾸면 어떻겠느냐고 권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학교 가는 것을 1년 쉬어 버렸다. 그러더니 하버드대학 대학원 사회학과에 수속을 해서 들어갔다. 그런 후 일본말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더니 하버드대학에서 일본중소기업사회를 연구하는 공부를 시작했다. 그 말을 들은 어떤 친지는 하필이면 왜 중소기업이냐 면서 대기업사회를 연구하면 돈도 많이 원조 받을텐데 어려운 분야를 골라서 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Field work하러 2년간 일본을 간다고 하더니 가족을 데리고 4년이나 동경에서 살면서 동경대학 대학원에다 적을 두고 Japan Foundation에서 장학금도 받고 영어도 가르치고 자기들도 일본말을 배우면서 4년의 세월을 유용하게 보내고 돌아와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진

 

유진이(1955년생)는 토론토대학을 다니면서 운동도 여러 가지를 했고 특히 야외활동을 좋아해서 등산, 낚시질, 카누 타기 등 자연과의 접촉을 많이 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담당교수의 추천으로 로드 장학금을 신청했는데 여러 교수들의 테스트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고 받게 되었다. 로드장학금이란 학생들을 위한 노벨상만큼이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대영제국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실로드라는 영국사람이 아프리카에 가서 다이아몬드 광으로 거부가 된 후 옥스퍼드대학에 거액을 기부해서 만든 장학제단이다. 지금은 그 나라이름이 짐바부에로 바뀌었지만 아프리카에 있는 로대시아라는 나라이름은 그 사람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뉴욕에서 퀸 엘리자베스 호를 타고 갔다. 뉴욕부두에서 본 퀸 엘리자베스 호는 호화찬란한 여객선이었다. 새로 뽑힌 상당한 수의 로드장학생들이 이 배를 타고 같이 영국까지 가면서 그들의 양양한 인생 길의 첫 발을 이 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간이 크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란 사람이다. 어간한 일은 놀라지도 않지만 쪽쪽 빼 입은 백인 젊은이들 사이의 한 사람뿐인 아들을 바라보았을 때 자랑스럽기 한량없으면서도 약간 주눅이 들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생기기도 하였다. 사 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고 나는 여러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한인회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대담한 성격이면서도 수줍음을 타는 나는 그 상장을 한번도 남에게 보이지 못하고 지나갔다

 

옥경

 

옥경이는 박사학위를 받고 직장을 찾았으나 남편과 아들 자식을 가진 주부인지라 넓은 범위에서 찾아 없어서 자기가 원했던 학교에서 가리키는 교수자리를 얻지 못해 정부관리로 취직해 오타와에 있는 주정부 이민성에 취직이 됐다. 이민성에서 일을 하면서 많은 모순에 갈등하더니 직장을 옮겨 지금은 캐나다 해외개발공사(Canadian International Development Agency)에서 일하고 있다

 

은명

 

              은명이도 남매를 키우면서 힘들여 공부한 것을 사회에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 나가 정형외과 의사와 결혼해서 남편인 Dr. 김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다 보니 자기의 길을 확립하기 어려웠다. 여자가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 생활하면서 전문직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 직장 따라 거주지를 옮겨 다니면서 자기 직장을 갖지 못하더니 한국에 나가서 서울대학에 취직이 돼 얼마동안 가리키더니 학교 당국에서 이유 아닌 이유를 들어 그만두라고 해 그만두었다학교당국의 이유인즉 서울대학교 졸업생이 있어 그 자리에 서게 되니 그만두어 달라고 했단다지금 세상에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미쳐 몰랐던 일로 그 당시 교수자리도 돈으로 뒷거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Dr. 김은 자기가 쓰는 논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세계정형외과 잡지에 내는데 아내를 홀로 이용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내가 남편 하는 일을 도와 남편이 성공하면 되지 않는가 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 아내 되는 사람이 자기라는 것은 희생시키고 남편이 하는 것이 훌륭해서 진심에서 우러나서 자기라는 것을 없애고 할 수 있을 때는 희생자체가 기쁨이 되니 그것은 별 문제이다. 그러나 은명이 경유는 그렇지가 않았다. 자기 남편에게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보수를 요구했단다.

              Dr. 김은 외국에서 상당기간을 살았지만 전형적인 가부장제도하의 가부장으로 군림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인격과 영혼을 존중해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상대의 인간성을 살리면서 자기도 성장을 해 나갔다면 참으로 이상적인 부부로 모범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누가 보던지 좋은 커플이라고 칭송을 받았는데 은명이의 얼굴에서는 활기가 없어지고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딸의 건강이 걱정이 되어 물었으나 자기의 내부갈등이 터져 나올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민생활을 하는 동안에 나도 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은명이도 자기 내면을 털어 놓을만한 친구가 없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결국 갈라지고 말았다.

              나는 인생사란 수련장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이혼할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혼이란 결과는 + - 해서 -라고 생각이 되었기에 하지 않았다. 이 세상만사가 좋기만 한 것도 없고 나쁘기만 한 거도 없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 때 만사가 수월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명이는 용감하게도 이혼을 했다이혼이란 칼로 생살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주기 때문에 좀 무디다 던지 하지 않으면 굉장한 용기와 결단성이 없는 사람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런데 은명이는 그 힘든 과정을 극복하고 새 사람으로 탄생했다. 결국 가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은명이를 높이 평가한다

 

세진

 

              세진이는 4년간의 일본생활을 끝마치고 돌아와서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다몬트리올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인터뷰를 하고 오더니 처음이라 너무 긴장해서 대답을 잘못했다고 하더니 안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고 있을 때 동경대학 대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호주 아대라이드 대학에서 사람을 찾고 있으니 신청해 보라고 했다. 세진이는 즉시 아대라이드 대학에 연락을 했고 답을 받았다. 이사비용도 대주고 첫 연봉을 규정보다 더 높여 주겠다고 했단다. 그런 모든 조건에다 인터뷰하는 것을 생략하겠다고 했다니, 세진이는 처음 한번 해 본 인터뷰 경험이 부정적이었기에 거리가 너무나 멀다는 것 빼고는 괜찮다고 생각이 되어 결정을 했다. 실지로 한번 가보지도 않고 결정하는 대는 어려운 감도 있었지만 이민을 한 경험이 있었기에 용단을 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세진이 가족들의 호주생활은 지금까지 무사히 이어지고 있다나는 호주를 세 번 다녀왔다. 해안선을 따라 도시가 발달하고 있으나 아직도 내륙지방은 미개발인 상태다. 백호주의로 인종차별이 심하다고 들었지만 어디엔들 그 정도는 없겠는가! 한국사람들끼리의 지방차별에 비교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진

 

              유진이가 엘리자베스호를 타고 떠난 옥스퍼드에서의 로드장학생으로서의 생활은 3년 반으로 끝났다. 담당교수와 자기가 구상한 논문을 자기고 토론을 해 본 결과 그 교수말이 자기는 이 문제를 가지고 지도할 수가 없다고 했단다. 왜 그랬지는 들어보지 못했다

              3년 반동안 옥스퍼드에 있으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면서 결국 박사학위는 받지 않고 끝났다. 자기 인생은 좁은 한 길을 들어가야 하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한 길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실사회에 나가 사회인으로 출발을 할 때 학위를 자기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오랜 발판을 가진 사람이라면 로드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원을 마쳤다면 그것만으로 그 사람의 재주와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에 어느 분야로 진출하던 소위 말하는 부와 명예를 위한 성공의 길로 들어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진이는 직장을 갖기 위한 노력에는 적극적이 아니었다. 토론토대학에 다닐 때 사귄 친구 중에 에밋서리(Emmissary of Divine Light)란 이름을 가진 영적모임에 속한 사람이 있었다. 유진이는 그 사람을 통해 이 그룹과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영국생활 3년 반 동안 옥스퍼드대학에서 가까운 미캘돈에 있는 이 그룹에 참석 심취하게 되었다

              토론토에 돌아온 뒤에도 코로라도에 있는 애매사리 본부를 다녀왔는데 소위 말하는 사회생활에 발을 들어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 자유당후원회 맴버들이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나설 것을 권유해왔다. 유진이는 애매사리 멤버의 어떤 사람과 의논을 해보더니 그것도 아니란다. 그 때 마침 한국에서 나무젓가락 공장을 하다 캐나다로 온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유진이가 돈 버는 쪽으로도 재주와 능력이 있을 테니 바닥부터 시작을 하는 것도 무방하다 생각이 되어 내가 도울 수 있는 한의 금액을 저 몫으로 투자해 주기로 하고 캐나다 서부 BCPrince Geoge에다 주정부 원조 하에 나무젓가락 공장을 세웠다. 공장을 시작하면서 그 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 들어온 안씨 한 사람뿐이었으니 소규모로 해서 경험을 쌓아가면서 키워나가야 하는데 무모하게도 시작을 너무 큰 규모로 했었다. 뻔한 일로 실패로 끝이 났다

              유진이는 그 뒤 콜로라도에 있는 싼라이스 매미사리 본부로 들어가 오늘까지 적극적으로 자기의 심신수행과 인류의 의식수준성장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 어떤 한국사람은 말한다. 유진이가 그 재주와 능력, 간판을 가지고 캐나다 사회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최고로 올라갈 수 있을텐데라고... 유진이는 결국 영적생활쪽으로 이끌여간 셈이다.

사람이란 보이는 세계에 중점을 두고 사는 것이 보통상식이나 보이지 않은 세계에 관심을 더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남편의 사망 (198447)

 

              은명이의 남편 Dr. 김이 토론토  웨스턴 병원 미국 시카고 대학부속병원을 거쳐 보스톤에 있는 하버드대학병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따라서 은명이는 시카고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하버드대학 대학원으로 옮겼다세진이도 하버드대학원에 들어가서 대학 아파트에 있게 되고, 유진이도 박사학위을 따고 보라는 주위의 권고로 하버드대학원에 등록은 했다가 계속하지 않고 말았다. 이런 사정이었기에 우리 부부는 의논하고 보스톤에다 아이들을 위해 집을 한 채 사기로 했다. 마침 집을 수리를 하다가 돈이 부족해서 끝내지 못하고 팔려고 나와 있는 집이 있어 그 집을 달라는 전액을 현금으로 샀다. 우리가 돈은 다 내고 Dr. 김에게 반을 주기로 하고 매달 조금씩 갚아나가도록 의논이 되었다

              산 집이 위층은 수리가 끝나 있는 상태여서 은명이, 세진이 식구들은 그 집으로 이사를 하고 수리를 시작했다. 남편은 그 집수리를 감독하느라 토론토에서 보스톤까지 차로 10시간이 걸리는 곳을 왔다갔다하게 되었다. 집이 워낙 컸고 방수가 많았기에 우리 부부가 갔을 때도 또 유진이까지 합쳐서도 넉넉했다. 1983년 집수리도 다 끝이 났고 옥경이 식구들까지 보스톤을 다녀간 뒤 남편은 혼자서 토론토로 갔다. 그 때 토론토 집 지하실에 누가 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사람에게서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전화가 왔다급히 토론토로 돌아와서 병원으로 갔더니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심장마비라고 한다. 의사의 말은 수술을 해도 되나 하지 않고도 잘 요양만 하면 괜찮을 수도 있다고 하면서 좀 두고 보자고 한다. 이렇게 해서 차차 차도가 보여 퇴원해서 치료하기고 하고 병원을 나왔다

              남편을 일제 때 동경제국대학 이공학부를 졸업하고 동경에 있는 애바라 펌프회사에 취직해서 1년만에 급성결핵에 걸린 일이 있은 후 항상 무척 몸을 아꼈고 결혼도 이런 일 때문에 진행도중 중단이 되었다가 인연이 다시 맺어졌지만 결혼한 후 그 때까지 재발도 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왔는데 혈압이 높아 혈압 약을 먹고 있는 상태였다돌이켜보면 그 때 남편은 돈을 어떤 브로커의 소개로 부동산들을 담보잡고 빌려 주고 있었는데 이 돈이 물리게 되어 회수하려고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자동차로 보스턴까지 왔다 갔다 하느라 심신에 무리가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차차 회복해가니 수술을 하지 않고도 지탱해 나갈 수 있겠구나 생각이 되었다. 그러면서 지나는 동안 남편에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전에 자기 마음속을 털어놓지 않는 성질의 사람인데 말을 많이 하게 되었고 내가 항상 남편에게 바랬던 그런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놀라고 기뻤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슴에 매친 일들이 그리 쉽게 풀리지는 않았으나, 내 자신이 마음을 닫아 놓고는 살수가 없는 사람이라 차차 내 마음도 풀려갔다

              평생동안 같이 살아오면서 나를 싫어하지도 않으면서도 한번도 나를 좋아한다든지 사랑한다든지 하는 말을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변해가면서 지금까지 절대로 그 사람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를 사랑한다면서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나하고 다시 결혼하겠단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오기가 나 "누구 마음대로"라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지금의 내 마음은 아우성을 내질렀던 내가 아니다. 하늘이 짝지어준 천생배필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내 생애에서 첫사랑 빼고 유일하게 한때나마 열렬하게 사랑했던 남성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고 내 마음에 좋다고 생각되어 내가 택한 사람이기도 하니 말이다남편은 건강도 회복되면서 참으로 좋은 남편으로 내 마음에 합당치 않던 그런 점들이 바꿔져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주변의 모든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지만 나하고 의논하지 않았던 돈 문제는 자기가 정리하지 못한 것을 내용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야 할 일이 좀 있다. 어떤 부부든지 그렇지만 우리 부부도 너무나 다른 점이 많았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 하나 속에 정반대 되는 양면이 있게 하여 끊임없는 분열 속에 변화, 창조가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우리 부부는 사물을 보고 판단할 때 정반대로 한다. 남편은 숫자적이고 분석적이고 물질적인가 하면 나는 숫자에는 어둡고 전체적으로 먼저 사물을 파악하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한국에 있을 때는 남편이 잘 되면 나도 잘되는 것으로 알고 남편이 하는 일을 돕는 쪽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었다. 이민을 나온 이후 토론토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남편은 미국계통 용역회사에서 자기의 경험을 살려가면서 일을 했고 나는 직장을 가져 보았지만 언어문제와 캐나다에서의 경험이 없어 할 수 있는 일은 육체적인 일 뿐이라 육체적인 일에 전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나에게는 이를 지속할 수가 없어 직장을 그만두고 방향을 바꿔 머리를 써서 하는 일, 집을 사서 세를 놓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5년간이나 북미에서는 필수품인 차를 사지 않고 지냈다

              직장에 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육체적인 노동은 감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 부지런하고 적당히를 모르는 나의 성격 탓으로 나의 몸을 혹사하게 한 점이다다운패이 할 돈이 모이면 집을 사서 세를 놓고,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몰게이지를 물고 남은 돈을 또 모아 같은 방법으로 또 집을 사고해서 집은 한 체에서 두 체로 두 체에서 세 체로 늘어 나갔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집도 청소를 하랴, 다른 집도 관리하랴하니 집 수가 늘러나면서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남편은 직장에 다니면서 여가를 내어 집 관리하는 것을 도왔지만 그런 정도로는 끼끗하게 관리하기에는 무리였다. 나는 남편에게 집 청소하는 사람을 사서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남편은 돈 쓰는 것이 아까워서 자기가 하겠다고 하였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지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결국은 그런 방법으로는 여러 체의 집을 관리할 수 없어 몸이 망가지니 나는 손을 들어 버렸다. 이 때까지는 집을 살 때는 둘이서 보고 서로 합의했을 때 사곤 했었다. 나는 관리비를 지불하면서 집을 유지하던지 아니면 집을 팔고 몰게이지를 사는 방법을 택하던지 의논을 하던 중 몰게이지를 사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몰게이지 살 때마다 두 사람의 합의하에 해나가니 훨씬 수월하고 돈이 차차 불어 나갔다. 이렇게 해가면서 잘해 나가던 중 하루는 어떤 사람이 남편을 찾아 왔다.

              나에게는 사람 보는 눈이 좀 있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부정적인 느낌을 받았기에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고 남편에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브로커라고 한다. 나는 몰게이지를 사기 위해 브로커를 불렀나보다 하고 전에 하던 대로 같이 말을 들으려고 차를 가지고 가서 앉으려고 하니 남편은 나에게 나가 있어 달랜다. 나는 처음 그 사람을 보았을 때의 부정적인 인상 탓으로 별로인 기분이었는데 나에게 나가 달라고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 그 Don이란 브로커가 남편을 자주 찾아오게 되어 나는 남편에게 내용을 물었다. 남편은 나에게 내용을 말하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남편 하는 일에 이상을 느껴 몰게이지 사는 일인데 나에게 비밀로 할 일이 무엇이냐고 하니 지금부터는 나의 간섭 없이 혼자서 해 보겠다고 한다. 나는 큰 일이 났다고 생각이 되어 단호히 그 사람과 단독으로 만나는 것을 반대했다. 내가 그 정도로 반대하면 다시 고려해 볼만도 한데 남편은 단독으로 하는 것을 완강히 고집했다

              나는 혼자서 곰곰이 생각했다. 돈을 잃지 않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대해야하고 그렇게 하게되면 둘의 사이는 파괴되겠구나 하는 판단이 섰다. 나는 어느 쪽을 택해야하겠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남편은 저렇게도 혼자서 해 보고 싶어하니 해보게 하자하고 마음을 굳혔다. 가서 돈을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니 편안했다나는 살아 나가는데는 돈이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돈이면 다다 무엇보다도 돈이 첫째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아이들이 심신으로 건강하고 고등교육만 받게 뒷바라지만 해 주면 먹고살아 나가는 것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는 남편의 나에 대한 이번 처사로 그 동안 삭이고 참아 왔으나 소화시키지 못한 여러 가지 일들이 합해서 나를 화나게 했다돈은 단념하는 쪽으로 굳히고 남편에 대한 내 마음의 문은 닫혀버리기 시작했다.

              그 때 남편이 부로커 Don을 통해 산 몰게이지가 4건이라고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키치나(토론토에서 차로 2시간 거리)를 자주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아무 말을 하지 않더니 어느 날 나더러 같이 키치나를 가자고 하면서한다는 말이 Don을 통해 산 모게이지들이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아 키치나에 있는 변호사에게 부탁을 했으니 같이 가서 싸인을 해 달고 한다. 내 예상이 맞아 떨어져 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그 변호사도 Don과 짜고 남편을 속였던 것이다. 사람이 남에게 속았을 때 상대만 나쁘다고 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의 욕심과 판단의 잘못은 자기 책임이기 때문이다그렇게나 쓰지 않고 모았던 돈은 마음에 상처만 남기고 날아가고 말았다. 남편은 처음 심장마비를 일으킨 뒤 11개월만에 재발해서 영원한 길로 떠나버렸다. 11개월 동안 나에게 대한 모든 것을 청산하고 떠났으나 자기가 일해 번 돈도 다 가지고 가 버린 셈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토론토에서 우리가족이 살기 위해 처음 산 집인데 남편은 이 집 살 때 명의를 나 혼자 이름으로 등기했다. 나는 그 때 남편의 처사를 희한한 일도 다 있다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훗날에야 생각해보니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이었다.

              우리 부부가 결혼해서 친정에 몇 달 있다가 어머니가 내 몫으로 시골에 땅을 사 두셨던 것을 팔아주셔서 자그마한 집을 사서 신혼생활을 시작을 했었던 일이 있다. 남편은 그것을 생각하고 이 집 명의를 나 혼자의 이름으로 등기를 해 주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나는 지금도 그 집을 수리해서 위  층은 세를 놓고 그 수입으로 노후대책을 세우면서 살고 있다.

 

 

남편의 무언의 귀향

 

              남편이 돌아가신 화장을 해서 고국 땅에 시부모님과 같은 곳에 모시기로 작정하고 유진이와 더불어 같이 귀국수속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유진이의 입국사정은 나왔는데 나에게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유골은 선련사 절에 모셔놓고 한 달 가량이나 지났을 때 사위인 Dr. 김이 나의 신분을 보증한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한 뒤 나의 입국사정이 나왔다. 나와 유진이는 서둘러 유골을 모시고 남편의 무언의 귀국 길에 동반했다. 남편은 목매에도 있지 못할 고국 땅을 고국을 떠난 지 처음으로 한 줌의 재로 변해 귀국하게 되었다. 그렇게나 아끼던 돈도 한 푼도 가지지 못하고, 그렇게나 사랑하던 자식들도 동반하지 못한 체 혼자 쓸쓸히 한 줌의 재가되어 말없는 귀국 길에 오른 것이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어떤 세관원이 나를 딴 방으로 불렀다. 신분을 확인한 뒤 나가라고 한다. 이러기 위해 유골을 모시고 나오는 사람을 한 달이나 못오게 했는가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도 마련해 놓지 않고 나왔기에 어디다 모셔야 할 지 막막했다. 내 생각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목매에도 서로 잊지 못한 시부모님과 남편을 한자리에다 모시도록 해야겠다고 혼자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나왔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가 않았다시아버님 유골은 당신의 소유지인 땅에 안장되어 있었고, 시모님의 묘지는 큰시누가 성당 공동묘지에 모셔 놓았었다. 짧은 시일 안에 적당한 유택지를 물색하고 있는데 이리 가까이 있는 원불교 공동묘지가 조성되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유진이와 같이 서둘러 전라도로 내려갔다. 원불교 공동묘지는 조성된 지가 오래 되지 않아 아직 엉성했으나 남향 언덕바지에다 4자리를 샀다. 땅을 사 놓고 비석 맞추는데 가서 세 분의 비석을 주문해 놓고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 성당 공동묘지에 모셔진 시모님의 유골을 먼저 수습해서 전라도 송정리 근처에 모셔진 시부님의 유골을 수습해 이리 근처에 있는 원불교 공동묘지에 옮겨 모시고 일단락을 지었다양지 바른 남향 언덕바지에 세 분의 유골을 나란히 모시고 나니 내가 할 큰 일이 하나 끝난 안도감이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내가 묻힐 자리까지 4자리를 구했기에 지금도 그 자리에는 세 분만 모셔져 있고 한 자리는 아직도 비어있다.

              지금의 원불교 영모원 공동묘지는 잘 관리가 되어있어 아주 아름답다지금은 한국에서는 누구도 해 낼 수 없던 납골당 건물이 산 사람들의 거주지인 아파트와 같이 위풍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대종사님의 개방적이고 평등정신이 후배들에 의해 맺어진 결실이라 본다. 원불교는 고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민족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대중들의 의식수준을 끌어올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대종사님은 유, , 선에 원불교의 근원을 둔다고 하셨는데 요즈음 출판되어 나오는 원불교 출판물에는 유, 불에 근원을 둔다고 했으니 이것은 대종사님의 생각에 위배되는 잘못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IX. 홀로 서기 (1984년부터 현제까지)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

 

              부부가 같이 살다가 같이 죽는 법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같지만 막상 남편이 없어지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나 허전할 수가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마음에 간직했던 남편에 대한 섭섭함을 모두 흘려 보내기로 했다. 홀로 남은 나는 지금까지 남편 몫이던 모든 일을 내가 해야 했기에 당황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 우선 영어가 딸리니 고지서와 와도 다 이해하지 못해 사전을 찾아가며 읽어야하니 시간이 너무나 걸렸다.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파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거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땅을 밟고 넓은 공간에서 살다가 아파트에 들어가니 방문할 때의 아파트의 느낌과 막상 내가 살기 위해 가 본 아파트의 느낌이 달랐다. 갑갑함을 느꼈다. 죽는 날까지 마음 편히 살아야하는데 이것도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문제는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는 수입이 있으니 관리하는데 어려움이 있더라도 안전성이 있었다. 세상만사는 좋은 것만이 있는 법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사전 찾아가면서 고지서들을 읽는 것을 영어 공부하는 셈치기로 하고 정원사를 불러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내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기로 결정했다어느 날 나는 꿈을 꾸었다. '알라딘의 램프'라는 이솝이야기에 거인이 마법으로 병 속에 갇혀 있다가 병 뚜껑이 열리면서 흉하니 나오는 것과 똑같이 내가 그 병 속의 거인과 같이 병 뚜껑이 열리면서 휭 하니 병 속에서 빠져 나오는 꿈을 꾸었다. 나는 이 꿈을 꾸고 눈을 뜬 뒤 내가 무의식중에 얼마나 억압되어 살아 왔는가를 깨달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무의식중에 항상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지향하고 살아 왔었다.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좀 무거운 것도 잘못 들었고 하물며 청소도 못했다. 남편이 있을 때는 청소하는 사람을 부를 수 없었지만 청소하는 사람을 불러 집 청소를 부탁했다

한국 갔을 때 사온 기-단에 대한 책들과 "소공자 초험센터"에서 발행한 책들을 읽으면서 본격적인 명상생활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1시간 정도의 내가 만든 기 운동을 계속했다. 나는 건강이 나빠진 후 병원에도 가보고 한약방에 가 침도 맞아 보면서 내 몸이 약을 거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침은 효과를 보았다. 그러면서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자기 몸을 관찰해 나갔다. 말하자면 몸을 관찰해 나가면서 마음과 몸의 관계를 나의 마음의 눈으로 관찰해 나왔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지 마음 따로 몸 따로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차차 깨닫기 시작했다.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으면 내 몸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깊은 명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내 몸 속에서는 희열감이 뭉개 구름처럼 떠올라 아침해가 뜰 때 비치는 붉은 빛처럼 저녁 해가 서산을 넘어 갈 때의 저녁노을의 하늘처럼 아름다운 감정이 내 마음과 몸을 채운다. 나는 이런 느낌을 가끔 경험했다. 나날의 생활에 리듬을 만들고 무리하게 무엇을 밀고 나가는 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2, 3층을 세를 놓고 있는데 세든 사람들도 가지각색이다.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앞 뒤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 놓으니 집을 빌려주는데는 문제가 없다. 이렇게 하면서 세월은 흘러갔다. 한국 갔다 사온 책들 중에 "일지대선사"가 쓴 책들이 있었다. 이것이 나와 단학선원과의 만남의 시작이 됐다. 단학선원에서 말하는 '弘益人間 利和世界'는 나 개인의 이상이기도 했기에 심정적으로 일체감을 느꼈다.

 

 

              1987년에 보스턴에 있던 집을 팔았다. 판 돈 중에 반은 은명이에게 주고 반을 토론토로 가지고 와서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인생이란 판단의 연속이다. 그 때 그 때 어떻게 판단하고 처리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일의 결과가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스턴 집은 남편이 이이들을 위해 사자고 해서 샀던 집이었다. 그런 집을 팔았으니 이 돈을 잘 유지했다가 아이들을 위해 유용하게 써야만 할 책임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토론토에다 집을 다시 하나 살까 생각하고 알아보았더니 그 때는 집 값이 너무나 올라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오래 된 집이라 이 집에 계속해서 살려면 수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완전수리를 하지 않으면 헌차 고치듯이 밤낮 여기 고치고 저기 고치고해야 했기에 나는 내가 사는 집에 돈을 들려 하나라도 온전하게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결정한 뒤 세진이가 호주에서 정착을 하게되면 집세를 물고 가는 것보다 내 집 마련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다운패이 할 돈을 보내고 집을 사게 했다.

              유진이가 젓가락공장을 하기 위해 투자할 돈을 은행에서 빌렸기에 그 돈을 갚아 주었다. 옥경이에게도 얼마를 주고 은명이에게는 집 판 돈 중 절반을 주었기에 남은 돈으로 집수리를 시작했다. 건축업자가 유진이와 같은 애미사리그룹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어느 정도 안심하고 착수할 수 있었다. 2개월이면 된다던 수리가 열 달을 끌면서 끝이 났다. 물론 예산도 초과했다. 집에 있던 모든 헌 물건들을 모두 없애고 가구도 새로 장만해서 새 출발을 했다. 그 때 치솟고 있던 토론토의 집 값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 집 값이 떨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나는 수리한 집을 팔고 콘도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다운패이만하고 집을 사서 값이 더 오를 것으로 예상했던 많은 사람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내가 만일 보스턴 집 판 돈으로 그렇게 올라간 집을 샀더라면 어쩔 뻔했나 생각하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진다.

 

영혼의 편력

 

              내가 태어난 울산 용잠은 우리 나라의 남쪽 바닷가였다. 마을 가운데로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뒤에는 봉대산이란 이름의 높은 산을 배경으로 산야가 자락을 펼치고 있는 조용한 아름다운 어촌이었다. 잔잔한 바닷가에서 바라다보면 건너편으로는 방어진 뒤 산이 보였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는 저 먼 곳까지 펼쳐져 있는 바다는 끝 간 곳을 모르게 넓게 펼쳐져 있었지만 날씨가 좋은 날 찬찬히 보면 대마도가 아스란이 물안개 저쪽으로 보이기도 했다. 마을 앞은 모래사장이었지만 마을을 벗어나면 아름다운 바위들이 서로가 자기의 모습을 자랑하는 양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틈틈이 큰 바위들 사이로 중간 바위들이 있고 물이 빠져나갈 때는 그들 사이로 작은 바위들이 여러 가지의 해초의 옷을 입고 물 속에 하반신을 잠그고 있었다. 나는 그 바위들을 너무나 좋아했다. 바위들은 말없이 거기에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너무나 정겹게 느껴졌다. 지금도 나는 돌을 좋아하며 그 잘 생긴 바위들을 잊지 못한다. 물위에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바위에서 해초의 옷을 살짝 재쳐 보면 거기에는 고동, 전복새끼, 때로는 해삼, 군수 등의 보물을 감추고 있었다. 그와 같은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태어나 12살까지의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해외로 나온 후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바닷가에 가면 반드시 물가로 가 보지만 어느 곳에서도 내가 자란 용잠 앞바다와 같이 해초와 어패 종류가 다양하고 풍부한 곳을 아무 곳에서도 보지를 못했다.

              서울로 올라가서 여학교 졸업반에서 수학여행으로 금강산 여행을 갔을 때 해금강을 구경했을 때만 나는 용잠에서 본 것과 같은 바다를 보았었다. 그러기에 나의 추억에서 가장 아름답게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풍경 중에는 해금강과 용잠 앞바다였는데 해금강의 바다는 지금까지도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용잠바다는 그 아름다움을 잃고 말았다. 울산공업단지 조성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신라의 문화전통을 받아 사람들의 생각이 불교 식이다. 그런데서 자란 나는 자연히 생각하는 것이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고 절에도 별로 가 본 일이 없었어도 불교 식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 때 내가 있던 대학 기숙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성당이 있었다. 나는 막연히 거기를 가보고 싶었지만 끝내 가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나는 테레사 수녀의 초상화카드를 사서 고이 간직하면서 수녀원에 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을 골똘이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그 때의 내 나이는 이성에 관심 있어야 할텐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 때의 나는 이성에 대해서 그리 관심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을 떠나기 전 옥경이의 서강대학 입학으로 맺어진 카톨릭과의 인연이 브라질에서의 4년과 그 후 캐나다로 와서 성당에 다닌 것을 합하면 10년이나 되었어도 나의 영혼을 떠돌기만 했다. 유진이가 애미사리와 관계하면서 거기에서 하는 Art of Living Seminer10번은 참석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에 갔을 때 사온 책 중에 '소공자의 초험 센터'에서 발행한 책들을 여러 권 사다 읽었고 또 '소공자'가 강의한 많은 테이프들을 주문해서 되풀이해서 읽고 듣기도 했다. 한국에 나가서 용타 스님께서 펼치고 있는 동사섭에도 참가해 보았다. 야마기시가이에서 하는 수련에도 참석해 보았다. 통일교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통일원리교육 테이프 10개를 부탁해서 사다가 2번 되풀이해서 들어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영혼은 조금씩 자극은 받았다하지만 끝없이 영혼의 편력은 계속되었다.

 

감성치유

 

지금까지의 나의 영적편력은 등산가가 산이 거기에 있기에 산을 오르고자해서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고 오를 려고 것과 같았다. 나의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싸여진 부정적인 면을 파헤쳐 치유함으로서 온전한 나, 참 나를 확립시키고자 하는 것이 감성치료이겠다. 은명이가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시작한 작업이 자기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쌓은 경험으로 감성치유 크리닉을 열었다. 나는 지금까지 긍정적인 면을 살리면서 해 온 심신수련을 180도로 바꿔 나의 부정적인 면을 다루는 감성치유 작업을 VanaTom과 더불어 시작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터득한 것은 모든 감정(사랑, 탐진치, 희노애락)이 기운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았다. 감성치유에서는 사람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 침전되어있는 자기도 미쳐 모르고 있던 부정적인 기운을 의식화시켜 밖으로 빼냄으로 해서 소모시켜 버리는 작업이었다. 사람의 몸은 정신과 한 쌍을 이루어 작용하고 있기에 마음의 부정적인 요소는 바로 육체에 나타나 병이라고 이름 붙여진다는 것을 나는 거듭 확인하게 되었다. 몸 안에서 생기는 병은 마음의 작용에서 먼저 시작이 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책을 통해 먼저 만난 단학이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생겨 나는 그 단학선원에 평생회원으로 등록하고 1주에 5일 하루에 1시간씩 수련을 하면서 심신이 하나로 작용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내가 단학 Bloor 지원에 등록한 것은 19971022(단기 4330) 이었다. 그 후 토론토에서 심성수련도 받고 세도나로 심성수련여행도 다녀왔다. 옛날에는 심신수련을 하시던 분들이 오랜 세월동안의 고행을 통해 한 가지씩 깨달아 가던 일을 단시간에 터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물질적인 발달덕택이라 생각이 된다. 다만 그렇게 해서나마 깨달은 것들이 완전히 자기 것이 되기 위해서는 실천을 통해서 만일 것이리라.

              옛날부터 선사들이 돈오 점수를 말했고 점수의 방법이 쉬운 것 같지만 오랜 시간을 거듭해야 하니 오히려 어렵고 단번에 깨닫는 방법이 쉽다고 하지만 그것도 어떤 계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Bloor '나니' 지원장이 다른 지원으로 옮기기로 발령이 내려 오늘로 여기는 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왜 그렇게나 섭섭했던지 나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날 밤에는 잘 자던 잠도 설치고 귀 뒤 두 골 속이 폭폭 쑤시는 통증을 느껴 더욱 기분이 나빴다. 나니 전 Bloor 지원장과 새로 온 조화 지원장을 점심에 초대했다. 나니 전 지원장은 혼자 먼저 와서 이런 말을 한다. 자기가 토론토의 다른 지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국으로 돌아간단다. 그러면서 도우님들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는데 도우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서 나에게는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했단다.

사람의 마음(기파장)이 이렇게나 미묘하게 작용할 줄을 미쳐 몰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은 가벼워졌고 뒷골 쑤시던 것도 멈추어 버렸다.

 

 

 

 

 

 

 

 

 

 

 

 

 

 

 

 

 


나는 글을 쓸려고 생각했나.

                                                                                  1999. 11. 5 금요일

 

내가 한국에서 이 나이까지 살았더라면 지금쯤 시간이 남아돌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1964년에 한극을 떠난 뒤 지금까지 열심히 바쁘게 사느라 이이들과 조용히 대화할 시간의 여유 없이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한 존재로서 지구상 어떤 지점에서 말없이 피었다 진 한 송이 꽃과 같이 나도 이제는 돌아갈 날을 앞에 두니 자꾸만 말이 하고 싶어졌다. 그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본 것이 이 글이다자식들이, 손자들이, 그리고 또 그 누군가가 이 글을 읽을 때 말없이 피었다 진 꽃과 같지 않게 아! !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또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이구나 하며 생각해 보게 할 것이다. 반 컵의 물 잔을 보고 '물이 반 잔 밖에 없네'하는 삶과 '물이 아직도 반잔이나 남았네' 하는 것의 차이는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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